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서방에 침투하다 (상)

9평 편집부
2018년 7월 13일 업데이트: 2019년 7월 18일

목차

머리말
1. 폭력 공산주의와 비폭력 공산주의
2. 코민테른, 첩보전, 루머전
3.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에서부터 진보주의까지
4. 서방의 문화대혁명
5. 반전평화운동과 민권(民權)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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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2016년 미국 대선은 최근 수십 년 중 가장 극적인 선거였다. 비록 투표율은 58%로 그리 높지 않았지만, 선거 과정에 우여곡절도 많았고 평범하지도 않았다. 공화당 후보가 대선에서 이김으로써 떠들썩했던 선거전이 잠시 막을 내렸으나, 이어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언론에 쏟아지는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공격 외에도 많은 도시에서 선거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 참가자들은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등의 구호를 내걸었고 새로 선출된 대통령을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배타주의자’ ‘나치 당원’이라며 재검표를 요구했으며, 심지어는 탄핵 절차를 밟겠다고 위협했다.

시위자들은 시위가 자발적이었다고 거듭 주장하지만, 탐사 기자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 누군가가 배후에서 시위를 기획했음을 밝혀냈다. 증언에 따르면 시위를 조직한 것은 좌파 ‘직업 혁명가’들이었고, 이 단체들은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 혹은 독재국가들과 복잡하게 연계돼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두 단체인 ‘노동자세계당’과 ‘자유의 길 사회주의자 기구’는 각각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주의를 신봉하는 공산주의 조직임이 밝혀졌다. 뉴질랜드 정치평론가 트레버 루돈은 일련의 조사 결과에 근거해 다큐멘터리 <포위된 미국, 내전 2017>[1]을 제작했다.

루돈이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충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는 1980년대부터 공산주의 문제를 연구했는데, 공산주의의 목표가 미국에 침투하고 전복하는 것임을 발견했다. 각양각색의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교육과 언론을 장악하고 정계와 산업계로 침투하면서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사회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끊임없이 좌편향, 즉 공산독재 방향으로 이동했다. 바로 세인들이 자유세계가 공산 진영을 격파했다고 환호하는 동안, 공산주의는 서방 주요 국가들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언론을 조용히 장악하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유세계의 등대로서 ‘세계 경찰’이라는 천부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미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 참여해 최후에 전쟁 국면을 반전시켰고, 미국은 또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냉전 속에서 다른 초강대국의 핵무기 위협을 막아냈으며, 최종적으로는 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진영을 성공적으로 무너뜨렸다. 200여 년 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서방의 주요 신앙 체계와 철학 이념을 연구하고 신중한 사색과 토론을 거쳐 불후의 정치학 경전인 <독립선언>과 <미국 헌법>을 편찬했다. 이 두 개의 기초 문헌은 천부인권을 증명이 필요 없는 명백한 진리로 규정함으로써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원칙을 확립하고 분권을 통해 균형을 잡는 공화제도를 확립했다. 이 두 문헌과 예지(叡智)가 있는 수많은 정치인, 그리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미국 시민들이 함께 미국 사회의 평화와 안정, 번영을 200년간 지속되게 했다.

서반구를 장악하지 못한 공산사령(邪靈)은 당연히 안심할 수가 없었기에 동서양을 동시에 아우르는 포석을 깔았다. 사령은 인류를 훼멸하기 위해 인간의 대표를 조종해 먼저 대동사회(大同社會)라는 아름다운 비전을 그려 놓고 다양한 인간 대리인을 선택한 후 다양한 방식으로 궤변과 삿된 설을 퍼뜨림으로써 지극히 교활하게 인류를 훼멸할 계획을 실행했다.

공산사령은 소련과 중국에서는 정권을 탈취하거나 살육하는 방식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사람들의 도덕을 타락시켜 최후에는 인류를 훼멸하려 했다면, 이른바 자유세계라고 하는 서방에서는 변화무쌍한 사기 수법으로 침투해 종교와 문화를 변이시키고 정치, 경제, 사회조직을 통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을 타락시켜 훼멸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서방국가에서는 공산당이 한동안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사령의 대리인들은 부득이 각양각색의 탈을 쓰고 각종 조직과 기구에 침투해 들어갔다. 공산주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네 갈래의 역량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했다.

첫째, 소련의 전복과 침투 방식이다. 소련 초기에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을 설립해 전 세계로 혁명을 수출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의 개혁개방 이후 서방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서방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둘째, 각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전복 활동을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했다.

셋째, 서방의 많은 정부가 경제와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에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각종 변형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서방 사회에서는 과거 수십 년간 끊임없이 좌편향 추세가 나타났다.

넷째, 각 나라에는 모두 공산당의 동조자, 동정론자, 공산당에 이용당하는 대량의 ‘유용한 바보’들이 있는데, 이들은 공산사령이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도구가 됐다. 그들이 공산당과 함께 서방국가 내부의 제5열(fifth column, 공격 대상에 몰래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여론전을 벌이는 ‘지지자’ 혹은 ‘동조자’)이 돼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사회 도덕을 타락시키며 공산 정권을 지원해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 장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공산주의가 서방에 침투하는 과정과 수법을 묘사하고자 한다. 그림이 매우 복잡해 불가피하게 누락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단서만 파악한다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듯이 독자들이 각종 가면을 쓴 공산사령의 마수를 명백히 가려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지면의 제한으로 우리가 주로 미국의 예를 들었지만, 악마의 술수는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고도로 유사한 수법을 쓴다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이 장에서는 공산주의가 유럽에 미친 영향도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 폭력 공산주의와 비폭력 공산주의

수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공산당은 모두 폭력과 갈라놓을 수 없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상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부르짖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관점과 의도를 숨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2]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후의 백여 년 동안, 특히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혁명이 모두 폭력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볼 때 세인들은 공산주의의 또 다른 표현 형식, 즉 비폭력 공산주의를 간과했다.

폭력 혁명파의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을 대표로 한다. 레닌은 두 방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의 구상대로라면 공산주의 혁명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먼저 폭발해야 하나, 레닌은 낙후한 러시아에서도 똑같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닌의 또 다른 공헌은 그의 ‘창당 학설’이다. 레닌은 계급의식과 혁명의 요구가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생길 수 없기에 반드시 외부에서 혁명의 요구를 노동자 계급에 주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업 혁명가들로 구성된 엄격한 기율을 가진 정당을 조직해야 했다. 이 정당은 바로 ‘무산계급 선봉대’ 공산당이다. 레닌의 창당 학설의 본질은 폭력조직과 테러조직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접목해 폭력과 기만에 의거한 공산주의 사기극을 실현하는 길을 설계해낸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고 나서 그 이듬해(1884년) 영국에서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단체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가 탄생했다. 페이비언이라는 이름은 도피와 지연전술로 유명한 고대 로마 장군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에서 유래했으며, 페이비언 협회의 상징은 양가죽을 쓴 늑대다. <페이비언 단평>의 제1기 간행물의 서두에 이런 사훈이 실렸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한니발에게 쓴 작전처럼 많은 사람이 파비우스를 시간만 끈다고 책망했지만, 그는 여전히 극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린다. 일단 때가 오면 파비우스처럼 전력을 다해 출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연히 한바탕 기다렸다가 헛수고만 하는 것이다.”[3]

페이비언 협회는 평화적, 점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그래서 ‘곳곳에 구멍을 뚫는 침투’ 전략을 발명했다. 페이비언 협회는 자기 구성원들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내각 총리, 고위 행정관료, 대기업가, 대학 총장, 주교 등 중요 인물들의 수행원이 되도록 격려하거나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는 단체들에 직접 가입시켜 이런 경로를 통해 그들의 사상을 의사결정권이 있는 인물들에게 주입했다. 페이비언 협회 설립자인 시드니 웨브(Sidney Webb)는 “우리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침투 정책’을 굳게 믿는다. 즉, 우리는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계획을 사회주의를 완벽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의 사상에 주입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사상 속에도 동시에 주입해야 한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자유당인이나 급진주의자들 속에서 이런 선전을 진행할 뿐만 아니라 보수당 사람들 속에서도 이런 선전을 진행한다. 노동조합 운동가와 합작주의자들 속에서도 이런 선전을 진행하고 고용주, 금융가들 속에서도 이런 선전을 진행한다. 기회만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방향에 부합하는 이념과 계획으로 그들을 공격한다.”[4]

페이비언 협회 구성원 중에는 청년 지식인이 많았는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연설을 하고 서적, 잡지, 소책자를 출판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아주 컸다. 20세기가 된 후에 페이비언 협회 구성원들은 정당 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페이비언 협회의 4대 구성원 중의 하나인 시드니 웨브는 갓 성립된 노동당의 전국 집행위원회의 페이비언 대표가 됐다. 그는 노동당 당헌 초안과 강령 초안을 작성하고 각 정책을 지도하면서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당의 지도 사상이 되도록 노력했다. 페이비언 협회는 미국에서도 영향력이 매우 크다. 페이비언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페이비언 사상은 유명 대학의 문과대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5]

레닌의 폭력 공산주의든 페이비언 협회의 비폭력 공산주의든 배후에는 모두 공산사령이 통제하고 있어 궁극적인 목적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따라서 레닌식의 폭력 공산주의도 비폭력적인 수단을 배제하지 않는다. <공산주의 운동의 좌파 유치병(幼稚病)>이란 책에서 레닌은 서구 공산당이 반동적인 노조와의 협력을 거부하거나 부르주아 국가의 의회에 가입을 거부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레닌은 “정치가의 예술은(공산주의자의 자기 임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어떤 조건하에서, 어느 시기에 무산계급 선봉대가 성공적으로 정권을 획득할 수 있을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정권 획득 과정과 정권을 획득한 이후에 노동자계급과 비무산계급 노동자 등 대중의 매우 광범위한 계층의 지지를 얻으며, 또한 정권을 획득한 후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갈수록 많은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쟁취해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확대하는 데 있다”고 했다.[6] 그는 공산당은 반드시 자신의 진실한 의도를 숨겨야 하며,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약속이나 타협도 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바꾸어 말하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 볼셰비키당과 중국 공산당의 정권 탈취 과정에서 그들은 확실히 폭력과 기만, 이 두 가지 수단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비폭력 공산주의 유파도 사실은 폭력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을 사람들은 간과했다. 영국의 페이비언 협회의 대표 인물 중 한 사람인 극작가 버나드 쇼는 “나는 이미 명백하게 천명했다. ‘소득의 평균’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 사회주의 제도하에서 빈곤은 금지된 것이다.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당신은 강제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거주하고,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배치받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품행과 근면함이 이런 대우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명되면 당신은 부드럽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7] 위장에 능한 페이비언 협회는 말주변이 좋은 버나드 쇼를 선택해 비폭력 사회주의의 진실한 목적을 온정이 넘치는 것처럼 포장하고, 최후에야 비로소 흉악한 몰골을 드러낸다. 서방국가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고조되던 시기, 공산당 분자와 그들의 각종 로비 조직, 그리고 선동에 현혹된 청년들이 견해가 다른 언론을 압박하기 위해 사람마다 무서워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때리고 부수고 강탈하고 불 지르고 암살하고 폭파하는 등 폭력수단 사용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공산당과 판박이였다.

2. 코민테른, 첩보전, 루머전

공산주의는 국가가 계급 압박의 도구며 계급사회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을 없앴기에 당연히 더는 국가가 필요 없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은 조국이 없다”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 마지막 부분에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호소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은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한 후 코민테른을 신속하게 수립했다. 이들의 사명은 바로 혁명을 수출하는 것이었고,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각 나라의 합법적 정권을 무너뜨리고 전 세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1921년에 성립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극동지부 소속이었다.

사실 중국 공산당뿐만 아니라 세계 대다수 국가의 공산당은 모두 코민테른의 명령을 따르고 지원과 교육을 받았다. 소련 공산당도 그들의 방대한 제국을 배경으로 세계 각국에서 급진주의자들을 모집해 직업 혁명가로 양성하고 각국에서 전복 활동을 진행하게 했다.

1919년에 성립된 미국 공산당은 코민테른과 소련 공산당의 명령에 따르는 공산당 조직이다. 미국 공산당은 100년 가까운 역사가 있음에도 많은 당원을 보유한 큰 정당으로 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유연하고 변화무쌍한 수법으로 미국 사회의 급진 단체, 급진주의자들과 결탁해 노동 운동, 학생 운동, 교회, 심지어 미국 정부에까지 침투했다. 미국 반공운동의 선구자 프레드 슈워츠(Fred Schwartz) 박사는 “공산당원 수로 따져 그들의 영향력을 판단한다는 것은 마치 구멍난 면적과 온전한 면적을 비교해 선체의 안전 여부를 확정하는 것과 같다. 구멍 하나가 선박 전체를 침몰시키기에 충분하다. 공산주의 이론은 바로 기율이 있는 소수 사람이 나머지 사람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이론이다. 민감한 위치에 있는 사람 한 명이 수천 명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정곡을 찔러 지적했다.[8]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정부 내에 많은 소련 간첩이 있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1954년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의 반공 노력이 묵살되고 좌파의 언론‧정계‧학계가 협력해 은폐함으로써 관련 증거는 줄곧 대중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정부는 2차대전 종전 직전인 1940년대에 미국 정보당국이 해독한 극비 코드 베노너 문서(Venona Files)를 공개했다. 극비 코드에 따르면 미국 정부 내에서 소련을 위해 일한 공작원이 300여 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들 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일부 간첩은 루즈벨트 정부에서 고위직에 올라 민감한 극비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일부는 직권을 이용해 미국의 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원자폭탄 기술과 기타 군사기술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가 전기의자 처형을 당한 로젠버그 부부, 재무부 차관보 해리 덱스터 화이트, 국무부 관료 앨저 히스 등이 있다.

베노너 문서는 빙산의 일각만을 밝힌 것으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가 소련으로 유출됐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부 소련 간첩이 고위직에 포진해 있어 미국 정부의 중요한 결정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열린 중대한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문 앨저 히스는 전후 영토 처리 문제, 포로 교환, 유엔 헌장 제정 등 중대 결정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재무부 장관의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 중 한 명으로, 중요 정책 결정에 많이 참여했고, 브레트 우즈 체제(BWS)의 주요 설계자 중의 한 사람이자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1941년에 국민당을 움직여 공산당 지하당원 지차오딩(冀朝鼎)을 재정부 고위 관료로 임명하게 한 것도 화이트다. 치차오딩이 국민정부를 ‘도와’ 설계한 금원권(金圓券) 개혁이 국민당 정부의 신용을 실추시켰다. 역사학자들은 소련 간첩과 친공분자들의 영향으로 미국이 1940년대 후반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고, 그것이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잃게 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다.[9]

M. 스탠턴 에반스(M. Stanton Evans) 등의 학자들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야말로 소련 간첩이 발휘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10] 한때 미국 공산당과 소련 간첩망에 소속돼 있다가 이후에 바른길로 돌아와 다른 간첩들을 지목한 휘태커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는 “적대국의 대리인이 차지하는 위치는 문서를 훔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해 자국의 제1 주적(主敵)에 유리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일부 특별한 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수없이 많은 일상적인 의사 결정에도 반영된다.”[11]고 했다.

1970년에 자유를 찾아 미국에 망명한 전직 소련 KGB 요원 유리 베즈메노프, 토머스 슈만은 그의 저서와 연설에서 소련이 비밀리에 서방을 전복하는 수단을 폭로했다. 베즈메노프는 제임스 본드의 007과 같은 첩보영화의 영향을 받은 많은 서양인은 소련의 전복 수단 역시 간첩을 통해 정보를 빼내고 교량을 폭파하는 등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KGB의 전체 인력과 물자 중 10~15%만이 전통적인 첩보전에 투입하고, 대량의 인력과 물자는 이데올로기 침투와 전복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베즈메노프는 전복 전략의 과정, 영역, 수단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통상적으로 전복은 4개 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적대국의 문화적 퇴폐와 사기 저하를 조성한다. 두 번째 단계는 국가와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 세 번째 단계는 위기를 조성하는데, 위기는 3가지 국면을 초래할 수 있다. 즉 내전, 혁명 또는 외적의 침입이다. 이 위기 때 공산당은 네 번째 단계를 시작하는데, 바로 이 기회를 틈타 정권을 탈취하고 나아가 국면을 안정시켜 일당 독재국가를 만든다.

베즈메노프의 견해에 따르면 공산당의 침투 목표는 주로 3대 영역이다. ▲사상 영역, 여기에는 종교, 교육, 언론, 문화 등이 포함되고, ▲권력기구, 여기에는 정부, 법원, 경찰, 군대, 외교기구 등이 포함되고, ▲사회생활, 여기에는 가정, 의료건강, 종족, 노사관계 등이 포함된다. 베즈메노프는 ‘평등’의 관념을 예를 들어 공산당이 어떻게 문화 침투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혁명의 적기를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했다. 첩보원들은 각종 방식으로 ‘절대 평균주의’를 선전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경제 상황에 불만을 품게 한다. 불만이 커지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고,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쳐 연쇄 파업과 경기 침체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사회가 불안해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급진적으로 변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다. 전면적인 위기가 폭발하면서 혁명 또는 외국 침략의 기회가 무르익게 된다.[12]

1978년 서방으로 망명한 전 루마니아 내무부 장관 및 해외정보국 최고책임자인 이온 미하이 파체파는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당 국가들의 대규모 심리전, 루머전 책략을 더욱 전면적으로 폭로했다. 파체파는 루머전의 목적은 대중이 문제를 들여다보는 기본적인 틀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리적으로 개조되면 진실을 직면해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어 ‘유용한 바보’가 돼 버린다는 것이다.[13]

베즈메노프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첫 번째 단계를 일반적으로 한 세대가 교육을 받는 기간인 15~20년이라고 했으며, 두 번째 단계는 2~5년, 세 번째 단계는 3~6개월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1984년 그는 연설에서 첫 단계는 이미 완성됐고, 그 효과가 소련 당국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좋았다고 했다.

구소련의 수많은 간첩 및 정보 요원의 자술과 냉전 후에 해독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구소련의 침투는 1960년 서방의 반문화운동 배후의 중요한 추진력이었다.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1950년부터 미국 정부와 사회에 대한 공산당의 침투를 폭로하기 시작했으나, 1954년 상원에서 규탄 결의를 채택했을 뿐 미국 정부 내에서 공산주의를 청산하려던 노력은 중도에서 폐기됐다. 이는 미국이 더 빨리 내리막길을 걷게 된 관건적인 원인이다.[14]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침투와 매카시즘(1950~1954년 미국을 휩쓴 반(反)공산주의 선풍) 등 일련의 문제는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현실적 의의를 결코 잃지 않았다. 매카시는 수년간 좌파 정치인들과 언론에 의해 악마화됐으며, 매카시즘은 ‘정치적 박해’의 대명사가 됐다. 이는 좌파가 이미 이데올로기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한 보수파 정치평론가는 매카시 등 반공산주의 영웅들이 미국에서 억압당하고 부정적으로 묘사된 역사를 돌이켜 본 후 “좌파의 반미는 그들의 전체 세계관의 유기적인 구성 요소다. 자유주의자는 간통한 자, 포르노 업자, 낙태권을 선동하는 자, 범죄자와 공산주의자를 위해 권리를 쟁취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무정부 상태를 지지하고 문명을 반대한다.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배신이다”라고 했다.[15]

3. 루즈벨트 뉴딜 정책에서 진보주의까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뉴욕 증시가 붕괴했다. 위기는 금융과 재정에서 경제 전반으로 확산했고, 주요 서방국가도 재난을 모면하지 못했으며 실업률은 25%대에 이르렀다. 전 세계 실업자는 3천만 명을 넘었고, 소련을 제외한 주요 공업국의 공업 생산은 평균 27%나 감소했다.[16]

1933년 초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된 첫 100일에 ‘구제·회생·개혁’의 주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법안을 잇달아 내놓았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간접적인 관여를 확대했다. 국회는 ‘긴급 은행법’ ‘농업 조정법’ ‘전국 산업 부흥법’ ‘사회보장법’ 등의 법안을 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뉴딜 정책은 거의 끝났지만, 루즈벨트 뉴딜 시대에 생긴 일부 제도나 기구들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루스벨트가 반포한 대통령령의 수는 이후 20세기 모든 대통령이 반포한 대통령령의 총합을 초과한다. 그러나 30년대 말까지 미국의 실업률은 두 자릿수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이후 미국 정부는 높은 세율, 큰정부, 개입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수파 사상가 디네시 디수자는 그의 신작 <거대한 거짓말(The Big Lie)> 중에서 “국가 재건법은 루즈벨트의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이자 뉴딜 정책의 중심이다. 이 법안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자유시장 제도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라고 지적했다.[17] 역사학자 짐 파웰은 루즈벨트 뉴딜 정책의 효과가 어떻게 기대에 어긋났는지 충분한 역사 자료를 통해 증명한 바 있다. 즉, 뉴딜 정책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사회보장법은 실업률을 높였으며, 높은 세율은 건강한 기업 경영 방식을 파괴했고, 노동법은 실업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1976년)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그의 저서에서 ”파웰은 뉴딜 정책이 경제가 침체에서 회복되는 데 악영향을 미쳤고, 실업을 연장하고 가중했으며, 더욱 침략적이고 비싼 정부를 위한 조건을 마련했음을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칭찬했다.[18]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출범한 린든 존슨 정부는 ‘빈곤과의 전쟁’과 ‘위대한 사회’ 정책을 폈다. 존슨은 극히 짧은 기간에 일련의 대통령령을 반포하고 관련 법률을 제정하며 새로운 정부기구를 설립했다. 나아가 복지 예산을 늘리고 세수를 늘려 정부의 직권을 급격히 확대했다. 흥미로운 것은 존슨 대통령의 시행 조치와 1966년 발간된 <미국 공산당의 새 강령>이 거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미국 공산당 당수 거스 홀은 이 강령을 이렇게 해석했다. “공산당은 위대한 사회에 대한 태도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은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산당원은 위대한 사회의 모든 조치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꿈은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홀이 말한 ‘같은 침대’는 위대한 사회 정책을 가리킨다.[19] 비록 똑같이 위대한 사회 조치를 지지하지만 존슨 정부의 초심은 민주주의 제도하에서의 개량이고 미국 공산당은 미국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사회주의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위대한 사회와 빈곤과의 전쟁, 이 두 가지 정책의 가장 엄중한 결과는 세 가지다. 복지에 대한 국민의 의존도가 높아졌고 갈수록 많은 청장년이 일하기를 거부했으며 가정 해체를 가속화했다. 복지 정책은 한부모 가정을 돌보기 때문에 실상은 이혼과 혼전‧혼외 자식을 장려하는 것이다. 1940년의 혼외 출생아 비율은 전체 신생아 중 3.8%였는데 1965년에는 7.7%였다. 위대한 사회 개혁이 시작된 지 25년이 되는 1990년에는 28%까지 상승했고, 2012년에는 40%까지 치솟았다.[20] 가정 해체는 일련의 사회적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정부의 재정 부담이 크게 늘어나고, 범죄율이 급상승하고, 가정교육이 쇠퇴하고, 대가족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불로소득을 바라는 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 자발적 ‘실업자 무리’가 형성된 것 등이다.

스코틀랜드 역사가 알렉산더 프레이저 티틀러는 “민주제도는 장기간 지속되는 정치제도가 될 수 없다. 언젠가 국민들은 국고에서 혜택을 얻게 해주는 후보자를 투표로 뽑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민주주의 제도는 종식된다. 다수의 유권자는 영원히 공공재정에서 그들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준다고 공약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데,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제도는 느슨한 재정 정책으로 인해 붕괴되고, 궁극적으로는 독재에 의해 대체된다”고 말한 바 있다.[21] “검소하다가 사치하기는 쉬워도 사치하다가 검소하기는 어렵다(由儉入奢易 由奢入儉難)”는 말이 있듯이, 대중이 복지에 의존하는 습성이 형성된 후에 정부가 복지를 다시 줄인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 복지국가는 서양 국가의 정치적 고질병이 됐고,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이후부터 극좌파들은 미국 민중이 경계하는 혁명적인 용어를 포기하고 더 중성적인 색채를 가진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라는 용어를 대체해 사용했다. 공산당 국가에서 생활했던 독자들은 후자가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진보는 줄곧 공산당이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은어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진보 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을 가리키고, ‘진보 지식인’은 ‘친공 분자’ 혹은 아예 지하당원을 가리킨다. 자유주의든 진보주의든 그것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이는 모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명사일 뿐이다.

우리는 그 어느 정계 요인이나 개인을 책망할 생각이 없다. 복잡다단한 역사의 변화 속에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역사의 페이지를 한장 한장씩 펼쳐 보면 우리는 20세기 초부터 공산사령이 동서방에서 동시에 손을 쓰기 시작했음을 또렷이 볼 수 있다. 동양에서 폭력혁명이 일어나는 동시에 서방국가의 정부와 사회 전반이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차 좌편향으로 기울었다. 미국을 놓고 볼 때 제1차 세계대전, 특히 경제위기 이후 정부는 갈수록 많은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복지국가는 국민의 타성과 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키웠고, 이와 동시에 무신론과 유물론은 미국 사회의 도덕적 유기체를 급속히 잠식했다. 신을 멀리하고 전통 도덕을 멀리하게 된 민중은 변화무쌍한 공산주의의 속임수 앞에서 점점 저항력을 잃어갔다.

4. 서방의 문화대혁명

1960년대는 현대사의 분수령이다. 사상 유례없는 반(反)문화 운동이 동방에서 서방에 이르러 전 세계를 휩쓸었다.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중국의 문화대혁명과는 달리 서방 각국의 반문화 운동은 겉으로는 다중심(多中心) 운동 또는 구심점이 없는 운동이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10여 년간 이 대규모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대다수는 젊은이들)은 서로 다른 동기와 요구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중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 유색인종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람, 부권(父權)을 반대하고 여권(女權)을 쟁취하려는 사람,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람 등이 있었다. 그 속에는 전통문화를 반대하고, 권위를 반대하며, 개성 해방과 향락주의를 추구하며, 마약과 로큰롤 음악을 추구하는 자들도 뒤섞여 사람들의 눈을 현혹했다.

‘서방의 문화대혁명’의 목적은 정통 기독교 문명과 서방의 전통문화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처럼 난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글로벌 문화 현상은 공산주의에서 비롯됐다. 마르크스, 마르쿠제(Marcuse), 마오쩌둥(毛澤東) 등 이른바 ‘3M’은 반란을 일으키는 청년들이 숭배하는 우상이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중요 구성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를 핵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유파다. 1923년 이 연구소 설립 초기에 ‘마르크스주의 연구소’라는 이름을 고려했었으나,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중성적인 ‘사회연구소’로 명명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헝가리 마르크스주의자 루카치 죄르지에게는 “누가 우리를 서방 문명에서 구원해낼 수 있는가?”라는 하나의 명언이 있다. 마르쿠제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한 걸음 더 발전시켰다. “서방은 그와 접촉하는 모든 문명과 문화에 대해 인종말살 → 집단학살의 범행을 저질렀다. 미국과 서구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배척주의, 반유대주의, 파시즘, 나르시시즘의 집결지다. 미국 사회는 억압적이고 사악한 것이므로 충성을 다할 가치가 없다.” 이로써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서양의 전통문화를 주적(主敵)으로 삼고, 문화 파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주도권과 정치적 리더십을 탈취하려 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935년에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미국으로 옮겨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내에 간판을 걸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미국 본토의 좌파 지식인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와 그 변종들을 전파해 이후 미국 청소년 몇 세대를 망가뜨렸다.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범성욕설(汎性慾說)을 받아들여 성에 대한 문명의 억압을 풀어 줄 것을 주장한 마르쿠제는 성 해방 트렌드를 추진한 주요 인사 중 한 명이다. 마르쿠제는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면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본능에 대한 과도한 억제를 폐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 질서와 권위를 반대해 전 사회를 무절제한 향락을 누리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쿠제의 대표 작품 <에로스와 문명>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방대한 저서들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책에서 마르쿠제는 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 사상의 결합을 완성하고,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적 비판을 신마르크스주의의 문화 심리 비판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이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청년 독자 사이의 가교가 돼 반항 철학을 직접 1960년대의 반항 운동으로 전환했다는 점이다.[22]

마르쿠제는 “(반문화 운동은) 가히 한 차례의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항의가 겨냥한 것은 기성 사회의 도덕을 포함한 문화체계 전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통적인 혁명 이념과 혁명 전략은 이미 종결됐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너무나 진부하다…우리는 반드시 분산의 방식으로 이 체계를 사분오열시켜야 한다”고 말했다.[23]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어렵고 난해한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반란 청년은 몇 안 됐으나, 마르쿠제 사상의 취지는 간단 명료했다. 즉 반전통, 반권위, 반도덕으로 치닫고 성, 마약, 로큰롤에 무절제하게 빠지며 “전쟁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든 권위와 규범에 대해 “아니요”라고만 말하면 고상한 혁명 사업에 참여한 셈이 된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자기만족적인 혁명은 얼마나 싸고 간편한가!

반드시 강조할 것은 비록 많은 반란 청년이 자발적이었지만, 가장 급진적이며 운동의 최선두에 선 학생 지도자들은 국제공산주의 훈련과 통제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중에는 쿠바에서 훈련을 받은 ‘민주사회학생회(SDS)’의 학생 지도자가 포함된다. 학생들의 항의 운동은 공산주의 단체가 직접 추진한 결과였다. SDS에서 분리돼 나간 극좌익 단체 ‘웨더맨’은 1969년에 발표한 성명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적 인민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모순은 현재 세계의 주요 모순이다. 이 모순의 발전은 전 세계 인민이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를 반대하는 투쟁을 촉진했다”라고 했다. 이는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의 2인자 린뱌오(林彪)가 ‘인민전쟁 승리 만세!’에서 한 말이다.[24]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와 사회에 불가역적인 파괴를 조성한 것처럼 서방사회 문화를 전복한 반문화 운동도 마찬가지로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첫째, 그것은 많은 비주류 문화, 하층 문화, 변이 문화를 주류 문화로 만들었다. 성 해방, 마약, 로큰롤은 청소년의 도덕적 관념을 빠르게 잠식했고 그들에게 신을 반대하고 전통을 반대하고 사회를 반대하는 잠재적인 타락 역량을 길러줬다. 둘째, 길거리 혁명의 선례를 만들어 폭넓은 반(反)사회, 반미 사고방식을 키워 이후의 길거리 혁명을 위한 선례를 남겼다. 셋째, 1960년대 젊은이들은 길거리 혁명이 좌절된 후 대학, 연구소에 들어가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나서 미국 사회의 주류인 교육계, 언론, 정계, 상공업계에 진입해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체재 내로 진입시킴으로써 한 차례 미국 사회를 휩쓰는 비폭력 혁명을 일으켰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의 주요 언론, 대학교, 할리우드는 대부분 좌파의 본거지가 됐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절, 정계에서 좌편향 태세를 약간 되돌려 놓았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정책이 다시 좌편향으로 돌아서서 최근 정점에 달했다.

5. 반전평화운동과 민권운동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대양국(大洋國)에는 중요 정부 부처인 ‘평화부’가 있다. 평화부의 역할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해학적인 명칭을 달아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뜻이 있다. 실력이 남보다 못할 때 가장 좋은 방책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선언하는 것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싶을 때 가장 좋은 은폐 수법 역시 올리브 가지(역주: 평화 및 화해를 상징한다)를 높이 치켜드는 것이다. 소련과 여타 공산국가들이 이 책략을 아주 능숙하게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공산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이 깃발을 자주 내걸어 서방에 침투하고 자유세계의 대중들을 마비시키고 타격하는 주요 도구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평화평의회(WPC)는 1948년에 설립됐다. WPC의 첫 사무총장 졸리오 퀴리는 프랑스 물리학자이자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고, 미국은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연구 제작한 유일한 나라였다. 소련은 세계 평화를 전쟁 압력을 완화하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힘을 키우며 기다린다)’의 수단으로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WPC는 소련 공산당 산하의 소비에트평화위원회에서 직접 통제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소련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라고 허풍을 떨었고, 미국을 세계 제일의 전쟁광이자 평화의 적이라고 불렀다. 소련은 세계노동조합연맹, 세계청년연합, 국제여성연합, 국제기자연맹, 세계민주청년연맹(WFDY), 세계과학자협회 등 대량의 조직 단체를 육성했다. 이들은 WPC와 서로 호응했고, 세계 평화는 공산주의가 자유세계를 겨냥한 여론전의 전초 기지가 됐다. WPC는 사실상 코민테른의 외곽 조직이다.

1961년에 소련 공산당 총서기 니키타 흐루쇼프는 보고서에서 “매일 더욱 많은 사람이 평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말려들어야 한다…평화의 기치는 대중들을 우리 주위로 단결시켰다. 이 기치를 높이 치켜들면 우리는 더욱 큰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 공산당 서기 거스 홀은 이에 즉각 호응하면서 “평화를 위한 투쟁을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더욱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고, 그것이 모든 지역사회, 국민단체, 노동조합, 교회, 가정, 거리, 대중 집회지의 주관심사가 되게 해야 한다”[25]고 했다.

냉전 시기에 반전평화운동은 세 번의 고조(高潮)가 나타났다. 첫 번째는 1950년대 초에 등장했고, 두 번째 반전운동의 고조는 1960~70년대의 베트남전쟁 때였다. 러시아군정보기구(GRU) 대령 출신으로, 1992년 미국으로 망명한 스타니슬라프 루네프의 증언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 소련이 서방의 반전 선전에 쏟아부은 돈은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경제 지원의 두 배에 달했다. 그는 “GRU와 KGB가 미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들의 반전운동과 반전 단체들을 지원했다”고 말했다.[26]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서 활약했던 전 마르크스주의자 로널드 라도쉬는 “반전 운동의 진짜 의도는 결코 전쟁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반전 정서를 이용해 미국 내 새로운 혁명을 만들어 내는 사회주의 운동이다”라고 했다.[27]

세 번째 반전운동의 고조는 1980년대 초에 미국이 서유럽에 중거리 핵무기를 배치할 때 나타났다. 유럽의 평화, 반핵운동은 비록 소련과 미국에 동시에 핵무기를 제한할 것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결코 어떠한 국제 조약도 준수한 적이 없었다. 미국 상원 사법위원회가 1955년에 진행한 연구에서 소련은 설립 후 38년간, 전 세계 각 나라와 1000건에 달하는 양자 및 다자 조약을 체결했는데, 소련은 거의 모든 조약의 약속을 위반했음을 발견했다. 연구보고서 저자는 인류 문명 역사상 강대국이 이렇게 성실하지 못한 것은 소련이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28] 따라서 반핵운동이 겨냥한 것은 사실상 미국뿐이었다.

트레버 루돈은 “1980년대 뉴질랜드의 반핵운동은 바로 소련이 공작원을 양성해 나라 안팎으로 협력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뉴질랜드가 앤저스(ANZUS·태평양안전보장조약)에서 탈퇴함으로써 인구가 400만 명밖에 안 되는 뉴질랜드를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시켰다”고 지적했다.[29]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대규모의 반전 시위와 항의가 일어났다. 이런 항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 역시 공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직이었다.[30]

역사책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많은 미국 민권운동의 배후에도 공산주의 유령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미국의 사상가 에드워드 G. 로빈슨은 중국, 쿠바, 알제리의 공산주의 혁명을 비교한 후, 미국의 민권운동이 이들의 혁명과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첫 번째 단계는 민중을 적대적인 다양한 군중으로 나눈다. 두 번째 단계는 통일전선을 형성해 어떤 운동 하나가 보편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허상을 만든다. 세 번째 단계는 반대파를 타격한다. 네 번째 단계는 폭력을 선동한다. 다섯 번째 단계는 혁명을 연출하는데, 실제로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빼앗는 것이다.[31]

192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의 미국 노동자당은 흑인 혁명의 거대한 잠재력을 발견했다. 그들은 흑인이 모여 살고 있는 남부에서 소비에트 흑인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호소했다.[32] 1934년 출판된 한 공산주의 선전 책자 <소비에트 미국의 흑인>은 남부 흑인의 인종 혁명과 무산계급 혁명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3]

미국의 1960년대의 민권운동은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지지를 받았다. 한때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모스크바에 가서 훈련을 받은 흑인 레오나르도 패터슨은 미국 공산당을 탈퇴한 후, 흑인들의 폭동과 소동은 소련 공산당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본인은 미국 공산당 총서기 거스 홀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34]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이 고조된 것 역시 중국 공산당의 혁명 수출이라는 큰 배경하에서 발생한 것이다. 1957년 이후, 중국 공산당의 외교사상은 점차 급진적으로 전환돼 1965년에는 공공연히 세계 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광대한 농촌(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이 세계의 도시(서유럽, 북아메리카)를 포위하는 길을 걸을 것을 호소했다. 흑인 민권운동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색채를 띤 조직인 ‘혁명행동운동’, 마오쩌둥 주의의 ‘블랙팬서(검은 표범당)’ 등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지지를 받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혁명행동운동은 폭력혁명을 주장했는데, 주류 사회로부터 위험한 극단주의 조직으로 간주돼 1969년 후에 해체됐다. 블랙팬서는 형식에서 내용까지 모두 중국 공산당을 따랐는데, 내세운 슬로건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속한다’였고, <마오(毛) 주석 어록>은 필독서였다.

중국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블랙팬서는 폭력혁명을 주장했다. 블랙팬서의 지도자였던 클리버는 1968년에 “대학살이 곧 도래할 것이다. 흑인 해방의 폭력 단계가 도래하면 널리 알려질 것이다. 총성과 선혈 속에서 미국은 붉게 물들게 될 것이다. 시체는 거리에 더미로 쌓일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다른 사람들도 폭력, 게릴라전, 심지어 테러리즘을 부추겼다. 수많은 흑인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홍보서(紅寶書: 빨간 비닐표지로 만든 휴대용 마오 주석 어록)’를 흔들었다. 회의 현장의 붉은 바다는 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목격된 광경과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35]

민권운동의 아주 많은 요구 사항이 주류 사회에 받아들여졌으나, 급진적인 흑인혁명 조직은 사라지지 않았고 최근의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운동 중에서 다시 출현했다.[36]

전 세계인은 모두 평화를 희망한다. 평화주의 사상과 실천은 수천 년 전 고대로부터 기원했고, 20세기 이래 일부 선견지명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인물들이 국가 간 오해와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역사적인 원인으로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인종차별 현상이 존재하고,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대중의 교육과 선전, 심지어 항쟁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 사령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사상 동향과 갈등을 이용해 이간질하고 증오를 부추겨 폭력을 조장하고 애초에 악의가 없는 대중을 기만하고 말려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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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 Interview with Trevor Loudon,」 Capital Research Center, https://capitalresearch.org/article/an-interview-with-trevor-loudon/. 노동자 세계당이 1959년, 미국 및 세계 범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데에 주력하고 있으며, 각지의 역사적 조각상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시위에 참여하였다. 참조: 더럼 남부연합 동상(Durham Confederate statue)을 넘어뜨린 것을 조직한 노동자 세계당은 누구인가? http://abc11.com/politics/who-are-the-workers-world-party-and-why-durham/2314577/.

[2]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중문마르크스주의문고

[3] 쉬줴자이(徐覺哉), 『사회주의유파사(社會主義流派史』, 상하이인민출판사(2007), 217

[4] 위의 책

[5]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미국에 미친 영향,

참조 : Rose L. Martin, Fabian Freeway: High Road to Socialism in the U.S.A., 1884-1966 (Boston: Western Islands Publishers, 1966), Part II 「The United States」 ; Zygmund Dobbs, Keynes at Harvard: Economic Deception as a Political Credo. (Veritas Foundation, 1960), Chapter III, 「American Fabianism.」

[6] 레닌,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좌익 소아병』, 중국마르크스주의문고

[7] George Bernard Shaw,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and Capitalism (Garden City, New York: Garden City Publishing, 1928), 470.

[8] 「The Truth about 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Congressional Record: Proceedings and Debates of the 87the Congress, 1st session, https://sites.google.com/site/heavenlybanner/aclu.

[9] John Earl Haynes and Harvey Klehr, Venona: Decoding Soviet Espionage in Americ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138-145.

[10] M. Stanton Evans and Herbert Romerstein, Stalin’s Secret Agents: The Subversion of Roosevelt’s Government (New York: Threshold Editions, 2012), 「Introduction.」

[11] 위의 책

[12] Thomas Schuman, Love Letter to America (Los Angeles: W.I.N. Almanac Panorama, 1984), 21-46.

[13] Ion Mihai Pacepa and Ronald J. Rychlak, Disinformation: Former Spy Chief Reveals Secret Strategies for Undermining Freedom, Attacking Religion, and Promoting Terrorism (Washington D.C.: WND Books, 2013), Chapter 6.

[14] 매카시즘, 참조: M. Stanton Evans, Blacklisted by History: The Untold Story of Senator Joe McCarthy and His Fight against America’s Enemies (New York: Crown Forum, 2007).

[15] Ann Coulter, Treason: Liberal Treachery from the Cold War to the War on Terrorism (New York: Crown Forum, 2003), 292.

[16] 왕쩡차이(王曾才), 『세계현대사』, 대만 삼민서국(三民書局, 1994), 324~329

[17] Dinesh D’Souza, The Big Lie: Exposing the Nazi Roots of the American Left (Chicago: Regnery Publishing 2017), Chapter 7.

[18] Jim Powell, FDR’s Follies: How Roosevelt and His New Deal Prolonged the Great Depression (New York: Crown Forum, 2003), back cover.

[19] G. Edward Griffin, More Deadly than War, https://www.youtube.com/watch?v=gOa1foc5IXI.

[20] Nicholas Eberstadt, 「The Great Society at 50」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http://www.aei.org/publication/the-great-society-at-50/. 미국의 높은 복지정책의 결과에 대한 탐구는 같은 저자의 다음 서적을 참고할 수 있다. A Nation of Takers: America’s Entitlement Epidemic (Templeton Press, 2012).

[21] 이 말에 대해서는 저자가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가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22] William L. Lind, Chapter VI 「Further Readings on the Frankfurt School,」 in William L. Lind, ed., Political Correctness: A Short History of an Ideology (Free Congress Foundation, 2004), 5-6.

[23] Raymond V. Raehn, Chapter II 「The Historical Roots of 『Political Correctness』,」 in William L. Lind, ed., Political Correctness: A Short History of an Ideology (Free Congress Foundation, 2004), 10.

[24] 선한(沈漢), 황펑주(黃鳳祝), 『반항세대, 1960년대 서방학생운동(反叛的一代, 20世紀60年代西方學生運動)』, 간쑤인민출판사(2002), 136

[25] Jeffrey G. Barlow, 「Moscow and the Peace Movement,」 The Backgrounder (The Heritage Foundation, 1982), 5.

[26] Stanislav Lunev, Through the Eyes of the Enemy: The Autobiography of Stanislav Lunev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1998), 74,170.

[27] Robert Chandler, Shadow World: Resurgent Russia, the Global New Left, and Radical Islam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2008), 389.

[28] Anthony C. Sutton, The Best Enemy You Can Buy (Dauphin Publications, 2014), 「Conclusions.」

[29] Trevor Loudon, The Enemies Within: Communists, Socialists, and Progressives in the U.S. Congress (Las Vegas: Pacific Freedom Foundation, 2013), 5-14.

[30] 「AIM Report: Communists Run Anti-War Movement,」 Accuracy in Media (February 19, 2003), https://www.aim.org/aim-report/aim-report-communists-run-anti-war-movement/.

[31] G. Edward Griffin, Anarchy U.S. A.: In the Name of Civil Rights (DVD). John Birch Society.

[32] John Pepper (Joseph Pogani), American Negro Problems (New York: Workers Library Publishers, 1928), https://www.marxistsfr.org/history/usa/parties/cpusa/1928/nomonth/0000-pepper-negroproblems.pdf.

[33] James W. Ford and James Allen, The Negroes in a Soviet America (New York: Workers Library Publishers, 1934), 24-30.

[34] Leonard Patterson, 「I Trained in Moscow For Black Revolution,」 https://www.youtube.com/watch?v=GuXQjk4zhZs.

[35] 유잔(于展), 『미국 민권운동 중 중국요소(美國民權運動中的中國因素)』 http://www.aisixiang.com/data/95027.html.

[36] Thurston Powers, 「How Black Lives Matter Is Bringing Back Traditional Marxism,」 The Federalist, http://thefederalist.com/2016/09/28/black-lives-matter-bringing-back-traditional-marx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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