장쩌민 그 사람 – 16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6극악무도하게 살인하고 황당한 거짓말을 하다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파룬궁 탄압에 걸었던 장쩌민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은 장쩌민에게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더더욱 이지를 잃게 만들었다.

1. “명예를 더럽히고, 경제를 고갈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

탄압 초기, 장쩌민은 뤄간과 비밀담화를 했는데 요점은 아래와 같다.

첫째, 파룬궁수련생들을 좀 악독하게 대하라, 특히 청원하러 오고 진상을 알리는 등 행위가 있다며 붙잡히는 대로 구타하라. 때려 죽였다면 자살로 간주하고 신원 조사 없이 직접 화장하라. 둘째, 파룬궁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일체 수단을 가리지 말고, 법률적 제약을 포함한 어떠한 구속도 받지 말라. 사람을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장쩌민이 파룬궁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셋째, 명예를 더럽히고, 경제를 고갈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 넷째, 정부 도장이 찍힌 문서로 명령을 전달하지 말고 암호로 된 팩스나 전화를 이용하며 일률로 ‘중앙의 지시’라고 하라.

1999년 말, 뤄간은 장쩌민의 지시에 따라 파룬따파(法輪大法) 연구회 요원 4명을 중형에 처했다. 2000년, 뤄간은 또 장쩌민의 밀령을 전달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한 바퀴 돌았다.

미국에 있는 ‘중국 종교박해진상 조사위원회’와 ‘자유중국운동’은 2000년 5월에 작성된 중공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지린성 공안청과 고급법원이 작성한 이 문서에서는 경찰이 체포영장 없이 파룬궁수련생을 체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서에는 “파룬궁에 대해 타격의 강도를 높여야 하며 일단 발견하면 먼저 체포하고 나중에 필요한 절차를 보충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내동향보고서’에서 장쩌민은 베이징에 탄원하러 가는 파룬궁수련생이 줄어들지 않으며 심지어 북미, 유럽, 호주 및 동아시아 기타 국가에서도 탄원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00년 10월에는 1만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 ‘진(眞), 선(善), 인(忍)’ 혹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문구가 있는 현수막을 들고 1천명이 단체 연공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들이 구타, 체포, 감금을 통해 즉시 그들을 해산시켰지만 장쩌민과 뤄간에게 여전히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장쩌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군대, 경찰, 특무 및 선전기구를 갖고 있었지만 맨주먹인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속수무책이 되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탄압을 찬성하지 않았던 정치국 위원들도 뒤에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파룬궁 탄압이 의외로 쉽게 성사되지 않자 장쩌민은 어슴푸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두려움은 직접 공격 받을 때 느끼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마치 칠흑 속에서 손에 칼을 들고 서있는 것처럼 자신의 적수가 어디 있는지 몰라 어느 방향으로 찔러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와 같았다.

1989년, 장쩌민은 베이징에 온 뒤부터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권력투쟁 중에서 늘 쩡칭훙(曾慶紅)의 도움을 받아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정적을 대처해 왔다. 예를 들면, 류화칭(劉華淸)을 순종하게 하기 위해 자녀를 붙잡아 가뒀고, 차오스(喬石)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그와 군자 협정을 맺고 자신은 그에 따르지 않았다. 또 보이보(薄一波)는 자신의 아들, 보시라이(薄熙來)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내리 누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므로 제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보이보를 이용했다. 장쩌민은 이처럼 사람들의 약점을 틀어쥐기만 하면 모두 고분고분 순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쩌민의 수하들을 놓고 말하면 더 간단했다.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 등에 따라 장쩌민은 모두 그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파룬궁수련생들이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적 신앙의 힘에 대한 장쩌민의 이해는 여전히 중공 계급투쟁의 낡은 사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암살, 고문, 거짓말, 세뇌, 감시, 연좌 등 몇 십 년 동안의 정치 운동에서 중공이 사람을 타격할 때 이용했던 수단들을 총동원했지만 왜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만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매우 온순하여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해도 대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탄압의 수위가 점차 높아가고 있고 있었지만 수천 만 파룬궁수련생들은 위협, 욕설, 고문, 감금 등 강압 수단 앞에서 한 사람도 반격, 보복하거나 기타 폭력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장쩌민에게 불가사의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장쩌민은 오히려 그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반항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는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6.4사건’ 때처럼 신속하게 ‘폭력사태’를 진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반격이라곤 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신의 도움을 받는 것 같았다. 2000년 10월,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이 천안문광장으로 청원하러 갔는데, 그 중 허난성 난양(南陽)시에서 간 10여명 파룬궁수련생들이 현지 610사무실 경찰에 붙잡혀 구치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련생들이 감방에 들어서자 손에 차고 있던 수갑이 동시에 풀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만약 한 두 사람만 그랬다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10여개 수갑이 동시에 열렸다는 것은 불가사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경찰과 기타 죄수들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신기한 현상 때문에 그 10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풀려났다. 나중에 이 일을 전해들은 장쩌민은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황당한 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610사무실 경찰들도 그리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2005년 호주에 망명간 한 610사무실 경찰은 “610사무실에서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되도록 낮게 이야기하며 눈으로는 또 주위를 살핍니다. 오랫동안 그런 환경에 있다보니 일반 장소에서도 그런 행동을 하게 되더군요. 경우를 불문하고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알까 봐 두려워하는데 마치 정신병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도 예전의 웃음을 잃고 한숨만 쉬었지요. 사실 공안 내부에서도 ‘610사무실’은 비난의 대상이랍니다. 기타 공안들은 610사무실 경찰들이 이상한 짓만 한다며 수군거리지요”라고 실상을 털어놓았다.

한편, 장쩌민은 권력과 돈을 이용해 사람들을 매수하는데 박차를 가해 각지 610사무실에 인력과 경제 지원을 늘리고 등급을 올려주었다. 예를 들면 2000년 10월, 중공은 톈진시 610사무실을 톈진시 공안국 제1처와 합병시켜 국가안전보위국 산하에 있게 함으로써 인력과 등급을 상승시켰다. 공안 내부에서 610사무실은 동급의 기타 기구에 비해 권력이 훨씬 컸다. 그러나 이상하게 내부 공개 모집에 지원하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아 나중에는 추첨으로 인원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의 탄압기구는 세뇌기계와 같았다. 우선 장(江)의 탄압운동에서 희생양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련한 탄압도구들이었다. ‘610’의 신노(新老) 성원들은 매일 자각적으로 장(江)의 탄압정신을 학습해야 하고 파룬궁을 모함하는 대량의 자료를 보고 주입하는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뇌가 된다. 선량한 본성이 이렇게 철저히 파괴되자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악한 면모가 극도로 팽창했다. 이는 장쩌민의 명령을 잘 집행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었다. 그 다음 조치로 장쩌민은 마치 조련사가 동물에게 상을 주듯이 그들에게 돈과 권력을 주었다.

장쩌민은 또 ‘610’과 강제노동수용소 경찰들의 보너스, 승진, 실적 등 개인 이익이, 감금되어 있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신념을 포기하는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고 규정했다. 장쩌민의 지령, 각급 관리들이 가하는 정치 압력에 이익의 유혹까지 겹쳐 ‘610사무실’과 강제노동수용소 경찰들은 양심을 깨끗이 버렸다. 그들이 ‘인민경찰’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가지고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을 해칠 때, 가장 자주 말하는 구실은 “상급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탄압이 시작된 후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장쩌민은 이렇게 전체 중국인들을 야수로 만들어 전례 없는 재난을 조성했으며 문화혁명 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던 양심, 도덕, 정의, 공평 등 인류의 기본 가치를 이번 파룬궁을 탄압 운동을 통해 또 다시 무참하게 파괴했다. “진(眞), 선(善), 인(忍)”을 고수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은 사실 중국 최후의 양심을 지키고 있었다.

각종 고문으로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했던 장쩌민은 살육도 서슴지 않았다. 파룬궁 정보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2005년 6월까지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수가 2,500명에 달하며 강제노동수용소, 세뇌반, 구치소 등 박해 시설에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억울하게 사망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천쯔슈의 죽음

해외 언론에서 널리 보도된 적이 있는 ‘천쯔슈(陳子秀) 사망 사건’은 장쩌민이 지휘하고 있는 전국적인 범위의 잔혹한 파룬궁 박해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천쯔슈는 산둥 웨이팡(濰坊)시의 한 퇴직 노동자이다. 천쯔슈는 37세 때 남편이 간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결혼 생활을 14년밖에 하지 못했다. 남편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생활했던 친정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13살과 11살짜리 아이 둘만 남았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2000년 4월 20일자 장편 보도에서는, “사망하기 전날, 그녀는 또 다시 파룬궁에 대한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다. 수차례 진행된 전기봉 구타가 또 한 차례 몸에 쏟아진 후 그녀는 거의 의식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58세 노인은 여전히 머리를 흔들어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고 기록했다.

화가 난 감옥 경찰은 천 여사를 맨발로 눈 위를 달리게 했다. 감옥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이틀간의 시달림으로 그녀는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으며 그녀의 짧은 머리에는 고름과 피가 뒤엉켜 있었다고 한다. 2월 21일, 그녀는 눈 위에서 기어가면서 구토했고 결국 탈진해 쓰러진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튿날, 천쯔슈의 딸 장쉐링(張學玲)은 시체실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다. 천쯔슈는 이미 수의를 입었고 얼굴도 깨끗하게 정리됐다. 그러나 옷을 헤쳐 보니 상반신은 전부 검푸른 상처로 뒤덮여 있었고 귀 역시 붓고 검푸른 색을 띠었으며 치아는 금이 가거나 부러져 있었다. 비록 처리를 거쳤지만 몸에는 여전히 혈흔이 남아 있었고 종아리에 어혈과 등에 6인치 길이의 채찍 흔적을 볼 수 있었으며 복부가 부어 있었고 둔부와 대퇴 부위도 검은 색을 띤채 부어 있었다. 천쯔슈의 옷, 이불, 속옷은 피와 대변으로 얼룩졌으며 겉옷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찢어지고 구멍이 나 있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모두 천쯔슈가 외상으로 사망했음을 증명했다.

천쯔슈가 죽은 뒤, 경찰들은 그녀가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말했고 현지 정부는 또 딸 장쉐링을 협박해 관리비 2,000위안, 이불과 식사비 1,000위안을 강탈했다.

그러나 천쯔슈를 때려죽인 흉수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때문에 장려받고 승진했다. 그들 중, 웨이팡시 도시관리국의 덩핑(鄧萍)은 예비 당원에서 정식 당원으로 되었으며 가오신궁(高新功)은 선진인물과 모범인물로 선발됐다.

천쯔슈가 파룬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해 받아 사망한 소식이 ‘월스트리트저널’ 제1면에 보도된 후, 중국 정부는 ‘사회 안전을 파괴했다’는 죄명으로 천쯔슈의 딸 장쉐링을 체포하고 남편과 면회하는 것을 불허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미국 언론계의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사회는 파룬궁수련생들이 받고 있는 잔혹한 박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천쯔슈사건이 해외에서 널리 전해짐으로써 해외 여론조성으로 파룬궁 탄압 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려 했던 장쩌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산둥성은 1999년부터 줄곧 파룬궁 박해가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는 산둥성 출신인 뤄간이 탄압이 시작된 후, 장쩌민의 지시를 받고 여러 차례 직접 산둥성을 방문하고 산둥성 서기이며 측근인 우관정(吳官正)을 통해 탄압정책을 적극 추진한 것과 관련이 있다.

2000년 4월, 산둥성 수련생 천쯔슈가 고문으로 사망한 소식이 그녀의 딸 장쉐링을 통해 ‘월스트리트저널’에 보도된 후, 뤄간은 노발대발하며 장쉐링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2000년 12월, ‘월스트리트저널’의 이안 존슨(Ian Johnson) 기자는 “중국의 한 도시가 파룬궁을 통제하기 위해 얼마나 사악한 폭력을 사용했는갚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중국 화베이(華北)평원 동부에 위치한 도시 웨이팡, 먼지가 가득 쌓인 아파트 단지와 붐비는 거리가 교차해 있는 이 도시는 어디를 보나 평범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경찰이 자주 고문을 통해 주민들을 살해한다는 점만은 특별하다… … 인권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산둥 웨이팡시 인구는 전국 13억 인구의 1%가 채 되지 않지만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수는 전국의 15%를 차지한다.”

웨이팡은 800만 인구를 가지고 있는 중국 동부 도시이다. 뤄간은 2000년 9월 30일과 10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직접 웨이팡시 안추(安丘)에 머물면서 파룬궁 탄압을 지휘했다. 이 때문에 1999년 7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웨이팡시에서 박해받아 사망한 파룬궁수련생은 확인된 인원만 30명으로 전국 같은 등급 도시 중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2000년 10월, 랴오닝 마싼자(馬三家)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감옥 경찰들이 18명의 파룬궁 여 수련생들을 발가벗긴 뒤 남자 감방에 밀어 넣었다. 이 사건 역시 국제 언론에 폭로된 후, 매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듬해 2월, 여성고문에 대한 특별 조사보고서를 발표, 이번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는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라”는 장쩌민의 지시에 따른 결과라고 밝혔다.

아홉 살 여자 어린이를 윤간

수많은 몸서리치는 박해 사례들 중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장기간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는 지린성 출신의 탄원인 류(劉) 여사는 창핑(昌平) 정신병원에 3일간 감금된 적이 있는데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전했다. 2002년 여름, 처음 베이징에 탄원하러 왔던 그녀는 경찰차에 실려 베이징 창핑수용소에 갔다가 반항한다는 이유로 다시 창핑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류 여사는 그 정신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한 명도 보지 못했으며 환자들 대신 탄원인들과 파룬궁수련생들이었으며 ‘정신병원’의 경찰과 고용 깡패들은 모두 가죽으로 된 채찍을 들고 다니며 걸핏하면 감금된 사람들을 구타했다고 했다. 또 수감자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지만 폭력배들은 마음대로 그녀들의 방을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그녀가 큰 철문 세 개가 달린 ‘환자실’에 들어갔지만 검진하러 오는 의사가 없었다. 거기에 갇혀 있는 사흘 동안, 밤마다 세 명의 깡패가 찾아와 같은 감방에 있는 9살 여자어린이를 윤간했다. 그 여자어린이의 부모는 파룬궁수련생인데 세 식구가 함께 그곳 창핑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다. 부모가 그곳에서 박해 받아 죽은 후, 설움을 이겨내기도 전에 그 여자어린이는 또 그런 수모까지 당해야 했다. 어린이의 비명소리가 가슴이 찢어지게 했지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류 여사는 ‘9평공산당’ 서적을 좀 읽어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그 중 파룬궁수련생들이 받은 박해에 대한 서술이 실제에 훨씬 못 미친다고 말했다. 그녀는 창핑 정신평원에 갇혔을 당시, 처참한 비명 소리로 인한 극도의 공포 속에서 거의 밤마다 뜬 눈으로 지새웠다고 말했다.

전 ‘610사무실’ 관리들의 증언

갈수록 많은 중공 관리들이 선량한 민중에 대한 박해에 회의를 느끼면서 중공을 반대함에 따라 ‘610사무실’의 내막도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2005년 6월, 호주에서 망명을 신청한 전 ‘610사무실’ 경찰 하오펑쥔(郝鳳軍)은 “내가 다른 여경과 함께 차를 운전해 톈진시 난카이(南開) 지국 구치소에 도착했을 때, 파룬궁수련생 쑨티(孫緹)가 두 눈이 맞아서 퉁퉁 부어 있는 채로 심문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그녀를 심문한 경찰은 국가안전국 ‘610사무실’ 제2대 대장 무루이리(穆瑞利)였는데 손에 피가 묻은 가시 이빨 쇠몽둥이(직경 1.5cm)를 들고 서있었으며 테이블 위에는 고압 전기봉이 놓여 있었다. ”, “그녀가 쑨티의 상의를 걷어 올렸는데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쑨티의 등은 온통 자주빛 멍이 들어 있었으며 20cm 길이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 경찰이 반 미터 길이의 쇠몽둥이로 그녀를 때렸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 1999년 7월 20일 이후,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파룬궁수련생들이 대량으로 체포되었다. 하오펑쥔은, “우리 간수소에 잡혀온 3명의 여 수련생은 모두 4, 50세 쯤 되었는데 모두 고문 수사를 받았다. 10여일 동안, 나는 날마다 처참한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나중에 형사경찰팀 동료들은 나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파룬궁수련생들로부터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호주 통신 AAP는 2005년 6월 9일 보도에서, 호주에서 세 번째로 파룬궁 탄압을 폭로한 중공 공안부 관리가 중국에서 근무할 때, 파룬궁수련생이 고문당해 사망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전했다. 이 관리는 호주 캔버라의 유명 변호사 버나드 콜래리(Bernard Collaery)를 통해 호주 ABC 라디오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그가 구타 소리를 듣고 저지하려 했지만 동료들은 그를 쫓아냈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양심에 걸려 또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고문을 당장 멈출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그 파룬궁수련생이 의자에 쓰러져 두 다리를 뻗은 채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충격을 받았다…”

전 랴오닝성 사법국 국장, 선양 공안국 부국장 한광성(韓廣生)은 2001년 9월 캐나다에 남아 망명을 시도했다. 그는 “당시 우리의 주요 임무는 파룬궁수련생이 베이징에 탄원하러 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부에서는 엄격한 규정을 내렸는데, 예를 들어 선양시에서 한 달 동안 만약 3명 혹은 그 이상의 파룬궁수련생이 베이징에 탄원하러 간 사실이 밝혀질 경우 시 부서기 심지어 서기까지 성 정부에 가서 훈계를 받게 됩니다. 때문에 각 도시 관리들은 관직을 위해, 훈계를 받지 않기 위해 많은 인력과 물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선양시는 일반적으로 3명을 초과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싼자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더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의 신념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고문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랴오닝성 사법부에서 기타 관련 부문 관리들을 동원해 마싼자에 가서 경험을 학습하게 하면서 알게 되었지요.”, “마싼자의 경험을 들어보면 전기봉이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합니다.”

선양시 루쉰(魯迅) 미술대학 재무과 직원이었던 가오룽룽(高蓉蓉)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2004년 5월 7일 룽산(龍山) 강제노동수용소 탕위바오(唐玉寶), 장자오화(姜兆華) 등 경찰에 의해 연속 6시간 전기 충격을 받고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1년 뒤, 선량한 가오룽룽은 결국 박해로 사망하고 말았다.

박해가 시작된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미 10만 명이 넘은 파룬궁수련생들이 재판 절차 없이 강제노동수용소에 들어갔으며 그 가운데는 임산부, 노인과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다. 또 500여 명이 판결을 받았는데 가장 긴 형기가 18년에 이른다. 이 밖에, 수십 만 명이 억울하게 협박, 갈취를 당했고 거의 대부분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1천여 명 수련생이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신경 파괴 약물을 주입 당했다는 점이다. 2005년 6월까지, 이미 2,500여 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됐다. 이번 박해로 인한 피해 상황은 현재까지 추산할 방법이 없다.

2. 암살 미수

장쩌민의 질투심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극심한 질투심은 결국 원한으로 전부 변했으며 동시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발생시켰다.

장쩌민은 고위층에 발탁되어 베이징에 온 초기에는 누구든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는 스포츠위원회 우사오쭈(吳紹祖)를 만나면 권투, 무술, 바둑 등 스포츠와 관련된 화제를 꺼내 있는대로 주절댔지만 나중에 권력이 공고해 지자 파룬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우사오쭈를 관직에서 떨어뜨렸다. 처음 덩샤오핑의 집을 방문해 유명 영화배우 류샤오칭(劉曉慶)을 보게 되자 장쩌민은 겸손한 척 하면서 영화예술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나중에는 류샤오칭이 자신을 농담거리고 삼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감금하고 그녀의 부동산을 전부 몰수했으며 거액의 벌금까지 안겼다. 장쩌민은 그녀에게 “목숨만 남겨놓겠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의 집에서 류샤오칭이 장쩌민을 가지고 농담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편벽한 지방으로 보내졌고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마저 욕을 보았다.

그러나 장쩌민의 보복 행위는 외부에서 추측하는 것처럼 오랫동안의 준비를 거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았다. 장쩌민이 정적들을 잔인한 수단으로 제거하는 원인은 매우 간단했다. 즉, 그들이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다거나, 자신이 점찍어 둔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접근했다거나, 또는 고의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비위를 건드렸다거나, 심지어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파룬궁 박해를 놓고 말하면, 장쩌민은 기타 모든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결정을 고집해 왔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구실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지만 사실은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질투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줄이는 조건으로 파룬궁 창시자를 인도(引渡)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자 쩡칭훙에게 암살 밀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국가안전부, 총참모부 연합으로 특별행동팀을 만들어 전문 파룬궁 창시자의 행방을 추적했으며 킬러를 모집해 훈련시켰다.

2000년 12월, 파룬궁 창시자가 대만에 가서 설법한다는 소문을 들은 장쩌민은 쩡칭훙에게 사람을 파견해 대만의 깡패조직과 비밀리에 접촉하게 했으며 700만 달러를 대가로 암살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의 음모를 미리 간파한 파룬궁 창시자는 마지막 시각에 갑자기 대만 방문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괜한 돈만 날린 장쩌민과 쩡칭훙은 화가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갈고 발을 굴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후 장쩌민과 쩡칭훙은 눈에 쌍불을 켜고 특별행동팀에 일체 대가를 아끼지 말고 파룬궁 창시자를 암살할 것을 요구했다. 이 특별행동팀은 말 그대로 일체 대가, 심지어 생명을 희생하면서라도 사건을 조작해 파룬궁을 모함함으로써 민중들이 파룬궁을 적대시하게 하며, 동시에 기회를 노려 파룬궁 창시자를 암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장쩌민은 또 50만 달러를 들여 스리랑카의 ‘타밀타이거’와 유사한, 여성들로 구성된 ‘결사대’를 모집했다. 장쩌민은 그녀들을 ‘인간폭탄’으로 훈련시킨 다음 미국에 파견해 파룬궁 창시자가 수련생 심득교류회에 참석할 때 자폭 테러를 감행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여성 결사대가 조직된 지 얼마 안 되어 장쩌민은 비밀정보를 얻었다. 즉 파룬궁수련생들이 이듬해인 2001년 1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 동안 홍콩에서 심득교류회의를 개최하며 파룬궁 창시자가 둘째 날 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한다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즉시 밀령을 내려 목표물이 집 앞에 찾아온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일체 대가를 아끼지 말고 암살을 성공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해방군 총참모부, 국가안전부 및 공안부는 즉각 ‘114암살행동’ 계획을 짰으며 동남아, 북미 등 지역에 파견된 중공의 정보기관들도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갔고 홍콩, 마카오의 거의 모든 깡패집단도 중공의 위협과 이익의 유혹으로 이번 행동에 가담했다. 혐의를 철저히 피하기 위해 ‘114암살행동’은 홍콩, 마카오 지역의 깡패집단이 직접 손을 쓰도록 했다. 장쩌민은 이번 계획이 절대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고 심득교류회에 파견된 킬러들도 파룬궁 창시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나중에 포상을 받을 흐뭇한 상상에 잠겨있었다.

그러나 1월 14일, 파룬궁 창시자는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심득교류회가 끝날 무렵, 사회자가 갑자기 파룬궁 창시자가 미국에서 보내온 축신을 꺼내 읽었다. 암살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소식이 전해진 후, 장쩌민과 쩡칭훙은 반나절이나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파룬궁 창시자는 축신에서 그의 이 편지가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암살 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때서야 파룬궁 창시자가 이미 그들의 음모를 전부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쩌민의 질투와 암살 음모는 파룬궁 창시자의 영향력이 파급되는 것을 가로 막지 못했다. 2001년, ‘아시아 위크’지는 수개월간의 토론을 거친 후,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선생을 그 해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뽑았다. 단지 중국 최고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명단에 오른 장쩌민은 겨우 제4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위크’지는, “파룬궁이 불과 9년 동안에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 수련자들을 탄생시켰고 중공 당국의 강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향력이 커지고 있으며 리훙쯔 선생은 공개적인 장소에 아주 적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련자들로부터 찬양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치밀한 암살 계획이 거듭 수포로 돌아가자 장쩌민은 조금 두렵기 시작했다. 장쩌민의 별동대도 구성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이유 없이 연이어 교통사고 등 의외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2003년 LA법회 후, 파룬궁 창시자는 거의 매번 미국 파룬궁수련자들의 대규모 활동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장시간에 거쳐 수련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세계 각지 파룬궁수련생들은 중공 특무의 시달림을 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해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중공이 가장 엄밀하게 통제하고 있는 외국 주재 영사관과 대사관 및 610사무실에서 전문 파룬궁 박해에 참여했던 2명의 관리, 천융린(陳用林)과 하오펑쥔이 호주에서 양심선언을 하며 중공의 파룬궁을 박해를 폭로했다.

천융린은 호주에 약 천 명에 달하는 중공 스파이가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하오펑쥔도 중국이 해외에서 방대한 첩보망을 운영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천융린은 또 호주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중공의 정책이 “철저하게 반대하고 먼저 공격하며 호주 정부의 지지를 얻어 내는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처럼 전 중공 관리들의 증언은 중공이 국가 테러주의의 마수를 국내로부터 해외까지 뻗쳐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호주 ‘에이지(The Age)’지 2005년 6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중공 대사관은 파룬궁 단체의 활동을 파괴하기 위해 감시, 도청 심지어 수련자들 집에 잠입하는 등 여러 가지 수단을 이용했다. 파룬따파 정보센터 멜버른 대변인 애나 비어샤카(Ana C. Vereshaka)는 중공 스파이가 발와인(Balwyn)에 있는 그녀의 주택에 몰래 들어와 파룬궁 전단지를 훔쳐갔다고 증언했다.

해외 파룬궁수련자들에 대한 중공의 이러한 비열한 행위는 모두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며 파룬궁 창시자를 암살하려 했을 때와 똑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3. 미국 CBS방송국 기자의 특별 인터뷰

8월 15일, 미국 방문을 앞둔 장쩌민은 좋은 여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CBS의 ‘60분(60 Minutes)’ 프로그램의 사회자 마이크 월레스를 비롯한 8명 취재진의 인터뷰를 허락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을 취재하기 위해 10년 이상 노력해왔던 월레스는 미국 TV방송계에서 최초로 장쩌민을 인터뷰한 사람이 되었다.

3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과정은 장쩌민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야인 9월 3일 저녁에 방송되었다. 장쩌민은 자신의 미국 방문이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위해 이번에 인터뷰를 허락한 것은 중미 양국의 친선 관계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양국 관계는 총적으로 말하면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월레스는 급소를 찌르며 장쩌민의 이 대답은 여느 정객의 입에서나 다 나올 수 있는 형식적인 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월레스는 또 장쩌민을 세계에 남은 최후의 주요 공산당 독재자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장쩌민은 “당신은 중국을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허황하게 묘사하는군요. 중국에는 인민대표대회가 있어 중공중앙 상무위원회를 선거하고 중앙위원회에는 정치국이 있으며 정치국에는 또 상무위원회가 있는데 저 역시 상무위원회 위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모든 상무위원회 위원이 찬성하지 않으면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극력 중국의 민주를 표방하려했던 장쩌민은 가장 기본적인 하나의 상식을 잊고 있었다. 전국 인민대표대회는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을 선거할 자격이 없으며 또 선거한 적도 없다. 이것은 중국 국민들이 기본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당시 3권을 혼자 거머쥐고 있었던 최고 권력자 장쩌민은 사실 기본적인 법률 개념이 전혀 없었으며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황제’로 되었다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중공중앙의 결정도 모든 상무위원이 모두 찬성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파룬궁 탄압도 당시 7명 상무위원회 중 6명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장쩌민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발동된 것이었다.

월레스가 “미국 사람들은 자국의 지도자를 선거할 수 있는데 왜 당신은 중국 국민이 중국 지도자를 선거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장쩌민은 “비록 조금은 다른 선거제도이지만, 저 역시 선거를 통해 올라온 지도자입니다. 우리 두 나라는 문화와 전통이 다르고 교육과 경제발전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정치 제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장쩌민은 여러 가지 개념을 혼동했다. 그는 자신이 ‘도장 찍는 대회’로 불리는 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 것이며 게다가 도장은 바로 독재자인 자신의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어야 했다. 즉, 일반 국민들은 전혀 그를 국가주석으로 선거한 적이 없다. 그는 ‘특수한 나라 사정’으로 변명을 했는데 반세기 전의 중공 자신의 언론과 비교해 보면 절묘한 풍자로 된다.

65년 전, 중공 기관지인 ‘신화일보’에는 이런 한 단락이 있다. “그들(국민당)은 중국의 민주정치가 현재가 아닌 먼 훗날의 얘기로 생각하고 있으며 중국 국민의 지식 및 교육 수준이 구미 자산계급 민주국가들처럼 제고된 다음 다시 민주정치를 실현할 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은 민주제도를 실시해야만 국민 교육이 더욱 잘 이루어 질 수 있다.” (1939년 2월 25일)

5년 후, ‘신화일보’는 또 이렇게 썼다. “철저하고 충분하게, 효과적으로 보편적인 선거제도를 실시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보편적이고 평등한 선거권, 피선거권을 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손중산(孫中山) 선생이 말한 것처럼 선거 전에 각 지방 단체 및 인민에게 선거의 자유, 의안 제기 및 선전, 토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말하자면 인민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른바 선거권이란 여전히 빈 말에 불과하다.” (1944년 2월 2일) 이처럼 장쩌민은 근본을 잊고 공산당의 초기의 주장과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월레스가 또 “중국에는 왜 하나의 당파만 존재합니까?”라고 묻자 장쩌민은 “우리가 왜 반드시 야당이 있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중공 자신의 50여년 전의 이론을 다시 보기로 하자. “현재 민주 정치를 실시하는데 있어서 관건은 일당 치국의 국면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 사업이 한 당파의 손에 독점되어 재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 없고 좋은 건의가 있어도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당 독재 하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민주를 실시한다 해도 빈말에 불과하다.”

월레스가 “중국에는 언론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당신은 왜 언론의 자유를 두려워합니까?”라고 묻자 장쩌민은 “언론은 반드시 당의 대변인이어야 합니다”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이에 대해서도 중공 언론이 1943년 9월 1일 명확하게 논평한바 있다. “파시즘 언론에서 이론가들은 후안무치하게도 공개적으로 ‘하나의 당, 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신문’을 주장했다. 그들은 반체제 진보적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통제를 실시하고 합병 및 강제 폐간시켰다. 그들은 원고를 검열하고 임의로 삭제했으며 독자를 위협하고 판로 확장을 저애했으며 신문사에 스파이를 잠복시켜 점차 관리권을 거머쥐었고 나중에는 강제로 인수하고 폐간되게 만들었다.”

이밖에, ‘신화일보’는 1944년 10월 9일자에서 “만약 현재 우리가 전쟁이 끝난 후의 세계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민주세계라는 것을 승인한다면 이러한 세계에서 생존하고 이러한 세계의 국제기구에서 우수한 구성원이 되려고 한다면, 첫 번째로 해야 될 일이 바로 즉각 인민의 절대적인 권리인 언론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서방 언론에 개명적인 이미지로 각인되기를 희망하는 장쩌민이 왜 케케묵은 이론만 늘어놓고 심지어 공산당 초기의 이론보다도 못한 관점을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에서 장쩌민이 가장 추태를 부린 것은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모욕적인 평가에서 나타났다.

월레스가 “중국 당국이 왜 파룬궁 단체를 박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연공과 정신 신앙이 고문, 체포, 처형해야 할 정도로 우려할만한 것인가?”라고 묻자 장쩌민은 “파룬궁 창시자가 석가모니, 예수가 환생한 것이라고 자칭했다”, “파룬궁은 세계 종말이 곧 닥쳐와 지구가 폭발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수 천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자살했다”고 말했다.

스스로 미국인의 심리를 잘 파악한다고 생각한 장쩌민은 그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것이 아마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룬궁 창시자는 여태 자신이 석가모니 혹은 예수가 전생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으며 지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말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사실 파룬궁 창시자는 1998년에 여러 차례 수천 명 사람들 앞에서 많은 예언가들의 예언에서 나오는 99년 지구 종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생긴 수련자가 총 수련자 가운데서 얼마만큼의 비례를 차지하는지에 있어서는 사실 99년 이전에 중국 고위층은 이미 3차례 이상의 대규모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그들은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탄압을 진행할 수 없었다. 1999년 탄압이 시작된 후, 장쩌민이 통제하고 있는 언론에서는 1,400명이 연공을 한 뒤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물론 중국 당국이 꾸며내고 과장한 숫자였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에서 장쩌민은 한술 더 떠 아예 자살한 사람이 몇천 명이 된다고 주장했다.

파룬궁 수련자는 수천 만을 헤아리는데 7년 동안에 설사 1,400명이 사망했다 해도 매년 200명 사망한 것으로서 중국 평균 사망률 0.6%보다 훨씬 낮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1,400이라는 숫자는 파룬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효과가 좋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번 특별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장쩌민이 기대했던 ‘개명하고 능력 있는’ 이미지를 보지 못했으며 대신 황당한 거짓말쟁이로 보게 되었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할 것은 월레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가 주석인 장쩌민은 중국 전체 국민의 신용과 명예를 걸고 거짓말을 하고 파룬궁을 비방했다는 점이다.

4.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파룬궁을 만나

2000년 9월의 뉴욕은 전세계 정상회담으로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뉴욕 경찰측 자료에 의하면 정상회의 기간에 허가를 받은 시위활동은 90여 건인데 그 중 10여 건이 장쩌민을 겨냥한 것이었다. 장쩌민이 뉴욕을 떠나는 9일까지 닷새 동안, 항의 단체들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참가 인원이 가장 많고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일으켰던 것은 파룬궁수련자들의 활동이었다.

미국 30여개 주 외, 캐나다, 유럽,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약 2천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이 장쩌민을 ‘환영’하기 위해 뉴욕에 모였고 뉴욕의 거리 어디서나 ‘파룬따파(法輪大法)’ 글자가 새겨져 있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수련자들의 활동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정상회의 첫날인 9월 5일부터 본격적인 대규모 항의 활동을 시작했다. 첫날 그들은 6, 7개의 같지 않은 장소에서 단체로 연공하고 전단지를 배포했다. 파룬궁수련자들은 장쩌민이 머물고 있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과 기타 중점 지역 외, 중국인들이 집거해있는 차이나타운 세 곳에서도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뉴욕을 뒤덮은 노란 티셔츠는 아름다운 가을 풍경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이튿날 정오, 박해중지를 호소하는 천여 명 파룬궁수련자들의 시위 행렬은 3번가에서부터 하마소 광장까지 길게 이어졌다.

약 1년 동안의 탄압을 받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은 끊임없이 미국에서 단체연공을 통해 탄원을 해왔지만 이처럼 큰 규모의 시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날 그들은 또 ‘뉴욕타임스’에 “장쩌민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광고로 실었다. 신문 한 지면을 꽉 채운 이 글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은 장쩌민에게 수백만 파룬궁수련생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수백만 중국 국민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헤아려 줄 것을 호소했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한 파룬궁수련생은 거리에서 우연히 뉴욕 시장 루디 줄리아니를 만났다. 줄리아니 시장은 노란 티셔츠에 있는 문구 “China: Stop Persecuting Falun Gong(중국은 파룬궁 탄압을 중지하라)”를 보고 그 수련생에게 “You are doing the right thing(당신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다. 파룬궁수련자들을 피하기 위해 중국측 대표들은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장쩌민은 뉴욕 경찰에 압력을 가해 일부 장소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이 노란 티셔츠를 입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이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차량 운행 노선은 극비로 몇 개의 편지 봉투에 나눠 넣고 방향을 바꿔야 하는 지점에 가까워 질 때마다 차례차례 열어보게 했다고 한다. 설사 이러할지라도 평화적이고 성실한 파룬궁수련자들은 여전히 그를 몇 번이나 놀라게 하고 말았다.

8일 정오, 장쩌민이 월도프 호텔에서 열린 오찬회를 마치고 나오고 있을 때, 한 파룬궁수련자가 그와 1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파룬궁수련생을 석방하라!”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시 주위에 있었던 많은 기자와 중국측 대표들은 모두 그 수련자가 외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장쩌민은 파룬궁 세 글자를 듣자 갑자기 얼굴색이 확 변하면서 반사적으로 손을 후려칠 자세로 쳐든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날 저녁, 장쩌민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음악회에 참석했다가 혼자 뒷문으로 빠져나와 앞문으로 나간 차량과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려고 했다. 이에 앞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중국 자유민주당 8명 인사가 니위셴(倪育賢) 회장과 함께 단체표를 사서 입장했고 음악회가 열리는 8시 정각에 귀빈석 뒤쪽 좌석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음악회 두 번째 연주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가 끝나자 그 8명 인사도 다른 관중들과 함께 기립 박수를 쳤다. 이때 사람들은 그들이 똑같이 흰 바탕에 붉은 글자를 새긴 티셔츠를 입었음을 발견했다. 그들의 티셔츠 앞면을 이어서 보니 “중공의 일당 독재를 폐지하자”란 여덟 글자(역주 – 한자로 되어 있었음)가 있었고 뒷면에는 “장쩌민은 대 독재자이다”라는 여덟 글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약 30초 뒤, 중공 영사관 장훙시(張宏喜) 총영사 등 사람은 꿈에서 깨어난 듯 그제야 급히 친공 화교 량관쥔(梁冠軍), 화쥔슝(花俊雄) 등을 지휘해 그 8명 자유민주당 인사들을 저지했다.

놀란 가슴을 채 진정하지도 못했는데 차에 앉은 장쩌민은 첫 커브길에서 또 현수막을 높이 쳐든 파룬궁수련생을 보게 되었다. 현수막에는 영어로 “Practicing Falun Gong is a Right(파룬궁 수련은 일종 권리이다)”라고 크게 씌어져 있었다. 이를 본 장쩌민은 갑자기 전기에라도 닿은 듯 몸이 뒤로 젖혀진 채 덜덜 떨었고 차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장쩌민이 뉴욕을 떠나는 날, 파룬궁수련자들은 그가 35가에 있는 유엔주재 중국 사절단 건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몇십 명이 모여 거기로 갔다. 거기서 어떤 수련자는 거리 맞은편에서 연공을 하고, 어떤 수련자는 “파룬궁 탄압을 중지하라”, “선과 악에는 모두 보응이 있다” 등 표어를 들었다. 중국 사절단 관리들은 유인작전을 펼쳐 차량을 정문으로 내 보낸 뒤 장쩌민을 옆문으로 빠져나가게 하려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차에 타자마자 현수막을 든 4명의 파룬궁수련생과 부딪쳤다. 현수막에는 영어로 금빛이 반짝이는 “파룬따파(Fa Lun Da Fa)” 네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1번가와 제35번가에서도 장쩌민의 눈앞에는 현수막을 들었거나 연공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을 또 다시 나타났다. 며칠 동안, 장쩌민은 아무리 애를 써도 파룬궁의 포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5. 홍콩 기자에게 욕설을 퍼부어

미국의 유명 기자 앞에서 흥이 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장쩌민은 3개월 후, 홍콩의 무명 기자 앞에서 눈을 부릅떴다. 사실 홍콩기자가 포착한 장쩌민의 모습이야말로 그의 진실한 모습이었다.

10월 27일, 장쩌민은 베이징에 업무 보고를 온 홍콩 특구 행정장관 둥젠화(董建華)를 접견하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놀랍게도 불쾌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기자회견 장소에서 현장에 있었던 9명 홍콩 기자를 훈계했다.

사건은 한 홍콩 여 기자가 장쩌민에게 둥젠화 행정장관의 연임을 허락할 것인지 물으면서 일어났다(역주 – 장쩌민이 혼자만의 결정으로 임명한다는 의미). 이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버럭 화를 냈으며 광둥말과 영어를 섞어가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홍콩 기자들의 질문이 너무 유치하다고 하면서 “You are too simple, too naive(사고가 너무 간단하고 유치하다).”, “I am angry(나는 화가 났다)!”라고 하며 영어로 소리 질러 댔는데 4분간이나 지속되었다.

장쩌민은 홍콩 기자들이 수준이 낮아 월레스와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당신들은 미국의 월레스가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는가? 그래도 나는 그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월레스와의 인터뷰에 매우 흡족하고 있었다. 홍콩 기자들은 당시 “이 세상의 마지막 독재자”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월레스를 부러워했을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월레스가 홍콩 기자들은 부러워할 차례가 되었다. 아무리 경험 많고 능력 있는 기자라고 하지만 월레스는 그의 특별 취재에서 폭군 장쩌민의 화려한 허울을 벗겨놓지는 못했다. 이번에 홍콩의 초년병 여 기자가 이를 쉽게 해낸데 대해 월레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장쩌민은 자유, 민주 국가에서 기자가 명칭만 다르지 왕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언론자유는 민주 정치를 보호하는 동시에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월레스가 명성을 날리게 된 것도 기자인 그가 장기간 예민한 관찰, 예리한 질문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과 뉴스들을 발굴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면서 언론의 자유를 통해 이득을 본 사람이었다. 만약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제도가 없었더라면 월레스와 같이 수준 높은 기자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장쩌민 통치하의 중국 대륙의 기자들을 강제로 무릎 꿇린 채 장쩌민의 도와 거짓 선전으로 파룬궁 탄압을 유지하게 하느라고 바쁜데 어찌 ‘높은 수준’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장쩌민은 홍콩기자들 앞에서 한바탕 날뛰고 나서 좀 보기 좋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또 기자들에게 “만약 안 좋은 보도가 나가기라도 한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날 뒤, 홍콩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충격적이라며 거의 모든 신문 제1면에서 상세히 보도했다.

장쩌민이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심하게 화를 낸 데는 다른 속사정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명망이 없는 그가 중공 고위층에서도 고립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쩡칭훙 같은 측근마저도 중앙 정치국위원으로 올려놓지 못할 정도로 권력이 흔들리고 있는 자신에게 “홍콩 특구 행정장관의 연임을 허락할 것이냐”고 물은 홍콩기자의 질문에 심기가 건드려 졌던 것일까? 그것도아니면 파룬궁 탄압이 확실히 여러모로 곤경에 빠져 엉뚱한데서 화풀이를 한 것일까?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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