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닝의 계략(하) ‘中공산당, 세계 지도자 되는 길’ 설계… ‘망국으로 이끄는 주범?’

Lin Xin
2019년 6월 25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20일

(상편에서 계속)

중국 공산당 브레인인 왕후닝(王滬寧)은 맨 처음 개혁파 인물 자오쯔양(趙紫陽)의 눈에 들었다. 이어서 ‘부패치국(腐敗治國·부정부패로 국가를 통치함)’을 전략으로 내세운 장쩌민(江澤民)에 의해 중용됐고, 또다시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발탁됐다. 그는 지금도 여러 회의 석상에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 자격으로 시진핑(習近平) 옆에 달라붙어 있다. 그의 아첨과 변신술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왕후닝은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생각을 포장하는 데 능하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중국 공산당 내부의 언어로 표현해 낼 줄 알며, 그 생각들은 결국 정책이 된다. 한 언론은 “왕후닝의 역할을 정확히 말하자면 지도자의 ‘정치 분장사’로, 저질 정치를 그럴듯 하게 보이도록 집행한다”고 정곡을 찔러 표현했다.

왕후닝은 총서기 3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린 뒤 그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정책안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최대의 기득권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왕후닝은 자신이 내놓은 정책과 이념들이 앞뒤가 맞든 안 맞든, 심지어 후세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오쯔양 집권 때는 ‘개혁’ 내세우던 왕후닝, 장쩌민 때는 ‘안정’ 주장

1986년에 발표한, 개혁을 호소하는 왕후닝의 정치적 관점은 현재의 ‘시진핑 사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참고로 당시 총서기 자오쯔양은 중국 공산당 개혁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1986년 왕후닝이 쓴 <‘문화개혁’에 대한 반성과 정치체제의 개혁>이라는 제하의 글을 보면, 마오쩌둥(毛澤東)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대기근으로 4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문화혁명’으로 2천만 명이 괴롭힘을 당해 죽었다”고 공개적으로 표현했고, “우리에게도 장징궈(蔣經國) 같은 지도자가 있어 민주 헌정을 추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또한 “중앙집권제가 공산당을 해치고 망쳐놓았다!”고도 했다.

당시 왕후닝의 이 같은 관점들은 덩샤오핑(鄧小平)과 자오쯔양의 관심을 끌었으며, 자오쯔양의 담화와 문건에서도 그의 관점이 드러났다. 또한 그는 시사 잡지 ‘반웨탄(半月談)’의 표지 모델로 선정돼 문선(文宣·문화선전)을 주관했던 쩡칭훙(曾慶紅) 당시 상하이 시위원회 부서기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왕후닝이 마오쩌둥을 비난한 이 글 때문에 ‘우여우즈샹(烏有之鄉·중국의 좌파 사이트)의 ’마오쩌둥 좌파(毛左)‘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를 ’반마오분자(反毛分子·마오쩌둥을 반대하는 사람)‘로 보고 있다.

‘6.4’ 톈안먼 사태 시기, 특히 1989년 중국 공산당의 <4·26 사설>이 나온 이후, 왕후닝은 학생운동의 반대편에 섰다.

1989년 4월, 베이징 학생 시위에 영향을 받은 상하이 푸단(複旦)대학에서도 단식, 강연,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에 참여한 젊은 교직원들이 청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베테랑 교수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왕후닝에게도 찾아갔으나 왕후닝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위 반대 문서에 서명했다.

‘종람중국(縱覽中國)’의 천쿠이더(陳奎德) 편집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왕후닝의 행동은) 자신이 학생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입장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 사건으로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장쩌민은 상하이 학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은 탄압을 반대했지만 왕후닝만은 공개적으로 탄압을 지지했다. 그의 발언은 장쩌민과 쩡칭훙에게 극찬을 받았다.

1989년, 장쩌민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된 후, 왕후닝은 첫 논평에서 ‘안정 강화가 최우선시돼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의 논평에서 왕후닝은 또다시 “민주 정치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우리나라 현 단계의 조건을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며 “정치체제 개혁과 민주정치 추진에는 통일되고 안정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왕후닝의 이 견해는 중국 공산당 권력을 갓 장악한 장쩌민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졌으며, 장쩌민이 정치체제 개혁을 거부하는 구실로 삼을 수 있었다.

1995년, 우방궈(吳邦國)와 쩡칭훙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후닝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로 자리를 옮긴 후, 당시 중난하이(中南海·중국 권력자들의 집무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가장 잘나가던 브레인 텅원셩(滕文生) 밑에서 일했다. 장쩌민은 왕후닝을 베이징으로 데려온 후, 왕후닝에게 “만약 네가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와 중난하이 무리는 사이가 틀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을 통해 장쩌민과 그의 파벌 무리들이 왕후닝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왕후닝, 장쩌민 비위 맞춰 ‘3개 대표론’ 만들어

장쩌민 집권 초기, 중국 안팎의 환경은 모두 중국 공산당에 불리했다. 1989년 이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 해체됨으로써 중국 공산당은 이론 선전상의 근거를 잃었고, 1989년의 ‘6.4’ 톈안먼 탄압과 1999년의 파룬궁(法輪功) 탄압으로 중국 사회가 어수선해졌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南巡) 후, 중국 공산당은 ‘경제중심주의(以经济建设为中心)’에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대규모 부패 바람이 이미 일기 시작한 뒤였다.

왕후닝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희망은 통치의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경제성장이라고 여겼다. 왕후닝은 장쩌민의 취향을 고려해 2000년 이후 장쩌민을 도와 ‘3개 대표론(三個代表論)’을 만들었다.

‘3개 대표론’ 가운데 ‘중국 공산당은 중국 선진사회 생산력 발전의 요구를 대표한다’는 이론은 자본가들도 입당 가능하며 중국 공산당원들도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쩌민의 ‘소리없이 떼돈을 버는’ 생각과 딱 맞아떨어졌다. 또한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고 한 이상, 중국에 어떤 정치체제 개혁과 선거, 정당 교체가 더 필요하겠는가? 이는 장쩌민을 도와 중국 공산당 집권 합법성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그러나 왕후닝의 이 ‘3개 대표론’은 중국 공산당의 근본주의와 모순된 것이어서 장쩌민은 한동안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큰 압박을 받았다.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르주아를 타도하는 것인데, 장쩌민이 부르주아의 입당을 허용한 것은 중국 공산당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다.

2001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데다 중국 공산당의 ‘3개 대표론’까지 더해지면서, 부패해진 각급 관리들은 돈벌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GDP를 끌어올렸고 중국 경제도 한동안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현재 해외 학자들이 당시 중국 경제발전의 병폐를 되짚어볼 때, ‘저(低)인권, 저(低)환경, 저(低)도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제18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은 반(反)부패 운동으로 성부급 이상 고위관리 수백 명을 잡아들였다. ‘3개 대표론’ 출범 이후 몇십 년 사이에 부패 고관의 수가 이렇게까지 많아진 데는 중국 공산당이 ‘당원들은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장쩌민 일가가 부패에 앞장섬으로써 부패를 방임했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의 말을 빌리면, 중국 공산당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오늘날 중국 사회의 빈부 격차와 사회 대립이 심각해지고 부패 바람을 막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모두 당시 장쩌민의 정책과 직결된다. 이것이 항간에 장쩌민을 ‘중국 부패 총감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2002년, 장쩌민이 총서기직을 내어줄 때 왕후닝은 중앙 정책연구실 주임이 됐다.

왕후닝의 눈에는 ‘무능력한’ 후진타오

후진타오 집권 시기, 왕후닝이 후진타오를 도와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과 ‘조화사회(和諧社會)’를 내놓은 것도 사실은 후진타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과학발전관’은 ‘3개 대표론’이 만들어낸 ‘광적인 발전’의 부작용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각급 관료들이 GDP를 끌어올릴 때, 무턱대고 마구잡이로 하거나 중복 건설을 할 수 없으며 ‘과학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왕후닝은 또다시 후진타오를 도와 ‘조화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2004년 9월 19일, 왕후닝은 중국 공산당 16기 4중전회에서 ‘사회주의 및 조화사회 구축과 건설’이란 개념을 제시했고, 후진타오는 이를 중국 공산당 사회 발전 전략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 개념이 나온 데는 여러 배경이 있다.

첫째, 중국 공산당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흡수하고 그들과 타협해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조화로운 공존‘과 ’부패분자와 민중 사이가 화기애애한 국면‘에 도달해야 했다.

둘째, 장쩌민 집권 시기의 ‘공동체’ 개념이 심화한 점이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이 개념은 갑자기 ‘조화사회’로 바뀌었다가 시진핑 집권 시기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인류운명공동체 구축’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3단계 전략을 반영한 것으로, 장쩌민 집권 시기는 개념 형성 시기였고, 후진타오 시절은 중국 공산당이 ‘공동체’ 개념을 국내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진핑 집권 후, 왕후닝은 이 ‘공동체’ 개념을 중국 공산당의 국제적 정책으로까지 확장해, 중국 공산당 영구 집권의 목적 달성을 위해 세계 각국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관계를 이루려 하고 있다.

이 개념이 나온 또 다른 배경은 당시 중난하이에서 후진타오의 입지가 약했다는 점이다. 왕후닝이 보기에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인 후진타오는 중난하이에서 영향력이 약했고, 오히려 장파(江派·장쩌민 계파)가 강했다. 왕후닝이 내놓은 이런 개념들은 후진타오의 ‘문제 삼지 않으려는’ 사고에 순응한 셈이다.

중국 공산당의 ‘인류운명공동체’에 관한 내용은 ‘왕후닝의 계략(상)’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조화사회’라는 말이 나오자 네티즌들은 ‘조화’를 전형적인 속임수라고 평가했다. 이때부터 인터넷상에서 발언이 삭제되거나 홈페이지가 차단되거나 토론이 금지되기만 하면, 네티즌들은 ‘조화롭게 됐다’거나 ‘허셰(河蟹·검열당해 삭제되다)당했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이는 왕후닝이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것을 막진 못했다.

시진핑 집권 후 또다시 ‘정치색’을 바꾼 왕후닝

2012년 12월, 시진핑은 ‘제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직을 얻자마자 광둥(廣東) 남순에 나섰고, 선전(深圳) 롄화산(蓮花山)에 가서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했다. 당시 언론은 시진핑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길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외부 언론은 그 후 시진핑이 장쩌민파 및 다른 정적들을 대상으로 반부패 및 숙청을 이어가면서 그의 언행도 점점 중국 공산당 근본주의로 회귀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2013년의 ‘7불강(七不講·다뤄선 안 되는 7가지)’에서부터 2017년의 ‘불망초심(不忘初心·초심을 잊어선 안 된다)’에 이르기까지 시진핑 정권의 이론은 점점 ‘좌편향’ 돼갔다. 사람들은 지금의 시진핑이 처음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할 때의 시진핑과 왜 딴 사람 같은지 궁금해한다. 그 안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현재 시진핑 정권의 정치구조와 발언을 살펴보면, 사실 왕후닝이 초기 논평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많이 엿볼 수 있다.

왕후닝은 1988년 3월의 ‘푸단쉐바오(複旦學報)’에 ‘현대화 과정 안의 정치 리더십 방식 분석’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기고한 바 있다. 왕후닝은 이 글에서 ‘민주’나 ‘분산’의 지도체제가 아닌 ‘집중’의 정치 양식을 취하면, 정부가 ‘사회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급속한 경제 성장을 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통일된 리더십은 각종 다른 관념과 견해가 불필요하게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도 했다.

2017년, 왕후닝이 단독적으로 설계한 ‘시진핑 사상’이 중국 공산당 당장(黨章·당헌)에 삽입됐다. ‘제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정권은 중국 공산당원들에게 ‘초심을 잊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미·중 무역전이 한창이던 지난 5월에도 정치국 회의에서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이 ‘초심을 잊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왕후닝의 개념은 이론적으로 모두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중국 공산당 창당 당시 이른바 ‘초심’에는 부르주아 계급을 없애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해 5월, 시진핑 정권의 최고 정책결정자들은 <공산당선언>을 단체로 공부했다. <공산당선언>의 핵심 주장은 사유제 폐지다.

2000년 전후로, 왕후닝이 장쩌민을 도와 만든 ‘3개 대표론’에는 자본가가 입당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왕후닝이 ‘정치색을 바꾼’ 것이다. 왕후닝이 시진핑을 도와 만든 개념들은 그가 장쩌민을 도와 직접 만든 ‘3개 대표론’의 일부를 또다시 부정한 것이다.

왕후닝이 시진핑을 도와 설계한 ‘중국 공산당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세계 리더가 될 수 있는 길’로 인해 시진핑이 국제적으로 곳곳에서 충동했고 미국은 중국 공산당을 저지하기로 했다.

중국 공산당 총서기 3대에 걸쳐 비위를 맞춰 온 왕후닝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지금의 왕후닝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시진핑 옆에 앉아, 자신의 혀끝에서 나온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죽음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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