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탈북 재일교포 “지상낙원은 거짓 선전…그곳은 지옥이었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 가와사키 에이코
이윤정
2022년 09월 4일 오전 7:21 업데이트: 2022년 09월 4일 오후 1:21

조총련 ‘지상낙원’ 선전에 속아 북한행
자유 없는 인권 불모지서 43년간 비참한 생활
북송 피해자 구제 NGO 단체 운영
국제재판소에 김정은 제소…손배소송도

17세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栄子)는 일본 니가타(新潟) 부두에서 북한으로 향하는 선박에 몸을 실었다.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부모님에게 1년 뒤 지상낙원 북한에서 만나자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차별과 가난을 벗어나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푼 것도 잠시, 북한 청진항에 도착한 순간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북한은 지상낙원이라고 했던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선전을 믿고 북한행을 택했던 그는 43년 동안 부모 형제와 이산가족으로 살았고, 2003년에 탈북함으로써 이제는 북한에 두고 온 자식들, 손자들과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다.

열일곱 살 소녀는 어느새 80세 할머니가 됐지만, 지금도 날이 어두워지면 북한의 참상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 2세다. 탈북자들과 일본인들로 구성된 NGO 단체 ‘모두 모이자’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지난해 7월 한국어로도 출간된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日本から北に帰って人の物語)’ 저자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발이 묶였다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를 9월 2일 만났다.

 

17세, 혼자 북한으로

일본 도쿄의 조총련 중앙본부 건물 | 연합뉴스

가와사키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총련 간부가 그의 집을 방문해 조총련계 고등학교에 재일 교포 학생들을 위한 김일성 장학금 제도가 있다며 진학을 권유했고, 가와사키는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 시험을 거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해 무료로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김일성 장군 노래를 가르쳤지만, 가와사키는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개인을 숭배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북송선을 타게 된 경위는 무엇인가요?

“선생님들이 ‘북한은 지상낙원’이라고 끊임없이 가르쳤습니다. 세금이 없고 무상의료·무상주택·무상교육이 제공된다고 했어요.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재일 교포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북한은 지상낙원이니 우리 모두 북한으로 갑시다’라고 선전하는 사업에 동원됐습니다.”

가와사키는 이러한 선전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선전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게 훗날 큰 위안이 됐다”고 했다. 자신의 선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북한으로 와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됐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거나 사망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서다.

“우리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전라도가 고향입니다. 북한에 아무 연고도 없는 제가 북한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주의가 도대체 뭐길래 세금도 없이 나라를 운영하는지 납득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사회주의를 직접 체험해봐야겠다고 결심했죠.”

-혼자서 북한으로 가는 게 두렵지 않았나요?

“세뇌 교육 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북한이 지상 낙원이라는 선전을 계속 들었기 때문에 혼자서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전혀 걱정을 안 했어요.”

딸의 결심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다. 1년 후 가족들도 북한에 건너와 함께 살기로 약속했지만, 북한의 실상은 일본에서 들은 것과 너무나 달랐다. 가와사키는 부모님에게 ‘(당시 초등학생이던) 동생이 결혼하면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 북한행을 막았고 결국 40년 넘게 부모 형제와 떨어져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했다.

-북한에 도착했을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멀리 북쪽 땅이 보이자 귀국자들은 갑판에 나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청진항에 도착했을 때 배에 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듣던 북한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암흑이었고, 환영 나온 사람들은 꽃다발을 들고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야윈 얼굴은 새까맣고 까칠했다. 양말조차 신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허름한 천으로 만든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 신발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천으로 만든 신발 밖으로 발가락이 튀어나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거지 떼 같았다. 누군가 북한 군인이 못 알아듣게 일본어로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북한으로 가기 전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가난했고 차별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진입하기 전이라 특히 재일 한인들의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재일 교포라고 하면 고용하지 않아 육체노동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1945년 해방 후 200만 명이 넘는 재일 한인 대부분이 귀국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본에 남은 교포가 약 60만 명이었습니다. 1960년대 북한은 6·25 전쟁으로 잃어버린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재일본 조선인의 북한 귀환사업을 추진했어요. 당시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영향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일본은 북한의 귀환사업을 환영했습니다.”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됐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니가타 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은 총 9만3340명. 이 중에는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북한으로 간 재일 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다.

그곳은 생지옥

1971년 5월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약 3년반 만에 재개된 가운데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 조선인을 태운 토볼스크호가 북한을 향해 출발하려고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 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사람들이 특히 많았고 경제적 조건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병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로 위험분자로 취급당하며 차별과 감시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가 체험하고 지켜본 북한의 현실은 2007년 출간한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에 실린 8편의 이야기에 담겼다. 한국어판은 지난해 7월 30일 출간됐다. 이름과 장소를 바꿔 소설 형식으로 썼지만 모두 귀국자들의 삶을 기록한 실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굶주린 아이들은 석탄과 진흙을 이긴 골탄을 껌처럼 씹는다 △창문도 없는 열차는 화장실까지 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꽉 들어차 용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 △자살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비방이자 배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간 후 43년 동안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당시 조총련계 학교에 다니던 학생은 북한 고등학교에 바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함흥시 화학공업대를 졸업하고 기계공장에서 설계 엔지니어로 근무했습니다. 월급은 겨우 배급받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만 지급해주더군요. 나머지는 국가가 수탈하는 거죠. 세금 없는 나라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됐습니다.”

모든 자유가 보장된다는 조총련의 설명과 반대로 북한은 아무런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그야말로 인권의 불모지였다. 생지옥에서 보낸 40여 년의 생활은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다.

“북한은 조선 봉건사회로부터 직접 일제 식민지를 거쳐 소련의 의도에 따라 김일성이 투입됐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한 번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맛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구조를 인간 사회의 상식으로 당연시했고,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 세습이 이뤄져도 그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탈북을 결심하신 이유는요?

“한국에서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자 북한도 김정일 주도로 이듬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2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행사였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 이 때문에 북한 경제는 어려워졌습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식량 배급을 중단했고 대량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문을 열고 나서면 길가에 나뒹구는 시체를 건너뛰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한편으로는 핵 개발을 하면서 막대한 돈을 들여 지금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태양궁전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걸 보고 이 땅은 외부로부터 영향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고 더는 이 땅에 머무르는 의미도, 필요도 없어졌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탈북 과정은 어떠했나요?

가와사키 씨는 “일상적으로 중국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 탈북은 어렵지 않았다”며 “운이 좋았다”고 했다. 일본인처럼 치장한 가와사키 씨는 브로커에게 비용을 2배로 지불하고 안전하게 국경을 넘었다. 2003년 3월 중국으로 간 뒤 이듬해 일본에 입국했다.

“해외, 특히 일본 사람들에게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그 후에 무언가 협력을 얻는 게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탈북 결심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우선 자유세계로 나가서 자식들을 데려오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탈북 후 일본으로

가와사키 씨는 “공산당과 공산주의 사상 자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인류가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임호/에포크타임스

-탈북 후 왜 남한으로 오지 않고 일본 국적을 취득하셨나요? 일본 이름을 쓰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이런 활동을 하면 언젠가 위험이 닥칠 수 있기 때문에 한국보다는 저와 직접적 연고가 있는 일본이 저를 뒷받침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일본 내에서 일본 국민으로 활동해야 일본 정부가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반도가 통일되면 한국 국적으로 바꿀 겁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가와사키 씨는 일본어를 모르는 탈북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는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이 있지만 일본에는 그런 기관이 없어 은행 계좌 개설, 교통기관·병원 이용 방법, 쇼핑 등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1959년 12월 14일부터 1984년까지 실시된 북송사업의 부당성과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는 활동과 함께 그 구제를 위한 협력을 호소해왔다.

-대표를 맡고 계신 ‘모두 모이자’는 어떤 단체인가요?

“2014년 발표된 유엔(UN)의 ‘북한인권보고서’를 접하고 북한 인권문제를 연구, 행동하기 위해 그해 11월 14일 결성한 NGO 단체입니다. ‘모두 모이자’는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참하겠다는 분들은 다 같이하자는 뜻입니다.”

2014년 2월 유엔조사위원회(COI)는 식량 위기와 정치범수용소에서의 고문과 학대, 인접국 국민들의 납치 등 북한의 인권침해를 ‘반인륜 범죄’라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같은 해 3월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책임자에 대한 제재와 국제형사사법체계에 회부할 것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은 이러한 결의안 채택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3명의 탈북자를 극비리에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 초대해 정보의 진위 등을 조사했다. 가와사키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북한의 가혹한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법으로 북한을 다스리고자

도쿄지방재판소가 입주한 재판소 합동청사 | 연합뉴스

-2015년 일본변호사협회에 인권 구제를 신청하신 배경은 무엇인가요?

“법을 통해 북한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진행한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2015년 1월 15일, 저를 비롯한 탈북자 10명과 재일교포 1명이 일본변호사연합에 인권구제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북송사업에 관여한 북한정부·일본정부·조총련·북한적십자·일본적십자·적십자국제위원회 등 6개 기관을 피고에 포함했습니다. 그리고 2가지를 요구했습니다. 그 옛날 실시된 북송사업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밝히라는 것, 당시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 2세·3세까지 일본만이라도 좋으니까 왕래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018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김정은과 허종만을 제소하셨습니다.

“두 번째 법적 조처였는데 2018년 2월에 국제변호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서 북한 김정은과 조총련의 허종만을 제소했습니다. ‘모두 모이자’ 단체가 아닌, 저 개인 이름으로 제소한 이유는 그 어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나 독재자도 단 한 사람의 자유와 민주주의도 짓밟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하셨죠.

2018년 8월 20일, 가와사키 씨를 포함한 5명의 원고는 “북한에서 가혹한 생활을 강요당했다”며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북한 정부를 상대로 1인당 1억 엔(약 1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대한 첫 재판이 지난해 10월 14일에 열렸다.

지난 3월 23일 도쿄지방재판소는 “북한이 조총련과 함께 북한 상황에 대해 사실과 다른 선전으로 (북한행을) 권유했다”고 인정했으나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는 기각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있지만, 제소 시점에서 배상 청구할 수 있는 20년의 제척기간(법률상 권리 존속 기간)이 지나 원고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이미 소멸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아울러 재판부는 원고들이 북한에 부당하게 억류됐고 가족의 출국이 방해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일본 재판소가 관할권을 갖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가와사키 씨는조총련의 거짓 선전에 대해선 유죄로 판결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재판에서 이긴 것이라며기각된 부분을 포함해 항소했다. 최고재판소까지 갈 각오가 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인권 문제는 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법적 조처를 하는 이유가 있나요?

“탈북자들이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호소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법으로 대응해야 북한 체제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통일 꼭 이뤄야

평생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는 가와사키 씨는 “통일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임호/에포크타임스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 소식은 아시나요?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지만, 저의 탈북으로 자식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탈북할 때 자식들을 자유세계로 데려온다고 결심했지만, 그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북한이 무너져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전 살아서 북한을 무너뜨리고 기어코 가족을 만날 겁니다.”

-남은 생애에 꼭 이뤄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한반도 통일이죠.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 평화가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을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건 북송된 사람들의 이산가족 문제는 한국의 천만 이산가족 문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북한이나 공산주의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공산주의 사회가 평등하다는 선전에 현혹되지 말고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처절하게 경험했듯이 계획경제는 성립될 수 없고 공산주의·사회주의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모두 사람을 죽이기만 했지 살리지 않았습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장기 적출 같은 게 자행되고 있고,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목숨이 어떻게 되든 알려지지도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 이런 것들이 더는 존재해선 안 됩니다. 공산당과 공산주의 사상 자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인류가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