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5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5‘반부패 운동’ 통해 정적 제거하고, 천수이볜 총통 당선에 힘 써

장쩌민의 가장 큰 ‘공로’는 공산당 통치 역사상 처음으로 ‘부패한 관리를 등용해 나라를 다스린 것(貪官治國)’이었다.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탐관치국’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지혜와 덕망으로, 어떤 사람은 국민이 인정하는 선거에 의거하지만 장쩌민은 그렇지 않았다. 장쩌민은 지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선거를 거쳐 당선되지 않았으므로 만약 전부 청렴한 관리만 등용한다면 그의 무능함과 부패함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었다. 청렴한 관리 이미지로 국가주석인 장쩌민보다 더 성망이 높았던 주룽지의 사례는 장쩌민에게 ‘청렴한 관리 전략’이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탐관치국’의 최대 장점은 국민의 원성이 탐관오리들로 집중돼 장쩌민이 성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장쩌민의 빈말뿐인 반부패운동 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부패한 관리들일수록 ‘반부패’의 깃발을 더 높이 들고 나왔다. 정치투쟁에서 부패 행위가 드러나 낙마한 관리들을 보면 전부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제창한다’고 평소 누구보다 더 높이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중국 최대 탐관오리인 장쩌민은 국민을 속이고 정적을 타격하는 도구로 ‘반부패’를 이용했다. 쿤이 장쩌민을 대신해 쓴 ‘장쩌민평전’을 보면, 장쩌민이 ‘반부패’를 외치며 발표한 연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가 한 말보다는 그가 한 행동을 보아야 한다. 장쩌민의 통치 아래, 그에게 충성하는 탐관오리들은 관운이 텄지만 그렇지 않은 관리들은 반부패 운동 중에서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장쩌민에게 이용 가치를 잃은 일부 작은 관리들은 여러 가지 용도의 희생양이 되었다.

2000년, 장쩌민은 위안화(遠華)그룹 사건을 이용해 전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공연히 정적을 제거하고 심복들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반부패운동 꼭두각시극을 벌렸다.

1. 세상을 놀라게 한 위안화그룹 사건

위안화그룹 사건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샤먼(厦門) 위안화그룹 회장 라이창싱(賴昌星, 역주 – 현재 캐나다에 도주해 있음)은 1994년에 위안화그룹을 설립했으며 나중에 와서는 밀수 활동을 일삼았다. 정부는 위안화그룹이 96년부터 5년 동안, 총 530억 위안어치의 물품을 밀수했으며 탈세 금액이 300억 위안에 달해 국가에 총 830억 위안의 손실을 주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중공이 1949년 정권을 잡은 이래, 최대의 밀수 사건이 되었다.

당시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샤먼 위안화그룹 밀수 사건을 크게 보도했지만 중국에서는 1999년 11월 ‘베이징만보(晩報)’의 한쪽 모퉁이에 짤막한 뉴스만 실었을 뿐, 모든 매체들이 한결같이 침묵을 지켰다. 2000년,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LA타임즈 등 해외 언론들에서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위안화그룹 사건은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위안화그룹 사건은 1999년 3월,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주룽지가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으면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편지에는 위안화그룹의 대규모 밀수 활동과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어 있었다.

당시 주룽지는 이 사건에 대해 “누구와 관련되는지 막론하고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것이며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쩌민도 위선적으로 누구든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지만 수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사건이 장쩌민 주변 인물, 자팅안(賈廷安), 자칭린(賈慶林)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자 즉시 태도를 바꿨다.

2000년 초, 홍콩 ‘경제일보’는 베이징 소식통들의 말을 빌려, 이번 ‘세기의 부패사건’을 반부패 운동의 중대한 성과로 국민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반드시 3월초 열리는 양회 전에 수사를 마무리 짓도록 ‘420전문수사팀’에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장쩌민은 이 사건을 이용해 자신을 치켜세우려 했으며, 빠른 시일 내에 수사를 마침으로써 자신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증거 없애

2000년, 기율검사, 감찰, 세관, 공안, 검찰, 법원, 금융, 세무 등 부문이 합동 수사를 진행한 결과 위안화그룹 밀수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 600여 명의 용의자가 입건되어 조사를 받았고 그 중 300명이 형사 처벌을 받았다.

2001년까지 각급 인민법원은 샤먼 특대 밀수사건과 관련된 167건 안건을 판결했는데 피고가 269명에 달했다. 그러나 그 해 7월, 수사가 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공상은행 샤먼 지점 지점장 예지천(葉季諶), 샤먼 세관 둥두(東渡) 사무실 선박관리과 우위포(吳宇波) 과장, 그리고 왕진팅(王金挺), 제페이궁(接培功), 황산잉(黃山鷹), 좡밍톈(庄銘天), 리바오민(李寶民)과 리스좐(李士專) 등 관리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수사가 채 끝나기 전에 중요 인물 10여 명이 처형됨으로써 위안화그룹 사건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자신의 측근과 관련되자 조급해진 장쩌민이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신의 음흉한 살인을 반부패 운동에 대한 자신의 결심과 성과로 만들어 언론에서 크게 선전했다.

라이창싱에게 고마워했던 장쩌민

위안화사건 수사과정에 장쩌민 사무실 주임이며 장쩌민의 심복인 자팅안은 라이창싱 회장과 몰래 연락하며 소식을 주고 받았다. 라이창싱은 그가 자팅안을 포함한 장쩌민의 5명 비서 중 세 사람과 각별한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자팅안에 대해 모두 생소해 하고 있다. 자팅안은 장쩌민이 총서기직을 맡고 있을 당시 장쩌민 사무실 주임이었다. 그는 장쩌민이 전자공업부에 있을 때부터 장쩌민의 비서로 있었으며, 1985년 1월 장쩌민을 따라 베이징에서 상하이에로 돌아왔다가 1986년 6월 다시 장쩌민을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그는 장쩌민의 가장 신임하는 비서이자 막료로 내부에서는 모두 그를 ‘큰비서’라고 부른다.

2004년, 장쩌민은 자팅안을 군사위 사무실주임으로 승직시키고 ‘특별한 케이스’, ‘사업에 유리하다’ 등 이유로 그를 상교(上校 역주 – 중령과 대령 중간계급)에서 중장(中將)으로 진급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군사위 위원들은 자팅안의 기존 지위가 너무 낮아 주위의 반발을 살 수 있다며 반대했다. 장쩌민은 포기하지 않고 중앙군사위 회의 때, 또 다시 이 문제를 꺼냈으나 여전히 거절당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팅안이 장쩌민의 중요한 심복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라이창싱은 “그의(장쩌민) 저택은 중난하이에 있는데 엄청나게 큽니다. 장쩌민이 한 쪽을 차지하고 경호원과 비서 등 잡무를 보는 사람들이 다른 한 쪽을 사용합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중난하이에서 지내지만 한동안 인테리어 때문에 댜오위타이(釣魚臺 역주 – 베이징의 영빈관)으로 옮겨갔습니다. 97년, 98년은 모두 댜오위타이에서 지낸 것으로 기억됩니다”라고 말했다.

라이창싱은 ‘위안화사건 흑막’의 작가 성쉐(盛雪 역주-베이징 작가, 6.4사건 후 캐나다로 망명)에게 장쩌민과 직접 접촉하지는 못했으나 비서를 통해 연락을 가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쩌민의 비서에게 중앙군사위에 헌금하려한다는 뜻을 전하게 했는데 장쩌민은 필요없으니 뒀다가 장사를 하는데 쓰라고 하고 또 저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장쩌민은 진작부터 제가 비서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한번은, 장쩌민이 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 자팅안이 공항에 나가 그를 맞았다. 자팅안은 장쩌민을 보자 광둥성에서 리지저우(李紀周, 공안부 전 부부장)와 관련된 자동차 밀수 사건이 적발되었다고 급히 보고하고 장쩌민의 집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도맡아 처리하는 다른 한 비서에게 이 사건이 라이창싱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라이창싱이 전혀 관련이 없다고 대답하자 전화를 했던 비서는 “그렇다면 그들이 이 일을 처리하기 훨씬 쉽겠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주하이(珠海)에 있었던 라이창싱은 이 일을 안 뒤, 즉시 리지저우에게 알렸으며(당시 리지저우는 밀수 활동을 적발하기 위해 주룽지를 따라 광둥성에 있었다) 리지저우의 여자 친구, 전 공안부 교통국 관리 리사나(李莎娜)를 숨겨주었다.(나중에 체포되었음)

라이창싱이 장쩌민의 심복 자팅안과 이처럼 가까운 사이었는데 이번 사건에서 장쩌민의 화살은 누구를 향해 쏜 것일까? 확실한 것은, 장쩌민이 아무리 반부패를 소리 높이 외쳐대도 결국 모두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펑페이와 류화칭을 제거

한때 큰 파문을 일으킨 위안화사건에서 사실 장쩌민이 제거하려 했던 사람은 바로 원로 외교관 지펑페이(姬鵬飛)의 아들 지성더(姬勝德)와 류화칭(劉華淸)의 딸, 그리고 며느리였다.

거슬리는 말 한마디라도 듣게 되면 반드시 보복하고야 마는 장쩌민은 줄곧 지펑페이와 류화칭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각자 영역에서 인맥이 든든했으므로 장쩌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장쩌민은 확실히 너무나 무능했으므로 그에 대한 이 두 원로의 태도는 사실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펑페이는 중공 외교부의 실권파로 홍콩 수뇌인물을 지내기도 했으며 국무원 부총리, 국무위원, 홍콩ㆍ마카오 사무실 주임, 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중앙 고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줄곧 중공 요직에 있었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기도 전에 그의 손자는 외국에서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나다니면서 우쭐댔다. 때문에 그는 장쩌민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지성더 역시 장쩌민에게 그리 공손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이를 갈게 했다. 지펑페이의 외독자인 지성더는 총 참모부 정보부처 상무부 부부장이었으며 라이창싱과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었다. 류화칭의 딸은 또 지성더의 수하에 있었으므로 장쩌민은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1999년 3월 중순, 주하이에 있었던 지성더는 베이징 위취안산(玉泉山)에서 열리는 군사위 확대회의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지성더가 회의장에 도착해 보니 그와 인사하는 사람이 없고 분위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체포되었으며 당장이라도 처형될 것 같았다. 지성더가 체포되자, 아버지 지펑페이는 4차례나 장쩌민에게 너그럽게 처리하여 사형만은 말아달라고 사정 편지를 썼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지펑페이는 아들이 목숨을 건질 가망이 없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져 2000년 2월 10일 13시 52분,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지펑페이의 죽음에 대해 중공 언론들은 그저 간단한 소식만 내보냈고 장쩌민은 추도회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중앙군사위원회, 군부 4개 총부, 국방부에서도 화환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성더의 어머니 쉬한빙(許寒氷)은 끝내 중공 원로들을 통해 아들의 사형 집행 유예를 허락받았다.

총참모부 감방에 감금되어 있던 지성더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가한 후, 절망에 빠졌다. 8월 13일, 그는 칫솔대로 동맥을 끊고 수면제 70여 개를 먹고 자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쉬한빙은 아들이 고혈압이 있다는 이유로 보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매주 3번 아들을 만나게 해 주고, 음식물 전달을 제한하지 말아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비분을 억제하지 못한 쉬한빙은 2001년 9월 14일,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301병원에 호송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처럼, 장쩌민은 일생을 공산당에 바친 지펑페이 가족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했다.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중앙군사위 부주석인 류화칭 역시 장쩌민이 오래 전부터 제거하려 했던 대상이었다. 류화칭은 6.4사건 이 후, 덩샤오핑이 총이라곤 만져보지 못한 장쩌민을 위해 배치해 준 군사 ‘보모’였다. 제멋대로 고위급 장령들을 진급시켰던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바로 곁에서 이래라 저래라 지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89년 6.4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군사 방면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장쩌민을 중공 중앙총서기, 군사위 주석으로 발탁하면서 걱정된 나머지 류화칭, 장전(張震) 두 노장을 군사위 부주석으로 배치하여 장쩌민을 보좌함으로써 군부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점차 권력이 공고해 지자 군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자격이 없는 젊은 장교들을 등용하고 점차 직접 나서서 군부 사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류화칭과 장전은 군사를 아는 사람이 군부를 이끌어야 한다며 장쩌민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류화칭은 심지어 정치국 회의에서 늘 장쩌민을 손가락질 하면서 훈계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총이라곤 만져본 적 없는 장쩌민 앞에서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속 좁은 장쩌민은 그렇지 않았다.

1999년, 정권 확립 50주년 기념 축제 때 장쩌민은 자신만을 내세우기 위해 퇴직 장교들에게 군복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 열병식 전, 당정군(黨政軍) 요원들을 만나러 천안문 성루에 올라간 장쩌민은 류화칭이 상장 군복을 차려입고 늠름하게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신과 맞선다고 생각한 장쩌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누르면서 “어떻게 된 겁니까? 군복을 입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수그러들 류화칭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당신도 군복을 입는데 내가 왜 입지 못한단 말이요!”하고 맞받아 쳤다.

말문이 막힌 장쩌민은 화가 나 얼굴이 검푸르게 되었으며 온 몸을 부르르 떨다가 열병식이 시작되어 승용차에 올라서서야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왔다. 열병식이 끝나자 장쩌민은 즉시 유시구이(由喜貴, 역주 – 중앙 경위국장, 장쩌민의 심복)에게 류화칭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중공 제15차 대표대회 이후, 장전은 퇴직을 선언했으며 덩샤오핑도 사망했다. 이 시기, 장쩌민은 한 동안 갖은 수단을 동원한 결과, 군대 내에서 세력이 강해지고 있었으므로 류화칭을 제거할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했다. 류화칭 본인에게는 그렇다 할만한 약점이 없었지만 당시 그의 딸 류차오잉(劉超英 총 참모부 제5 정보국 상교, 부국장)이 마침 미국 정치헌금 스캔들에 말려들어 있었다. 그런데 지성더가 류차오잉의 상급이었고 지성더는 또 라이창싱과 친구 사이었다. 이런 관계는 장쩌민에게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라이창싱은 ‘위안화사건 흑막’의 저자 성쉐와 지성더를 이야기하면서 “베이징, 선전, 샤먼, 홍콩 그 어디든지 막론하고 우리는 같은 곳에 있기만 하면 만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의 진정한 목적은 라이창싱을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지펑페이의 아들과 류화칭의 딸이었다.

류화칭은 평소 가장 끔찍하게 아꼈던 작은 딸 류차오잉과 둘째 며느리 정리(鄭莉, 총 정치부 군관)가 체포되자 침식을 잊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다른 수가 없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장쩌민에게 전화를 하여 사정을 봐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냉소를 띤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쩡칭훙은 일찍 류화칭에게 “당신이 장쩌민 주석을 반대하는데 대해 우리는 어쩔 수 없지만 당신의 며느리, 부인과 자녀들을 붙잡아 가둘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류화칭의 며느리 정리는 체포된 후,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허난으로 도망갔으며 거기서 류화칭에게 전화를 했다. 류화칭이 체포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자 정리는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 자수했다.

류화칭의 딸 류차오잉은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체포될 때에만 해도 매우 거만하게 “나는 류화칭의 딸이다, 이래도 되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10여 명 군인들은 들은 척도 안하고 그녀를 공항 밖으로 끌고 갔다. 류차오잉이 계속 거만하게 나오면서 자백을 거절하자 중앙 기율검사위원회 수사원이 다가가 그녀의 뺨을 후려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여태 그런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었던 류차오잉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깨닫고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 전반 수사 과정에 장쩌민은 직접 나서서 지휘하고 수하들을 지지해 주었다. 류화칭의 가족들이 체포된 후, 장쩌민의 한 측근이 “은인(恩人)의 자녀들을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류화칭이 장쩌민을 보좌하는데 공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즉시 노발대발하면서 그에게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한다.

위안화사건, 자칭린까지 연루돼

위안화사건에 관련된 또 하나의 주요 인물이 바로 장쩌민의 측근 자칭린이었다.

1999년에 적발된 샤먼 위안화사건은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래 중국에서 적발된 가장 큰 밀수 사건으로 700억 위안의 불법 자금이 적발되었고 250명 이상의 지방 및 고위층 관리들이 말려들었다. 그들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뇌물 수백만 달러를 받고 가치가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동차, 연료, 원자재, 중형기계와 사치품 등을 샤먼항을 통해 중국으로 밀수했다. 그런데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 푸젠성 당서기와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직을 맡은 사람이 바로 자칭린이었다. 이것이 장쩌민이 위안화사건에 대한 수사를 중단시킨 원인이었다.

자칭린은 1940년 3월에 태어났으며 허베이 보터우(泊頭)사람이다. 그는 장쩌민과 함께 가장 기계 공업부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에 장쩌민의 신임을 얻었고 장쩌민의 관직이 높아짐에 따라 함께 그 행운을 누렸다.

장쩌민은 베이징시 당서기 천시퉁을 제거한 후, 푸젠성 당서기 자칭린을 베이징시 시장으로 임명했으며 나중에는 베이징시 당서기와 정치국위원도 겸임하게 했다. 자칭린에 대한 장쩌민의 신임은 이 정도였다.

자칭린은 1962년 허베이 이공대학 전력학부를 졸업하고 제1기계공업부 사무실 정책연구실에서 일하다 1978년 중국 기계장비 수출입회사 사장직을 맡았으며 1985년에는 푸젠성으로 가서 정부 사업을 하다 1993년 초 푸젠성 성장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연말 푸젠성 당서기로 되었다.

위안화사건이 터진 후, 특별수사팀이 자칭린이 위안화회사를 찾아 라이창싱과 함께 찍은 사진을 수색해 냈다. 라이창싱은 자신이 돌아가 자칭린에 대한 진실을 밝힌다면 자칭린은 바로 끝장난다고 말했다. 때문에 자칭린이 베이징으로 옮겨갈 때, 푸젠성에서는 “푸젠의 탐관오리가 베이징으로 갔다”고 비웃었다고 한다.

2003년, 중앙 기율위원회 4명의 부서기가 중앙위원회에 자칭린의 자격에 대해 다시 조사, 검토할 것을 요구했고, 각 민주 당파와 정치협상회 인사들도 자칭린이 정치협상회 주석직을 맡는 것을 반대해 나섰으며, 국무원 심계국(審計局)에서는 자칭린이 푸젠성 성장직을 맡고 있을 당시의 특대 경제 스캔들을 조사해 냈다.

2003년 1월 하순, 국무원 심계국이 중공중앙 정치국, 인대 상무위원회에 국채 건설자금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제출했다. 보고서에서는, 1993년 푸젠성 당위원회가 20억 위안의 예산을 들여 건설한 푸저우(福州) 창러(長樂) 국제공항이 1997년 초까지 국가자금 12억 위안을 초과 유용했으며, 1993년부터 1997년까지 푸젠성 성장, 당서기로 있던 자칭린이 이 기간 창러 공항 건설자금을 횡령했다고 폭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중 푸젠성 당위원회와 성정부에서 12억 8천만 위안을 횡령했고 그 돈은 고위층 관리들이 나눠가졌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푸저우 창러 국제공항은 완공된 1998년 초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총 15억 5천만 위안에 달하는 적자를 냈는데 그 원인은 건설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창러 공항은 국내 다른 공항에 비해 원가가 1.25배 높았으나 여객과 화물 수송량은 전체 수용능력의 30%밖에 되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 보고서에는 또 공항 건설 과정에 자칭린, 허궈창(賀國强) 등 관리들이 11차례에 거쳐 국토 전문 프로젝트 자금을 유용하여 지출이 초과된 부분을 채웠는데 총 12억 위안에 달한다고 한다.

심계국은 이 밖에, 공항 건설과정에 횡령한 자금 일부분이 푸저우, 샤먼, 주하이, 다롄, 칭다오, 우시(無錫), 항저우, 베이징 등 곳곳에 건설된 호화별장 570여 채를 건설하는데 이용됐으며 각각 230여 명의 고위층 관리들이 익명으로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0년 12월, 국무원 심계국은 국채 전문 건설 자금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서, 공항, 고속도로, 싼샤(三峽) 수력발전소, 농업종합개발 이 4대 건설 프로젝트에 국가자금 횡령 현상이 심각하다고 밝히고 특히 자칭린과 허궈창의 이름을 찍어 ‘자허공정(賈賀工程)’ (‘假禍工程’ 역주-‘賈’와 가짜 ‘假’, ‘賀’와 재난 ‘丸의 발음이 비슷하므로 재난을 가져다주는 가짜 공정이라는 의미)을 지적했다.

당시 장쩌민은 이 보고서를 받아 보고 나서 “창러 공항은 기타 공항들과 마찬가지로 경영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라고 묵과했다.

자칭린이 푸젠성 당서기로 있을 때, 부인 린유팡(林幼芳)은 중국 대외무역회사 푸젠성 지사에서 당서기직을 맡고 있었다. 린유팡은 위안화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엄중한 부패 행위가 있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자칭린에게 이혼을 권하여 이번 사건에 적게 연루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린유팡은 2000년 1월, 그들이 이혼을 했다는 보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그녀는 “40년 동안 우리는 줄곧 사이가 매우 좋았으며 행복한 가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홍콩에 등록되어 있는 그 무슨 화위안(華遠)이라는 회사를 나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 했다. 린유팡은 밀수사건과 관련된 푸젠 샤먼의 ‘위안화그룹’ 대신 ‘홍콩에 등록된 화위안회사’ 이름을 대며 시치미를 뗐지만 그건 누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발뺌이었다. 푸젠성 사람들은 “푸젠성 대외무역 사업을 책임졌던 린유팡이 푸젠성에서 가장 큰 수출입 회사를 모른다고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믿겠는갚라고 말했다.

자칭린이 린유팡과 정말 이혼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2005년 4월 28일, 자칭린은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전국 정치협상회 주석의 신분으로 대만 야당 주석 롄잔(連戰) 일행을 만찬에 초대했다. 공식 행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롄잔의 옆에는 부인 팡위(方瑀)가 있었지만 자칭린의 옆에는 부인 린유팡이 보이지 않았다.

1999년 9월 18일, 장쩌민은 ‘베이징 도시건설 사업을 시찰’한다는 명의로 당시 탄핵 위기에 몰린 자칭린과 함께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외부에서는 이를 자칭린을 부추기기 위한 장쩌민의 조치라고 분석했다.

제10차 인대와 정치협상회 ‘양회’를 앞두고 장쩌민에 의해 내부적으로 제10기 정협 주석으로 임명된 자칭린은 외부 압력 때문에 건강을 구실로 중앙 정치국에 정치국위원, 정치국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 부인과 함께 고향에서 휴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당신이 사직하면 나는 끝장이요”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경제적인 범죄행위를 숨기고 있는 장쩌민과 자칭린은 서로 이용하고 보호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보도에 따르면, 중공 베이징시 당위원회는 자칭린의 승진을 축하하여 국빈관에서 연회를 열었으나 연회석에서 자칭린은 아무 말도 없이 술만 마시면서 혼자말로 “나 자칭린이 승직하려 한 것이 아니라…”라고 중얼거리다가 나중에 취해서 쓰러졌다고 한다. 2002년 11월, 16차 당대표대회 의장석에서 수심에 잠겨 앉아있는 자칭린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장쩌민의 무리에서 몸을 뺄 수 없었던 그의 고민을 잘 보여주었다.

장쩌민은 자칭린을 중공 최고 권력층에 올려놓았지만 위안화사건은 자칭린에게 있어서 영원히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자칭린과 위안화사건의 관계는 또한 중공의 부패 정치의 경전으로 되었으며 부패를 타격한다는 장쩌민의 구호에 대한 가장 큰 풍자로 되었다. 장쩌민은 위안화사건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려 했으나 결국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은 격이 되었다.

2. 청커제의 죽음

2000년 샤먼 위안화 밀수 사건에 대한 수사가 긴장되게 진행되고 있을 무렵, 광시 자치구 주석 청커제(成克杰)가 갑자기 처형당했다.

청커제는 소수민족(좡족) 출신으로 일찍 광시 류저우(柳州)지역 철도국 기술원, 엔지니어, 부국장, 국장을 담임했다. 그는 하층에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위로 올라가 1986년 광시 좡족자치구 정부 부주석이 되었다가 1990년 주석으로 승진했으며 1992년에는 중공 중앙위원으로 되었다. 청커제는 1998년에는 더더욱 관운이 터, 제9기 전국 인대 제1차 회의에 참가하여 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음으로써 부총리급 관리로 되었다 .

그러나 청커제는 2000년 7월 31일,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 법원에서 ‘거액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청커제는 즉시 상소했으나 베이징 고급인민법원은 8월 22일, 원심 판결을 유지한다고 선포했고 최고인민 법원에서 사형 집행을 비준했다. 9월 14일, 청커제는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렇게 되어, 부총리급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불과 한 달 반 동안에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청커제는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래 뇌물수수죄로 처형된 관리들 중 직무가 가장 높고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처형된 관리가 되었다.

9월 21일, 중국 관영 언론에서는 한편의 사설을 발표해 “청커제의 죽음은 직위의 여하를 불문하고 부패 행위를 철저히 타격하려는 정부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설에서는 또 “청커제에 대한 판결과 샤먼 밀수사건을 철저히 수사할 것이라는 성명은 정부가 부패를 청산함에 있어서 빈 구호만 외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고 썼다. 그러나 청커제가 수뢰한 돈은 ‘중국 최대의 탐관오리’인 장쩌민의 아들 장몐헝(江綿恒)이 탐오한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사실 청커제는 처음에 단서를 잡혀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먼저 체포하고 나중에 비열한 수단을 써 증거를 수집했다. 청커제는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핑(李平)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내연녀로 두었다. 1993년 말, 그들 두 사람은 각자 원래 배우자와 이혼하고 결혼하기로 했으며 해외로 이민가기 위해 400만 위안을 횡령했다. 수사팀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으나 리핑에게서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청커제가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는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여자의 질투심은 리핑을 순식간에 무너지게 했다. 그녀는 청커제가 처음부터 자신을 속였다고 여기고 그들의 계획을 전부 털어 놓았다. 그러나 수사팀이 리핑에게 보여준 사진은 컴퓨터로 조작한 것이었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안 리핑은 “내가 청커제를 죽였다! 내가 청커제를 죽였다!”라고 하면서 통곡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리 부패한 관리들을 조사해 낸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정말 말이 아니다. 깡패와 같은 수사에는 반드시 더러운 목적이 따르기 마련이라 이번 사건에도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내막이 숨겨져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인대 부위원장 청커제가 처형된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인대 대표이며 가수인 쑹주잉(宋祖英)에게 좀 지나친 관심을 보여 질투심 많은 장쩌민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커제는 죽으면서도 자신이 누구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밖에, 무엇 때문에 청커제가 위안화사건 법정 재판이 곧 시작되려 하는 시기에 급급히 처형되었는지는 중공 내부에서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3. 대만 대선

2000년에 들어서자 세계 각지 중문 매체들의 초점은 3월에 진행될 대만 총통 대선에 맞춰졌다. 이번 대선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일 3개 당파의 주요 후보는 각각 민진당(民進黨)의 천수이볜(陳水扁), 친민당(親民黨)의 쑹추위(宋楚瑜) 그리고 국민당(國民黨)주석 롄잔이었다. 당시 천수이볜과 쑹추위의 지지도는 아주 비슷했으며 롄잔은 이들보다 좀 낮았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번 대만 대선에 대해 장쩌민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몰랐다. 오래 전부터 장쩌민은 중앙 선전부에 지시하여 민진당을 과격한 대만 독립파로 선전하게 하고 끊임없이 여론을 동원해 공격함으로써 대만 민심에 영향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천수이볜의 지지율은 계속 상승했으며 만약 그가 정말 총통으로 당선된다면 장쩌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력 분쟁을 일으키려 해도 자신이 총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 데다 군부 원로들이 그 기회로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두려었던 장쩌민은 그 방법은 포기했다. 그렇다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장기간 국내 민중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만들어 놓았던 터라 군부와 민중들 앞에서 너무 나약하게 보이면 자신의 권력이 영향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장쩌민은 고민으로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최고 집권자로서 장쩌민은 대만 대선에 반드시 입장을 밝혀야 했으므로 장쩌민은 결국 또 자신의 특기인 쇼를 하기 시작했다.

3월 4일, 장쩌민은 베이징에서 9기 전국인대 3차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에게 연설을 발표하면서 일부러 엄숙하게 “만약 대만 당국이 평화 통일 담판을 무기한으로 거절한다면 일체 가능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대표들에게 대만과 중미관계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쩌민이 말 장난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만약 대만 당국이 평화 통일 담판을 무기한으로 거절한다면”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당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므로 누가 당선되어도 ‘당국’이 될 수 있어 장쩌민은 사실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과 같았다. 장쩌민의 이번 발언에는 중국 대륙의 언론들이 열을 띠고 선전했던 ‘대만 독립 결사반대’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무기한’이라는 것 역시 해석이 불가능했다. 무엇이 ‘무기한’인가, 몇 년을 말하는 것인가, 몇 십년을 말하는 것인가? 총적으로 말해, 대만이 장쩌민이 물러나기 전까지 계속 통일 담판을 거절한다 해도 ‘무기한’이라는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장쩌민은 자신에게 넓은 퇴로를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월 1일, 미국 하원에서 ‘대만 안전강화법안’을 통과시키자 장쩌민은 억지로 강경하게 나오려 해도 용기가 없었다. 1996년, 대만을 겨냥해 진행했던 군사 훈련에서 큰 좌절을 겪었던 기억이 아직 새롭기만 한 장쩌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휘청거리는 장쩌민에게 있어서 미국의 관여는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의 특기는 역시 연극을 꾸며대는 것이었다. 중국 CCTV에서는 그 시기 연일 ‘중국 군대’라는 특집 프로를 방송해 대만에 겁을 주었으며 대만과 마주하고 있는 연해지역에 끊임없이 군인들을 집결시켰다. 그리하여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당선되면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고 중국 국민들도 천수이볜의 당선에 반대해 시위행진을 요구하는 등 불만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베이징 몇몇 대학교 학생들이 가두행진을 신청했으나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사전 준비 없이 형성된 자그마한 시위대열도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장쩌민은 일단 민중에게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기회를 주게 되면 민간에 장기간 쌓여온 불만들이 폭발되어 나올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중공 통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그 자신 역시 거꾸러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난제에 부딪칠 때마다 장쩌민은 주룽지를 찾았다. 주룽지는 장쩌민이 질투하는 상대이면서도 탄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룽지는 우직한 사람이었으므로 장쩌민은 이를 간파해 주룽지를 총알받이로 이용했다. 장쩌민은 이 점을 생각할 때면 그에 대한 질투가 조금 수그러들었으며 남몰래 교활하게 웃었다.

경제를 맡아보고 있었던 장쩌민은 집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므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주룽지는 무뚝뚝한 외모와는 달리 대만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는 사실 온건파였다.

그러나 총통 선거일을 3일 앞둔 3월 1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장쩌민에게 떠밀려 앞에 나선 주룽지는 일부러 화난 척 하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면서 “중국 정부는 대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경한 말투로 경고하고, “대만 민중들은 이 관건적인 역사 시기에 일시적인 충동에 이끌려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때, 한 외신 기자가 “중국 정부는 구체적으로 어느 때, 대만에 대해 무슨 행동을 취할 예정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으나 주룽지는 “며칠 후 두고 보라!”라고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주룽지의 담화가 발표된 후 대만 대통령 입후보자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지지율에서 앞서고 있는 두 사람은 반대하는 입장을 표시했다.

민진당의 입후보자 천수이볜은 핑둥(屛東 역주 – 대만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에서 진행한 선전 행사에서 “대만의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는 중공이 아닌 대만 국민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대만 국민들이 대만 총통을 선거하는 것이지 중공이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독립 입후보자 쑹추위도 같은 날, 타이베이시 중정(中正)기념당 광장에서 민중들에게 “대만 국민들은 절대 위협에 무릎 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입후보자 쉬신량(許信良)도 “주룽지의 발언에는 대만이 반드시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대만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키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쉬신량은 대만 국민들에게 일시적인 감정으로 대응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한편 주룽지에게 통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이 이런 식으로 대만을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쩌민의 예상과는 달리 주룽지의 연설이 발표된 후 대만 국민들의 반발은 더 강렬해 졌으며 특히 젊은이들의 분노를 샀다. 결과 대만 대선은 장쩌민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통일’과 ‘독립’의 대립은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으로 강제로 인심을 바꾸지 못했다. 나중에 천수이볜은 취임연설에서 한 마디 중요한 말을 했다.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전쟁은 원한과 대치만 가져올 뿐, 관계 발전에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다. 중국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어진 정치를 하면 주변사람을 기쁘게 하고, 먼 곳에서도 찾아오게 하며’, ‘불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덕을 닦아 가까이 오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중국인들의 지혜는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진리다” 천수이볜의 연설은 6.4사건을 발판으로 최고 권력층에 기어 올라가 오직 권력 하나만 믿고 강제와 협박을 일삼는 장쩌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18일, 대만 국민들은 야당 민진당 지도자 천수이볜을 총통으로 당선시킴으로써 반세기 넘게 지속된 국민당 집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투표율이 82.7%였던 이번 대만 대통령 대선에서 천수이볜은 3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쑹추위는 37%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했고 국민당의 롄잔 후보는 겨우 23%의 득표율 밖에 얻지 못했다. 이런 선거 결과는 대만 유권자들 및 민진당에 대한 중공의 위협과 공격이 오히려 천수이볜을 총통 자리에 올라가게 했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대만 총통이 정해지자 베이징 중난하이의 등불은 밤이 깊도록 꺼질 줄 몰랐다. 국민당이 그처럼 쉽게 민진당에 정권을 빼앗길 줄 몰랐던 장쩌민은 안절부절 못하며 아래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해댔다.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은 책임을 모두 주룽지에게로 떠밀었고 대만 국민들 가운데서 이미지가 좋았던 주룽지의 인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하여 주룽지는 장쩌민의 이번 꼭두각시극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이 되었다.

이번 선거 결과는 장쩌민 그리고 전체 중공 고위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2000년 3월 19일 저녁, 중공 CCTV 뉴스 프로그램 아나운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새로 당선된 민진당이 극단으로 가지 말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중공중앙 대만사무 사무실의 성명을 전했다. 대선 결과에 대한 수긍은 중공의 속수무책을 나타냈으며 대만 국민들의 민심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설명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 쑨위시(孫玉瓕) 대변인은 기자 회견에서 중국 정부가 관망의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장쩌민은 선거 전에 비해 많이 누그러들었다. 그는 갑자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었으며 주룽지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일도 모두 잊어버렸다. 이번 사건에서 혼자만 나쁜 사람이 된 주룽지는 장쩌민에게 이용되어 연설을 발표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뤼자핑(呂加平, 역주 – 베이징의 학자, 반체제인사)이 중공 지도자와 인대대표, 정협 위원들에게 편지를 써, 장쩌민이 대만 문제를 이용해 양다리를 거친 내막을 폭로했다. 장쩌민은 군부의 신임을 얻기 위해 대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친 동시에, 미국 대통령에게는 군사위 주석을 연임하도록 도와준다면 절대 대만을 진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담보했다.

장쩌민은 항상 대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떠들면서 몇 번은 정말 당장이라도 싸울 듯한 기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모두 쇼였다. 장쩌민은 대만을 자신의 권력에 위기가 올 때마다 꺼내 흔드는 카드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 카드를 뽑아 들고 군부를 흥분시키고는 다음 번 위기를 대비해 도로 집어넣곤 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