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0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0부패로 군을 다스리니 군부가 호화방탕한 생활로 무너지다

장쩌민은 자신이 군부에서 위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장령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싸운 경험을 갖고 있고 군부 인맥을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이는 또한 장쩌민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은 대군을 통솔한 경력이 있기에 군인들이 기꺼이 복종했지만 장쩌민만은 정치적인 배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었으며 심지어 총 한번 만져 보지 못했다.

정상적인 현대사회 제도 하에서 집권당은 민주 선거를 통해서야 비로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사회상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집권당을 감독하기 위한 것이며 국가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최고 지도자는 탄핵 당할 수도 있다.

그러한 국가들에서 군대는 어느 한 집권당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국가에 속하며 국민의 이익과 국토를 수호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당파 사이의 투쟁과 당 내부의 투쟁은 군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느 당파가 당선되든 군대는 반드시 국가에 충성해야 하며, 헌법 규정에 따라 국가 최고 권력기구의 지시에 복종한다. 이는 서방 민주국가들의 경우 당파 싸움이 극심하지만 국가 정세가 여전히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중국에는 사실 당에 속하는 군대가 있을 뿐, 국가에는 군대가 없으며 군대는 한 당의 사욕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중공은 줄곧 “당 지부를 연대 위에 설립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마오쩌둥도 일찍이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때문에 당내 정치투쟁의 승부는 누가 먼저 군사권을 장악하는 가에 달렸다. 군사권을 완전히 손에 장악하지 못하면 사실 미래를 보장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장쩌민은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쩌민의 방법은 따로 있었다.

1. 관직으로 인심을 매수

군부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진급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를 위해 피 흘려 싸운 영광스러운 공로를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 시대에 원수(元帥)로 봉해진 장군들은 모두 생사를 넘나들며 세운 공훈으로 진급했으므로 매우 소중히 여김과 동시에 긍지를 느꼈다. 평화 시대의 군인들은 실력이나 우월한 조건이 없다면 장군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장쩌민이 올라온 뒤에는 아첨이 군부에서 진급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었다. 장완녠(張萬年), 궈보슝(郭伯雄), 유시구이(由喜貴)의 진급이 바로 그러했다. 특히 47군 군장 궈보슝은 가장 전형적이 사례로, 장쩌민이 낮잠을 잘 때 보초를 선 것 때문에 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군부에서 군인 계급 제도를 회복한 1988년 이래, 중앙군사위에서는 총 96명 고위급 장교들에게 상장(上將) 계급, 경찰관 직위를 수여했다. 1988년 9월 14일, 덩샤오핑은 17명 고위급 장교에게 상장 계급을 수여했을 뿐이었지만 장쩌민은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상장 계급, 경찰관 직위만 무려 79개나 수여했으며 더욱이 소장, 중장 계급은 장난치듯이 마구 수여했다.

그 중 1993년 6월 7일, 장쩌민은 6명 고위급 군관들에게 상장 계급을 수여했고 이듬해 6월 8일에는 한 번에 19명을 상장으로 만들었다.

1996년 1월 23일, 장쩌민은 갑자기 흥이 났던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오늘은 상장 계급을 몇 명에게 수여하면서 즐기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기회가 없어 아첨하지 못했던 주위 사람들이 얼른 좋다고 맞장구를 쳐 그 즉시 4명이 진급하게 되었는데 제2 포병부대 정치위원회 수이융쥐(隋永擧)가 바로 그날 중장에서 상장으로 되었다.

1997년 10월 24일, 장쩌민은 단 하루에 152명 장군을 진급시켰다. 고위급 간부 자제 그리고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장쩌민이 끌어안는 주요 대상으로 되었다. 예를 들면 허룽(賀龍)의 아들 허펑페이(賀鵬飛)는 문혁 4인방이 제거된 후에야 군에 입대해 군인이 된지 십 여 년에 불과했으나 단번에 해군 중장 부사령으로 진급했다. 1997년까지 장쩌민이 직접 진급시킨 장군은 530명이나 되었다.

1998년 3월 27일, 중앙군사위에서는 10명 고위급 장교와 경찰관들을 상장으로 진급시켰고, 1999년 9월 29일에는 2명을 상장으로 진급시켰으며, 2000년 6월 21일에는 16명 고위급 장교, 경찰관들을 상장으로 진급시켰다.

2002년 6월 2일, 또 7명이 상장으로 진급했는데 군부 노장들은 생방송에서 장쩌민이 한쪽 손으로 증서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며 “장쩌민은 최소한도의 상식도 없고 너무 엄숙하지 못하다”라고 분개했다.

퇴임하기 전야인 2004년 6월 20일, 장쩌민은 또 15명 장교들에게 상장 계급, 경찰직위를 수여했으며 그 중에 그의 측근인 유시구이(由喜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진급한 사람들은 그것을 영예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이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심을 매수하기 위한 장쩌민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진급식에서 매우 엄숙하지 못했으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노장들은 모두 능력에 따라 진급했기에 매우 높은 위망이 있었으며 군령을 하달하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의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서로 승인하지 않고 헐뜯으며 명령을 집행할 때도 협력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방해하거나 질투했다. 이런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겠는가? 이런 군대는 아무리 현대화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참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밀수, 부패에 대한 방임

군인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였는데 처음 목적은 군부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였으므로 중공 고위층도 “군부가 군부를 먹여 살리는 것”이라며 칭찬했다. 양상쿤, 왕전 등 군부 원로들도 자주 군부 기업에 격려의 글을 써주었다. 장쩌민은 군사위 주석으로 된 후, 군사권을 통제하기 위해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권력과 군부 경제활동의 허점을 충분히 이용했다. 장쩌민은 군부의 경제 활동을 방종하고 부패를 부추김으로써 군부 인심을 매수하려 했다. 장쩌민은 그들이 끝없는 욕심을 채우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의지하게 하고 감격하게 하려고 했다. 그 결과, 동남 연해에서 해군의 밀수가 해적보다 더 기승을 부렸고, 북방 군인들의 밀수는 마적을 능가하는 등 군부 부패 문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주룽지는 반(反)밀수 회의에서 “1998년 상반기에만 군부가 총과 대포를 쏴서 해관 밀수검거 인원과 공안 무장경찰 및 사법 인원 450명을 사살하고 2,200명을 다치게 했다”고 밝혔다. 그들은 또 군부 기상대의 도움을 받고 총리의 서명을 도용했으며 군사위원회 부주석의 도장까지 마음대로 이용해 20억을 사취했지만 장쩌민이 모두 감싸줬다. 군부의 이러한 부패로 해적, 마적, 지방의 탐관오리들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1998년 7월 26일, 북해함대 군함 4척, 잠수정 2척, 4천 톤급 운반선이, 7만 톤의 정유를 가득 싣고 북유럽에서 출발한 4척의 밀수 유조선을 호위하며 중국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교롭게도 104년 전 갑오(甲午) 해상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등세창(鄧世昌 역주 – 청일전쟁 때 일본 제국주의 해군에 끝까지 대적한 북양[北洋]해군 제독)이 희생된 해역을 통과하다 공안부와 전국해관총부의 12척 밀수검거 경비정에 발견되었다. 경비정이 스피커로 해군들에게 수사에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군들은 중앙 군사위원회, 해군사령부의 명령이 없이는 안 된다고 큰 소리를 쳤다.

양측은 약 15분간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밀수 유조선을 호송한 해군은 상급에 이 긴급 상황을 보고했다. 상급은 감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베이징 군부 고위층에 대책을 물었는데 그들의 명령은 매우 간단하고 단호했다. “포를 쏴버려!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라!”

그리하여 해군들의 군함 한 척이 신속하게 세관과 공안의 경비정을 향해 기관포를 발사했고 이와 동시에 운반선과 기타 군함 3척은 전력을 다해 경비정을 향해 돌진했다. 이 충돌은 59분 만에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 황해 충돌에서 총 87명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극적인 것은 억울하게 사망한 공안과 세관 밀수검거팀 13명 전사들 중에 등세창의 손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흐지부지 끝나고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98년 7월 13일 열린 중공 중앙회의에서 주룽지는, 통일전선부에서 자동차 1만 대를 밀수했고 정치협상회 당조직과 손잡고 23억 2천만 위안을 횡령한 사건을 폭로했다. 군부는 가장 큰 밀수 조직이었다. 같은 해 9월, 전국 밀수 사업회의에서 주룽지는 “최근 해마다 8,000억에 달하는 암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군부가 가장 큰 밀수 조직으로 적어도 5,000억 위안에 달하는 암거래를 하고 있다. 탈세를 거래액의 3분의 1로 계산한다 해도 1,600억 위안이지만 80% 이상이 군부가 아닌 고위급 장령 개인 주머니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군부가 밀수하는 상품은 없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마약까지 있었다. BBC는 2001년 3월 28일, 필리핀 국가안전 보좌관 로일로 골레즈 국장이 “중국 동부 5개 성의 일부 불법 마약 제조공장은 중국 군인들이 경영하고 있으며, 그들은 해마다 필리핀에 약 12억 달러에 달하는 필로폰을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골레즈 국장은 중국이 이를 제지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중국 마약 밀수가 50% 줄어든다면 필리핀 마약 문제도 절반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나중에 필리핀 정부는 여러 번 베이징에 대표를 파견해 장쩌민 아래의 군부가 마약을 수출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협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해방군보’는, “인민해방군은 이른바 ‘서양화 하고 군대를 분열하는’ 외국 적대 세력에 저항할 수 있다. 군대에 침투하려고 시도하는 양주, 여색, 부패한 사상과 문화에 저항한다”고 말했다.

군부 장령들이 돈을 끌어 모으는 지름길에는 밀수 외에 부대 이름을 걸고 장사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난징(南京)부대에는 미사일 부대가 있는데 이 부대의 한 상위(上尉)는 ‘이싱(宜興) 중국인민 창청(長城)회사’를 세우고 불법이득을 많이 주는 조건으로 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대출을 받았다. 결과 상위에 불과한 군인이 3억 위안의 거금을 탐오했다. 군사위 사무실 둥량쥐(董良駒)는 전국 각 명승지에 호화로운 별장 9채를 지었으며 혼자서 고급 승용차 15대를 가지고 있다. 광저우(廣州) 부대 사령관은 군부 자금으로 정원이 딸린 별장 6채와 고급 승용차 4대를 샀다. 군사과학원 부원장은 이탈리아에서 개인주택 인테리어 자재를 12만 위안어치 구입했고, 제2포병부대 부사령관의 가족은 유럽에서 쇼핑하는 데 25만 달러를 소비했다. 또 광저우 부대 고위급 장령 7명은 새 주택에 이사하면서 인테리어에 거금을 쏟아 부었는데 화장실에만 120만 달러가 들었다. 그들은 인테리어 자재를 전부 이탈리아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1998년 11월, 시산(西山) 군사위, 군기율검사위원회 회의에서 츠하오톈(遲浩田)은 “1994년부터 군부 자금과 수입의 80%를 고위급 간부들이 사취했고 군부 지원금 50%이상은 고위급 간부들의 연회, 해외여행, 호화 자택, 고급 승용차 등에 썼다”고 지적했다.

1998년, 군부 지출은 1,311억 위안이었으므로 50%는 655억 5천만 위안이며 여기에 군부 자체 수입에서 횡령한 공금 1,863억 5천만 위안을 합치면 군 간부들의 그 해 탐오액은 군비예산 940억의 2배에 달하는 셈이다. 1999년 3월말까지 군사 검찰기관에 검거된 공금 탐오, 유용, 해외 도피 사건은 큰 사건만 해도 2,170건에 달했다. 소장급 혹은 그 이상 계급 장교들이 거금을 가지고 해외에 도망간 사건은 총 24건이나 되었다.

중앙군사위 장쩌민 주석의 지도하에 군부 장령들은 진급과 횡재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으며 그것도 크고 살찐 토끼였다.

주룽지는 군부 경제활동이 시장을 엄중하게 교란하는 것을 보고 1996년, 이를 중지할 것을 제기했으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98년에 이르러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 주룽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또 다시 장쩌민에게 군부 경제활동을 금지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하여 그해 7월, 장쩌민은 ‘전국 밀수타격 사업회의’에서 군대, 무장경찰, 법률과 공안계통에서 더이상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선포했으며 연말 전까지 정리를 끝내 지방정부에 업무를 넘겨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부를 부추겨 장사를 하게 한 사람도 장쩌민이고 장사를 금지시킨 사람도 장쩌민이어서 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쿤은 ‘장쩌민평전’에서 군부의 경제활동을 금지시킨 것을 장쩌민의 공로라고 크게 치켜 올렸는데 이것은 완전히 흑백을 전도시킨 서술이었다.

장쩌민이 당시 군부를 부추겨 장사를 하게 한 것은 군부에 측근을 배양하기 위해서였다. 장령들을 마구 진급시키려면 주의력을 정규화와 전투력을 제고하는 데 두지 않는 부패한 군부 환경이 필요했다. 군부의 이런 부패하고 혼란한 상태는 군인 경력이 없는 군사위 주석 장쩌민이 군부 내에서 세력을 키우는 데 가장 유리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또 군부의 경제활동이 군부에 더욱 큰 독립성을 가져다주어 군부를 통제하는데 불리할까 봐 두려웠기에 다른 한 편으로는 군부가 경제상에서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를 바랐다. 따라서 군부의 경제활동을 금지시킨 것은 장쩌민에게 있어서 한가지 탈출구였으며 군부에게 자신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몇 해 동안 군부에 배양한 세력은 장쩌민에게 자신감이 생기게 했다. 양 씨 형제가 물러나고 덩샤오핑이 죽자 대권을 독점한 장쩌민은 주룽지의 강력한 요구로 개인 득실을 잘 계산한 뒤, 비로소 이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악영향을 생각해 장쩌민은 또 상습적인 방법으로 정치국 상무위원 후진타오를 내세워 이 일을 처리하게 하고 자신은 뒤에 숨어 있었다. 당시 후진타오는 군사위 부주석도, 군사위 위원도 부총리도 아니었지만 할 수 없이 ‘위험’이 따르는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직접 지명한 제4세대 후계자 후진타오를 목에 걸린 가시처럼 생각했기에 손대기 꺼리는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를 내세웠다. 말로는 '단련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만일 군부가 반발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 후진타오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번에 제4세대 지도자의 명분을 가진 후진타오를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흐뭇한 타산을 하고 있었다. 장쩌민은 이런 수법을 여러 번 했지만 다행이 후진타오는 신중한 성격을 가졌고 또 운이 좋아서인지 권력을 물려받을 때까지 큰 실수도 없이 지나왔다.

그러나 연말이 되자 2만여 개 군부 기업 가운데 실제로 지방 정부에 인수과정을 마쳤거나 인수 중에 있는 기업은 불과 5천여 개 밖에 되지 않았다. 군부 기업은 독립 기업에 속했고 큰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 지방의 공상(工商), 세무 부문의 제약을 받지 않았으므로 자산, 분배, 영리 등 업무가 거의 제도화 된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일단 군부의 이익에 불리하면 여러 가지 수단으로 맞섰기에 조사에 큰 어려움이 따랐다. 진일보 조사를 펼치려면 ‘군사 기밀’을 건드린다는 위협을 받았으므로 대충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엄격하게 한다면 서로 좋은 점이 없었으므로 나중에 겨우 조사해낸 한 가지 사건도 흐지부지하다 마무리 지었다.

3. 돈 때문에 목숨 걸고 싸워

1999년 2월 2일부터 22일까지, 중공은 군부에 연속 3가지 긴급 명령을 내렸다.

2월 2일 국무원, 중앙 군사위의 긴급 명령 내용은 “군부 기업 자금, 자산을 놓고 유혈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제지해야 한다”였다.

2월 8일,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총장비부는 “군부 기업 자금·자산을 쟁탈·할분하는 불법행위를 조사, 처리해야 한다”는 명령을 발표했다.

2월 22일, 국무원, 중앙군사위는 또 긴급 명령을 내려보냈다. “즉시 경제 자금, 재산 쟁탈을 중지하고, 무기로 사건에 개입하는 자를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1998년, 군대, 무장경찰, 공안의 경제활동을 금지시킨 후, 기존 기업의 자산은 군부에서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미 돈에 눈이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진 군대, 무장경찰은 돈을 나누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무력 충돌이 일어나 총과 대포 심지어는 장갑차까지 동원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부패로 군대를 다스리는 장쩌민에게 매수된 군부 고위급 장령들은 당연히 실력으로 진급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도덕이 타락한 사람들에게 총이 쥐어져 있으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 몸서리치는 사례를 몇 가지 들겠다.

광둥 부대 부정치위원과 난하이(南海) 함대 부정치위원은 각각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술집에서 재산을 나누었는데 주하이(珠海) 경비구 군부에서 중재 역할을 해주었다. 술자리에서 쌍방은 오가는 말들이 거칠어지자 술병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당시 맞아서 피를 흘린 사람은 물론 뇌수가 흘러나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광둥 부대 내무부 탕(唐) 처장과 잔장(湛江) 해군기지 정치부 샤오(肖) 주임 두 사람은 피를 과도하게 흘린 데다가 뇌수가 흘러나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제13군 부군장 추이궈둥(崔國棟) 소장은 1998년 11월 28일, 시창(西昌) 부대 내무부 쑹(宋) 부장에게서 2,000만 위안을 받으러 항공기편으로 시창에 갔다가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쑹 부장이 조금 먼저 총을 먼저 빼들었기에 추이궈둥 부군장과 경비원 장궈민(蔣國民)은 그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 일을 알고 깜짝 놀란 총 참모부장 푸취안유(傅全有), 총 정치부 왕루이린(王瑞林) 부주임과 군 내부기율검사위원회 저우쯔위(周子玉) 서기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급히 시창으로 갔다.

또 이런 사건도 있었다. 후베이 셴닝(咸寧) 656공군기지 레이더 기지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 천여 명의 군인들과 헬리콥터 10대가 진화에 동원되었으나 사상자가 많았다. 이 사고는 보복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였다. 1996년 대만 해협에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공을 세운 윈난(雲南) 추슝(楚雄) 미사일 기지 내무부 창고 주임은, 상급이 탐오한 돈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얼마간 챙겼다가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앙심을 품고 1998년 4월 5일, 일요일 군영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창고에 불을 질렀다. 아침에 일어난 불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꺼졌으며 1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중앙 군사위 주석 장쩌민의 지도와 지휘 하에 ‘인민군대’의 지휘관과 전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전쟁터가 아닌 재물 다툼 속에서 죽어 갔다. 이런 사건은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모두 일어났는데 일일이 서술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래에 동서남북 그리고 중부 지역에서 각각 예를 하나씩 들겠다.

동쪽: 화둥(璜)부대 소속 안후이(安徽)성 부대, 허페이(合肥)시 경비구와 안후이성 무장경찰 총 대대는 함께 협력해 회사를 경영했는데 중앙에서 경제활동을 금지하기 전까지는 안후이성 부대에서 재무를 맡았다. 나중에 군부 경제활동이 중지되자 안후이성 부대 사령관이 회사를 인계하기 전에 자산 4분의 3을 혼자 삼키고 나머지 4분의 1만 내놓고 나눠 가지게 했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다른 세 지역 군인들은 안후이성 부대 강당에서 총을 쏘며 혼전을 벌여 장교만 30여 명이 사망했다.

서북: 란저우(蘭州)부대와 간쑤(甘肅)성 부대가 협력해 회사를 경영했는데 1999년 1월 15일, 회사 인계가 눈앞에 들이 닥치자 란저우 부대 사령관은 간쑤성 부대로 병력을 출동시켜 트럭 여러 대로 30여 대 승용차를 약탈해 오게 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간쑤성 부대에서도 군용차와 트럭으로 란저우 부대 075창고에 있는 철재를 털어 오게 했다. 쌍방은 돌아오는 길에서 극적으로 만났고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상대방에게 사격을 해댔다. 이날 충돌에서 총 72명이 사망했으며 그 중 장교 1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남: 쭌이(遵義) 주둔 부대와 구이저우(貴州)성 부대가 260만 위안을 쟁탈하기 위해 군부 건물 안에서 총격전을 벌여 군인 52명이 사망한 외에도 일반인 90여 명이 사상했다.

동북: 랴오닝(遼寧) 진시(錦西)부대와 제2포병부대가 협력해 회사를 경영했는데 회사를 인계하게 되자 진시 부대에서 먼저 50만 위안을 삼켰다. 이를 안 제2포병부대는 전원 출동해 진시 부대를 70여 시간 포위했다. 다행이 미사일은 근거리에서 발사할 수 없었으므로 큰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만 놀랄 대로 놀란 상급 선양(瀋陽)부대 사령관과 제2포병부대 사령관은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으로 정신없이 날아갔다.

1997년 9월 7일 저녁 11시, 선양 경비구, 39군 116사, 랴오닝성 무장경찰 각각 세 부대는 1억 2천만 위안의 이윤을 쟁탈하기 위해 군인 350명, 군용차 37대, 장갑차 2대가 출동해 서로 혼전을 벌였다. 116사에서는 250명 군인이 출동하고 첨단무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장(蔣)부단장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무장경찰들은 무기가 초라했기에 4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서부: 1997년 11월 22일 정오,산시(山西)성 다퉁(大同)시 외곽 시핑(西坪)에 있는 28군 군부 동쪽 1층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졌으며 군 당위 사무실 궁다샤오(鞏大校) 주임을 포함해 총 63명이 사망했다.

중부: 아시아 1위이자 세계 제2위인 허난(河南)성 난양(南陽) 서치(社旗)에 있는 중국공군 비행기 수납센터는 1990년 8월 착공하여 1994년 12월에 준공했으며 총 80억 위안을 투자했다. 이 비행기 수납 건물은 두 층으로 만들어졌고 비행기 출구가 20개 있으며 총 350대의 비행기를 수납할 수 있다. 그리고 지면에는 160대의 전투기, 공격기와 폭격기가 머물 수 있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1996년 8월 3일 저녁 11시, 이 센터의 7호 당직실에서 두 군인이 다른 부대에서 경영하는 회사가 그들에게 준 돈을 나누다 말다툼이 일어났으며 나중에는 총 싸움으로 번져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이렇게 일어난 화재는 더 큰 폭발을 일으켜 이튿날 아침까지 거의 8시간이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공군 사령 위전우(于振武), 총 참모장 푸취안유(傅全有)가 황급히 현장에 달려왔으나 이미 비행기 81대가 훼손되고 90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며 직접적인 군사 손실이 11억 위안에 달했다. 손실된 비행기는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총 5,000대 비행기의 60분의 1에 달했다.

관영 언론들도, 군부의 군사훈련, 기술시험, 실전훈련의 질은 직선 하강하고 있어 군사위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군 기율을 어기거나 법을 위반하는 사건이 급증해 악성 사건(탈영이나 총기를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욱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각 지방 군부의 지출은 부단히 증가되고 있으나 군사훈련, 기술훈련을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대신 ‘장교, 간부들의 다이어트 활동’을 크게 벌여 5kg 이상 살을 빼면 천 위안에서 2천 위안, 7.5kg 이상 빼면 2천 위안에서 5천 위안, 10kg 이상 빼면 5천 위안에서 만 위안의 상금을 주었다. 장쩌민이 이렇게 한심하게 군대를 다스리니 어떻게 전투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4. 호화스롭고 방탕한 생활

‘해방군보’는 2004년 9월 24일 ‘장쩌민 동지가 군부와 국방 사업을 이끈 15년에 대한 논평’이란 문장을 발표했다. 이 문장을 읽어보면 장쩌민이 추진한 일은 결국 “반드시 사상정치 교육을 고도로 중시하고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상, 정치상에서 당중앙과 반드시 고도로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중앙은 장쩌민을 ‘핵심’으로 했으므로 장쩌민의 ‘군부 발전 사상’은 쉽게 말하면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상 정치만 확실하게 틀어쥔다면 다른 문제는 해결하기 쉽다는 뜻이었다.

장쩌민이 이끄는 군부는 전무후무하게 유흥업을 발전시켰다. 총참모부, 총내무부, 총정치부 군관들은 음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으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부의 ‘강철의 장성(長城)’도 부패한 사회의 침식에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총참모부 3부(部) 산하에는 15개 유흥업소가 있었는데 1995년에 비정규직으로 476명의 아가씨들을 모집했다.

군부의 다양한 클럽, 초대소, 요양원, 휴양지들에서 서로 뒤질세라 앞 다투어 군관들에게 호화방탕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2001년 11월 1일, 국무원, 중앙 군사위는 갑자기 “즉시 군부와 경찰 유흥업소를 차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감독소조를 내왔으며 주룽지가 소장을 맡고 츠하오톈, 뤄간(羅干), 푸취안유(傅全有), 저우쯔위(周子玉), 위융보(于永波) 등이 부소장을 맡았다.

그 이튿날, 국방부, 총참모부에서도 “군부 클럽, 초대소, 휴양지 등 업소들의 영업을 중지시키라는 중앙의 명령을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번 행동으로 영업을 중지당한 업소들은 거의 모두 장쩌민이 군사위 주석으로 당선된 후인 90년대 초에 생겨난 것들이었으며 97년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이런 업소들은 특급, 고급, 일반으로 분류되었는데 전국적으로 특급은 약 8곳, 고급은 30여 곳 있었다. 특급 클럽, 호텔, 휴양지에서는 매일 24시간 영업했다. 고급, 일반은 일년 365일 매일 빈자리가 없었다. 군 계급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업소의 등급이 달랐다. 무료회원들은 서명만 하면 한 푼도 낼 필요가 없었다.

특급, 고급 업소들에는 또 의료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전문가 군의관들이 병을 봐줬으며 응급실과 구급차도 갖춰져 있다. 특히 특급 클럽에는 응급 환자용으로 Z-9헬기가 준비되어 있고 내부 시설이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클럽에서 일하는 ‘접대부’, ‘조무사’, ‘간호사’ 등 직원들은 모두 군부 예술단, 간호사학교, 지방 당 기관에서 선발되어 ‘정치심사’를 거치고 다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은 미혼 여성들이었다.

중앙에서 이번에 유흥업소 영업중지 조치를 취한 것은 당원들의 작풍을 개선하자고 한 6중 전회 결의에 따라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당원들과 군부에서 고위급 군관들에게 특권과 향락을 제공하는 이런 업소들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원인도 있었다. 업소에서 아무리 밖에 소문을 내지 않으려 해도 새어 나갈 수밖에 없었고 또 하급은 상급이 하는 것을 따라서 하기 마련이라 많은 지방 부대에서도 유사한 클럽을 꾸려 장교들이 명절이나 휴가 때 방탕한 생활을 누리게 했다. 이런 썩어빠진 기풍은 군인들의 정신력에 엄중한 영향을 주었으며 업소에서는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군부의 훙쉐즈(洪學智), 샤오커(蕭克), 랴오한성(廖澣生), 양청우(楊成武), 양바이빙 등 노장령들은 장쩌민이 망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장쩌민에 의해 갖가지 수단으로 권력을 잃었기에 군대를 좌우지할 수 없었다.

5. 수단을 써 반대 목소리를 제거

일부 위망이 있고, 아직 실권을 쥐고 있는 노장령들은 군대를 부패하게 만든 장쩌민에게 불만이 컸으며 그들의 부하들도 따라서 장쩌민을 우습게 보았다. 장쩌민은 그들을 미워했으나 그들이 연합해 대처할까 봐 두려워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계책을 쓰기로 했다.

장쩌민은 노장령들을 우선 진급시키고 그 다음 즉시 퇴직시켜 권력을 완전히 내놓게 하는 방법을 썼다. 한 등급 올라간 사람은 바로 퇴직 수속을 했으며 그들의 빈자리에는 장쩌민의 측근들이 올라갔다. 장쩌민은 군부에서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기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을 무제한 진급시켰다.

2001년 7월, 장쩌민은 국무원에서 특별 경제지원금을 3등급(50만, 30만, 20만 위안)으로 나누어 당 고위층 간부의 유가족(모두 322명)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8월 중순, 천윈의 부인 위뤄무(于若木), 장원톈의 부인 류잉(劉英), 뤄룽환(羅榮桓)의 부인 린웨친(林月琴), 후야오방의 부인 리자오(李昭), 왕광메이(王光美) 등 50여 명 원로 유가족은 발급 받은 특별 경제지원금을 그대로 중앙 직속기관 당위원회에 바치면서 이름을 밝히지 말고, 대학 입시에 합격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바치지 못하는 서북지구 극빈 학생들에게 줄 것을 요구했다. 나머지 270명 원로들의 유가족들은 ‘특별 경제지원금’을 받고는 많이 얌전해졌다.

2002년 음력설 전야에 쩡칭훙이 부장직을 맡고 있는 중앙 조직부에서는 총 1,700만 위안에서 2,500만 위안에 달하는 자금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장쩌민은 출처를 공개할 수 없는 이 자금을 퇴직 간부들을 돌본다는 명분으로 16차 당대회에서 선거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 주었다. 이번에 돈을 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주고 얼마를 주는지는 모두 장쩌민과 쩡칭훙 두 사람이 결정했다.

고위층 비서들이 폭로한 데 따르면, 이 돈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중요한 직위에 있거나 영향력이 크면서 평소에 장쩌민과 쩡칭훙에게 불만이 있거나 방해가 되는 실권파들이라고 한다.

6. 양상쿤을 죽음으로 몰아

양상쿤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장쩌민이 늘 찜찜해 하자 쩡칭훙도 그를 남겨두면 언젠가 화가 될 것이라며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덩샤오핑이 살아 있어서 그들은 손을 쓸 수 없었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은 죽었지만 92세 고령인 양상쿤은 건강에 큰 이상이 없었다. 그는 장쩌민이 군대에서 장령들을 마구 진급시켜 인심을 매수하고 반대의견이 있는 사람들을 타격하는데 대해 줄곧 불만이 있었으며 늘 원로들의 모임에서 장쩌민을 질책했다. 1998년 하반기 어느 날, 군대 원로들의 모임에서 양상쿤은 또 장쩌민을 질책하면서 그가 군사위 주석을 계속 맡는다면 군부가 철저하게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쩡칭훙이 사처에 사람을 배치했기에 이 말은 장쩌민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쩌민은 양상쿤, 양바이빙 형제가 중공 14차 대회에서 군사권을 잃었지만 군부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간사한 계략으로 자오쯔양과 양상쿤을 잘라버리고 혼자 대권을 독차지한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전 군사위 제1부주석 겸 전 국가주석인 양상쿤이 사람들을 끌어 모아 장쩌민을 공격한다면 장쩌민은 당해내지 못할 것이 뻔했다. 곁에 원로인 보이보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군인 출신이 아니었으며 보이보 자신도 후야오방을 배신한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장쩌민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기회를 이용해 양산쿤을 없애려 후환을 방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나중에 탄로나고 말았다. 2003년 8월 3일, 신화사에서는 갑자기 이상한 ‘뉴스’를 내보냈다. 1996년 겨울, 장쩌민이 중난하이에서 특별 회의를 열고 해방군301병원 남쪽 입원실에 큰 문제가 있다며 온도와 습도를 표준으로 조절할 것을 요청했다. 장쩌민은 평생 군인 생활을 하면서 국가를 세우는데 공로가 큰 원로들이 입원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쩌민이 해방군병원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은, 장쩌민과 쩡칭훙은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병원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중공 원로들은, 대부분 무능한 광대이면서도 공로가 크다고 자처하는 장쩌민을 아니꼽게 보았으며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중공 고위층 내부 회의에서 늘 장쩌민을 질책하고 심지어 따돌림시켰지만 장쩌민은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사람이 늙으면 병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과 동시에 병원을 생각하게 되었다. 장쩌민은 병원을 이용해 원로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동시에 그들의 생사를 자기 손에 장악할 수 있기에 관건적인 시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장쩌민이 특별한 관심을 쏟은 해방군병원은 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가을, 양상쿤은 감기에 걸려 장쩌민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해방군301병원에 입원했다. 양상쿤은 입원한지 얼마 되지 않는 9월 14일 새벽 1시 17분, 갑자기 사망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양상쿤이 사망하자 민간에서는 그가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유가족들은 중앙에 사망 원인을 다시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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