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혁명 수출

9평 편집부
2018년 7월 15일 업데이트: 2019년 7월 25일

목차

1. 아시아로의 혁명 수출
1) 한국전쟁
2) 베트남전쟁
3) 크메르루주
4) 기타 아시아국가들

2.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로의 혁명 수출
1) 라틴아메리카로의 혁명 수출
2) 아프리카로의 혁명 수출

3. 동유럽으로의 혁명 수출
1) 알바니아
2) 동유럽 혁명에 대한 소련의 탄압

4. 냉전 종결
1) 붉은 광장은 여전히 붉다
2) 여전히 범람하고 있는 붉은 재앙
 

* * *

 
공산 사교(邪教)는 폭력과 거짓말에 의존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대국이 소국에 이런 사이비 이데올로기를 수출할 때, 폭력은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만약 자유사회가 공산주의의 사교적 특징을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폭력이나 거짓말에 의지해 이른바 ‘대외선전계획’ ‘공자학원’ 등의 형식으로 수출하는 사악한 이데올로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이 장(章)에서는 주로 공산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및 동유럽으로 확장하고 침투한 데 대해 다룬다. 공산주의가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침투한 방법은 더욱 복잡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1. 아시아에 혁명을 수출하다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소련의 ‘혁명 수출’ 덕분이다. 1919년 소련은 코민테른을 결성해 전 세계를 향해 혁명을 수출하고 국제사회 전체를 완전히 적화(赤化)하려고 획책했다. 이 계획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1920년 4월 코민테른의 대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가 중국으로 갔다. 그해 5월 그는 상하이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해 중국 공산당 창설을 준비했다. 그 후 코민테른은 중공 정권 수립 초기까지 30여 년 동안 소련 공산당 휘하에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으로부터 경비 160~170은화(銀元)를 월급 조로 받았다.[1] 당시 상하이의 일반 노동자 월급은 20은화(銀元)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의 정권 찬탈 과정은 공산당의 미국 침투와 관련이 있다. 이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장제스(蔣介石) 지지를 철회하고 소련이 지지하는 중국 공산당에 중국을 순순히 넘겨준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미국은 한국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했고, 1950년 1월 5일 트루먼은 성명을 통해 ‘장제스의 타이완에 군사 원조를 하지 않으며, 만약 타이완과 중국 공산당 간에 전쟁이 터지더라도 미국은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아시아 불개입 정책’을 발표했다. 일주일 후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도 이 정책을 거듭 강조하며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해도 이는 미국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밝혔다.[2] 북한이 남침하자 미국이 UN평화군을 파견하면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크게 바뀌었지만, 아시아에 대한 기존의 불개입 정책은 확실히 공산당이 아시아에서 퍼져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중국 공산당은 혁명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각국의 유격대를 훈련하고 무기를 제공하며, 전투병력을 파견해 각국의 합법 정부를 전복하는가 하면 대량의 자금을 지원했다. 문화대혁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3년 중공의 대외 원조는 국가 재정지출의 7%를 차지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공개된 중국 공산당 외교부 기밀자료에 따르면 1960년에 기니에 쌀 1만t, 알바니아에 밀 1만 5천t을 보내는 등 1950년부터 1964년 말까지 중국의 대외 원조금 규모는 108억 위안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해외 원조는 중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60년부터 1964년 사이에 가장 많이 이뤄졌다.[3] 특히 1958년부터 1962년 사이에 수천만 명이 아사한 대기근이 발생했을 당시 중국의 대외 원조금 규모는 무려 23억 6천만 위안에 이르렀다.[4] 만약 이 자금으로 식량을 구입했다면, 아사자 3000만 명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아사자들은 중국 공산당 대약진 운동의 대가(代價)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전 세계를 향해 펼친 혁명 수출의 희생양이다.

1) 한국전쟁

공산사령은 전 인류를 훼멸하기 위해 전 세계를 점령하려 했다. 따라서 공산사령은 권력,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전 세계에 사교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도록 유혹했다.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호치민 등은 모두 이러한 야심을 가진 자였다.

마오쩌둥은 1949년 스탈린을 만나 21개조요구(二十一個條要求: 1915년 일본 제국이 자국의 권익 확대를 위해 중국에 제시한 강압적 요구)보다 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마오쩌둥이 북한을 통치하는 대가로 1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1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보내 스탈린의 유럽 진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5] 1950년 6월 25일 오랜 계획 끝에 북한이 남한을 침략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한 달 반 만에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50년 3월 마오쩌둥은 동북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언제든 북한 땅에 들어가 참전할 준비를 했다. 여기서는 트루먼의 유화정책이 전쟁을 오랫동안 지속시켰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전쟁의 전체 과정에 관해서는 생략하겠다. 중국 공산당이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것은 또 다른 음험한 속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민당과 내전 당시 공산당에 투항한 군사 100만 명을 최전선으로 보내 총알받이로 희생시키는 전략이었다.[6] 전쟁이 끝날 무렵 중국군의 사상자는 역시 100만여 명에 달했다.

한국전쟁은 ‘남북 분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북한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던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을 모두 이용했다. 일례로 1966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에 지하철을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평양에도 무상으로 건설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곧바로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상으로 북한에 철도를 건설해 주기 위해 베이징 지하철 공사를 중단하고 모든 장비와 인력(철도병 2개 사단 수만 명과 대량의 기술자)을 평양으로 보냈다. 북한은 돈 한 푼, 인력 한 명 쓰지 않고도 ‘전쟁 대비’란 명목으로 중국 공산당을 이용해 지하철 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평양의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이 됐다. 가장 깊은 곳은 지하 150m에 이르며 평균 깊이는 90m이다.

그 후 김일성은 뻔뻔하게 태도를 바꿔 북한이 지하철을 자체적으로 설계하고 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중국을 무시하고 소련에 직접 보고하거나 자금과 물자를 요구했다. 또한, 그는 중국이 한국전쟁 당시 친(親)베이징 정부 수립을 위해 남긴 인사들을 모두 숙청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고 모든 것을 다 잃었다.[7]

소련 공산당이 몰락한 후 북한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원조는 역시 예전 같지 않았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2007년 한국의 NGO 탈북자동지회는 김씨 일가가 집권한 60년 동안 최소 35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밝혔다.[8] 이 또한 공산당의 사악한 정권이 혁명을 수출하면서 진 피의 빚이다.

2) 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 이전인 1954년 중국 공산당의 지원으로 베트남 공산당이 프랑스에 이기면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고 남북 베트남이 대치하게 됐다. 그 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북베트남의 남침과 미국의 개입으로 불붙은 베트남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국지전쟁으로 확대됐으며, 미군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직접 참전했다.

1952년 마오쩌둥은 베트남 공산당에 고문단을 파견했다. 그 당시 군사 고문단 단장이 바로 중국 공산당의 웨이궈칭(韋國淸) 상장(上將)이었다. 고문단 중 토지개혁 고문단은 베트남 지주와 부농 수만 명을 옥에 가두거나 사형시킴으로써 북베트남의 기근과 농민폭동을 야기했다. 중국 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은 함께 폭동을 진압했고 중국 공산당의 ‘옌안정풍(延安整風)’ 운동과 유사한 ‘정훈(整訓)’ ‘정군(整軍)’운동을 일으켰다. 마오쩌둥은 아시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중국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는 대기근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대대적으로 베트남을 지원했다.[9] 1962년 류사오치(劉少奇)는 ‘7천인 대회(七千人大會)’에서 마오쩌둥의 터무니없는 정책에 마침표를 찍고 경제 회복을 준비하기 위해 마오쩌둥을 2선으로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아 서슴없이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었다. 군권(軍權)이 없었던 류사오치는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제 회복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마오쩌둥은 잇따라 뤄루이칭(罗瑞卿)과 린뱌오(林彪)를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류사오치는 호치민에게 중국 공산당이 독자적으로 베트남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하고 “전시에 당신들은 중국을 후방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했다.[10] 중국 공산당의 선동과 지원하에 1964년 7월 베트남 공산당은 통킹만(Gulf of Tonkin)에서 어뢰로 미국 군함을 공격했다. 이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공식적으로 참전을 하게 됐다. 이어 중국 공산당은 베트남 통제권을 쥐기 위해 소련과 경쟁하면서 자금과 물자, 인력을 쏟아부었다.[11] 천셴후이(陳憲輝)가 쓴 <혁명의 실상, 20세기 중국 기사(紀事)>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베트남을 지원한 것이 도리어 베트남에 500만 명의 사망자와 폐허, 지뢰밭, 경제 붕괴 등 심각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중국 공산당이 베트남 공산당에 제공한 무상원조에는 육해공군 200여만 명이 충분히 쓸 수 있는 무기‧탄약과 기타 군수품, 생산업체 및 수리공장 100여 곳, 옷감 3억여m, 기차 3만여 량, 철로 수백km, 식량 500여만t, 휘발유 200여만t, 송유관 3000여km, 현금 수억 달러가 포함됐다. 중국 공산당은 금전과 물자 지원 이외에도 비밀리에 해방군 30여만 명을 파견해 북베트남 군복으로 갈아입힌 뒤 전투에 투입했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중국 전사자를 베트남 현지에 묻었다.

1978년까지 중국 공산당이 베트남에 원조한 돈은 총 200억 달러에 달했다.[12] 하지만 중국의 1965년 GDP는 704억 위안(당시 환율로 약 286억 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13]

1973년, 미국은 자국 내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하는 반전운동(反戰運動)과 타협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은 멸망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찬탈한 후 벌인 진반(鎮反·반혁명 진압) 운동과 비슷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인 200여만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는,[14] 냉전 시기 아시아 최대의 난민 사태가 벌어졌다. 1976년 베트남 전역이 공산주의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3) 크메르루주(Khmer Rouge)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에 대규모 원조를 요청했는데, 이는 훗날 중국과 베트남 관계가 악화하는 도화선이 됐다. 중국 공산당은 혁명 수출을 위해 거액의 원조를 대가로 베트남에 끊임없이 미국과 싸울 것을 요구했다.[15] 하지만 베트남은 전쟁이 장기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969년부터 미국을 포함한 4자회담에 참여했다. 이 회담에 중국 공산당은 배제됐다. 1970년대에 이르러 린뱌오(林彪) 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 내에서 시급히 위상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은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전투를 한 후 관계가 더욱 악화했다. 마오쩌둥은 미국과 연합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중국에 초대했다. 당시 미국은 국내에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베트남은 점차 중국 공산당과 멀어지고 소련과 가까워졌다.

베트남에 큰 불만을 가진 마오쩌둥은 캄보디아를 이용해 베트남을 견제하기로 했다.[16] 베트남과 캄보디아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고 결국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중국 공산당은 1955년부터 캄보디아 공산당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캄보디아 공산당 지도자들을 교육했다. 1965년 살인 마왕 폴 포트를 캄보디아 공산당 최고지도자로 임명한 것도 바로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캄보디아 공산당에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1970년 한 해만 해도 중국은 폴 포트에게 3만 명이 쓸 수 있는 무기를 원조했다.[17] 미국이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철수하자 이들 정부는 중국 공산당이 지지하는 현지 공산당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결국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권이 1975년 공산당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베트남이 라오스를 수중에 넣자 중국 공산당은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크메르루주 정부를 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베트남을 훈계하려고 했고, 크메르루주는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1975년 베트남 남부 지역을 수차례 침입해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의 주민을 학살하고, 베트남이 차지하고 있던 메콩강 삼각주를 점령하려고 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과 사이가 틀어진 베트남은 소련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1978년 12월 베트남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캄보디아를 침공했다.[18]

크메르루주의 폴 포트가 집권한 후 화폐를 폐지하고, 모든 시민을 교외로 데려가 강제 노역을 시키고, 모든 지식인을 학살하는 등 극도의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3년여에 걸친 폭정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죽었지만, 장춘차오(長春橋)와 덩샤오핑(鄧小平)의 극찬을 받았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전쟁을 시작한 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캄보디아 시민은 베트남 군대를 지지했다. 불과 한 달 만에 크메르 루즈의 모든 전선이 붕괴되고 수도 프놈펜이 함락됐다. 크메르루즈 정부는 산악 지역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펼 수밖에 없었다. 1997년 폴 포트가 체포됐고, 그 후 공개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됐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의 전쟁은 덩샤오핑을 격노케 했고, 다른 요인까지 더해져 덩샤오핑은 ‘자위(自衛) 반격전’이란 명분으로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중월전쟁)을 일으켰다.

4)기타 아시아 국가

중국 공산당의 혁명 수출은 각국의 현지 중국인에게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바로 화교 배척 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중국인 수십만 명이 살해됐고 현지에서 경제 활동 및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제한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네시아다.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중국 공산당은 인도네시아에 대량의 경제 원조와 무기를 제공하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Partai Komunis Indonesia) 을 육성했다. 당시 PKI는 공산당원 300만 명을 거느린 인도네시아 제1당이었다. 부속 조직까지 합치면 그 수가 220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의 당(黨), 정계, 군부 등 각 기관에 분포해 있었으며, 하지 무하맛 수카르노(Haji Mohammad Sukarno) 대통령 주변에도 공산당원이 적지 않았다.[19] 마오쩌둥은 당시 소련이 수정주의로 변질했다고 비판하면서 PKI가 무장 정권 찬탈의 길을 가야 한다고 부추겼다. 마오쩌둥 숭배자였던 PKI 당수 디파 누산타라 아이디트(Dipa Nusantara Aidit)는 쿠데타를 준비했다. 하지만 1965년 9월 30일, 우익 군사 지도자 수하르토(Suharto)가 쿠데타를 제압했고, 결국 중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수많은 공산당원을 처형했다. 당시의 숙청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관련이 있다. 저우언라이는 공산국가 국제회의 석상에서 소련과 각국 공산당 대표들에게 “동남아시아에 화교가 이렇게 많으니, 중국 정부가 이들을 통해 공산주의를 수출하면 동남아시아 전체를 하룻밤 사이에 붉게 물들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의 대규모 화교 배척 운동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20]

미얀마의 화교 배척 운동도 이와 유사하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이제 막 시작됐을 때, 미얀마 주재 중국대사관과 신화사 지사는 화교 사회에 문화대혁명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또 화교 학생들이 마오쩌둥의 휘장과 ‘마오쩌둥 주석어록’을 가지고 등교하고 미얀마 당국과 대치하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군사정부 네윈 장군은 마오쩌둥 휘장을 달거나 마오쩌둥 저서를 학습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고 화교 학교를 폐쇄했다. 1967년 6월 26일 수도 양곤에서 폭력적인 화교 배척 사건이 일어나 화교 수십 명이 맞아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1967년 7월 중국 공산당 관영매체는 “미얀마 국민이 미얀마 공산당의 지도하에 무장투쟁을 통해 네윈 정부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그 후 중국 공산당은 미얀마 공산당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해 현역 군인 200여 명을 미얀마 공산당 군사로 편입시켰으며, 중국에서 17년 동안 거주한 미얀마 공산당원들을 대거 귀국시켜 무장투쟁을 벌이게 했다. 그 후 수많은 중국 홍위병과 중국 공산당이 비호하는 미얀마 공산당 무장단체가 윈난(雲南)에서 미얀마로 진격해 정부군을 섬멸하고 샨주 코캉 지역을 점령했다. 이 사건으로 윈난의 지식청년 천여 명이 이국 타향에서 전사했다.[21]

문화대혁명 전후로 중국 공산당은 아시아 지역에서 폭력 선동을 혁명 수출의 주요 수단으로 삼아 현지인을 교육하고 무기와 군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혁명 수출을 포기하자 각국 공산당 대부분이 해체돼 재기하지 못했다.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61년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합법적인 정당 신분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로 했다. 덩샤오핑은 말레이시아 공산당 당수인 천핑(陳平) 등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은 베트남 전장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혁명의 절정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무장투쟁은 20년 더 지속됐다.[22] 중국 공산당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에 자금을 지원해 태국으로부터 불법 경로로 무기를 구매하게 했다. 또한 이들은 1969년 1월 후난성 이양(益陽)시에 ‘말레이시아 혁명의 소리 방송국’을 설립해 말레이시아어, 태국어, 영어 및 일부 방언으로 방송을 진행했다.[23] 문화대혁명 이후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는 덩샤오핑과 회담을 할 때 덩샤오핑에게 말레이시아 공산당 방송국과 인도네시아 라디오 방송국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그 당시 중국은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제 막 정치무대에 복귀한 덩샤오핑도 국제사회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리콴유의 요구대로 말레이시아 공산당 당수 천핑을 만나 기한 내에 말레이시아 혁명의 소리 방송국을 폐쇄하도록 했다.[24]

앞서 말한 국가 외에 중국 공산당은 필리핀, 네팔, 인도, 스리랑카, 일본에도 혁명을 수출했다. 어떤 국가에서는 군사훈련을 지원하고, 어떤 국가에서는 여론을 조성했다. 당시 일부 공산당이 설립한 조직은 훗날 일본적군(日本赤軍)과 같은 국제 테러조직이 됐다. 이 조직의 악명 높은 구호는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애국하자. 혁명은 곧 학살과 파괴다’였고, 항공기 납치와 승객 학살 등 일련의 테러를 저질렀다.

 

2.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로 혁명 수출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공산당은 ‘무산계급은 전 인류를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구호를 자주 인용해 세계혁명을 부추겼다. 하지만 1960년대 구소련이 위축되면서 삼화일소(三和一少)를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삼화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적인 공존, 평화적인 이행, 평화적인 경쟁을 지지하는 것을 말하며, 일소는 제3세계의 민족주의 혁명에 대한 지지를 축소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수정주의라 불렀다. 1960년대 초반 중국 공산당의 왕자샹(王稼祥) 역시 비슷한 주장을 폈지만, 마오쩌둥은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혁명 분자에 대해서는 화합하려 하고, 세계혁명 운동에 대해서는 원조를 줄이려 한다”며 비판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소련과 경쟁하면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도 혁명을 수출했다.

린뱌오(林彪)는 1965년 8월 발표한 ‘인민전쟁 승리 만세’라는 장문의 글에서, 세계혁명의 절정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농촌포위도시(農村包圍城市·농촌에서 세력 기반을 얻어 도시를 포위 공격하다) 전략에 따라 린뱌오는 북미‧서유럽을 도시에 비유하고,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농촌에 비유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혁명을 수출하는 것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업무였다.

1) 라틴아메리카로 혁명 수출

델라웨어대학교 청잉훙(程映紅) 교수는 ‘전 세계로 혁명 수출 – 문화대혁명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에 대한 초보적 탐구’라는 제하의 글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1960년대 중반 마오쩌둥파 공산당원은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콜롬비아, 칠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청년과 학생 위주로 구성된 조직을 세웠다. 중국의 지원으로 1967년 라틴아메리카의 마오쩌둥파 공산당은 유격대를 두 개 세웠다. 하나는 콜롬비아 인민해방군으로, 그중에는 마리아낭자군연(瑪利亞娘子軍連)이라 불리는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을 모방한 여성 용병대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볼리비아의 마오쩌둥파 유격대였다. 베네수엘라의 일부 공산당원들도 같은 시기에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 외에 페루 공산당의 좌파 지도자인 아비마엘 구즈만(Abimael Guzman)은 1967~1968년경 베이징에서 훈련을 받았다. 폭탄과 무기 사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오쩌둥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것은 정신이 물질로 변하고, 정확한 노선이 있으면 사람이 없어도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총이 없어도 총이 있을 수 있다는 등 대표적인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문구였다.”

구즈만은 ‘빛나는 길(Shining Path)’이라고도 불리는 페루 공산당의 지도자다. 이 조직은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 페루 정부가 테러조직으로 간주하는 집단이다.

멕시코와 중국 공산당은 1972년 수교했고, 중국 공산당이 임명한 첫 번째 멕시코 대사는 슝샹후이(熊向暉)였다. 슝샹후이는 중국 공산당 내전 당시 후쭝난(胡宗南) 주변에서 장기간 잠복해 있던 스파이였다. 그를 대사로 파견한 것은 정보(미국 정보 포함)를 수집하고 멕시코 정부를 간섭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슝샹후이가 부임하기 일주일 전 멕시코는 중국에서 훈련받은 유격대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 수출을 입증하는 증거이다.[25]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과 처음으로 수교를 맺은 국가이다. 쿠바를 끌어들이고 소련과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1960년 11월 중국에 아사자가 폭증하는 상황에서도 당시 중국을 방문한 체 게바라에게 6000만 달러를 대출해 주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는 체 게바라에게 “협상을 통해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한 후 피델 카스트로가 소련과 가까워지자 중국 공산당은 아바나 주재 중국 대사관을 통해 쿠바 간부 및 국민에게 대량의 소책자를 우편으로 보내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선동했다.[26]

2) 아프리카로 혁명 수출

청잉훙 교수는 ‘전 세계로 혁명 수출’에서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및 독립 후 노선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요약했다.

서방 언론 보도에 따르면, 60년대 중반까지 알제리아,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 카메룬, 콩고 출신의 아프리카 혁명 청년들이 하얼빈, 난징 등 중국 몇몇 도시에서 훈련을 받았다. 짐바브웨 로디지아 민주연맹의 한 조직원은 자신이 상하이에서 1년간 훈련받은 바 있다고 밝혔다. 군사훈련을 제외하면 주로 정치학습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고 인민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게릴라전 전개 방법을 학습했다. 한 오만 유격대원은 1968년 중국에서 훈련을 받았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조직의 배정에 따라 먼저 파키스탄에 도착한 후 파키스탄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갔다. 그들은 중국의 일부 시범 학교와 공사(公社)를 참관한 뒤 훈련소에 입소해 군사훈련과 사상교육을 받았다. 훈련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저서를 배우는 과목이 제일 중요했으며, 훈련생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모두 외워야 했다. 관련 규율과 농촌 군중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은 들어보면, 마치 삼대기율팔항주의(三大紀律八項注意, 마오쩌둥이 만든 군대 규율)와 매우 유사했다. 이들 아프리카인들도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중국을 현지 관찰했다. 예를 들어 그들이 한 학교를 참관할 때 교사가 ‘반동분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殺殺殺)’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훈련을 마칠 때 훈련을 받은 모든 오만인은 아랍어로 된 마오쩌둥의 저서를 받았다.

탄자니아와 잠비아에 대한 원조는 중국 공산당이 1960년대에 아프리카에 실시한 최대 프로젝트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 방직공업국의 수많은 전문가를 파견해 탄자니아 친선 방직공장 건설을 지원했다. 파견된 책임자는 건설 지원 프로젝트에 대량의 이데올로기 색채를 주입했다. 이 책임자는 탄자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반동단체를 조직하고, 공사 현장에 오성홍기와 마오쩌둥 초상화, 어록을 걸어놓고, 중국 공산당의 문화대혁명 음악과 마오쩌둥 어록가(語錄歌)를 틀어 공사 현장을 문화대혁명의 해외 모범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를 조직해 탄자니아 노동자들 중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면서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저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관점을 퍼뜨렸다.[27]

중국 공산당의 혁명 수출은 탄자니아의 불만을 초래했다. 그 후 마오쩌둥은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잇는 ‘탄자니아-잠비아 철도(TAZARA)’ 건설을 지원해 동아프리카와 중남아프리카를 관통하기로 했다. 이 철로는 높은 산과 협곡, 급류와 울창한 숲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야생 동물이 무리 지어 다니고 토질조차 진흙과 모래여서 건설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 5만 명을 파견해 교각 320개를 세우고 터널 22개를 뚫는 등 난공사를 벌였다. 결국 이 철로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 66명이 목숨을 잃었고, 약 100억 위안(약 6200억 원)이 투입됐으며, 공사 기간도 6년(1970~1976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탄자니아와 잠비아 양국의 경영 부실과 경영진의 부정부패로 철도는 파산했다. 현재 경제 가치로 평가하면 철도 건설비용은 최소 수천억 위안에서 수조 위안에 달한다.
 

3. 동유럽으로 혁명을 수출하다

1) 알바니아

중국 공산당은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혁명을 수출한 데 이어 유럽에서 공산국가 알바니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일찍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의 비밀 연설(역주: 1956년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대숙청 등의 과오를 지적하며 신격화돼 있던 스탈린을 격렬히 비난한 연설) 이후 알바니아는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오쩌둥에게 뜻밖의 기쁨을 안겼고,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은 알바니아에 묻지마식 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신화사의 왕홍치(王洪起) 기자는 “1954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 공산당은 알바니아에 75회에 걸쳐 약 100억 위안에 이르는 금액을 원조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알바니아 인구는 약 200만 명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1인당 약 4천 위안씩 지원받은 셈이다. 당시 중국의 1인당 평균소득은 200위안에 불과했다. 중국 공산당이 알바니아를 돕는 동안 중국은 3년간의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시기의 경제 붕괴를 겪었다.

대기근 기간에 중국은 당시 대단히 귀중한 외화로 식량을 수입했다. 1962년 주중 알바니아 대사 레이스 마릴리에(Lais Malile)가 중국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자, 류사오치는 캐나다에서 밀을 구입해 싣고 오던 중국 선박의 뱃머리를 즉시 돌려 알바니아 항구에 모두 부려놓게 했다.[28]

알바니아는 중국 공산당의 원조를 당연시하며 원조 물자를 흥청망청 낭비했다. 중국에서 반출된 대량의 철강, 기계설비, 정밀기기 등을 노천에 쌓아놓고 비바람을 맞혔다. 그러고도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괜찮아, 망가지거나 없어지면 중국이 또 주니까”라고 했다. 중국이 알바니아를 위해 방직공장을 건설했지만, 그곳에는 목화가 나지 않아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외화를 들여 목화까지 수입해 공급했다. 한번은 카르카니 부총리가 당시 알바니아 주재 중국 대사 겅뱌오(耿飆)에게 화학비료공장의 주요 설비를 교체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중국 제품이 아닌 이탈리아의 제품을 요구하자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외화로 이탈리아 설비를 사서 보냈다.

이와 같은 원조는 그저 상대 국가의 게으름과 탐욕을 조장할 뿐이었다. 1974년 10월 알바니아는 중국에 차관 50억 위안을 요구했다. 당시 문화대혁명 후기에 들어 경제가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한 중국은, 여러 번 따져보기는 했겠지만, 결국 또 10억 위안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자 알바니아는 크게 불만을 표하며 중국 규탄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절대로 외부 경제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중국에 원유와 아스팔트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

2) 동유럽 혁명에 대한 소련의 탄압

동유럽 지역의 사회주의 제도는 완전히 소련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얄타회담에 따라 분할 점령하면서 동유럽은 소련의 손에 넘어갔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이후 처음으로 반기를 든 국가는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노동자 항의 → 진압 → 정부의 사과’ 과정을 거쳐 소련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를 지도자로 선출했고, 그는 흐루쇼프의 간섭을 막아냈다.

다음은 1956년 10월에 발생한 유명한 헝가리 사건이다. 한 무리 학생이 집회를 열어 스탈린 동상을 무너뜨리자 더 많은 대중이 동참했고, 결국 경찰과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최소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소련은 새로운 반대파와 협력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카다르 야노시를 당중앙 제1서기로 임명하고 너지 임레를 부장회의 주석(총리)으로 임명했다. 너지는 취임 후 바르샤바 조약기구(바르샤바 조약에 따라 소련을 중심으로 창설된 동유럽의 공동 방위기구) 탈퇴를 선언하고 자유화를 추진했다. 헝가리의 이런 변화를 용납할 수 없었던 소련은 탱크를 부다페스트 거리로 몰고 가 너지를 체포한 뒤 처형했다.[29]

헝가리 사건 이후 1968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다.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이후 체코 내에서 통제가 점차 완화됐다. 1967년 봄에는 체코에서 비교적 독립적인 민간단체가 만들어졌다. 그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훗날 체코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츨라프 하벨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68년 1월 5일, 개혁파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체코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며 개혁 추진과 인간적인 사회주의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 후 둡체크는 반란자 석방, 언론 통제 완화, 학술 자유 장려, 출국 자유화, 종교 탄압 해제, 당내 제한적 민주화 실시 등 스탈린 시대의 암울한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에 돌입했다.

소련은 이러한 개혁이 사회주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가 따라 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68년 3월부터 8월까지 흐루쇼프는 브레즈네프 등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과 5차 정상회담을 개최해 둡체크가 민주개혁을 포기하도록 압박했다. 하지만 그가 굴복하지 않자 1968년 8월 소련 탱크 6300대가 체코로 진격했다. 그렇게 ‘프라하의 봄’은 8개월에 걸쳐 탱크에 짓밟힌 끝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30]

헝가리 사건과 프라하의 봄을 통해 우리는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사실상 소련이 강제로 이식하고 폭력으로 유지해온 제도임을 알 수 있다. 훗날 소련이 이 같은 폭력을 포기하자 동유럽의 사회주의 진영도 빠르게 해체됐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베를린 장벽 붕괴다. 1989년 10월 6일 동독의 각 도시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과의 충돌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동베를린을 방문한 고르바초프가 에리히 호네커 동독 통일사회당 총서기에게 “기회를 잡고 개혁해야만 살길이 있다”고 했다. 그 후 동독이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관광 제한을 해제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체코를 통해 서독으로 갈 수 있게 됐고 베를린 장벽은 더는 민중의 탈출 러시를 막을 수 없게 됐다. 11월 9일, 동독이 부득이 동서독 국경 통제를 포기하자 동독인 수만 명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향했고, 결국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이로써 수십 년 동안 유지돼 온 철의 장막이 사라졌다.[31]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은 혼란의 시기였다. 이 한 해 동안에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동독은 모두 자유화를 실현하고 사회주의 명의(名義)를 포기했다. 이 또한 소련이 이들 국가에 대한 간섭을 포기한 결과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됐다.

중국 공산당이 지난 수십 년간 원조한 나라는 110개국에 달했고, 이데올로기 수출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었다.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소련의 간섭도 앞서 밝힌 것에 그치지 않는다. 본 장에서는 단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을 뿐이다. 폭력 이식은 공산주의 사령이 국제적으로 공산주의를 확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공산주의 사령이 점유하는 지역과 통제하는 인구가 많을수록 더욱더 뜻대로 인류를 훼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냉전 종식

냉전이 종식되자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또는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폭정이 드디어 끝났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악마의 술수를 몰라서 갖게 된 환상일 뿐이다. 미‧소 양국이 대립하는 구도가 되자 중국 공산당에 쏠리던 국제사회의 시선이 다른 데로 돌려졌고, 이는 중국 공산당이 더욱 사악하고 은밀하게 공산주의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꼴이 됐다. 1989년 ‘6.4 톈안먼 사태’ 이후 사악한 장쩌민(江澤民)이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됐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성숙한 탄압 기계와 거짓 선전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공산당 문화를 세웠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도덕을 타락시키는 방법으로 반전통적이고 반도덕적인 ‘이리 새끼’를 길러내 파룬궁을 대규모로 박해하고 최후에 인류를 훼멸하기 위한 준비를 충실히 했다.

공산 진영 국가들의 공산당이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청산되지 않았고 공산주의가 저지른 범행을 심판하지도 못했다. 러시아 역시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청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과거 KGB 수뇌가 오늘날 러시아를 다스리고 있다.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존재하고, 공산사령이 양성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건재한 채 서방 국가와 전 세계에 침투해 있다.

공산주의를 깊이 인식한 서방의 기성세대 반공 투사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떠났다. 새로운 세대는 공산주의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기에 공산주의의 사악함, 살육, 기만 등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급진적 혹은 점진적인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행동하며, 자국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체제를 파괴하고 심지어 폭력으로 정권을 전복하는 각종 활동을 하고 있다.

1) ‘붉은 광장’은 여전히 붉다

다른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이 곳곳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가운데 구소련은 내정 불안과 외교적 고립, 경제 붕괴, 민심의 변화를 겪었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은 소련 공산당을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고 활동을 제한했다. 국민들은 탈공산화와 반공산화에 대한 오랜 염원을 외쳤고, 결국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가 결의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이로써 소련은 건국 69년 만에 해체됐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배어 있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쉽게 지워질 수 있겠는가?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이 세워지자마자 탈(脫)소련화 운동을 일으켰다. 레닌 동상을 넘어뜨리고, 소련 서적을 불태웠으며, 소련 정부에서 일했던 공직자들을 해고하고 소련과 관련된 제품을 모두 파괴하고 불태웠다. 하지만 공산사령의 본질은 건드리지 못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 세계적으로 탈나치화는 아주 철저하게 이뤄졌다. 나치 전범 공개심판과 실형 선고에서부터 나치 사상 청산까지 철저하게 이뤄져 세상 사람들이 나치라는 두 글자만 보거나 들어도 치욕을 느끼게 했다. 법망을 빠져나간 나치주의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산 세력이 판을 친 러시아에서 탈공산화가 제때에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결국 호랑이를 키워 화를 초래하게 됐다. 곧 공산 세력은 반격에 나섰다. 1993년 10월, 모스크바 시민 수만 명이 모스크바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소련 국기를 흔들며 레닌과 스탈린의 이름을 연호했다. 시위 행렬은 점점 더 커졌다. 1991년에는 모스크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과 민주를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공산 세력이 소련 체제 회복을 요구했다. 여기에 군과 경찰이 참여해 사태가 더욱 격렬해졌다. 중요한 시점에 안보부처와 군 장성들이 옐친을 지지했고, 옐친은 정예 탱크부대를 파견해 위기를 수습했다. 그러나 공산 세력은 여전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공산당을 결성해 당시 러시아 제1당이 되기까지 했는데, 현재 집권당인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이 제1당이 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진행된 일부 사회조사(예를 들어, 모스크바 RBK방송국이 2015~2016년에 실시한 일련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0%가 ‘소련이 부활해야 한다’고 답했다. 2017년 5월, 수많은 러시아 사람이 소련 정권 찬탈 100주년을 기념했다. 소련 시절 설립된 콤소몰(Komsomol,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레닌의 시신 앞에서 청년 입단 선서식을 거행했다.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주석은 최근 6만 명이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공산당은 계속 생존하고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떠벌렸다.

모스크바에만 아직도 약 80개에 달하는 레닌 기념비가 있다.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의 시신은 여전히 다양한 관광객과 신앙 추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붉은 광장은 여전히 붉고 공산 사령은 여전히 러시아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KGB도 지금까지 철저히 폭로되거나 세인의 미움을 산 적이 없다.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직 너무나 많다.

2) 붉은 재앙은 여전히 범람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는 중국,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4개다.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포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공산 독재국가다. 냉전 이전에는 공산당이 장악한 공산당 국가가 27개였다. 현재 공산당이 여전히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국가는 13개, 현재 공산당이 등록된 국가는 120개다. 지난 100년간 공산당 정권이 이미 사라진 국가는 120개다.

1980년대에 이르러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각종 공산주의 정당(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한다고 자처하는 당 포함)은 50여 개였고 당원 수는 총 100만 명(쿠바 공산당이 절반을 차지한다)에 달했다. 1980년대 상반기 미국과 소련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하면서 공산 세력은 점차 약화했다. 페루 공산당(Shining Path·빛나는 길)처럼 공산 제도와 폭력 시스템을 고수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고, 대다수 국가에서는 겉모습을 바꾼 사회주의 변종 형태가 나타났다. 이들은 기존의 공산정당을 민주사회당, 인민사회당 등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미의 10개 공산 정당은 이름에 공산당을 없앴지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계속 추진하고 있어 형식상으로는 도리어 기만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33개 독립국 가운데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쿠바 이외의 나라 공산당은 대부분 합법 정당이다. 베네수엘라, 칠레, 우루과이 등의 공산당은 집권 여당과 각종 형식의 연정을 맺어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 외 다른 나라 공산당의 정치 신분은 대부분 야당이다.
비록 서방과 여타 지역의 일부 국가에서 공산사령은 동방에서처럼 살육과 폭력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온갖 변이된 수법과 서서히 침투하는 방식으로 도덕과 신전문화(神傳文化·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문화)를 파괴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및 제도를 추진하는 목표를 실현했다. 공산사령은 사실상 전 세계를 점령했다. 공산사령이 인류를 훼멸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실현되기 일보 직전이다.

다음편 보기


[1] 정창, 존 할리데이, 『마오쩌둥,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毛澤東:鮮爲人知的故事)』, 홍콩 開放出版社(2006)

[2]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대만 관련 성명(Statement On Formosa)」 1950년 1월 5일, https://www.archives.gov/education/lessons/korean-conflict

[3] 첸아핑(錢亞平), 「60년간 중국의 대외원조, 최대 국가재정 7% 차지(60年來中國的對外援助:最多時佔國家財政支出7%」, 인민일보(人民日報) 웹사이트

[4] 국가결산보고에서 발췌한 대외원조지출(對外援助支出摘自歷年國家決算報告)

[5] 첸시안후이(陳憲輝), 『혁명의 진실, 20세기 중국기사(革命的真相, 二十世紀中國紀事)』, 38장, https://china20.weebly.com/

[6] 상동,

[7] 첸시안후이(陳憲輝), 『혁명의 진실, 20세기 중국기사(革命的真相, 二十世紀中國紀事)』, 52장

[8]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망명하다」, 미국의소리(VOA) 프로그램 History’s Mysteries, https://www.voachinese.com/a/hm-escaping-north-korea-20121007/1522169.html

[9] 첸시안후이(陳憲輝), 『혁명의 진실, 20세기 중국기사(革命的真相, 二十世紀中國紀事)』, 49장

[10] 허리보(何立波), 「베트남 원조공작중인 류사오치(援越工作中的劉少奇)」, 인민일보(人民日報) 웹사이트 공산당역사 채널, http://dangshi.people.com.cn/GB/85038/8740381.html

[11] 상동

[12] 슈윈(舒雲), 「건국초기, 우리 나라는 얼마나 국력을 초월한 대외원조를 했나(建國初期,我國實施過多少超出國力的對外援助)?」, 인민망 공산당역사 채널, http://dangshi.people.com.cn/GB/85039/9398916.html

[13] http://blog.sina.com.cn/s/blog_622141230102wm6t.html

[14] 첸시안후이(陳憲輝), 『혁명의 진실, 20세기 중국기사(革命的真相, 二十世紀中國紀事)』, 49장

[15] 상동

[16] 상동

[17] 왕셴건(王賢根), 『베트남원조 항미 실록(援越抗美實錄』, 중국 지난출판사(濟南出版社)

[18] 첸시안후이(陳憲輝), 『혁명의 진실, 20세기 중국기사(革命的真相, 二十世紀中國紀事)』, 56장

[19] 숭정(宋徵), 『1965년 인도네시아 ‘930’ 쿠테타의 전말(1965印尼‘9.30’政變始末), 종람종국(縱覽中國)』, http://www.chinainperspective.com/ArtShow.aspx?AID=183410

[20] 상동

[21] 「설고논금(說古論今), 미얀마의 중국 공격(緬甸的中國衝擊)」, 미국의소리(VOA), https://www.voachinese.com/a/article-2012024-burma-china-factors-iv-140343173/812128.html

[22] 청잉훙(程映紅), 『세계를 향해 혁명을 수출하다-문화대혁명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영향에 대한 초보적 탐구(向世界輸出革命-文革在亞非拉的影響初探)』, 당대중국연구(當代中國硏究), http://www.modernchinastudies.org/cn/issues/past-issues/93-mcs-2006-issue-3/972-2012-01-05-15-35-10.html。

[23] 천이난(陳益南), 「중국의 말레이시아 공산당 방송국 설립(設在中國的馬共電台)」, 염황춘추(炎黃春秋), 2015년 제8호

[24] 청잉홍(程映紅), 「전세계 혁명수출-문화대혁명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에 대한 초보적 탐구(向世界輸出革命-文革在亞非拉的影響初探)」

[25] 한산(寒山),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今是昨非):슝샹후이와 중공의 라틴아메리카 혁명수출의 역사(熊向暉和中共在拉美輸出革命的歷史)」,자유아시아방송,https://www.rfa.org/cantonese/features/history/china_cccp-20051117.html

[26] 첸시안후이(陳憲輝), 『혁명의 진실, 20세기 중국기사(革命的真相, 二十世紀中國紀事)』, 52장

[27] 청잉홍(程映紅), 「전세계 혁명수출-문화대혁명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에 대한 초보적 탐구(向世界輸出革命-文革在亞非拉的影響初探)」

[28] 왕훙치(王洪起), 『중국의 대 알바니아 원조(中國對阿爾巴尼亞的援助)』, 『염황춘추(炎黃春秋)』

[29] 천쿠이더(陳奎德), 『현대법치주의의 진화(The Evolution of Contemporary Constitutionalism)』, 옵서버(The Observer, 2007), 60장

[30] 위의 책, 67장

[31] 위의 책, 78장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