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아오린피커’ 中 베이징, 지하철 안내판 교체

류정엽 객원기자
2022년 1월 7일
업데이트: 2022년 1월 7일

영어 지우기 나서…2008년 하계 올림픽 때와는 정반대

‘세계인의 큰 잔치’ 올림픽 개최를 앞둔 중국의 손님맞이 준비에서 시대를 역주행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1300만 인구를 전면 봉쇄한 도시 시안에서는 먹거리 부족으로 게임기로 라면을 맞바꾸는 등 원시 물물교환이 등장하더니 표지판의 영어마저 중국식 영어로 변하고 있다.

이를 두고 국제화를 향한 올림픽이 아닌 세계의 중국화를 향한 올림픽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베이징 거주 주민들은 지하철에서 미묘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국 베이징이 지난달부터 표지판 교체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표지판에 알 수 없는 영어가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보통 표지판에는 중국어와 영어를 병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 중국 베이징에서 교체작업이 이루어지는 표지판에는 보편적인 영어 단어 대신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한어병음 표기가 씌였다.

병음은 영어를 이용해 중국어 발음을 나타내는 표기법이다. 실례로 베이징역에서 ‘역’의 영어가 ‘스테이션’(station)이 아닌 ‘잔’(zhan)으로 바뀌었다. 잔은 역을 의미하는 중국어 ‘站’의 병음표기다.

올림픽파크(Olympic Park) 역시 영단어 ‘올림픽’의 중국식 발음인 ‘아오린피커’ 뒤에 공원(公園)이라는 한자의 중국식 발음인 ‘궁위안’을 붙인 아오린피커 궁위안(Aolinpike Gongyuan)으로 표기됐다.

마찬가지로 베이징 공항 제2터미널은 ‘터미널2’(Terminal 2)에서 ‘2하오 항잔러우’(2Hao Hangzhanlou)로 바뀌었고, 빈하이(濱海)국제공항 방향을 뜻하는 표지판은 ‘To BINHAIGUOJIJICHANG’으로 됐다. 무엇을 써놓은 것인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기왕 바꿀 것이면 방향을 나타내는 영단어 전치사 ‘투(to)’는 왜 그대로 남겼냐며 병음식 표기에 중국식 엉터리 영어인 ‘칭글리쉬’까지 섞인 혼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지 주민들도 새로운 영어 표기에 낯설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입장에서 이를 보면 이해할 수 있겠냐며 그냥 영어로 표기하면 될 것을 돈 들여 병음표기 간판으로 교체하는 당국의 방침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베이징지하철공사 측은 “베이징 지하철역 이름 번역을 위한 새로운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중국어 지명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외국인을 위한 것인데, 이를 병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실효성에 대한 지적이 쏟아졌다. 중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게 아니라 병음으로 번역했다는 비웃음도 이어졌다.

관영방송인 CCTV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CCTV는 중앙텔레비전방송국을 뜻하는 ‘차이나 센트럴 텔레비전’(china central television)의 각 단어 첫 글자를 모은 것인데, 새 규정에 따른다면 ‘중궈중양뎬스타이’(中央電視台·ZhongYangDianShiTai)의 첫 글자를 따서 ZZDS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당 기관지 광명일보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신문은 “중국인은 중국어를 읽을 때 병음 표기가 필요하지 않다”며 “외국인 대부분이 병음 표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중국 당국은 이번 표지판 변경이 베이징 동계 올림픽과 관련 있다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올림픽을 겨냥해 이러한 작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다만, 외국인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부 선전 의도가 깔렸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내부적으로 ‘중국몽’을 내세우고 서구문화를 배척하는 등 애국주의를 자극해 정권 안정을 꾀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어 종주국들과 대립하고 있다.

미국·영국·호주는 중국을 겨냥한 인도태평양지역 외교안보 3자 동맹인 ‘오커스’(AUKUS)를 지난해 출범시켰고,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즉, 베이징 당국의 표지판 교체 작업에서 영어에 대한 배척, 더 나아가 서구에 대항한 이념 전쟁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게 중화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러한 중국의 반(反)영어 움직임은 지난 2008년 치러진 베이징 하계올림픽 때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당시 당국은 표지판, 공공장소에 잘못 표기된 영어를 바로잡고자 했고 외국인 방문객을 위해 중국인들에게 영어를 배우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은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을 세계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중국화하려는 의도로 엿보인다. 올림픽을 통해 중국을 세계인이 찾아오는 국제무대 중심으로 치켜세워 경기하락, 물가상승, 실업난 등 내부 불만을 잠재우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자국민의 외국 문물 수용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는 중국에서 이미 실행 중이다.

영어 교육을 축소한 것이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상하이의 경우 지역 지난해 초등학교 기말고사에서 영어시험을 금지했다. 그 대신 ‘새 시대를 향한 중국 특성과 사회주의에 대한 시진핑 생각’이라는 교과서를 읽게 했다. 영어보다 공산당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은 2020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해외 교과서 사용을 금지했다. 외국 언어와 사고방식 등을 아동·청소년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병음은 1958년 2월 11일 중국 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정식 도입됐으며 2001년 1월 시행된 ‘국가통용어언문자법’을 통해 법률적 지위를 보장받게 됐다.

알파벳에서 차용한 발음체계인 병음 도입에 대해 중국은 문맹 퇴치, 대외교류 증진, 56개 소수민족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외국인들도 중국에서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는 병음으로 배운다.

1950년대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배우기 어렵다는 구실을 내세워 한자를 폐지하고 병음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를 폐지하면, 사투리와 방언이 많은데도 한자를 통해 통합된 여러 민족이 오히려 분열하거나 문화유산과 단절될 위험이 있어 한자 폐지 방안은 한자를 간략화하는 방안으로 변경됐다. 오늘날 중국에서 간략화된 한자인 간체자가 등장한 배경이다.

다만 간체자 역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전달 기능이 약해지거나 오히려 의미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대만은 원래 한자체(정체·正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홍콩 역시 정체를 사용하며 이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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