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치료 못받아 어머니 사망”…4주 봉쇄 中 시안 비극적 사연

류정엽 객원기자
2022년 01월 24일 오전 10:00 업데이트: 2022년 01월 24일 오전 10:22

대처할 겨를도 없이 하루아침에 ‘위험구역’ 지정
입원 앞둔 말기 암 어머니, 병원 측서 입원 거부
병원서도 치료 못받고 사망…사연 알린 글은 삭제

올겨울 들어 코로나19가 중국을 강타했다. 특히 인구 1300만 명이 거주하는 시안(西安)은 가장 큰 피해 지역으로, 중국 공산당(중공)의 ‘제로’(zero) 코로나 정책으로 인한 도시 봉쇄는 2차적인 문제들을 발생시키면서 2년 전 코로나 발생지인 우한의 모습을 재현했다.

시안은 지난해 12월 9일 첫 확진자 발생 후 40일 만에, 전면 봉쇄 조치를 한 후로는 27일 만에 도시 봉쇄를 부분적으로 해제했다. 18일 시안의 신규 확진자는 0명이라고 국가위생건강위원회가 19일 밝혔다. 시안의 신규 확진자는 175명까지 증가했으나 지난 11~15일 사이 신규 확진자가 한 자릿수로 줄어들면서 안정세를 되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시안 당국은 지난 4일 신규 확진자 수 ‘제로’(0)를 달성하겠다고 강조하면서 당국은 고위험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 집중 격리를 실시했다.

중공의 철통같은 군대식 봉쇄 정책은 2차 문제들을 유발했다.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 부족으로 ‘물물교환’이 성행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방역을 이유로 ‘임산부 유산’, ‘노인 협심증 치료 거부’ 등 안타까운 사연들이 외부에 공개됐다.

이를 두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바이러스 잡으려다 사람 잡는다며 우려하고 있다. 그러자 중공 당국은 당국의 규정을 준수한 민간 병원 두 곳을 처벌했다.

그런 와중에 말기 암 환자의 딸이 중공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낸 안타까운 사연이 인터넷을 통해 전해졌다. 본지 확인 결과, 해당 사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현지 사이트에서는 삭제됐다. 삭제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글쓴이는 암 말기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수년 동안 보살폈지만, 갑작스러운 봉쇄로 어머니가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며 사연을 공개했다.

시간은 2021년 12월 27일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쓴이의 사연을 정리해봤다.

딸은 입원을 하루 앞둔 어머니로 인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시안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1명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딸이 사는 동네가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통제구역 지정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던 그였기에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날 입원하기로 예약돼 있었기에 입원 준비에 신경 썼다.

지난 1월 8일 시안을 방문해 방역현장을 둘러본 쑨춘란 중국 공산당 국무원 부총리 일행 | 웨이보

그런데 돌연 예약한 병원으로부터 입원할 수 없다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환자 거주지가 통제구역으로 지정된 고위험 지역이므로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입원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지를 받고 머리가 하얘진 그는 대체 어느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지 몰라 주치의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2017년 4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해당 병원에서 2년 가까이 진료를 받아 왔다. 어머니의 최근 의료기록은 모두 해당 병원에 있었고, 주치의도 어머니의 병세를 잘 알고 있었다. 병실도 주치의 배려로 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제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딸은 생각나는 대로 지역사회 담당 부서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날 저녁 구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머니의 병세 확인 증명서 발급에 동의한다며 증명서를 끊어주겠다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딸이 직접 어머니가 입원할 병원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봉쇄된 지역 거주민이 입원할 병원을 직접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딸은 신청구(新城區)에 살았고 병원은 가오신구(高新區)에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인접해 있었지만, 관할 구역이 다름으로 해서 방역 정책이 다른 게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딸은 회고했다.

지난 1월 11일 시안시 방역당국이 시내 한 상점가에서 방역작업을 벌이고 있다. | STR/AFP via Getty Images/연합

암 환자는 계속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답답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그저 병원에서 어머니를 받아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딸은 처음으로 시안 자오퉁대(交大) 부속 병원에 연락했다. 병원 측은 어머니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먼저 병원에 직접 가서 등록해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시안시 싼자(三甲)병원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번호가 없었다. 병원이 진료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종양내과 전화번호를 찾았지만, 이상하게도 전화번호가 없었다. 전염병이 발발한 후 많은 병원이 입원 환자를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신규 환자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그는 전했다.

지역사회에서 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려면, 구급차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응급센터 120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단 전화를 걸면 받기는 하지만 담당자 연결은 힘들었다. 평균 200-300번 전화를 걸어야 한 번 연결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그렇게 날마다 어머니가 야위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딸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병세가 악화돼 가는 어머니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복수도 차올랐다. 그렇게 사흘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딸은 잠시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외출하려 했지만 핵산 검사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통제구역인 딸의 동네는 매일 지정된 장소에서 핵산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매일 어머니의 외출 준비를 도왔다. 또한 언제 가게 될지 모르지만 병원에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어머니의 상태가 대소변조차 침실에서 봐야 할 만큼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딸은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어머니가 들을까 봐 전화 통화마저 어머니의 방과 가장 먼 곳에서 해야 했다. 심지어 눈물 닦은 휴지를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입에 넣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고 그는 밝혔다.

그러다 어머니가 쓰러졌다. 딸은 신경이 곤두섰지만 “괜찮아요. 반드시 병원에 곧 갈 수 있을 거예요”라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는 매번 심호흡을 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을 연습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방문을 열었다.

급기야 어머니는 “그만두거라. 치료 안 하면 되지. 전화 그만해라. 집에서 죽는 것도 좋은 거다”라고 말했다. 딸은 가슴이 미어터졌다.

딸은 글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치료했는데, 어머니를 꼭 그렇게 집에서 하늘로 보내야 하느냐”며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서 우리 자신까지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환자의 생명도 생명인데, 그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서 포기해야 하는가”라고 썼다.

그는 “모두가 열심히 노력했지만, 모두가 무능했다. 많은 실무자가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해 내게 전화를 걸어왔고, 심지어 이들의 목소리는 쉰 목소리였으며, 나를 도운 많은 분은 개인 인맥을 통해 도와줬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딸은 모든 것이 임시로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전화를 한 끝에 어머니를 모시고 싼자(三甲)병원에 갈 수 있게 됐다. 이곳은 정형외과, 심혈관, 뇌혈관 전문으로 알려진 곳이었지만 코로나19로 폐쇄된 지역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별도로 마련된 곳이었다.

이곳에 배치된 의료진은 기존의 의료진이 아니라 임시로 특채된 의사들이었다.  그들도 병원 환경에 딸만큼이나 낯설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코로나19 방역으로 봉쇄된 시안의 한 주택단지 출입구와 현장 출동한 방역요원들 | 웨이보

딸과 어머니는 배정된 병실로 갔다. 병실에는 철제 침대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이불은커녕 매트리스도 없었다. 간호사에게 물으니 간호사들은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병실에 1인만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시안의 겨울은 최고 온도가 10도에도 미치지 못해 병원에서는 다운 재킷을 입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야만 했다.

의사는 어머니의 상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병력을 알려 주기 위해 손으로 직접 두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과거 수년간의 진료 차트도, 검사 사진도 없어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병동은 소형 의료 장비만 제공할 수 있었다. CT촬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병원 내 많은 이들은 급히 오느라 많은 것을 준비하지 못했다. 화장지마저 부족했으나 나갈 수도, 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은 갈수록 더 좋지 않았다. 딸은 병원에서 더 큰 문제에 맞닥뜨렸다. 바로 병원에 어머니에게 쓸 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딸의 어머니는 강한 진통제가 필요했다. 또한 증세가 악화되면서 항염증제, 간보호제, 헤파린 등 세 종류의 약이 필요했다. 하지만 병원에는 그중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의사는 바로 보고해 약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언제 도착할지 알 길이 없었다.

임시로 마련된 병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의료보험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았다. 의료보험을 적용받아 1천 위안에 구입할 수 있는 약을 그 10배인 1만 위안 이상을 지불해야 했다.

다행히 며칠 뒤, 어머니가 다니던 병원에서 재개원했다는 연락이 왔다. 딸은 어머니를 그 병원으로 옮기고 주치의에게 맡긴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상황은 점점 좋아졌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여전히 나빠졌다. 어머니는 임종 이틀 전에 정신 착란, 섬망, 환상 등의 증세를 보였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깨어 있었다. 시간 감각을 상실했다. 어머니는 딸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족 중 누가 찾아올지를 물었다.

몸이 허약해진 어머니는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영양제로 생명을 부지하기에 이르렀다.

퇴원 예정일이 다가와 퇴원 수속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피를 토했다.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1월 10일 새벽 1시 혼수상태에 빠졌고, 심전도 기기의 모니터의 선은 직선을 그려가고 있었다.

딸은 이별의 순간임을 직감했고, 그 순간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잃는 감각은 청각이라는 말이 떠올라 어머니의 귀에 대고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말 한마디를 건넸다.

“불편하시면, 그냥 가세요.”

4시간 뒤, 어머니는 그렇게 딸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