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동방의 살육

9평 편집부
2018년 7월 17일 업데이트: 2019년 7월 21일

목차

머리말

1. 폭력으로 정권 탈취 – 명예스럽지 못한 시작
1) 소련 공산당의 등극
2) 중국 공산당의 권력 찬탈

2. 고통받는 것은 역시 노동자와 농민
1)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을 죽였다
2) 중국 공산당도 똑같이 따라 하다

3. 공산당이 한 짓은 모두 비(非)인성적이고, 변이되고, 불명예스럽다
1) 소련 공산당의 폭행
① 노동수용소 살인 수법, 히틀러도 배우다
② 기근을 조성해 살인
③ 대규모 숙청을 통한 자기편 살인
2) 중국 공산당의 폭행
① 중국 공산당이 기근을 조성해 살인
② 문화대혁명의 폭력 살인과 전통문화 파괴
③ 절정에 이른 파룬궁 박해

4. 공산주의의 붉은 재앙, 폭력 수출

* * *

 

머리말

소련에서 정권을 탈취한 이래, 공산 폭정이 존재한 지 지금까지 100년이 됐다. 미국 의회 기록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최소한 1억 명을 학살했다.[1]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는 공산주의가 저지른 살인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했다.[2] 소련과 동유럽 공산집단이 해체된 후, 해제된 기밀문서 가운데 중국 공산당 역사 연구실에서 공개한 자료를 통해 역대 운동 중의 사상자 수,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심리한 전 캄보디아 공산당 당수의 살인 죄행, 독재 폭정을 이어온 북한 김씨 집안의 죄행 등이 드러났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폭정과 살육 본성에 관해 상당한 인식을 가지게 됐다.

일찍이 많은 학자가 공산당 독재와 나치 독재의 차이점을 비교한 적이 있다. 물론 학자들은 정확한 인식과 명철한 견해를 가지고 이 작업을 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학살 자체가 목적이지만, 공산당의 살인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란 점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며, 영혼은 천국으로 가거나 윤회 전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공산당은 학살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주어 그들의 사악한 이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도덕적 타락 속에서 지옥으로 내몰았다. 공산당은 사람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훼멸하려 한다.

공산당의 살인은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내부 구성원의 흉악함을 강화하고 가장 사악한 자를 선별해 당을 장악하게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공산당이 왜 끊임없이 내부 숙청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숱한 사람이 단지 다른 의견을 가졌을 뿐 당도 지도자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무자비하게 숙청당했고 심지어 구족이 연좌되기도 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공산당은 신과 사람을 적대시함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지어 늘 생존 자체에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가장 잔인하고 사악한 자를 찾아 그들의 주체 세력으로 삼는다. 학살은 잔인하고 사악한 자를 선별하는 과정이다. 그래야만 공산사령(邪靈)은 안심하고 권력을 넘겨 이 폭정의 연장을 보장받는다. 예를 들어, 1989년 6월 4일(6.4 톈안먼 사건)에 벌어진 학살 과정에서 차마 학생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 당원들은 모두 숙청됐고, 장쩌민은 가장 사악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후임 지도자로 선출됐다. 장쩌민이 그 후 파룬궁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저우융캉(周永康)과 뤄간(羅幹)을 잇달아 최고위층에 발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살인은 때때로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은 전 국민의 손에 피를 묻혔다. 당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후에는 이 사악한 체제의 수호자가 되기 쉽다. 폭력과 파괴를 일삼았던 홍위병 중 상당수가 아직도 ‘청춘은 후회가 없다(青春无悔)’고 외치는 것도 이런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밖에도 공산 사교(邪敎)는 학살을 통해 자기들이 만든 적을 소멸하는 동시에 방관자들이 공포와 전율 속에서 공산당에 품은 모든 의혹을 포기하게 한다.

상술(上述)한 원인을 이해했다면, 한 가지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다. 인류 역사가 보여주듯, 전쟁이든 폭군이든 먼저 적이 있어야 살인을 한다. 하지만 공산당은 그 반대이다. 그들은 죽이기 위해 적을 찾고 적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살인을 한다.

역사가 유구하고 전통문화가 깊은 중국 같은 나라에서 공산당은 지속적인 대규모 학살을 필수로 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신을 믿고 부처님을 경배하며 5천 년 동안 축적한 문화의 저력과 사상 수양, 그리고 민족정신이 있는 중국인은 신불(神佛)을 적대시하고 폭력을 숭상하는 공산주의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폭력을 통해서만 공산주의 사설(邪說)을 이식하고 유지할 수 있다. 공산당은 이에 앞서 소련에서 이미 시연(試演)을 했다.

 

1.폭력으로 정권을 탈취-명예스럽지 못한 시작

폭력으로 정권 탈취한 공산당, 명예스럽지 못한 시작

공산주의는 사악한 영(靈)이기 때문에 그 시작은 필연적으로 명예롭지 못하다. 마르크스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한 것에서부터 파리 코뮌의 불량배들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예술의 성 파리를 파괴한 것에 이르기까지, 또 소련 공산당이 음모와 폭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것에서부터 중국 공산당이 폭력과 계략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다.

1) 소련 공산당의 등극

1917년 2월, 당시 러시아 산업 노동자들은 식량이 부족하고 공장 환경이 나빠져 파업을 일으켰다. 그 후, 동란이 러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자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러시아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소식을 들은 레닌은 곧바로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라 러시아로 돌아가려면 많은 적대국을 지나가야 했다. 2007년 말,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90년에 걸친 추측을 증명했다.[3] 당시 러시아와 교전 중이던 독일 황제 윌리엄 2세는 레닌이 러시아에 가져올 재앙적 결과를 예상하고 레닌이 독일을 경유해 스웨덴에 도착한 뒤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 황제는 레닌에게 많은 돈과 무기를 지원했다. 독일 외교부는 1917년 말 이전에 이미 레닌에게 2600만 마르크를 줬다. 처칠은 독일인들이 망명 중인 레닌을 러시아로 돌려보낸 일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모든 무기 중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을 러시아에 사용했다. 그들은 레닌을 페스트균처럼 밀봉된 트럭에 실어 돌려보냈다.”[4] 러시아로 돌아간 레닌은 이미 벌어진 동란을 이용해 1917년 11월 7일(율리우스력 10월 25일)에 정변(10월 혁명)을 일으켰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뒤집어엎고 최초의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1918년 1월 5일, 러시아 제헌의회 선거에서 러시아 사회혁명당은 압도적인 표 차로 집권 여당, 즉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을 앞섰다. 유권자 440만여 명이 투표한 결과, 볼셰비키당의 득표율은 24%에 그쳤지만 사회혁명당은 40%에 달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한 레닌은 약속을 파기하고 제헌의회를 인민의 적이라고 선포했다. 이와 함께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제헌의회 개최 당일 이미 준비한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진입해 강제로 제헌의회를 해산했다. 결국 1월 5일 실시한 선거는 효력을 상실했다. 러시아 10월 쿠데타는 20세기 국제공산폭력운동의 시초로, 공산주의 폭력운동의 확장을 촉발해 전 세계인에게 끝없는 재앙을 안겨주었고, 이때부터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2) 중국 공산당의 권력 찬탈

1917년, 소련은 정권을 수립하자마자 중국이 공산 제3인터내셔널 회원국인 점을 이용해 혁명을 수출했다. 보이틴스키를 중국에 파견해 공산주의 소조를 창립한 데 이어 보로딘을 통해 국민당에 제1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침투해 조직 기반을 신속히 확대할 수 있게 했다. 국민당 정부군이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과 8년 동안 간고하게 대결하는 사이, 중국 공산당은 비겁하게 세력을 키워 궤멸 직전이던 3만 명의 홍군에서 132만 명의 정규군과 260만 명의 민병을 거느린 군사집단으로 성장했다. 일본이 패전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평화회담을 하는 척하는 한편, 무력 확장을 이어가면서 미국과 소련에 국민당을 포기하고 공산당을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 공산당은 결국 국민당 정부군을 물리치고 1949년 폭력으로 권력을 찬탈해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공산 독재국가를 세웠다.

이때부터 공산 진영은 놀라운 기세로 커져갔다. 세계 최대 면적을 가진 소련과 최대 인구를 가진 중국으로 인해 유라시아 대륙이 거의 붉은색으로 물들었는데, 전 세계 인구 및 지구 지도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 많은 나라도 소련과 중국 공산당으로 기울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많은 사람이 피 흘려 싸운 결과가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만들고 공산 독재를 키운 꼴이 됐다. 실로 세상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2. 고통받는 것은 역시 노동자와 농민

공산주의 시조인 마르크스에서부터 공산 독재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말로는 노동자, 농민, 무산계급에 의지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했지만, 실제 행동은 결국 노동자, 농민을 고통받게 했음이 증명됐다.

1)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을 죽였다

1918년, 레닌이 제헌의회를 불법으로 해산하자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일어나 저항함으로써 폭력 기계 앞에서 최초로 피를 흘린 계층이 됐다. 당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제헌의회 해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 노동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 볼셰비키 군대는 평화로운 데모 대열을 향해 총격을 가했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거리는 노동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러시아 최대의 노동조합인 러시아 철도노조연맹은 제헌의회 해산에 항의하기 위해 정치적 파업을 선언했고, 많은 노동조합이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은 곧바로 이 파업을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했다. 러시아철도노조연맹을 비롯한 여타 독립 노조의 활동이 금지됐다. 이때부터 러시아 노조는 점차 소련 공산당에 통제됐다. 1919년 봄, 러시아의 많은 도시에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굶주린 노동자들은 볼셰비키 군대와 같은 양의 식량을 공급하고, 공산당원의 특권을 폐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모든 파업은 비밀경찰 체카(Cheka)에 의해 체포와 총살이라는 가혹한 방식으로 진압됐다.

1918년 여름 러시아는 내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닌은 1918년 6월 스탈린을 볼가 지역의 차리친에 파견했다. 그곳은 러시아의 전통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레닌은 스탈린에게 차리친에서 집단학살을 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대규모로 농민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레닌에게 보낸 전보에서 “안심하세요. 우리의 손은 떨리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얼마 후 대량의 식량이 모스크바로 수송됐다.

소련 공산당의 폭정은 농민 저항을 더 많이 불러일으켰다. 1918년 8월, 펜자 지역의 농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곧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번졌다. 소련 공산당은 군대를 파견해 잔혹하게 진압했다. 레닌이 당시 펜자 지구에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다. “1. (인민들이 교수형 집행 과정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최소한 100명의 알려진 지주‧부자‧흡혈귀를 교수형에 처한다.  2. 그들의 이름을 공표한다. 3. 그들의 곡물을 전부 빼앗는다. 4. 어제의 전보에 따라 인질을 지정한다. 이 일은 반드시 주변 수백km 내의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하고, 떨리도록 하고, 알도록 하고, 소리 지르도록 해야 한다.”[5]

10월 혁명 전, 탐보프 지역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소련 정부는 식량 징발을 강행하기 위해 대량의 양곡 징발팀을 탐보프 지역에 보냈다. 농민 5만여 명은 강제 징발에 맞서 자위군을 결성하고 무장 양곡 징발팀과 무력 충돌을 감행했다.

탐보프 농민들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해 1921년 6월, 소련 정부의 반(反)비적위원회는 투하체프스키에게 독가스를 사용해 비적을 공격하라고 사주했다. 투하체프스키는 독가스를 살포하고 불을 질러 탐보프 지역의 광대한 땅을 무인 지역으로 만들었다. 탐보프주(州)의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과 그들 가족 10만여 명이 구금되거나 유배되고 1만 50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 예행연습은 나중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 노동자와 농민을 박해하는 데 충분한 밑거름이 됐다.

2) 중국 공산당도 똑같이 따라 하다

중국은 5천 년에 걸쳐 다져진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문화를 가지고 있고, 하늘을 경외하고 신을 믿는 전통은 이미 중국인들의 뼛속에 녹아있다. 공산사령이 기만, 변이, 침투 등의 수단만으로 5천 년 전통을 어찌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공산사령은 계획적으로 중화 전통문화를 이어받은 사회 엘리트 계층을 폭력으로 학살했고, 전통문화 중에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정신적 지주와 물질적 매개체를 파괴해 신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또한 사악한 당(黨) 문화를 만들어 전통문화를 대체하는 한편, 살해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당 문화로 육성하고 훈련함으로써 그들을 배은망덕한 ‘이리 새끼’로 개조해 인류를 훼멸하는 공산사령의 도구가 되게 했다.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탈취하자마자 적을 만들기 시작했고, 도살용 칼을 먼저 엘리트 계층을 향해 휘둘렀다. 중국 공산당은 농촌에서 지주와 유지를 살해하고 도시에서 자본가를 죽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동시에 사회 재부(財富)를 약탈했다.

중국 공산당의 이른바 토지 개혁은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우선 농민들에게 약간의 이익을 주면서 지주와 부농(富農)을 죽이고 공산당 새 정권을 지지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지주와 지역 유지를 학살하고 나서는 즉시 합작화를 통해 농민에게 나누어 준 토지를 회수했다. 결국 많은 농민은 여전히 자신의 토지가 없어서 고생했다.

중국 공산당은 1950년 3월 ‘반혁명분자를 엄하게 진압하라(鎭反)’는 지시를 내려 농촌의 지주와 부농 계층을 집중적으로 학살했다. 중국 공산당은 “1952년 말까지 소멸한 ‘반혁명 분자’가 240여만 명”이라고 공표했지만, 실제 살해된 사람은 당시 인구의 1%에 육박하는 500만 명 이상이다.

중국 공산당은 농촌의 지주와 부농을 학살한 데 이어 3반(反)과 5반(反) 운동을 통해 도시의 자산가들을 살해했다. 잠정적인 통계에 따르면 1952년 1월 25일부터 4월 1일까지, 상하이에서만 이 운동으로 인해 자살한 사람이 876명에 달하고, 그중 상당수 자본가가 일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지주와 자본가 계층을 소멸하고 나서도 중국 공산당은 멈추지 않고 농민, 소상공인, 수공업자의 재산을 약탈했다. 그 결과 많은 노동자,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3. 공산당이 한 짓은 모두 비(非)인성적이고, 변이되고, 불명예스럽다

1) 소련 공산당의 폭행

① 노동수용소 살인 수법, 히틀러도 배우다

1918년 9월 5일 레닌은 솔로베츠키 제도에 첫 번째 특별 노동수용소 설립을 명령했다. 이 수용소는 10월 혁명과 소련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 후 소련 공산당은 각지에 더 많은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러한 수용소들은 바로 스탈린 시대의 악명 높은 굴라크 수용소의 전신이다. 굴라크는 러시아어 ‘교정(矯正)노동수용소 관리본부’의 약칭이다. 스탈린 시대에 숙청이 잇따르고 공포정치가 심화함에 따라 굴라크 수용소는 갈수록 많아졌다. 굴라크 숫자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기 직전에 절정에 달했는데, 무려 170개가 소련 전역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 마치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도(群島)와 같았다.

<굴라크 군도>라는 책에서 저자 솔제니친은 고문 방법 31가지를 열거했다. 심리적 고통을 가하는 것에서부터 신체를 손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극악무도한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비밀경찰은 흔히 몇 가지 형(刑)을 병용해 생리적으로 체력을 고갈시키고 정신적으로 희망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그 결과 어떤 진술이든 필요한 대로 얻을 수 있었다.[6]

노동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고 한겨울에도 매일 12~16시간씩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목숨을 잃었고 가족들까지 굴라크에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남편을 수감하고 아내를 귀양보냈는데, 심지어 여든 살 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과 국가 고위 지도자에서부터 군 고위 장성, 민간인, 종교인, 엔지니어, 의사, 학생, 교수, 노동자,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피해자가 됐다.

사람들은 대부분 수용소가 독일 나치의 산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소련의 노동수용소야말로 공산 국가 수용소의 원조이다. 당시 히틀러도 게슈타포를 소련에 파견해 노동수용소 건설 경험을 배우기도 했다.

보수적인 통계에 따르면,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수감자 50여만 명이 사망했다. 굴라크 시스템은 1960년에 폐쇄됐다. 2013년 러시아 관영매체 웹 사이트는 1500만 명 이상이 굴라크 수용소에 수감됐고, 그곳에서 1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② 기근을 조성해 살인

공산 정권은 기근마저도 살인에 이용했다.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은 사실상 소련 공산당의 우크라이나 인종 청소에서 비롯됐다. 사건의 배경을 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소련 공산당이 우크라이나에서 추진한 농업 집단화 정책이 현지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자 소련 공산당은 농사 잘 짓는 농민을 대부분 부농으로 분류한 다음, 그 일가족을 모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유배했다.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해 1932년의 식량 생산량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소련 정부는 1932년부터 1933년 겨울까지 우크라이나에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우크라이나 주변에 경계선을 그어놓아 누구도 도망칠 수 없었다. 처음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집에 저장한 채소와 감자로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식량 징발팀을 파견해 각 가정에 남아 있던 채소와 감자를 전부 빼앗아 갔다. 곧 수많은 농민이 줄줄이 굶어 죽었고,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참극이 빚어졌다. 또 겨울에는 이미 땅속에 매장한 고양이, 개, 가축, 사람의 사체를 다시 꺼내 먹기도 했다. 농민들에게는 도시 진입과 식료품 구입을 금지했다. 결국 많은 사람이 철길 위에서, 혹은 철도 옆에서 굶어 죽었다.

대기근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가 100만 명이 넘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각 도시에서 구걸로 생계를 이어갔다. 스탈린 정부는 이 어린이 거지들이 소련의 빛나는 이미지를 손상했다며 12세 이상의 어린이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250만~480만 명이 대기근으로 사망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하리코프시 거리 곳곳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③ 대규모 숙청을 통한 자기편 살해

공산사령이 전 인류를 훼멸하는 목적 중에는 자기편 훼멸도 포함된다. 그래서 공산당은 같은 편에게도 인자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 스탈린 시대에 공포적인 살육은 갈수록 격해졌다. 1928년부터 스탈린은 10년간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탄압을 계속했다. 그중 이른바 대숙청은 스탈린이 자기편 사람들을 살육하는 운동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소련 공산당 17차 당 대회에 참석한 1966명의 대표 가운데 1108명이 대숙청 운동 과정에서 반혁명죄로 체포됐다. 17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과 중앙위원 후보는 총 139명이었는데, 그중 80%가 처형됐다. 레닌이 죽기 전, 최후의 정치국 위원 7명 중에서 스탈린은 레닌을 제외한 나머지 5명(카메네프,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리코프, 톰스키)을 모두 죽였다. 1919~1935년에 선출된 정치국 위원 31명 가운데 20명이 살해됐다. 베리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데려오면 나는 그의 범죄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

이 한 차례 숙청은 어떤 사회 계층도 빠뜨리지 않았다. 종교계, 과학계, 교육계, 학술계, 문화예술계 지식인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군부와 정계의 그것보다 빨랐다. 실제로 스탈린의 공포 정책에 더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소련의 일반 민중이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대숙청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살해하고 유배했을까? 아직 정확한 기록은 없다. 1991년 6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 소련 국가안전위원회 주석 크리우치코프가 통계 하나를 발표했다. “1920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은 약 420만 명을 탄압했고, 이 가운데 200여만 명은 대숙청 과정에서 탄압받았다.” 일찍이 소련 옐친 시대에 있었던 사건을 평반(平反: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잡음)하는 작업을 주도한 야코블레프는 2000년 기자회견에서 “스탈린의 탄압으로 희생된 자는 2000만 명에 달하며 더 많을 수도 있다”고 했다.[7]

2) 중국 공산당의 폭행

중국 공산당은 1949년부터 1966년 사이에 ‘진반(鎭反: 반혁명 진압)’ ‘삼반오반(三反五反)’ ‘반우파’ ‘대약진 운동’ 및 그들이 조성한 대기근을 통해 중국인 수천만 명을 살해했다. 피비린내 나는 당내 투쟁의 수요에 따라 무신론과 공산당 문화를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의 ‘이리 새끼’들이 성장하면서, 수천 년을 이어온 중화 전통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공산사령은 더 미친 살육과 파괴를 시작했다.

① 중국 공산당이 기근을 조성해 살인
1959년부터 1962년 사이, 중국에서 전대미문의 대기근이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은 줄곧 자연재해라고 속여왔다. 사실은 1958년 중국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대약진운동을 벌여 식량 재고를 전부 소진했다. 또한, 식량 생산량을 부풀려서 거짓 보고를 하도록 각급 도시와 농촌 지역을 강압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 보고서의 수량만큼 식량을 징수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식량, 종자, 사료까지 전부 빼앗기고도 거짓 신고한 양을 채울 수 없었다. 중국 공산당은 각급의 식량 징발대를 조직해 굶어 죽어가는 농민들을 매달아 때리고 고문해 목숨을 부지할 마지막 식량까지 약탈했다. 또 중국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을 본받아 농민들이 도시로 들어가거나 여타 방법으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막음으로써 수많은 가정, 심지어 마을 전체가 굶어 죽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상이 빈번했고, 길가에는 굶어 죽은 사람의 사체가 곳곳에 널려 있어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또한 살기 위해 식량을 빼앗는 농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농민들에게서 수탈한 식량으로 소련의 무기를 대규모로 사들이고 다른 나라로 수출해 황금으로 바꾸고 빚을 갚는 데 썼지만, 정작 중국 공산당은 자국민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불과 3년 사이에 인성마저 상실케 하는 대기근을 조성해 중국인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② 문화대혁명의 폭력 살인과 전통문화 파괴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5.16통지)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같은 해 8월, 고위급 간부 자제들을 주축으로 한 베이징시 일부 중학교 홍위병들이 베이징에서 대대적인 가택 수색과 구타, 학살을 시작했다. 1966년 8월 하순 베이징시 각 구(區)에서 수천 명이 사망하는 이른바 ‘붉은 8월(紅八月)’ 참화가 빚어졌다.

베이징시 다싱(大興)현의 학살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1966년 8월 27일에서 9월 1일 사이, 다싱현의 13개 인민공사 소속 48개 생산대대가 325명을 살해했다. 그들은 80세 노인에서부터 생후 38일 된 아기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했고, 그 가운데는 일가족이 몰살당한 집도 22가구나 됐다. 살인 방식은 몽둥이로 때리고, 작두로 자르며, 밧줄로 교살하는 등이었다. 영유아는 한쪽 다리를 밟고 다른 한쪽 다리를 찢어 두 동강 냈다.

공산사령은 폭력과 살육을 사주할 때 살인은 마땅한 것이고 인간다운 착한 마음은 포기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적에게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하고 무자비해야 한다’는 당(黨) 문화 이념을 고취했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의 모든 악행은 의도적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도덕을 타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당 문화의 독해(毒害)로 많은 사람이 공산사령의 살인 도구로 변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 독재 국가가 잔인하게 살인을 일삼는 것만 보았을 뿐, 인간이 어떻게 이처럼 인간성을 상실하고 잔인무도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공산사령은 증오와 우주 저층의 각종 부패물질로 이루어졌고, 또 썩은 귀신과 저층의 영(靈)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른다. 따라서 그러한 비인간적인 표현은 바로 근본적인 마성에서 나온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비명횡사한 사람은 집계하기 어렵다. 다수의 연구 결과로는 200만 명, 심지어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학살 사건을 연구하는 미국의 루돌프 룸멜(R. J. Rummel) 교수는 자신의 책 <피로 물든 중국의 100년(China’s Bloody Century)>에서 “문화대혁명 시기에 사망한 사람은 약 773만 명”이라고 밝혔다.

산둥대학 부교수 둥바오쉰과 산동성 당사연구실(黨史研究室) 전 부주임 딩룽자가 공저한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다>란 책이 1997년 안후이 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됐다. 이 책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예젠잉이 1978년 12월 13일 중앙공작회의 폐막식에서 한 연설이 인용돼 있다. “중앙 정부는 2년 7개월간의 전면 조사를 통해 확인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2000만 명이 사망했고, 전 인구의 9분의 1에 해당하는 1억 명 이상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으며, 8000억 위안(약 132조 400억 원)을 낭비했다.”

<덩샤오핑 문선(鄧小平文選)>에 의하면, 1980년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덩샤오핑은 인민대회당에서 이탈리아 기자 팔라치와 인터뷰를 두 번 가졌다. 팔라치가 문화대혁명으로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를 묻자 덩샤오핑은 “그것은 천문학적인 숫자이며, 영원히 추산해 낼 수 없는 숫자이다”라고 했다. 이어서 덩샤오핑은 억울한 사건 하나를 예로 들었다. 캉성(康生)이 윈난(雲南)성 당서기 자오젠민을 면전에서 ‘반역자, 국민당 특무’라고 지목하면서 공안부장 셰푸즈에게 당장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 한 사건만으로 138만 명이 연루돼 1만 7000여 명이 살해됐고 6만여 명이 불구가 됐다. 쿤밍(昆明) 지역에서만 1496명이 살해당하고 9661명이 불구가 됐다.

③ 절정에 이른 ‘파룬궁 박해’

수십 년간 중국 공산당의 폭력과 살육, 세뇌, 당 문화 주입과 교육으로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도덕 표준은 이미 신이 인류에게 규정한 최저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심지어 신을 믿는 사람들마저 어떤 것이 신에 대한 참된 믿음인지 모른 채 중국 공산당이 파괴한 후의 종교를 신을 믿는 형식으로 삼았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세계 각 민족이 예언한, 인류 전체를 훼멸하는 대재앙은 반드시 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도덕을 끌어올리고 구도하기 위해 1992년 봄,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진(眞), 선(善), 인(忍)을 신앙하는 파룬궁(法輪功)을 전수했다. 파룬궁은 파룬따파(法輪大法)라고도 하는데, 이 대법은 매우 간단하고 쉬운 데다 건강 증진 및 정신 수련 효과가 탁월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전 세계에서 1억 명 이상이 입문해 수련함으로써 신앙을 전반적으로 재건하고 도덕 승화를 이끌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류를 정도(正道)로 돌아오게 했고 강산이 다시 맑고 깨끗해지게 했다.

공산사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문화를 파괴하고 도덕을 타락시켜 창세주의 구도(救度)를 막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파룬궁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다.

1999년 7월 장쩌민 전 중국 공산당 당수는 곧바로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감행했다. 박해 만행은 동서고금의 온갖 사악한 수단을 다 집결해놓은 듯 잔인했다. 장쩌민은 파룬궁 수련자를 겨냥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국 공산당은 기만과 폭력을 앞세워 모든 중국인에게 박해에 동의하고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며, 도덕을 타락시켜 신을 등지게 하고 파룬궁과 대립하게 했다. 중국인들은 오랜 세월 지속된 고압, 세뇌, 살육 속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무감각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 만행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심지어 본의 아니게 박해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들도 공산당과 함께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

공산사령은 또한 경제적인 수단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자유세계 국가들을 묶어두어 파룬궁과 수련자들에 대한 잔인한 박해를 제지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박해를 자행하는 무리가 더욱 거리낌 없이 미쳐 날뛰게 됐다.

공산사령은 동서고금의 온갖 박해 수단을 집대성했는데, 그 사악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파룬궁 수련자를 살아있는 장기(臟器)은행으로 삼아 수시로 살해하고 장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데, 각 장기는 수만~십수만 달러에 거래된다. 2006년 7월 7일, 캐나다 인권 변호사 데이비드 메이터스와 전 캐나다 국회의원 데이비드 킬고어가 이에 관한 보고서 <블러디 하비스트, 장기를 얻기 위해 파룬궁 수련자를 살해(Bloody Harvest, The killing of Falun Gong for Their Organs)>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18가지 증거를 토대로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한 중국 공산당의 강제 장기적출 범죄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폭로하면서 ‘지구상에 전례가 없는 사악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또 국제 조사관들의 협력하에 2016년 6월 <블러디 하비스트>와 <학살(The Slaughter)>을 발표했다. 68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2400여 개의 참고문헌으로 된 이 보고서는 중국 공산당의 강제 장기 적출 범죄의 실체와 규모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2016년 6월 13일 미국 의회는 중국 공산당에 ‘파룬궁 수련자 등 양심수를 대상으로 한 강제 장기 적출 만행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343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중국 공산당은 강제 장기 적출로 벌어들인 거대한 자금으로 파룬궁 박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인들은 살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장기이식 수술을 받지만, 돈으로 살아있는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사는 것은 중국 공산당을 도와 살인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원하는 것으로, 사람을 훼멸하려는 목적이다.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찬탈한 후, 모든 종교 신앙에 대한 박해를 늦춘 적이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본서의 제6장에서 상세한 논술할 것이다.

4. 공산주의의 붉은 재앙, 폭력 수출

<공산주의 흑서: 범행, 공포, 탄압>의 서론 ‘공산주의의 범행’에서 저자는 전 세계에서 공산 정권이 저지른 만행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잠정 집계했는데, 총사망자 수를 약 9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그 내역은 소련 2000만 명, 중국 6500만 명, 베트남 100만 명, 북한 200만 명, 캄보디아 200만 명, 동유럽 공산정권 100만 명, 라틴 아메리카(주로 쿠바) 15만 명, 에티오피아 170만 명, 아프가니스탄 150만 명, ‘국제 공산주의 조직이 일으킨 운동과 재야의 공산당’에 의한 사망자 1만 명이다.[8]

또 다른 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중국 공산당의 직접적인 관여하에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폭정으로 죽은 사람이 140만~22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캄보디아의 인구는 700만 명에 불과했는데, 인구의 3분의 1이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북한에서는 1948년부터 1987년까지 강제 노동, 처형, 수용소 노동개조 등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북한은 대략 24만~42만 명이 1990년대 기근으로 사망했고, 1993년부터 2008년까지 60만~85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김정은이 집권한 뒤에는 더욱 처참한 살육을 감행했는데, 희생자에는 정부 고위층과 친인척도 포함됐다. 또한 핵으로 세계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소련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불과 100년 동안에 공산사령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망자를 합한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공산주의의 역사는 바로 살인의 역사로서 페이지마다 피로 얼룩져 있고 100년 동안 끊임없이 저질러온 폭력과 살인의 기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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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membering The Victims Of Communism,” https://www.congress.gov/congressional-record/2017/11/13/extensions-of-remarks-section/article/E1557-2

[2] Stéphane Courtois, ed.,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trans. Jonathan Murph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4.

[3] “Revolutionaer Seiner Majestät” (德皇陛下的革命), http://www.spiegel.de/spiegel/print/d-54230885.html.

[4] Winston S. Churchill, The World Crisis, Volume 5.

[5] Robert Service, Lenin: A Biography (London: Macmillan, 2000), 365.

[6] Aleksandr Solzhenitsyn, The Gulag Archipelago: 1918-1956.

[7] 『야코블레프 탐방록(1992-2005)』. 중국사회과학원 역

[8] Stéphane Courtois, ed.,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trans. Jonathan Murph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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