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3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3주위 권고를 뿌리치고 파룬궁 박해에 팔을 걷고 나서다

 

장쩌민이 정권을 잡은 15년 동안(수렴청정 2년 포함), 중국에는 홍콩, 마카오 반환, WTO 가맹, 파룬궁 탄압 등 역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장쩌민은 다른 사건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지만 파룬궁 탄압에서만은 특별한 관련이 있었다.

파룬궁 탄압은 장쩌민 정치생애의 전환점이었다. 6.4사건 후 베이징 정부에 발탁되어 험악한 정치투쟁 중에서 점차 권력을 공고히 한 장쩌민이었지만 파룬궁 탄압으로 예상치 못한 큰 굴레를 짊어지게 되었다. 장쩌민은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탄압 기구를 가동한 시각부터, 자의적이 아니게 모든 국가사무를 파룬궁 탄압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자신의 운명도 파룬궁 탄압과 함께 묶어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속세의 인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힘으로 강대한 로마 제국의 300여년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파룬궁도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항쟁을 지속해 과오를 승인하지 않는 장쩌민을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때문에 1999년 이후 장쩌민의 사상과 행위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룬궁 박해부터 알아야 한다.

1. 죄를 뒤집어 씌우다

4.25청원이 있은 후, 중국 전역에서는 파룬궁에 대한 조사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언론에서는 선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공안은 정보를 수집했고, 당 조직에서는 사상 교육을 준비하는 등 탄압을 위한 작업들이 철저히 진행되었다. 장쩌민은 이 일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추진시켰다.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이 199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관계로, 장쩌민은 심지어 미국과 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감소시키는 것을 대가로 리 선생을 소환하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리 선생은 1999년 6월 2일, ‘나의 약간의 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선(善)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무상으로 사람들을 도와 질병을 제거하고 보다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게 했을 뿐이며 금전과 물질적인 보수를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해지게 하고 도덕이 고상해지게 하여 사회와 국민에게 좋은 역할을 했는데, 설마 이 때문에 나를 소환하려 하는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소환하는 사람은 모두 전범(戰犯)이거나 인민의 공적(公敵)이며 더 있다면 형사 범죄자이다. 만약 이렇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어느 한 조항에 부합되는지를 모르겠다.”

리 선생은 또 “사실 나는 거듭 사람들에게 진(眞), 선(善), 인(忍) 원칙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나 자신도 당연히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나 그리고 파룬궁 제자들이 이유 없이 비난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지만 모두 대선(大善), 대인(大忍)의 흉금으로 대했으며 정부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우리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소리 없이 참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왜 기어코 파룬궁을 반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언론에서 말한 것처럼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억이란 숫자는 확실히 적지 않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인가? 좋은 사람이 많을수록, 나쁜 사람이 적을수록 더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밝혔다.

장쩌민은 리 선생이 권고하는 글을 보았지만, 비열하고 소인배적인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는데 길들여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또 자신이 전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는데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매수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 위해 중앙 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장쩌민은 파룬궁이 생기고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 것은 “국내와 해외 적대세력이 우리 당과 군중을 쟁탈하고 지반을 쟁탈하는 정치투쟁”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내린 결론에 그 어떤 증거와 논증 과정을 제시한 적이 없는 장쩌민은 이번에도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파룬궁이 억만 군중의 몸과 마음을 개변시킨 사실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모든 공산당원, 공청단원, 재직• 퇴직 공무원들에게 파룬궁 수련을 금지시키고 ‘사상적으로 분명히 선을 그을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은 4월 25일 저녁, 그가 쓴 편지에 대한 정치국 회원들의 반응으로부터 대다수 정치위원, 심지어 상무위원들마저 파룬궁 탄압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룽지가 있는 부서에서도 파룬궁을 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자신의 명령을 집행해 주는 부서를 따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정부, 법률기관, 경제부문의 구속을 받지 않게 하려고 했다. 장쩌민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리란칭(李嵐淸)을 찾았다.

당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기타 6명은 파룬궁 탄압을 반대했다. 중공 고위층에서 악명 높은 보이보(薄一波)는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모두 탄압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자 일부러 나서서 장쩌민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장쩌민은 사이 좋은 리란칭을 설득하려고 작정했다. 장쩌민은 당성(黨性)과 망당망국(亡黨亡國)론으로 리란칭에게 압력을 가해 끝내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를 처리하는 전문팀을 구성하고 리란칭을 팀장으로 임명했으며 총과 붓으로 인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중공 이론에 근거해 뤄간과 딩관건(丁關根)을 부팀장으로 임명했다. 장쩌민은 또 공안부 부부장 류징(劉京) 등을 합류시켜 함께 파룬궁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하고 국가기관과 지방 정부에 긴밀한 협조를 요구했다. 이 기구는 6월 10일에 설립되었기에 ‘610사무실’이라고 불렀다.

‘610사무실’은 ‘중앙문혁소조’와 마찬가지로 법률적인 근거 없이 세워진 100% 불법조직이었다. 610사무실이 세워진 목적은 법률의 단속을 피하고 경제와 인사 심사를 피해 파룬궁을 탄압하려는데 있었다. 이 불법조직의 총 두목은 사실 장쩌민으로, 중요한 밀령은 그가 하달했다. 장쩌민은 증거가 남을까 봐 두려워 밀령을 하달할 때 도장을 찍지 않았지만 610사무실의 사람들이 명령을 집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되지 않았다.

독재체제 하에서 장쩌민은 부당한 수단으로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 모든 국가 기관을 능가하는 ‘610사무실’을 조직했으며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을 협박해 법을 어기게 함으로써 20여 년 동안 지속해 오던 법제화 발전을 철저히 중단해 버렸다. 이는 중국 사회에 짐작하기 어려운 악영향을 조성했다.

장쩌민은 길길이 날뛰면서 큰 소리를 쳤으나 구체적인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또 쩡칭훙을 찾아 암암리에 계책을 의논하고 중앙사무실과 국무원사무실을 통해 6월 14일에 ‘탄원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견한 중앙, 국무원사무실 탄원사무실 책임자들의 견해’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1. 연일 일부 파룬궁수련자들은 공안이 탄압을 시작할 것이라는 등, 당원과 단원, 간부들이 수련에 참가하면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장에서 해고된다는 등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있다”, “2. 당과 정부는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정상적인 연공 활동을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거듭 성명한다, 정부는 정상적인 연공 활동을 금지시킨 적이 없다. 국민들은 기공을 믿고 수련할 자유가 있다… ”

당시 정부 관리들이 국민들에게 발표한 이 거창한 약속을 돌이켜 보면 장쩌민 등 중공 관리들이 얼마나 술수에 능란하며 신용이 없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파룬궁 활동은 모두 공개적이기 때문에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파룬궁 수련생들은 중공 언론에 아무런 경계심이 없었다. 그러나 대량의 공안과 스파이들은 파룬궁수련생으로 가장하고 연공장에 숨어들어와 정보를 수집하고 사진을 찍고 녹화했으며 연공장 책임자를 알아냈다.

2. 탄압 개시

7월 19일, 장쩌민은 중공중앙 고위층 회의를 소집하고 총서기의 신분으로 탄압 개시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수만 명의 무장경찰이 베이징으로 진입했으며 인근 부대 군인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했다. 그 다음 날인 7월 20일, 장쩌민은 전국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룬궁수련생들 중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심문을 받았다. 장쩌민은 또 7월 29일, 인터폴을 통해 리 선생을 소환하려 했으나 인터폴은 이를 거절했다.

6.4사건 때, 중공은 먼저 기관총, 탱크로 사람들을 살해해 입을 막은 다음 다시 언론을 이용해 거짓 선전을 했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환경에서 중공의 거짓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은 이 수단이 파룬궁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오산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파룬궁 서적과 테이프, 비디오를 소각해 버리는 동시에 파룬궁 소식을 얻을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폐쇄하고 국민들이 그가 통제하는 국내 언론만 접할 수 있게 했다.

탄압 전, 베이징시 전신(電信)국에서는 263서비스를 제공해 인터넷 사용자들은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없이 263에 접속하기만 하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고 이메일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탄압이 시작된 직후, 263은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이메일 서비스를 48시간 중단해 국내 민중이 해외와 연락하는 것을 차단했다.

탄압 3일 째 되는 7월 22일 오후 3시, 장쩌민이 정성들여 준비한 거짓 선전이 시작되었다. 약 30분 길이의 파룬궁 비방 프로그램이 TV에서 반복적으로 방송되었다. 각종 날조로 가득 찬 프로그램에서는 리훙쯔 선생이 1999년 2월, LA에서 설법하면서 “과거에 사람들이 말하던 그러한 재난은 존재하지 않는다[不存在]”라고 말한 부분에서 아닐 ‘부(不)’자를 잘라버리고 방송해 “과거 사람들이 말하던 그러한 재난은 존재한다”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파룬궁이 세계종말을 선전한다고 억설했다.

1999년, 중국 국민총생산량은 8천 3백억 위안에 도달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대, 무장경찰, 공안, 강제노동수용소, 감옥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2,000여 종의 신문, 잡지, 수백 개의 라디오방송국과 TV방송국 등 선전기구가 있었는데 CCTV만 해도12개 채널이 전국뿐만 아니라 위성을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었다. 7월 20일 이후, 방대한 중국 전체 국가기구는 갑자기 전력을 다해 “3개월 내에 파룬궁을 소멸하겠다”는 장쩌민의 목표를 위해 나섰다. 신문, 잡지, 라디오와 모든 TV채널은 24시간 반복적으로 파룬궁을 비방하는 문장을 내보내거나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경찰들은 연공장에서 연공하는 사람들을 쫓아냈고 복종하지 않으면 체포했으며 공장, 기업, 학교, 주민구역에서 집단으로 파룬궁 비방 프로그램을 보게 했다. 각 국가에 있는 중국대사관 역시 현지 화교들을 조직해 ‘비판대회’를 열고 각국 정부에게 파룬궁 비방 자료를 배포했다. 동시에 전국적으로 파룬궁 서적을 소각하고 수련생들의 집을 수색, 체포했으며 또 사람마다 탄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라디오, TV, 신문, 잡지가 총동원되어 하늘땅을 뒤덮을 듯이 선전과 비판을 하는 것은 제2의 문화대혁명을 방불케 했다.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일은, 그 당시 장쩌민은 홍콩 언론도 매수하여 파룬궁을 비방했는데 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매체는 홍콩 ‘봉황위성TV’였다. 이 방송사는 겉으로 봐서는 상당히 객관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중요한 원고를 직접 중공에서 받아서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내보냈다. 만약 누가 이에 불만을 표시하면 즉시 쫓겨났다. 봉황위성TV는 가장 관건적인 시각에, 그리고 가장 관건적인 문제에 부딪쳤을 때 CCTV가 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봉황위성TV 류창러(劉長樂) 사장은 중공 총참모 특무 출신이다. 1999년 4.25 중난하이 사건 이후 류 사장은 뤄간의 제안으로 돌팔이 과학자 허쭤슈와 손잡고 그 해 5월부터 전력을 다해 파룬궁과 파룬궁 창시자를 모독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며 베이징에서 책까지 출판했다. 책 내용은 황당무계하고 온통 거짓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한 단어 또한 매우 악독했다. 봉황위성TV는 시청자들이 즐겨보는 TV로 매우 객관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 했으나 배후에서는 장쩌민과 손잡고 거짓 선전을 하여 대륙과 해외의 수많은 중국인들을 독해시켰다. 나중에 봉황위성TV 방송국에는 여러 가지 사고가 잇달았다. 류창러 사장은 중국은행 전 은행장 왕쉐빙(王雪冰)의 탐오 및 범죄활동에 연루되었고, 중문 방송국 부국장 자오췬리(趙群力)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으며, 유명 아나운서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 정보 방송국 기자는 납치되는 사고를 당했다.

탄압 초기, 장쩌민이 전력을 다해 광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는 것을 본 많은 사회학자들은 “파룬궁이 일주일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오산했다. 그는 끝까지 이런 문제를 보아내지 못했다. 즉, 파룬궁은 사실 무슨 지도자가 없었으며, 책임자 역시 단체로 연공할 때 카세트를 가져다 음악을 틀어주고 활동이 있을 때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없었다. 수련자들은 각자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전법륜(轉法輪 역주 – 파룬궁 수련서적)’에서 이해한 것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닦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책임자’를 붙잡는다고 해도 파룬궁이 ‘머리 떨어진 파리’처럼 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반 수련생들마저 탄압에 반대해 일어나게 만들었다.

7월 20일 아침부터 대량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베이징에 몰려들어 억울함을 호소하고 합법적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청원을 했다. 그리하여 7월 21일과 22일, 중난하이 근처, 시단(西丹), 류부커우(六部口), 베이하이(北海) 및 천안문 등지에서는 계엄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610사무실은 지방 정부에 모든 대가를 아끼지 말고 청원 민중을 저지할 것을 요구했으며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를 엄밀히 봉쇄하는 동시에 수시로 투입 가능한 군인들을 대기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천리 길, 만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갔다. 일부는 베이징으로 가던 도중에 현지 공안에 붙잡혀 고향으로 되돌아가거나 구류되었지만 베이징에 들어가는데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 수만 명의 청원자들이 펑타이(豊臺)와 스징산(石景山) 스포츠센터에 임시로 구류되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베이징에 모인 청원자는 가장 많을 때에는 30만을 초과했고, 베이징 외곽의 청원자들은 항상 70만을 유지했다. 그들은 정부관리, 군인, 지식인, 학생, 상인으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쓰촨, 윈난, 헤이룽장, 신장과 같이 먼 지역의 농민, 심지어 마을을 한번도 벗어나 보지 못했던 농촌 부녀자들도 단호히 청원을 위해 길을 떠났다. 지린(吉林)성 백산(白山)의 한 부녀자는 기차에 앉아 베이징으로 가던 도중, 랴오닝(遼寧)에서 경찰에 붙잡혀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두 빼앗겼다. 간신히 경찰국을 빠져나온 그녀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둥베이(東北)에서부터 밥을 빌어먹으면서 베이징까지 걸어갔다. 쓰촨성의 한 농민은 경찰에게 심문당할 때 보따리를 풀어헤치고 그 속에서 헐대로 헌 신발 9컬레를 꺼내 보이면서 “내가 이렇게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마음속 말 한마디 하려는 것입니다. 파룬궁은 좋습니다! 정부는 틀렸습니다!”

당시 베이징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항의한 사람들 가운데 두 명 이상의 고위층 관리가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그들도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경찰들은 그들의 이름과 신분을 알자 깜짝 놀라며 돌려보냈다. 이는 파룬궁수련자는 사회 각 계층에 골고루 있다는 것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독재자 장쩌민은 고위층 간부들마저도 말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다.

청원[上訪]은 문화대혁명 이후 대량으로 존재하는 억울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중공이 제정한 중국 특유의 제도이다. 이는 힘없는 민중이 관리들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최후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파룬궁수련생들의 청원을 금지시키기 위해 ‘공안 6개조항’을 제정했다. 2005년 음력설 전야에 스자좡(石家庄)시 610사무실이 하달한 문서에는 ‘6가지를 방지하라’는 요구가 있었는데, ‘파룬궁이 법률과 청원 제도를 이용해 대항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 마지막 내용이었다. 법에 따라 상소해도 ‘대항’이라며 체포 판결하며, 법률을 이용해도 ‘법을 어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은밀하고 사악하기 유례없는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였다.

그러나 장쩌민은 벌금, 감금, 해직 및 가족, 회사 연좌 등을 포함한 가장 혹독한 조치를 취했지만 파룬궁 청원자들이 이에 전혀 흔들리지 않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 세상에 정말 신앙을 위해 물질 이익을 즐겁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파룬궁수련생들의 굳은 신앙은 리 선생에 대한 장쩌민의 질투를 증폭시켰으며 파룬궁 탄압을 더욱 급급히 진행하도록 만들었다.

3. 국제사회의 반응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을 적극 준비하고 있을 때, 리훙쯔 선생은 호주 시드니에서 세계 각국 수련생들이 주최한 파룬따파(法輪大法 역주 – 파룬궁의 다른 말) 수련심득교류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5월 2일 오전, 리 선생은 호주신보(新報), 쯔리콰이바오(自立快報), 아시아주간(周刊), 중화TV방송사 등 중문 매체 기자들을 만났고 오후에는 또 호주 방송청, 시드니 모닝헤럴드, AFP 등의 기자들을 만났다.

리 선생은 기자 회견이 시작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법(佛法)은 엄숙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광고하는 것처럼 매체를 이용해 선전하지 않았다. 그 자체가 엄숙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수련생들이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이 마음속으로 느낀 것, 몸으로 느낀 것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알려 주는 방식으로 전파되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누구도 자신의 친척,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속임수를 당했는데 아내, 자녀, 친척, 친구들을 다시 속임수에 들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리 선생은 또 “수련생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과학자, 박사, 석사이다. 특히 미국 수련생들 가운데는 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천 명을 초과한다. 이런 사람들이 총명하지 못한가? 그들은 매우 총명하다. 또 예를 들면, 우리 중국 대륙 수련생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지식인이고 고위층 간부이며 심지어는 정치계 인사들도 있는데 그들은 모두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들로서 추구했던 신념이 있었고 맹목적인 신앙도 있었으며 이런저런 운동도 수차례 겪었는데 그들이 모두 바보인가? 절대 아니다. 그들이 또 다시 맹목적으로 그 무엇을 추구하거나 신앙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 선생의 발언은 많은 해외 사람들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개시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파룬궁 진상을 알리는 모든 정보를 국외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탄압을 시작한 날, 리훙쯔 선생은 성명을 발표해 세계 각국 정부, 국제기구, 선량한 사람들에게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데 지지와 도움을 줄 것을 호소하고 중국 정부 및 지도자들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민중을 적으로 대하지 말기를 희망했다.

탄압이 시작되고 며칠동안, 리 선생은 각국 언론의 인터뷰에 응해 거듭 파룬궁은 그 어떤 정권에도 위협을 주지 않으며 반대로 어떠한 정부, 국가와 민족에게든 백가지 이로운 점만 있을 뿐 한 가지 나쁜 점도 없다고 설명했다. 7월 22일, 파룬궁 웹사이트 명혜망(明慧網)은 중공 중앙과 정부 지도자에 보내는 리 선생의 편지를 발표했다. 편지에서 리 선생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무고한 민중을 탄압할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대화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중국 정부에 호소했으며 계속 잔혹한 박해를 고집한다면 국가와 민족에 큰 재난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는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결과라고 말했다.

중국 내 수십만 심지어 수백만 규모의 평화청원과 동시에 세계 각국 파룬궁 수련생의 성원도 이어졌다. 7.20사건 후, 많은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코네티컷 거리 2300호에 있는 주미 중국대사관 앞에서 가부좌하고 평화청원을 했다. 2주 동안, 미국 수련생들은 미국 정부, 의원, 매체와 미국에 주재하고 있는 세계 70여 개 국가 대사관을 찾아가 중국에서 발생한 박해를 알리고 중국정부가 파룬궁수련생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 내에, 자유사회 각국 정부와 인권단체에서 반응을 보였다. 1999년 7월부터 12월까지 캐나다 정부, 유엔 세계시민연맹, 호주, 미국 상하원에서는 모두 결의안을 채택해 중공의 인권 침해와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를 규탄하고 박해받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구출할 것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4. 중공 고위층의 탄압 반대

탄압이 시작된 후부터 최고 행정권을 가지고 있는 국무원 총리 주룽지의 모습이 보름 동안이나 TV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1999년 8월 중순, CCTV에서는 장쩌민이 곤경에 처한 국영기업들과 가진 좌담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주룽지는 총리 취임식에서 국영기업을 3년 내에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사업마저 장쩌민에게 넘겨준 걸 보아서는 당시 주룽지가 실망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월에 열린 인대 ‘3강 보고회의’에서 리펑은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수련했는지 여부를 따질 것이 아니라 관건은 사상인식이 정말 변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 점을 우리는 명확히 하여 인민을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하며 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장쩌민의 잔혹한 탄압정책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치국 위원들도 당연히 탄압을 지지하지 않았다. 장쩌민을 화나게 한 것은 산둥, 랴오닝 등 소수 지방을 제외하고는 탄압에 적극적이지 않고 겉으로만 명령에 따르는 척 하는 것이었다. 특히 남방의 광둥성 같은 곳에서는 1999년 말까지도 “파룬궁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다”, “광둥에서는 한 사람도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분위기였다. 제4세대 후계자로 지명된 후진타오, 리창춘마저도 소극적으로 나오면서 장쩌민과 함께 역사에 오명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2000년 2월, 할 수 없이 파룬궁 탄압을 감시하러 직접 광둥성에 내려갔다. 그는 광둥성이 파룬궁 탄압에 “노력이 부족하다”, “힘이 없다”라고 비평했고 정치국 회의에서 반성하라고 리창춘에게 요구했으며 직접 선전(深圳)시 당 위원회에 팩스를 보내 “파룬궁에게 설 자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쩌민과 뤄간의 압력으로 광둥성에서는 마침내 파룬궁수련생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넣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들어간 수련생들 가운데 후진타오의 대학 동창생인 장멍예(張孟業)가 있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장쩌민이 광둥성에 좋은 출발점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 뜻인즉, 후진타오의 동창생마저 판결했으니 앞으로 누구든 주저하지 않고 판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이번 일은 후진타오가 ‘동창생을 배신했다’, ‘의리 없다’는 말을 듣게 했으므로 장쩌민에게 있어서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장쩌민은 혼자 날뛰고 고함을 질렀지만 중앙의 많은 관리들은 어릿광대의 추한 꼴을 보듯 구경만 하고 있었다.

5. 주룽지에 대한 협박

탄압이 별로 성과가 없자 보이보가 장쩌민에게 “이번 일이 잘 추진되지 않는 이유는 주룽지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과 관련 있다”고 말했다.

중국 민간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책 몇 권이고, 마오쩌둥 사상은 책 한 권이며, 덩샤오핑 이론은 문장 몇 편이고, 장쩌민 학설은 말 몇 마디이다”라는 떠도는 말이 있었다. 사실 장쩌민의 ‘3강’과 ‘3개대표’를 합쳐 놓아도 몇 십자에 불과해 그 무슨 사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룬궁 탄압이 시작한 뒤부터 쩡칭훙은 전국적으로 기세 드높이 ‘3강’을 선전하기 시작했고 장쩌민도 ‘3강’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쩡칭훙은 4.25사건 때 직접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견했던 주룽지가 지금 나서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외부에 당 중앙이 분열되었다는 추측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군중들에게 위신 있는 주룽지가 탄압을 지지한다면 장쩌민 쪽으로 다시 넘어올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청원하러 오는 파룬궁수련생들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3강’ 운동을 이용해 주룽지에게 입장을 표명하도록 협박하려고 했다.

쩡칭훙에게서 이 말을 들은 장쩌민은 즉시 주룽지를 불러 ‘3강’에 대해 국무원이 너무 소극적이라며 비판하고 ‘3강’을 당을 수호하는 운동으로 간주하고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은 또 주룽지가 장기간 정치 국면을 따르지 않고 당 중앙정책을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3강’에서 가장 핵심은 ‘정치를 말한다’는 것인데 현재 파룬궁 탄압이 바로 가장 중요한 정치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주룽지 동지, 당 중앙은 국무원에게 ‘정치를 말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주 잘 할 것을 요구하며 ‘3강’ 보급과 현재 가장 중요한 정치를 잘 결합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을 분열시키는 것이 됩니다”라고 협박했다.

장쩌민의 사무실에서 나온 주룽지는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겼다. 얼마 후, 주룽지는 자신의 마음을 어기고 장쩌민의 탄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아마 우파로 몰려 고생스러웠던 과거로 되돌아가기 싫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오쯔양처럼 비참한 처지에 빠지기 싫었을 수도 있다.

‘3강’은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으로서 민간에서는 정치국위원 우관정(吳官正)과 정치국 상무위원 웨이젠싱(尉健行)의 이름을 빌려 이런 말이 떠돌고 있었다. “정치, 학습, 바른 풍기를 아무리 말해도 바른 관리 없고[无官正, 역주 – 吳官正과 발음이 같음], 탐오, 부패, 타락을 아무리 반대해도 행하는 것을 보지 못했네[未見行 역주 – 尉健行과 발음이 같음]”

3국 시대 사마소(司馬昭)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사마소는 충복 가충(賈充)을 앞세워 나쁜 일을 하게 하고 자신은 뒤에 숨어 있었다. 마오쩌둥 역시 린뱌오(林彪), 장칭(江靑)과 장춘챠오(張春橋) 등의 사람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발동했다. 그러나 우둔하며 비이성적인 파룬궁 탄압에는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장쩌민은 사사건건 앞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4.25 저녁에 직접 밤새도록 정치국에 보낼 편지를 작성했으며, 9월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아태 경제협력회의에 참석해 체면이 깍이는 것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 직접 파룬궁 비방 소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장쩌민은 각국 정상들이 이번만큼은 중국 내정을 좀 간섭해 그의 탄압을 지지해 줄 것을 바랐으나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클린턴은 미국 국무원을 통해 1999년 9월 11일, ‘국제종교자유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중국대륙의 파룬궁 박해를 질책했다. 그 뒤,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클린턴은 또 워싱턴에서 열린 인권회의에서 중국의 파룬궁 탄압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면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체포를 인권유린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았다. 장쩌민은 신앙의 자유가 천부인권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파룬궁 탄압을 지지하는 민주국가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눠준 소책자가 역효과를 얻게 되자 장쩌민은 즉시 늘 써오던 수법인 ‘내정 간섭’과 ‘반(反)중국’이라는 몽둥이를 내들었다.

6. 국가 재산을 탕진한 축제

중국에서 언론을 이용한 파룬궁 비방은 하루도 중단되지 않았다. CCTV 뉴스에서는 매일 한 개 이상의 파룬궁 비방 뉴스가 나갔다. 이런 상황은 두 달 동안 지속되다 갑자기 며칠 동안 중단되었다. 중공이 정권 탈취 50주년 대형 축제를 위해 여론상 안정, 단결의 정치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50주년 축제를 가장 손꼽아 기다린 사람은 바로 중공 총서기 장쩌민이었다. 그는 축제 때 자기 사진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나란히 놓음으로서 만민 위에 올라선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는 또 덩샤오핑이 정권 탈취 35주년 축제에서 했던 것처럼 3군을 검열하며 군사위 주석의 재미를 맛보고 싶었다. 이 밖에 그는 천안문 의장대에 “장쩌민 동지를 핵심으로 당 중앙 주위에 긴밀히 뭉치자” 는 문구로 된 현수막을 들게 하여 전 세계에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려 했다.

당시 중앙 정치국에서는 50주년 기념 축제를 35주년 때와 같은 예산을 들인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나중에는 원칙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념 축제 전야에 주룽지 총리는 국가계획위원회의 청페이옌(曾培炎)과 재정부장 샹화이청(項懷誠)을 찾아 축제 예산에 대해 상세히 물어 보았다. 각종 선물, 공무원과 퇴직자 임금인상, 기초시설 추가 건설 등에 들어간 지출이 총 1천 8백억 위안에 달하는 것을 안 주룽지는 화난 나머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나는 총리직을 아무 것도 수행하지 못한다. 베이징의 이 몇 개 큰 행사는 국가 재산만 낭비하고 있지만 나는 말릴 수 없다. 미국에서는 50주년이 아니라 100주년을 경축한다 해도 감히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즉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 국민들의 돈을 베이징에 다 써버려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축제는 기세가 있어야 한다. 50주년 축제는 정치적인 득실을 따져야하므로 경제 장부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 하물며 우리 현재의 국력으로 못해낼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중국 국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에 그렇게 많은 돈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장쩌민이 이번에 낭비한 돈은 100여 개 희망공정(역주 – 극빈지역에 학교를 짓는 공정)을 실현하여 약 2억 명의 학생을 도와 줄 수 있는 돈과 맞먹었으며 3천만 실업자들이 일년을 살아갈 수 있는 돈과 맞먹었다.(한 사람당 매월 500위안으로 계산)

장쩌민은 사열 차량에 서서 천안문 앞을 서서히 지나가면서 덩샤오핑처럼 “동지들 안녕하십니까”를 외치긴 했지만 덩샤오핑처럼 자신만만하지는 못했다. 베이징대학의 학생들이 “샤오핑 안녕하십니까”라는 표어를 손에 들었을 때만 해도 덩샤오핑은 전 국민, 적어도 전국 농민들의 추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축제가 있기 전야에 1억이나 되는 선량한 백성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합친다면 이는 적지 않는 숫자였다.

7. 심해져 가는 탄압

탄압이 이미 3개월 동안 진행되었지만 축제를 전후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는 파룬궁수련생은 늘어만 갔다. 장쩌민은 단번에 꺾일 줄 알았던 파룬궁수련자들이 이처럼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축제가 끝난 날 저녁, 장쩌민은 답답한 마음에 또 쩡칭훙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내가 청원사무실에서 직접 파룬궁 수련생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더니 청원하러 베이징에 오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모두 천안문에 가서 항의하고 있네. 각 지방 수련생들이 매일 같이 베이징에 올라오다보니 우리는 국제 사회에서 매우 피동적이 되고 말았어.”

그러자 쩡칭훙은 “지금 정치국 상무위원, 위원으로부터 각 지방 당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탄압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첫째, 각 지방에 책임자를 두고 만약 그 지역에서 청원오는 파룬궁 수련생이 일정한 수량을 초과하면 책임자를 면직시킬 것. 둘째, 청원자들 가운데 산둥성 출신이 가장 많으므로 산둥성 서기 우관정에게 만약 청원하는 사람이 추가로 발견되면 해직될 것이나 탄압에 공을 세우면 16차 당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부터 상무위원으로 승직할 수 있다고 협박할 것. 셋째, 태도가 애매한 후진타오와 광둥성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리창춘 역시 큰 골칫거리이므로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 이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

쩡칭훙이 돌아간 뒤, 장쩌민은 중국과학원 원장 루융샹(路甬祥)을 급히 불러 중국과학원에서 원내 원사들을 조직해 과학과 무신론으로 파룬궁을 비판할 것을 요구했다. 루융샹은 허쭤슈, 좡펑간(庄逢甘), 판자정(潘家錚) 등의 원사들이 이미 이 일을 위해 종교계 인사들과 연락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그 몇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루융샹에게 첸쉐썬(錢學森 역주 – 세계적인 로켓전문가)을 설득해 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과학원에는 파룬궁수련생이 아주 많았다. 4.25 중난하이 사건 때, 푸유(府右)거리 중난하이 정문 맞은편에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하이뎬구(海澱區) 8개 대학 그리고 중국과학원의 교수와 학생들이었다. 중국과학원은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와 교육 기관이었으므로 사회적인 영향력이 매우 컸다. 때문에 장쩌민은 상하이 야금(冶金)연구소 소장직을 맡은 지 3개월이 채 안 되는 큰 아들 장멘헝(江綿恒)을 즉시 베이징에 불러다 중국과학원 부원장직을 맡게 했다.

일반적으로 이공과 박사를 졸업한 사람은 먼저 박사후 공부를 더 하고 강사로 된 다음, 차례로 부교수, 교수, 박사 과정 지도교수를 거치고 논문도 발표해야만 학부 주임, 대학원장으로 될 자격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매우 큰 성과가 있어야만 원사로 평가될 수 있다. 때문에 아무런 학술적인 성과도 없는 장멘헝을 직접 과학원 부원장으로 임명하기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으나 장쩌민이 직접 나선 일이라 루융샹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어, 교수도 되본 적이 없는 장멘헝이 중국과학원의 간부로 되었다.

이에 대해 노벨상을 받은 적이 있는 대만 중앙연구원 원장 리위안저(李遠哲)도 장쩌민을 맹비난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대만이 오늘 바로 중국과 합쳐 중앙연구원도 중국과학원과 합쳐진다면 중국은 작은 지방이나 다름없는 대만의 중앙연구원 원장에게 과학원 원장 자리를 줄리 만무하다. 그러나 리위안저와 같은 사람은 루융샹의 부하가 되는 것도 억울한데 장멘헝과 같은 자리에 있으라고 한다면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장멘헝은 중국과학원 부원장직을 맡기 전인 10월 22일, 아버지 장쩌민의 인맥을 통해 인터넷회사를 세웠다. 그는 첫 시작에는 폭리를 얻기 위해 신흥 업종에 속하는 이 회사를 세웠지만 나중에는 중국의 인터넷 차단을 목표로 세워놓고 회사를 운영했다.

그러나 해외, 특히 북미 파룬궁 수련자들 가운데는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이에 구속받지 않았다. 그들은 최첨단 기술로 인터넷 차단을 돌파하고 중국내 수련생들과 연락을 취함으로써 중국내 박해 진상을 실시간으로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동시에 국제사회의 성원과 지지 역시 중국내 수련생들에게 알려주었다.

8. 피의 빚은 누구나 한 몫씩

차오스 등 퇴직 간부들은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을 매우 반대했다. 1998년, 차오스는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 국가와 인민에게 백가지 이로운 점만 있을 뿐, 한 가지도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해외 각국 정부가 압력을 가하고 청원자들이 날마다 줄을 잇는 가운데 정치국 회의에서 탄압을 중지하고 파룬궁에 명예 회복을 시켜주자는 목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파룬궁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면 장쩌민은 스스로 잘못을 승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누구나 장쩌민이 탄압을 발동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희생양으로 삼을 사람도 없었다.

이번에도 쩡칭훙이 장쩌민에게 대책을 세워주었다. 그는 정치국 내에서 명예 회복을 시켜주자는 목소리를 없애려면 반드시 탄압의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보이보는 장쩌민에게 6.4사건의 누명을 벗겨주자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만약 정말로 누명을 벗겨 주려 한다면 정권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지금 파룬궁 탄압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진행되지 않았기에 정치국에서 장쩌민을 희생시켜 정권을 빼앗으려 한다고 하면서 세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파룬궁수련자들을 조금 죽여서, 그들의 누명을 벗겨 주려한다면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한다. 둘째, 정치국 상무위원과 일반 위원들에게 사람마다 탄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여 이 사건에 누구나 다 책임이 있게 만든다. 셋째, 파룬따파 연구회를 불법조직이라고만 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하다, 반드시 조치를 취해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은 범죄와 같다는 인식이 들게 해야 한다.”

장쩌민은 이 제안을 받아 들였다. 며칠 뒤, 우관정이 관할하는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