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4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4뒷거래로 국토를 판 민족의 반역자  ‘천고의 죄인’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되어버린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네르친스크, 묘가(廟街, 역주 – 현재 러시아의 니콜라예브스크), 외흥안령(外興安嶺), 사할린, 강동(江東) 64개 마을 등을 중국인들은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선조들이 중국 동북에 남겨준 비옥한 땅은 지금은 중국인들 마음속에 영원한 상처와 치욕으로 남아 있다.

1999년 12월 9일과 10일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치욕적인 날들이었다. 이 이틀 동안, 장쩌민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중국 국민들을 속인 채, 베이징을 방문한 러시아 대통령 옐친과 국경선조약을 체결해 홍콩, 마카오처럼 중국으로 반환될 수 있었던 땅들을 모두 러시아에 넘겨 주었다.

다 알다시피, 중-러 양국간의 영토분쟁은 줄곧 한 세기 동안 이어져 왔으며 심지어 60년대에는 무력 충돌까지 일어났다. 때문에 이번 조약으로 만약 양국 갈등이 철저히 해결됐다면 장쩌민은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고 러시아와 전략적 동맹 관계를 발전시킨다고 떠들었던 장쩌민이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인민일보’는 12월 11일자 제1면에 이 조약에 대해 100자 가량의 간단한 소개만 올렸다. 또 장쩌민이 쿤에게 부탁해 출간된 ‘장쩌민평전’에는 이와 같이 큰 사건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으며 옐친과의 회담 자체도 서술되지 않았다. 장쩌민은 왜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평전에 기재하지 않고 옐친과의 회담을 극력 숨기려고 한 것일까?

이유는 바로 당시 협정이 철저한 매국 협정이며 놀라운 내막이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협정에서 장쩌민은 동북 3성 혹은 대만의 몇십 배 면적에 해당하는 100여만 평방킬로미터의 귀중한 영토를 러시아에 넘겨주었고 투먼강(圖們江) 출해구(出海口)를 러시아 땅으로 승인해 중국 동북에서 동해로 열린 출구를 막아버렸다.

장쩌민이 팔아먹은 중국 북방 영토는 몇 개 큰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외흥안령 남부, 헤이룽강(역주 –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이라고 함) 북부 60여 만 평방킬로미터의 외흥안령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우수리강 동부 4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며, 나머지 하나는 17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 역주 – 현재 러시아의 투바공화국) 지역 및 7.64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사할린 지역이다.

이번 국경선조약은 청조 강희(康熙)제 때 중국 관병들이 피로 바꿔온 최초의 평등조약 ‘네르친스크조약’을 부인했고 중화민국과 역대 중공정부가 모두 승인하지 않은 불평등조약인 ‘아이훈조약’, ‘베이징조약’ 등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조약도 체결하지 않은 채 강점한 대규모의 땅을 모두 러시아의 소유로 하는데 동의했다. 그중에는 1953년, 유엔에서 표결을 통해 중국 영토로 지정한 당노오량해 지역(구이저우성 크기의 면적)과 아이훈조약에서 중국 영토로 승인한 강동 64개 마을(3,600평방킬로미터로 홍콩의 3배 면적) 및 금나라 때부터 중국 관할 지역으로 되었고 네르친스크조약에서 명확하게 중국 땅으로 승인한 사할린(7.64만 평방킬로미터로 대만의 2배 면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역사상 역대 국가들은 모두 러시아의 침략을 전력으로 저지했고, 중화민국 이래 역대 정부도 모두 러시아와의 불평등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중공 정부 역시 “중국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중화인민공화국도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에게 정해준 국경선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측이 이와 같이 나오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우선, 비엔나 ‘조약법협약’ 제52조에서는 “위협을 가하거나 무력을 사용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이 러시아 및 구소련과 체결한 ‘아이훈조약’, ‘베이징조약’ 및 ‘중-러 감분서북계약기(勘分西北界約紀)’는 모두 무력 위협을 가해 체결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므로 법률적인 효력이 없었다. 예를 들면, 1894년 갑오전쟁이 실패한 후 청나라 조정은 일본의 위협으로 ‘마관(馬關)조약’을 체결하고 대만과 펑후(澎湖)열도를 할양했으나 이는 불평등 조약이었으므로 일본이 패한 뒤, 중화민국 정부가 다시 소속권을 가졌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는 과거 러시아와 소련이 빼앗아 간 땅을 모두 떳떳하게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다른 한 이유는, 구소련 레닌정부도 앞에서 말한 지역들을 중국에 귀속시킨다고 선포하고 정식으로 돌려줄 준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법률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은 불평등 조약 없이 러시아에 강점된 당노오량해 지역, 강동 64개 마을, 사할린 등의 지역을 법에 따라 충분히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되돌려 받기는커녕 두 손으로 러시아에게 헌납했으므로 내막을 아는 중국인들은 장쩌민을 ‘현대판 매국노의 대표’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더욱 치를 떤 것은, 이번 매국 조약으로 중화민족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조약으로 잃어버린 넓고 비옥한 땅에는 큰 면적의 원시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광물 자원과 석유 자원이 있어 중화민족의 미래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귀중한 재산이었다. 중국은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다지만 원시사막과 철저히 사막화 된 토지가 33%, 수토 유실이 심각한 토지가 38%를 차지해 상태가 비교적 좋은 국토는 1/3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구 밀집 지역은 이미 중부 황하 유역으로부터 동남 연해, 양쯔강 유역으로 이동해 더 이상 이동할 데가 없게 되었다.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농경지는 계속 감소되고 환경도 계속 파괴되고 있어 인구에 대한 중국 국토의 부하는 이미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쩌민은 중국의 생존과 발전의 희망이었던 넓고 비옥한 땅을 팔아먹어 사실상 중화민족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사람들은 장쩌민이 왜 매국 조약을 체결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는 제2장에서 이미 그 답안을 제시했다. 장쩌민은 소련 전직 비밀 첩보국(KGB) 극동 지역 스파이출신으로, 진상이 밝혀지면 장쩌민 자신은 물론 공산당도 즉시 무너지고 말기 때문에 러시아의 입을 막기 위해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중공은 진상을 안 뒤에도 장쩌민의 죄를 공개할 수 없었다.

영토 문제는 원래 복잡한 역사적 갈등, 민족 감정과 한데 엉켜있어 쉽게 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매국은 장쩌민이 저지른 또 하나의 피치 못할 죄행이므로 이 책에서는 단독적인 장(章)을 만들어 중러 영토 갈등의 역사 배경, 국제법, 중국에 미친 영향, 장쩌민이 영토를 팔아먹은 배후의 원인 및 가능한 해결방법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려고 한다. 독자들은 여기서 장쩌민이 개인 이익을 위해 원래 중국이 떳떳하게 되돌려 받을 수 있었고 구소련도 반환에 동의했으며 중국의 미래에 중요한 전략적 의의가 있는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함으로써 중국에 치욕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미래에 큰 후환을 심어 놓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1. 영토 주권

역사상 러시아는 유럽 국가로 중국과 인접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차르 시대부터 러시아 제국은 영토 확장을 시작했으며 중국 동북 헤이룽강 유역의 야크사 등지를 강점하고 도처에서 살인방화하고 강간과 약탈을 일삼았다. 1685년, 강희제는 빼앗긴 땅을 수복하기 위해 야크사에 두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끝내 러시아 군을 축출했으며 1689년 9월 7일,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서는 아르군강, 케르비티강 두 강과 산맥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이는 중러 양국이 대등한 조건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법률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장쩌민의 손에서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1840년 이후, 청나라 조정이 부패하고 무력해지자 러시아 제국은 또 다시 침입을 시도했다.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이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들을 보면 배상금 대신 영토를 떼어준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처럼 많은 영토를 약탈해간 국가는 없었다. 특히 심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기타 국가들은 강점한 영토 대부분을 모두 중국에 되돌려 주었지만 소련만은 한 치의 땅도 되돌려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잠식하려고 애썼다.

러시아 제국은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 총 17개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영토를 약탈한 조약은 ‘아이훈조약’, ‘베이징조약’과 ‘중러감분서북계약기’ 이 세 조약으로, 합치면 100만 평방킬로미터를 초과한다.

아이훈조약

1856년 10월(함풍[咸豊] 6년), 제2차 아편전쟁이 발생했다. 1858년 5월, 영-프 연합군은 다구커우(大沽口, 역주 – 톈진 해안에 위치한 전략 요지)를 점령해 톈진, 나아가 베이징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동(東)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예프 아무르스키 공작은 청나라 조정이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진 기회에 코삭(역주 – 러시아의 소수민족) 군대를 이끌고 아이훈성 밑까지 쳐들어 왔다. 그리고 중국을 도와 영국군을 물리친다는 명의로 두 척의 군함의 호송 하에 아이훈성 내에 진입해 청나라 장군 혁산(奕山)과 담판을 진행했으며 네르친스크조약을 폐지하고 헤이룽강 북부와 우수리강 동부 지역을 강점했다. 무력을 앞세운 러시아 제국의 위협으로 혁산은 결국 굴복하여 28일, 무라비예프와 ‘아이훈조약’을 체결했다.

‘아이훈조약’은 3조로 이루어져, 헤이룽강 북부, 외흥안령 남부 60만 평방킬로미터의 중국 영토를 러시아의 영유지로 하고, 중국은 징치리강(精奇里江, 현재 러시아의 제야강) 상류 동남쪽의 작은 지역(나중에 강동 64개 마을로 불림)에서의 영주권과 관할권을 가졌으며, 우수리강에서 바다에 이르는 연해주를 양국 공동 관리하에 두도록 정했다. 그리고 원래 중국내 하천인 헤이룽강과 우수리강에서 중국과 러시아 선박만 드나들 수 있게 제한했다.

강조할 것은, 당시 청나라 정부는 아이훈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혁산 등의 사람들을 처벌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베이징조약

1860년(함풍 10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 서부 외곽을 점령하자 함풍황제는 후비(後妃)와 가까운 친척, 신하들을 데리고 열하행궁(熱河行宮, 현재의 허베이성 청더[承德] 외곽)으로 달아났고 동생 공친(恭親)왕 혁흔(奕欣)이 베이징에서 연합군과 협의를 보았다. 혁흔은 화해하는데 급급해 주중 러시아 대사 이그나치예프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그나치예프는 이 틈을 타 청나라 정부에 조건을 내놓았다. 11월 14일, 혁흔은 핍박에 못 이겨 ‘베이징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조약’은 ‘아이훈조약’을 승인한 외, 우수리강 동쪽 약 4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양국이 공동 관리하던 데로부터 러시아 소유로 만들었으며 중러 서부 국경선을 다시 확정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백만 평방킬로미터의 동북 땅을 잃었으며 우수리강에서 투먼강에 이르는 약 40만 평방킬로미터의 연해지역도 러시아 땅으로 귀속되어 동해로 향한 출해구를 잃어버렸다.

중러감분서북계약기

19세기 초부터, 제정 러시아는 중국 서북 지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도광(道光) 황제 때, 제정 러시아는 바이칼호 동남의 켈라탈레강, 일리하 등 7개 강 지역을 무장 침략했고 함풍 4년(1854년)에는 또 아라무투를 강점하고 일리하 하류 일대를 차지했다. 1864년(동치[同治]3년) 9월, 제정 러시아군이 국경을 압박하고 있는데다가 내부에서는 신장 위구르족들이 청나라 조정을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청나라 조정은 러시아와 신장 타청(塔城)에서 담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정 러시아의 무력 위협과 정치적 위협으로 청나라 조정은 10월 7일 ‘중러감분서북계약기’를 체결했다. ‘베이징조약’과 ‘중러감분서북계약기’를 통해 제정 러시아는 중국 서부 국경지역 바이칼호, 자이산호, 이식쿨호와 그 주변의 광활한 토지 총 44만 평방킬로미터를 차지했다.(주 – 소련이 해체된 후, 이 부분 영토는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즈스탄에 속하게 되었다)

기타 불평등 조약

동치(同治) 10년(1871), 제정 러시아는 또 다시 청나라 조정을 협박하여 ‘중러일리조약’을 채결했고 광서(光緖) 8년부터 10년 사이에는 청나라 조정을 강박해 5개 국경선 의정서를 체결, 중러 서부 국경선을 다시 확정하고 타청 동북 지역과 일리, 카스가얼 서쪽 총 7만여 평방킬로미터의 중국 땅을 차지했다.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강점한 영토

제정 러시아는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 조정, 북양(北洋)조정을 핍박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는 방식으로 중국 영토를 강점한 외, 조약에서 중국 영토로 승인한 지역조차 무력으로 병탄했다.

1900년 7월 24일, 제정 러시아는 중국에서 ‘청나라를 되살리고 제국주의를 소멸하자’는 구호를 들고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운동을 구실로 17만 대군을 출동해 ‘아이훈조약’에서 중국에 속한다고 규정한 강동 64개 마을을 포위하고 16만 주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당시 여자들은 강간을 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불에 타 죽었으며 도망간 소수 사람들도 헤이룽강까지 추격해 온 러시아군에 의해 사살되어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러한 피눈물의 역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바로 제정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였다. 그러나 장쩌민은 니콜라이 2세를 위해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 옐친에 대해 한마디 질책이나 항의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먼저 다가가 목을 끌어안아 옐친조차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 추태는 이미 외신 기자들에 의해 사진으로 남겨졌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은 심지어 러시아에 가서 수천 만 중국 백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코삭인들을 직접 추모하고 경의를 표시했으며 ‘의정서’를 통해 강동 64개 마을을 러시아에 할양했다.

헤이룽강 출해구 동쪽에 위치한 사할린은 중국 최대의 섬으로 동쪽과 북쪽은 오호츠크해이고, 서쪽은 타타르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은 라페루즈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인접해 있다. 중국은 금나라 때부터 사할린을 관할하기 시작했고 1689년에 체결한 ‘네르친스크조약’에서도 사할린섬이 중국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사할린섬은 면적이 7.64만 평방킬로미터로 대만 면적의 두배에 해당한다. 1789년, 제정 러시아 원정군은 사할린을 침략해 원주민인 선비족 허저인들을 쫓아내고 섬의 풍부한 탄광과 유전을 독차지했다.

외몽고 서북부에 위치해 있는 당노오량해는 사얀산맥과 알타이산맥 사이의 약 17만 평방킬로미터의 좁은 지대로 구이저우성만큼 크다. 러시아는 지난 세기 20년대에 이 지역의 독립을 꾀하고 1944년에는 자국 소유로 만들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 중화민국정부에서부터 중공 마오쩌둥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로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당노오량해 지역이 합법적으로 독립했음을 중국 정부는 승인하지 않았으며 1953년 유엔대회에서도 이 지역이 중국영토임을 승인했다.

역대 중공 정부의 태도

영토문제는 중국으로 말하면 지극히 민감한 문제로 역대 지도자들은 모두 경솔하게 역사상의 불평등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비엔나조약법협약’에 따르면, 무력 위협으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은 합법성이 없다. 그러므로 이상의 불평등 조약을 역대 중국정부는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1972년 마오쩌둥은 정부 명의로 구소련 및 주중 소련 대사관에 ‘9개불평등조약론’을 보내, 러시아가 중국에 강요한 17개 불평등조약 중의 9개를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 중국이 유엔에 가맹한 후, 마오쩌둥은 또 유엔에도 이와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은 우리의 영토를 너무 많이 점령했다. 그중에는 제정 러시아와 소련 홍군이 점령한 것을 포함한다. 그들이 점령한 영토는 너무 많아 확실하게 조사해 낼 방법이 없다. 국민당 정부와 청나라 조정은 이러한 토지의 불합법성에 대해 나보다 더 훨씬 많은 성명을 발표했다. 내가 지금 국제법을 이용해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토지는 역대 중국 정부 중 가장 적은 것으로 모두 중국 땅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지역이다”고 말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소련의 약탈은 계속 이어졌다. 1978년 10월, 중공 대변인은 소련이 1960년부터 1969년까지 185평방마일의 중국 영토를 약탈했고,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신장 일리에서 1080평방마일의 영토를 약탈했으며, 분쟁이 있는 영토를 제외하고도 3475평방마일 영토를 강점했다고 밝혔다.

1979년 9월 29일, 중국은 중러 양국이 신장 20개 지역에서 분쟁이 있는 영토가 11600평방마일에서 29696평방마일에 달한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8일, 리센녠(李先念)은 중러 국경에 분쟁이 있는 지역이 9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며 전부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다고 밝혔다.

역사를 간략하게 되돌아 본 결과, 제정 러시아에서 소련공산당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줄곧 여러 가지 수단으로 중국의 영토를 약탈해 왔으며 중화민국정부에서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조약과 점령지의 합법성을 승인하지 않았다.

2. 강점한 토지의 반환을 선포한 적이 있는 구소련

제정 러시아와 10월 혁명후의 구소련은 줄곧 중국에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소비에트 공산 정권이 건립한 초기에는 예외였다. 당시 정권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소련은 힘이 약해져 있어 수시로 서방 강국에 의해 소멸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레닌은 중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동안 강점한 토지를 되돌려주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레닌은 1919년, “러시아 제국이 중국 만주와 기타 지역에서 침략으로 취득한 땅을 모두 포기한다”고 중국에 선포했다. 1920년 9월 27일, 구소련 정부는 또 “러시아 역대 정부가 중국과 체결한 일체 조약은 전부 무효이며 약탈한 중국 영토, 중국 내에 있는 일체 러시아 조차지, 제정 러시아와 러시아 자산계급이 폭력으로 중국에서 약탈한 재물을 모두 무조건 중국에 되돌려 준다”고 선포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정부 대중국 선언’을 참조)

레닌이 이 약속을 실천하지 못한 채 죽자 정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우선 그의 ‘대중국선언’을 부인하고 이 선언에 서명한 외교인민위원부 부부장 레만 칼라한을 ‘매국노’로 몰아 총살했다.

스탈린이 승인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이 선언은 정식 체결된 합법적인 문서이므로 양국은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장쩌민은 권력을 장악한 후, 이 선언을 부인하고 반환 받아야 할 영토를 비밀리에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3. 담판 없이 서명

개혁 개방 후, 중국은 줄곧 지린성 투먼강 출해구를 개방하려 했다. 이것은 지린성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 여부를 결정짓는 큰 문제였다.

이 계획을 하루속히 실행하기 위해, 지린성 정부는 몇 년 동안 거금을 들여 훈춘(琿春)시와 주변 지역의 도로, 철도 등 기초 시설을 개선하고 러시아와도 여러 차례 담판을 진행했다. 투먼강을 할양한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기에 3년 동안의 노력으로 러시아 연해 지역 정부는 중국과 합작하여 항구를 만드는 계획에 성의를 보였다. 담판이 한창 순조롭게 진행되어 곧 중요한 결정 단계에 들어서려고 할 때, 장쩌민은 배후에서 모욕적인 ‘중러동부국경선의정서’에 서명하여 중국측 대표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어 투먼강 출해구는 완전히 막히다시피 되었고 출해구를 개방하려던 지린성 민중들의 오랜 기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중러 투먼강 출해구 협력문제 담판에 여러 차례 참석한 중국측 대표는 분개하여 “담판 때마다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력해왔지만 막바지 단계의 중요한 회의에서(장쩌민이 러시아와 영토 할양조약을 체결한 시간과 일치)러시아 대표가 긴급 전화를 받고 갑자기 합작을 거절하면서 담판이 무산되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이 중국 대표는 나중에야 그 영문을 알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자국 대표들에게 이 사실을 즉시 알리지 않았으나 러시아 정부는 즉시 이를 알렸던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쩌민이 그처럼 흔쾌히 모욕적인 ‘의정서’에 서명한 데 대해 러시아 대표들도 매우 놀랐다고 한다.

지린성이 5년 동안 인력, 물력, 재력을 투입해 기세높이 추진해 온 출해구 개방 전략은 이렇게 되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2000년 12월, 중공 지린성 당위원회에서 내놓은 몇 만자짜리 ‘지린성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10차 5년 계획’에는 출해구 개방에 대한 멋진 전략 계획을 찾아볼 수 없었다.

4. 장쩌민은 매 한 사람의 손에서 한 무의 토지를 빼앗아 갔다

중국이 1990년에 제정한 ‘조약체결법’ 제7조에서는 국가주석이 직접 서명해 체결할 수 없고 반드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의 비준을 거쳐야 하는 6가지 조약을 규정했다. 그중 첫 조항은 ‘우호합작조약, 평화조약 등 정치성 조약’이고 두 번째 조항은 ‘영토와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이었다.

이 규정은 이해하기 결코 어렵지 않았다. 민중의 투표가 아닌, 중공 원로들의 지명으로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장쩌민은 13억 중국 인민을 대표해 조약에 서명할 할 권리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의 토지는 전국민의 소유로 되어있지 장쩌민 개인 소유가 아니므로 이렇게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더더욱 전국 국민에게 알려야 하고 필요시 국민 투표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들은 장쩌민이 체결한 중러 국경선 조약을 모르고 있으며 지금도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중공이 환경 파괴를 무시한 채 경제 발전만 강조하는 바람에 중국 농경지 면적은 지난 80년대에 인구 당 2무(畝)이던 데로부터 현재 인구 당 1.4무로 감소했고 게다가 계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장쩌민이 할양한 100만 평방킬로미터의 토지는 대부분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노래 가사 “나의 집은 동북 쑹화강(松花江)에 있어요, 거기엔 산림, 탄광이 있고, 들판을 가득 메우는 콩과 수수가 있어요”는 동북 3성에 대한 묘사이다. 그러나 장쩌민이 할양한 토지는 그보다 더 비옥해 흙에서 기름이 흐를 지경이라고들 말한다. 1평방킬로미터를 1500무로 계산한다면 장쩌민은 매국 조약으로 13억 중국인 매 한사람의 손에서 한 무의 비옥한 땅을 빼앗아 간 것과 같다.

5. 장쩌민이 중국에 조성한 국가 안보의 후환

중국 근대의 위대한 애국자이며 민족 영웅인 임칙서(林則徐)는 도광(道光) 황제에 의해 신장에 유배된 후, 거기서 제정 러시아의 중국 침략 야심을 알게 되었고 임종하기 몇 달 전, 중국 국민들에게 “중국의 궁극적인 우환거리는 바로 러시아다! 나는 늙었으니 당신들이 반드시 이를 알고 대비하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불행하게도 매국노 장쩌민 때문에 우리 이 한 세대는 결국 임칙서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은 국경선 500킬로미터 안을 비무장 지대로

장쩌민은 군사위 주석 신분으로 중국 변방군에게 국경선 500킬로미터 밖으로 물러나 방어 시설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지크스탄, 키르키즈스탄 4개국 비무장 지대는 국경선에서 10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으며(러시아 연해 몇 개 지역은 제외)비무장 지대 밖에는 총 13만 병력(그 중 러시아군이 12만 명), 3900대의 탱크(그 중 90%가 러시아 소유), 5800대의 장갑차(그 중 90%가 러시아 소유), 4500문의 대포, 290대의 전투기와 434대의 헬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비밀은 2002년 러시아신문사 군사평론가 빅토르 리토프킨이 폭로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 국민들이 “우리가 손해 봤다”고 정부에 불만을 표시하자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점을 해명하기 위해 문장 한 편까지 썼다. 리토프킨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러시아 측은 100킬로미터 밖에서 출격할 수 있지만 중공 군대는 500킬로미터 밖에서 출격해야 하므로 러시아는 손해 본 것이 아니었다.

리토프킨은 그의 글에서 “군사 영역의 상호 신임을 강화하기 위해 베이징은 전무후무한 조치를 취해 일방적인 양보를 했다. 즉, 이 몇 개 국가와의 국경에서 500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지역을 비무장 지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기타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은 100킬로미터 범위만 비무장지대로 만들기로 규정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글에서 비웃는 말투로 “중러 국경 비무장지대의 범위가 다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즉, 우리는 중국처럼 많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며… 중국은 우리의 이런 상황을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100킬로미터 범위의 비무장지대는 모두 산림과 황야이므로 거기서 물러나도 손해 보는 것이 없지만 중국의 500킬로미터 비무장지대에는 거금을 들여 건설한 군사 시설들이 매우 많아 철거할 경우 거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장쩌민은 왜 대등한 조건에서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일까? 러시아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하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 중국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설사 돈이 있다 해도 이처럼 모욕적인 조약은 체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리토프킨의 글은 러시아인들에게 진실한 내막을 알려주었다. “동유럽과 발트해 연안 3개국에서 철수할 때의 군비에 비하면 중국 국경지대 러시아 주둔군은 거의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은 것과 같다.”

이렇게 러시아와 구소련 각 가맹공화국 10여 만 주둔군이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국경선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은 중국군 방어 시설을 오히려 철거하게 했다.

당시 국경에서 철수해야 했던 중국 군인들은 이 조약에 반발하여 명령 집행을 거부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환심을 사려 했던 장쩌민은 진상을 알고 있는 북방 변방군을 푸젠성으로 급급히 전부 이동시켰다. 장쩌민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일까? 쿤이 그의 ‘장쩌민평전’에서 이 문제에 간접적으로 대답했다.

쿤은 1989년부터 1996년까지의 사실을 적은 제7장 ‘지도자의 위캄에서 당시 장쩌민의 위험한 처지에 대해 서술했다. 이 장절의 요약 부분에는 “장쩌민은 일련의 전략으로 부단히 상승하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총 참모국 장교와 각 지방 부대 사령관들이 참여한 국방 전략 연구 비밀회의를 소집했는데 실제 목적은 그 당시 빈번했던 인사 변동으로 군부의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썼다.

이 장절의 요약 부분은 당시 장쩌민의 두려운 마음을 잘 폭로해 주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수시로 자신을 끌어 내리려 했기 때문에 군 내부에서 있는 힘을 다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인들을 고위급 장교로 봉하고 그들을 부패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군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장쩌민은 러시아 등 인접 국가들이 외부에서부터 자신을 지지해 주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 장쩌민이 비밀리에 불평등한 비무장지대를 설립하는 데 동의한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었다.

지연(地緣) 정치

지리적인 관계로 러시아는 항상 중국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합작, 교류 등의 명의로 중국영토를 잠식하고 정보를 캐낼 기회를 노렸다. 청나라 광서 22년(1896년), 제정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을 공동 방어한다는 명의로 청나라를 협박하여 불평등 조약 ‘중러비밀협약’ 또는 ‘방어동맹조약’을 체결해 시베리아에서 중국 헤이룽장성, 지린성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중동 철도 부설권을 가졌다. 그들은 ‘철도를 이용해 침략한다’는 책략을 세우고 철로 경유지들을 모두 자신들의 세력 범위에 넣으려 했으며 나아가 중국 동북3성을 병탄하려는 야심을 실현하려 했다. 나중에 이 음모는 1904년의 러-일 전쟁으로 파멸되었다.

1945년 초,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끝나가고 있을 무렵, 일본을 조속히 투항하게 하기 위해 구소련과 미국, 영국 정상들은 소련 얄타에서 회의를 열었다.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게 중국 동북에 출병할 것을 독촉하자 스탈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화민국 정부를 협박해 외몽고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모스크바에 담판하러 간 장징궈(蔣經國)가 스탈린에게 “외몽고 면적은 크지만 인구가 적고 교통도 불편하며 아무런 자원도 없는데 왜 외몽고의 독립을 요구하는가?”라고 묻자 스탈린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전적으로 군사적 전략을 고려해 그 지역을 가지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지도를 꺼내 가리키면서 “외부 침략군이 외몽고에서 소련으로 진격할 경우, 시베리아 철도만 끊어 놓으면 소련은 단번에 끝장난다”라고 말했다.

‘인민일보’는 2001년 7월 31일 이런 한편의 문장을 올렸다. 1958년 7월, 구소련 주중 대사 으젠느는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등 중공 지도자들에게 소련의 제안을 전달했다. 구소련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함대 활동이 제한받고 있지만 중국은 긴 해안선이 있으니 양국이 연합함대를 만들어 함께 미국에 대항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제안에 마오쩌둥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 시기 소련이 중국에 공동으로 관할하는 장파 라디오방송국을 세우자는 요구를 제기한 사건까지 겹쳐 마오쩌둥은 매우 불쾌해 했다. 마오쩌둥은 흐루시쵸프에게 직접 베이징에 와서 이 일을 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1958년 7월 31일, 소련공산당 중앙제1서기 흐루시쵸프는 중국을 방문하여 그날 바로 마오쩌둥과 회담을 진행했다. 마오쩌둥이 ‘연합함대’가 무엇인지 해석하라고 요구하자 흐루시쵸프는 말을 더듬었다. 마오쩌둥은 흐루시쵸프에게 한 함대를 두 국가가 지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러시아 신문사는 2002년 12월 18일 보도에서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전 국방부장 이고르 세르게예프가 1997년 베이징 방문을 앞두고 21세기 러시아의 잠재적인 적수가 중국이라고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러 양국의 상호 신임 분위기는 조금도 영향 받지 않았다. 베이징은 그의 이 발언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술책으로 받아들였다. 즉, 그가 자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더 많은 군비를 얻어 내려는 발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중국을 친구로 대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21세기 러시아의 잠재적인 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전혀 방비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계속 러시아와 국경에서의 군축협정을 체결하고 중국 변방군을 옮겨진 국경선에서 또 뒤로 퇴각하게 했으며 500킬로미터 범위를 비무장지대로 만들어 두진(杜金)교수의 서적 ‘기본 지연(地緣)정캄 중에서 러시아가 요구한 완충 지대를 현실화시켰으며 국가안보는 뒤로 한 채 러시아에 일방적인 편의만 제공해 주었다.

6. 매국 조약은 중국 생존의 길을 끊어 버렸다

매국 조약이 중화민족에게 준 상처는 현재 전혀 가늠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이미 민족 존엄, 국가 주권, 영토 완전의 범위를 훨씬 초과해 중화민족의 미래에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 2000년 12월 28일, 한 유명 작가는 ‘민족 생존의 길을 끊어버린 중러국경선신조약’이라는 문장을 써, “100년 이래, 중국에 이보다 더 큰 재난이 없을 것이다”라고 논평했는데 이는 절대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중국 국토는 96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국가에 속한다고 하지만 인구 당 경작지 면적은 1.4무밖에 되지 않아 세계 평균 수준의 3분의 1, 미국의 9분의 1에 불과하며 많은 지방은 자연 조건이 매우 열악하다. 서쪽은 고원이고 서북은 황량한 사막이며 북쪽은 초원과 사막이고 동남쪽은 바다이기 때문에 생존 조건이 비교적 좋은 국토는 국토 총 면적의 29%인 300만 평방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NO’를 외쳐대고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고 떠들고 있지만 현재 중국 정부는 토지, 에너지, 담수, 광산과 산림 자원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한 인구 밀도 때문에 벌써부터 골치 아파하고 있다. 이처럼 생존할 공간마저 문제가 되는데 더 이상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1999년 중앙 경제 사업회의에서 중국정부는 서부 대(大)개발 전략을 제기했다. 표면상 정부는 서부 지역의 봉폐되고 낙후한 국면을 개변하고 동서부 발전의 불평등한 국면을 타개하기위해 서부에서 생태 환경건설, 기초시설 건설과 특색 산업을 중점으로 발전시킨다고 하고 있으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30년대 후환융(胡煥庸)선생이 중국 인구 분포 ‘후환융선(헤이룽강 아이훈에서 윈난 텅충(騰沖)에 이르는 중국 동서부 인구 밀집지역과 희소지역을 가르는 분계선)’을 발견한 이래, 중국인구 분포 구도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후환융선 서부 면적은 전체 중국 면적의 64%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전체 인구의 5.6%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반면에, 후환융선 동부 면적은 전체 중국 면적의 36%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전체 인구의 94.4%를 차지해 중국 사회의 중심이 동남으로 기울어진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반세기 동안, 중국 인구 중심은 줄곧 동남 연해 100여만 평방킬로미터의 비좁은 지역에 놓여 있었다. 인구 증가, 과잉 개발과 환경 악화 등 요소로 중국 인구 중심과 문화 중심은 계속하여 생존 여건이 비교적 좋은 동남부로 쏠리기만 했다. 그러나 현재 동남 연해 지역은 더 이상 개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부 개발은 정말로 중국으로 하여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국무원에서 이 전략을 제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인민대학 인구 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중국 인구 분포와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서부 지역은 대부분 고원, 사막이고 개간할 수 있는 토지가 적을 뿐만 아니라 연해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중국 서부 지역의 인구 용납 능력은 중동보다도 못하다… 중국 서부 지역의 수토 유실, 사막화도 중동보다 훨씬 심각하다… 서부 지역은 인구 밀도가 적어 보이지만 사실 인구 부하를 심각하게 초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부 지역은 중동 인구 밀도를 초과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낮춰야 한다”라고 발표했다. 이처럼 중국은 서부로부터 인구를 이동해 감소시킬 것이 요구되지만 동부는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는 태평양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이제 어디로 인구를 이동해야 할 것인가?

유일한 답안은 바로 동북 지역이다. 중국이 만약 정말로 국제법과 평화담판을 통해 잃었던 토지들을 수복할 수 있다면 21세기의 중화민족은 그래도 유망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훈조약’과 ‘베이징조약’으로 잃은 100만 평방킬로미터의 토지는 동북 3성 면적에 달한다. 선조들이 남겨 놓은 외흥안령 남부, 헤이룽강 북부 및 우수리강 동부 지역은 원시 산림과 비옥한 농경지로 중화민족 부흥의 유일한 출로라고 할 수 있다.

한 민족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 수단인 토지가 턱없이 부족한 10여억 중국 국민의 미래는 정말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장쩌민은 국민경제 발전과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이 걸린 넓은 땅을 사인펜을 한번 놀려 러시아의 합법적인 소유로 만들었는데 이는 분명히 중화민족 역사 이래 최대의 매국조약이라 할 수 있다.

7. 장쩌민이 기타 국가에 할양한 영토

중공 정부는 베트남, 인도, 기타 구소련 동맹국들과의 영토 분쟁에서 모두 밀실거래를 통해 국가 이익을 팔았기에 여태 조약 내용을 국민들에게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장쩌민은 타지크스탄, 키르키즈스탄 및 카자흐스탄과 여러 개 국경선 협정을 통해 분쟁이 있는 국토를 거의 전부 포기했다. 예를 들면, 장쩌민은 타지크스탄 라흐마노프 총통과 체결한 조약을 통해 파미르 지역과 인접한 27,000평방킬로미터의 땅을 타지크스탄에 할양하고 1000평방킬로미터만 중국 소유로 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타지크 통신사가 보도를 내보내서야 해외에서 폭로될 수 있었다.

장쩌민은 1996년 필리핀을 방문했을 당시 남사군도(南沙群島)의 주권 분쟁을 중지하고 공동으로 경제 개발을 진행하자고 주동적으로 제안했다.

1996년 11월 말, 인도를 방문한 장쩌민은 또 ‘중-인 국경실제통제선 무장지역에서의 상호신임조치협정’을 체결해 인도와 현재의 통제선에서 국경선을 확정하게 만들었다. 이는 ‘맥하흔라인’을 승인하여 히말라야산 남쪽 기슭 9만 평방킬로미터의 비옥한 땅을 포기한 것과 같았다.

1999년 12월 30일, 장쩌민은 ‘중국-베트남 육지국경선조약’을 통과시켜 수백 명 장령들이 피를 흘리며 지켜낸 윈난(雲南) 라오산(老山)과 광시(廣西) 파카산(法卡山)을 베트남에 할양함으로써 마리포(麻栗坡)의 애국 충혼들의 뼈가 영원히 베트남에 남게 만들었다.

이밖에, 여기서 우리는 댜오위다오(釣魚島 역주 – 일본명 센카쿠제도)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려 한다.

댜오위다오 문제는 매우 애매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댜오위다오는 당연히 중국 영토이다. 그러나 대만과 중국이 모두 댜오위다오의 영토 주권을 주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청나라는 중일 갑오(甲午)전쟁에서 패배한 후 핍박에 의해 ‘마관(馬關)조약’을 체결하고 대만과 부속섬들을 일본에 주었다. 이때, 댜오위다오는 대만섬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 일본에 넘어갔다. 1945년, 일본이 전패하여 ‘마관조약’이 실효함에 따라 일본은 대만과 팽호열도(澎湖列島)를 중국에 되돌려 주었지만 댜오위다오만은 자국 오키나와현에 귀속시켜 결국 오늘날의 영토 분쟁에 도화선을 심어 놓았다.

댜오위다오 자체는 몇 개 황량한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고 면적도 겨우 6평방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1992년 ‘유엔해양협약’에 따르면, 이 섬에는 74만 평방킬로미터의 ‘해양경제 전속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1967년 유엔은 이 지역 바다에 800억 배럴에 달하는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탐측해 냈다. 국제 원유 시장가격에 따라 배럴당 50달러라고 쳐도 그 가치가 4만억 달러에 달해 중국 GDP의 4배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물자를 두고, 정말 민족의 대계를 생각한다면 정부는 우선 억지로라도 자신의 소유로 하고 볼 일이었다. 역사상에서 규정한 ‘우선권’이나 ‘카이로선언’, 그리고 ‘포츠담선언’, ‘중일연합성명’에 비춰보아도 중국이 댜오위다오 주권을 소유하는 것은 합법적이고 이치에 맞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웃에 주면 주었지 하인에게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쟁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국(대만)의 노력을 늘 비방하고 견제했다.

그러나 댜오위다오는 대만에 부속된 섬이기 때문에 장쩌민은 대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되었다. 게다가 대만은 댜오위다오에 대해 중공보다 더 강경하게 나왔다. 대만 국방부 천자오민(陳肇敏) 부부장은 2003년 초, 입법원에서 심지어 “댜오위다오는 대만 영토로, 만일의 경우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만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명확히 표명했다.

때문에 대만에 대한 주권을 이야기할 때마다 장쩌민은 대만에 부속된 야오위다오를 함께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댜오위다오를 말할 때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장쩌민은 대만에 대해서는 무력 사용을 포기한 적이 없지만 경찰과 헬기를 동원해 중국 땅이나 다름없는 댜오위다오에서 중국 국민을 단속한 일본에 대해서는 대변인을 통해 “평화적 담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한다”고 말했다.

2003년, 댜오위다오 수호 인사들이 ‘9.18사변’을 기념하기 위해 50명 규모로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활동을 할 것을 신청했지만 장쩌민 수하의 경찰은 ‘사회 질서를 교란’한다는 구실로 허락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언제나 국민들을 속이고 인민대표대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평등조약의 방식으로 분쟁이 있는 영토를 전부 ‘양보’하여 매국노의 본색을 드러냈다. 장쩌민은 애국주의, 민족주의, 반중국세력, 포위공격 등을 떠들어 댔지만 사실 가장 큰 반중국세력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8. 장쩌민은 주동적으로 나라를 팔았다

1999년 말 매국조약을 체결할 때, 장쩌민은 이미 당정군 3권을 손에 쥔 최고 집권자였다. 그러므로 이 조약의 체결은 전적으로 장쩌민 한 사람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장쩌민은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설사 당내 원로들과 인대의 허락을 받았다 하더라도 역사의 죄인으로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명을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장제스는 스탈린이 중국 동북에 군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소멸해 줄 것을 희망했다. 당시 모스크바에 담판하러 간 사람은 장징궈(蔣經國)와 쑹쯔원(宋子文)이었다. 스탈린은 한사코 외몽고에서 전 지역민 투표를 통해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할지 여부를 결정하게 하자고 했다. 장제스는 나중에 할 수 없이 쑹쯔원에게 협의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외교부 부장이었던 쑹쯔원은 이 전보문을 받자 즉시 사직했다. 협의서에는 외몽고에서 투표를 진행하게 하자고 되어 있지 외몽고를 할양하라고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는 협의서에 서명하는 즉시 민족의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협의서에 서명한 사람은 쑹쯔원으로부터 외교부장직을 인계받은 왕스제(王世杰)였다.

장쩌민과 비교가 되는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 주재 청나라 대사 양유(楊儒)다. 1900년 8월 15일,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8월 19일, 항상 중국 동북을 넘보았던 러시아는 ‘아르군강, 헤이룽강 오른쪽 기슭과 우수리강 좌측 기슭 만주 땅 일부를 우리 영토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9월 11일, 15만 러시아군이 중러 국경선을 넘어 청나라 수천만 주민들을 헤이룽강에 쳐넣어 죽이고 동북 국경선을 전부 점령했으며 10월 1일에는 선양(瀋陽)을 공격, 점령하고 성경(盛京 역주 – 현재의 선양)장군 증기(增祺)를 협박해 ‘봉천교지(奉天交地)임시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선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를 해산시키고, 잉커우(營口 역주 – 랴오닝성의 항구도시)를 잠시 러시아가 관리하며, 동북 각지에 설치된 포대와 무기 창고를 없앨 것을 요구했다…

1901년 1월 4일, 청나라 조정은 러시아 주재 대사 양유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러시아와 피터스버그에서 동북3성을 책임지고 되돌려 받도록 명령했다. 양유가 중국 주권을 위해 전력을 다하자 3월 25일, 러시아인들은 그를 외교부에 가둬놓고 위협하기도 하고 이익으로 구슬려 보기도 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만주를 러시아의 한 개성으로 만들 것”이지만 서명만 해주면 그에게 피터스버그의 “많은 땅과 큰 집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양유는 화를 내며 엄숙하게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양유가 흔들리지 않자 화가 난 러시아인들은 나중에 그를 건물 아래로 던졌다. 양유는 피투성이로 이국 길가에 쓰러졌다. 3월 28일, 극도로 분노한 중국인들이 러시아를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 조정에 서신을 보내 동북 주권을 러시아에 팔아먹는 것을 반대했다. 형세가 기울어진 것을 본 러시아는, 기타 나라들에게 러시아가 이미 중국에서 취득한 이익을 빼앗아갈 구실을 제공할까 봐 4월 3일 이번 협정을 잠시 포기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양유는 치욕적인 청나라 조정 역사에서 아주 보기 드문 절개 굳은 관리였다.

장쩌민은 역사상 일체 불평등 조약이 체결될 때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었다. 장쩌민 시대에 중국은 러시아, 타지크스탄, 인도 등 국가와 전쟁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불평등 조약도 체결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은 이치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중국 영토를 지켜내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이었으며 특별한 위험도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3권을 독점하고 있었던 장쩌민은 주동적으로 매국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 또한 아주 많다.

장쩌민의 매국 죄행에 대해 국내외에서 높아가고 있는 비판의 목소리에 장쩌민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는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을 찾을 수 있었는가?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평전에서 이번 영토 할양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이는 사실이 탄로날까 봐 전전긍긍한 장쩌민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9. 매국은 매국노의 역사를 속이기 위해서

중러 양국은 동서부 국경선을 확정하기 위해 1991년부터 탐사를 시작했다. 그 시기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으나, 중국은 덩샤오핑의 남부시찰 후 크게 발전하고 있었고 유럽, 미국과의 관계도 6.4천안문 사건 이후로 점차 정상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국제 환경으로 놓고 보면 러시아가 중국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 시기였으므로 중국은 과거의 불평등 조약을 승인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장쩌민이 매국조약을 체결한데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이 책의 제2장에도 나오지만, 1945년 중국 동북을 습격한 소련 홍군은 일본군 특무기관장이며 육군대장 도히하라겐지(土肥原賢二)의 첩보망 자료를 찾아냈는데 그 중에는 장쩌민이 훈련을 받았던 청년간부학교와 관련된 문서와 사진이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소련 정보부문은 장쩌민이 소련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 그 자료로 장쩌민을 협박, 유인해 극동 지역 스파이로 만들었다.

1991년 5월, 장쩌민이 중공 중앙총서기 신분으로 소련을 방문, 리가쵸프 자동차제조공장을 참관하게 되자 KGB는 장쩌민이 소련 여간첩 크라바와 ‘우연히’ 마주치게 배치했다. 크라바는 소련 유학 생활 시절, 장쩌민을 석류치마 아래에 무릎 꿇게 한 장본인이었다. 장쩌민은 KGB의 극동 지역 스파이라는 신분이 폭로되기만 하면 즉시 사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어떠한 큰 대가를 치러서라도 러시아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한편, 공산당은 이 내막이 공개되면 정권 유지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사실을 안 뒤에도 장쩌민을 처벌할 수 없었다. 장쩌민은 중공이 국민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잘못을 저질러야만 자신이 도리어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05년, 6.4천안문 사건 때문에 정부에 불만을 품고 사직한 홍콩 문회보(文匯報) 부총편집국장 청샹(程翔)이 중국에서 감금되었다. 해외 언론에 따르면, 그는 홍콩 명보(明報)에 중궈런(鍾國仁)이라는 필명으로 몇 편의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다. 청샹은 그의 글에서 ‘중러국경선협정’의 알려지지 않은 흑막들을 모두 폭로하고 21세기 가장 황당한 ‘인민 대변인’의 스캔들이라고 논평했다. 홍콩 언론계는 중궈런(鍾國仁)이 청샹 기자가 자신의 칼럼에 이용한 필명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또 중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감히 조약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는 3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이 조약은 중공이 매국한다며 쫓아낸 국민당 정권보다 못하다는 것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조약은 장쩌민이 중공 기타 지도자들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 조약은 중국 정부가 그토록 넓은 영토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담판과 협상 과정을 모두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중공은 민간에서 장쩌민이 매국한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두려워 정부 웹사이트 게시판에서 한동안 ‘중러국경선’이라는 단어를 금지하는 단어로 지정했다. 중국지도출판사의 지도매니아 게시판도 강동 64개 마을 등 장쩌민에 의해 할양된 지역을 이야기하는 네티즌 때문에 봉쇄되었다.

10. 장쩌민을 공개 심판하는 것은 영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매국 조약은 이미 체결되었지만 1969년 5월, 유엔에서 통과된 ‘비엔나조약법협약’에 따르면 장쩌민이 할양한 영토를 되찾아올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장쩌민을 공개 심판하는 것이다!

‘비엔나조약법협약’ 제49, 50, 51, 52조에는 사기, 뇌물, 강제, 협박으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규정되어 있다.

장쩌민은 KGB 극동 지역 스파이였던 자신의 신분이 폭로되어 국가 총서기 자리를 잃을까봐 두려워 국가 영토를 팔았기 때문에 그가 체결한 모든 조약은 무효이다. 만약 장쩌민이 영토 문제로 중국 국민들의 심판을 받는다면 그러한 조약들은 더구나 효력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장쩌민이 조약을 체결할 때의 목적과 전체 과정을 철저히 조사하고 그 죄행을 공개하여 법률적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중국이 북방 영토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1. 헤이샤쯔(黑瞎子)섬으로 매국 사실을 숨겨

1999년 12월 9일, 장쩌민은 비밀리에 ‘의정서’를 체결하고 당시 국방부장인 츠하오톈(遲浩田)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았다. 뒤늦게 일부 소식을 들은 츠하오톈이 이 일을 조사했지만 1999년 12월 11일자 ‘인민일보’를 보면 100여 자 정도의 더 이상 짧을 수 없는 분량으로 이번 조약을 소개하고 지나갔다.

2002년 10월, 장쩌민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전미(全美)학생•학자자치연맹’은 워싱턴 DC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염황의 자손들은 중국에 속하는 영토를 알 권리가 있다며 장쩌민에게 조약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고 이 소식은 국내와 해외 웹사이트에 널리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며칠 뒤인 10월 14일과 15일, 중공은 우스광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장쩌민의 입역할을 해주는 ‘인민일보’ 사이트판은 원래 국내와 국제 톱기사를 올리는 자리에 이례적으로 연속 이틀 동안 ‘포토: 광활하고 신비로운 중국-러시아-몽고 국경 지역 풍경’과 ‘포토: 끝없는 중국-러시아-몽고 국경선, 항구 건설은 날마다 새롭다’는 제목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진들만 가득 올렸다. 그들은 사실 아무 할말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 국내외 많은 비평가들은 모두 중대한 국가 이익과 관련된 중러 국경선 문제를 놓고 밀실 거래를 하고, 국민이 이에 관심을 가지거나 토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장쩌민을 강력히 질책했다.

그러나 2004년 10월 17일, 중공은 갑자기 줄곧 비밀에 부쳤던 중러 국경선 문제를 공개 보도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언론들은 중국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이 러시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과 베이징에서 ‘중러동부국경선보충협정’을 체결하여 원래의 ‘중러동부국경선협정’, ‘중러서부국경선협정’과 함께 4,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러 국경선 문제가 ‘철저히 해결’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보도를 보고 이전에 체결된 협정이 공개된 적이 없는데 대해 매우 의아해 했다. 그리고 원래의 ‘중러동부국경선협정’, ‘중러서부국경선협정’이라고만 하고 시간을 밝히지 않아 어느 때 체결된 조약을 가리키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3개 협정의 내용은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아 중러 국경선 문제가 철저히 해결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수수께끼는 장쩌민이 밝혀주어야 할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국내외에서 중국인들이 중러 전체 국경선의 98%에 이르는 동부 국경선에서 100여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러시아에 할양한 장쩌민을 질책하고 나서자 중공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머지 2% 국경선을 확정한 ‘동부국경선보충협정’을 가지고 크게 떠들면서 이 ‘보충협정’을 통해 헤이샤쯔(黑瞎子 역주 – 헤이룽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섬)섬을 되찾았다고 했는데 사실 이는 중공이 장쩌민의 매국 죄행을 은폐하기 위한 술수였다.

2005년 5월 31일,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연구원 성스량(盛世良)이 신화망에 초대되어 이번 협정에 대한 관점을 내놓았다. 그는 “빼앗겼던 100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되찾은 것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영토를 잃기만 했던 중국이 법률을 이용해 토지를 되돌려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논리는, 돈 1만 위안을 빼앗아 간 사람이 1위안을 되돌려 주자 돈을 빼앗긴 사람이 “1위안을 되돌려 주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니 나머지 9999위안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이보다 더 바보스러운 논리도 있단 말인가?

헤이샤쯔섬은 1929년 ‘중동로(中東路) 사건’ 때, 기꺼이 소련의 앞잡이가 되려했던 중공의 노예 근성 때문에 소련군에 넘어갔다.

1929년 5월 27일, 하얼빈 주재 소련 총영사관은 극동 각 지역 주요 공산당 간부 국제회의를 열고 중국을 침략할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이번 행동에 참여한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39명 명단, 중국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분열시키는데 이용될 문서 수만 권을 조사해 냈다.

같은 해 7월, 중국 동북 지역 당국은 빼앗겼던 중국 영토를 점차 되찾을 것이라는 중화민국정부의 결정과 1919년, 1920년 ‘중국과의 일체 불평등 조약을 포기하겠다’,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취득한 일체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한 소련 정부의 성명에 따라 중국 내에 있는 중동 철도 관리권을 넘길 것을 소련에 요구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소련은 자신이 했던 성명을 승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단교하고 10만 대군을 동원해 대규모 침략 전쟁을 발동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장쉐량(張學良)을 보내어 국경을 지키게 했는데 역사적으로 ‘중동로 사건’이라고 한다.

이와 동시에 9월 26일, 스탈린은 중공 조직에 “충성스럽고도 진정으로 확고하게 몸 바쳐 무장으로 소련공산당을 지켜내는 자야말로 혁명자이며 국제주의자이다”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10일 26일에는 국제공산당 조직에서 “소련공산당을 지키려면 전국적인 무장 폭동를 일으켜야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왔다.

11월, 리리싼(李立三)은 중공 제2차 대표대회에서 “무장으로 소련을 지키라고 한 상급의 지시대로 전국적인 무장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선포했고 당시 중국공산당 만주 당서기 류사오치(劉少奇)는 “중동로 사건은 제국주의가 소련에 무장 진공을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12월 8일, 중국공산당은 “무장으로 소련 공산당을 보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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