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유럽에서 시작되다

9평 편집부
2018년 7월 19일 업데이트: 2019년 7월 18일

목차

머리말
1. 마르크스 신앙은 신을 반대하는 사교(邪教)이다
2. 마르크스주의 출현의 역사적 배경
3. 프랑스 대혁명과 공산주의
4. 파리 코뮌은 공산주의가 세상에 발을 내디딘 시발점이다
5. 공산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다

머리말

정교(正教)는 모두 예언을 남겼는데, 그중 상당수가 이미 적중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만의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가 쓴 <제세기(Les Siecles)>를 비롯해 페루와 한국 등에서도 대대로 전해지는 예언이 있다. 중국에서도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에 모두 체계적인 예언이 있었는데, 그 정확성이 놀라울 정도다.[1]

예언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설명한다. 역사는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과정이 아니라 미리 써 놓은 시나리오처럼 발전 방향과 중대한 사건을 모두 먼 옛날부터 이미 배치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순간이 새로운 역사 대주기의 시작일 수도 있다)에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기다리고 있는 사건, 바로 구세주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는 사실이다.

영화 제작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은 모든 것은 클라이맥스를 위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작가는 많은 인물을 설계하고 많은 사건을 배치해 이 절정의 상태에 다다르게 해야 한다.[2] 이 각도에서 본다면 역사라는 이 각본의 절정은 구세주가 인간 세상에 신의 기적을 크게 드러내기 전에 치르는 최후의 정사대전(正邪大戰: 바른 신과 사악한 마귀의 전쟁)이다. 많은 사건이 이를 위해 배치된 것이다. 즉, 최후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악마는 세간에서 인간을 철저히 훼멸하려고 세밀한 배치를 했고, 전능하신 창세주는 자비롭게도 최후의 관건적 시기에 길을 잃은 인간을 일깨우기 위해 배치했다. 이 모든 것은 인간 세상의 복잡한 국면을 조성했다.

세상의 많은 정교(正教)는 모두 창세주가 인간 세상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상당수 종교가 이 시기에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수많은 악마가 세상에 내려오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사람의 도덕도 매우 타락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의 현실이다.

인류의 이러한 타락은 하룻밤 사이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무신론이 성행하면서 사기성 이론으로 사람들을 속였다는 점이다. 이런 거짓말은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시작됐고, 마르크스는 온갖 사기를 집대성한 자로서 마치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듯한 이론을 짜맞춰 완성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토대로 독재 폭정 정권을 세웠다. 간단히 말해서, 마르크스는 최후의 시각에 사람들이 창세주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마다. 마르크스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가 숭배한 것은 사교(邪敎)이며, 그의 이론은 악마를 대신해서 하는 말이다.

1. 마르크스 신앙은 신을 반대하는 사교(邪教)이다

마르크스는 서적을 많이 출판했다. 널리 알려진 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적 토대인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다. 전자는 1848년에, 후자는 1876년부터 1894년 사이에 출판했다. 서방의 마르크스 연구자들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마귀로 변하는 과정을 거쳐 악마의 대변자가 됐다.

마르크스는 젊었을 때 자신의 글에서 하느님을 열정적으로 찬양했다. 그러나 그 이후 신비로운 사건이 벌어지면서 전혀 다른 마르크스가 나타났다.

마르크스의 시 ‘절망자의 기도(Invocation of One in Despair)’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저주와 운명의 멍에만 남겨놓았네. 이 세상 모든 것을 뒤로한 나에게 남은 것은 증오뿐이라네. 나는 하늘에 나의 왕좌를 세우리. 그 꼭대기는 추위와 두려움이고 그 바닥은 미신의 전율이며, 그 주인은 가장 어두운 극도의 고통이라네.”[3]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한 시대가 이미 막을 내렸습니다. 신성한 것들이 제 몸에서 떨어지고 새로운 주(主)가 머물렀습니다. … 불안이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꿈틀대는 귀신을 달랠 수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있기 전까지는.”

마르크스는 ‘창백한 처녀(The Pale Maiden)’라는 시에서는 “나는 천국을 잃었음을 알고 있다. 예전에 하느님을 믿었던 나의 영혼은 지금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구나”라고 했다.

마성(魔性)으로 변한 마르크스의 심태를 그의 가족은 명백히 감지했다. 1837년 3월 2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언젠가 네가 명성을 떨치고 세속의 성공을 이루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 너에게 명확히 말해주겠다. 그런 것들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없단다. 네 마음이 악마로 변하지 말아야 내가 즐거울 수 있단다.”

1854년 3월 21일 마르크스의 아들 에드거는 마르크스에게 쓴 편지에서 아버지를 ‘친애하는 악마’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의 딸은 자신이 쓴 책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마르크스가 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했다.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이야기는 한스 로클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마르크스가 몇 개월 동안 들려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한스 로클은 주술사였고 장난감 가게를 가졌지만, 빚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진 멋진 장난감들을 하나씩 악마에게 팔아야 했다.

마르크스가 악마에게 판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성공과 바꿨다. 그는 자신의 시 ‘연주자(The Fiddler)’에서 기이한 자백을 했다. “지옥의 기운이 솟아올라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나를 미치게 하며 내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이 검을 보았는가? 암흑의 왕이 내게 팔았노라. 그것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내게 인기(印記)를 주었네. 내 죽음의 춤은 더욱 대담해져야 하네.”[4]

로버트 페인은 자신의 저서 <마르크스>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마르크스의 자서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악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고, 그는 악마의 특성을 갖추었다. 때때로 그는 그가 악마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의식했던 것 같다.”[5]

마르크스의 영혼은 사악으로 변했다. 그는 신에 대한 분노로 악마 숭배에 동참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에릭 보겔린은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라고 여겼다. 그는 피조물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피조물의 생존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았다. … 그는 ‘대립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의 시선, 즉 신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려고 했다.” [6]

마르크스는 그의 시 ‘인간의 자존심(Human Pride)’에서, 신에게서 벗어나 신과 동등하기를 바란다고 표현했다. “경멸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 세상에 도전하네. 세계라고 하는 얼굴에 갑옷을 던져 이 거대한 난쟁이의 붕괴를 지켜보리. 그러나 이놈의 붕괴는 아직 나의 희열을 진정시킬 수 없구나. 나는 신처럼 폐허가 된 왕국을 빠져나가 개선하리라. 나의 말은 구절구절 불(火)과 업(業)이니, 나는 조물주와 동등하다고 느낀다네.”

사교 신앙을 가진 마르크스는 반항적인 시각에서 글을 썼다. “나는 줄곧 조물주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신의 생각은 일종의 변태 문명의 청사진이니 반드시 없애야 한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정부 헬렌은 “그(마르크스)는 신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병을 앓았을 때 혼자 방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촛불을 마주하고 기도했다”고 했다. 한 분석 자료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기도는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었지만, 마르크스의 본질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출현한 위대한 인물들은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예수는 기독교 문명을 세웠고 중국 역사상 노자는 중화 문명의 중요한 버팀목인 도가 사상을 세웠으며, 석가모니는 불교를 창립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위대한 인물들의 사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거의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석가모니와 노자는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들의 지혜는 수련으로 깨달은 것이지 인간의 지식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명의 초창기에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나온 각자(覺者)가 있다면, 그에 상응해 문명이 최후의 정사대전(正邪大戰)으로 치닫는 시기에는 시대의 요구를 거스르기 위해 나온 악마의 대변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마르크스의 지식은 비록 이전 사람들의 이론을 참고했지만, 결정적인 기원은 사악한 악마에게서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관하여’라는 시에서 “나는 명상을 통해 가장 심오하고 숭고한 진리를 발견했기에 하느님처럼 위대하네. 나는 어둠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네, 그분과 마찬가지로”라고 거만하게 말했다.

마르크스는 공산사령의 배치로 인간 세상에 공산 사교를 창립했다. 그의 목표는 사람의 도덕을 타락시켜 신을 등지게 만듦으로써 최종적으로 지옥에서 영원히 불에 타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 출현의 역사적 배경

공산사령(邪靈)은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세상에서 온갖 이론을 준비했다. 또한, 공산 사교의 전파에 적응하기 위한 모종의 사회 형태도 만들었다. 이 두 가지 방면에서 우리도 약간의 정리와 분석을 해보았다.

많은 학자가 마르크스의 이론은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여긴다. 포이어바흐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종교를 이렇게 인식했다. “종교는 지각의 무한성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무한함에 대한 인식에서 의식적인 주체는 그 자신의 본능적 무한성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7]. 만약 우리가 포이어바흐의 이론을 좀 더 통속적으로 서술한다면, 그의 뜻은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장한 결과라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이론은 공산주의가 출현하고 범람한 데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과학이 발전하고 기계를 발명하고 물질이 풍요하고 의학이 진보함에 따라 제공되는 각종 향락과 오락 능력이 향상되면, 사람들은 이러한 물질적 토대에 의지해서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래도 불만을 품는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 형태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기술 발전과 사회 개조를 통해 인간 세상에 더는 신이 필요 없는 천당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라는 사교가 사람들을 속여 사교의 이론을 믿게 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포이어바흐가 최초로 기독교를 부정한 사람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는 1835년에 출판한 자신의 책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에서 <성경>의 진실성과 예수의 신성(神性)을 의심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7~18세기의 계몽운동 시기로, 심지어 고대 그리스 시대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추적하는 것은 결코 본서의 목적이 아니다.

비록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다윈의 <종의 기원>보다 11년 일찍 출간됐지만, 다윈의 진화론 가설은 마르크스에게 과학처럼 보이는 근거를 제공했다. 만약 모든 종(種)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자연 선택, 적자생존의 결과이며, 인간이 최고급 생명이라면, 신의 자리는 자연히 배제된다. (진화론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많고 심지어 수많은 허점이 드러났지만, 여기에서는 지면 제한으로 구체적인 분석은 생략한다.) 1860년 12월,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종의 기원>, 이 책은 영어로 엉성하게 썼지만, 우리의 관점에 자연사의 기초를 제공했다.[8] 이 책은 역사상 계급투쟁의 자연과학적 근거로 쓸 수 있다.”[9]

자연과학 분야의 진화론과 철학 분야의 유물론은 마르크스 이론에 사람을 현혹하는 두 가지 도구를 제공했다.

이론적인 준비 외에도 마르크스 시대의 사회는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제1차 산업혁명 시대에 태어났다. 1769년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함으로써 유럽은 가내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했다. 농업 발전으로 인한 많은 잉여노동력은 공업 생산에 투입할 수 있었다. 자유무역이 발전해 제품을 각지에 판매할 수 있게 됐고, 금융혁명은 공업혁명에 자본을 주입했다. 이러한 것들은 사회구조에 심각한 변화를 일으켰다.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도시의 발흥과 더불어 인구, 지식, 관점의 흐름을 이끌었다. 도시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농촌처럼 밀접하지 않다.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도시에서는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책을 저술하고 이론을 정립할 수 있다. 마르크스도 독일에서 추방된 뒤 프랑스와 벨기에를 전전하다 런던에 건너가 빈민가에 거주했다.

마르크스의 말년에 이미 제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 전기, 내연기관, 화학 등이 연이어 나타났다. 전신과 전화가 발명돼 통신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었다. 매번 사회 변동이 있을 때마다 인류는 경험 부족으로 빈부의 분화, 경제 위기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사회 형태가 죄악으로 가득 찼다고 비난하며 반드시 철저히 부숴버려야 한다고 선전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새로운 과학기술은 사람들에게 자연을 개조하는 능력을 높여줬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오만도 키웠다.

여기서 재차 강조하는 것은, 이런 사회적 변동과 이론적 준비가 마르크스주의의 출현과 전파를 초래했다기보다는 악마가 마르크스주의의 출현과 전파를 위해 그러한 조건들을 미리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악마도 기성의 일부 사회 현상을 이용해 사악한 목적을 달성했다.

3. 프랑스 대혁명과 공산주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그 영향이 매우 컸다. 그것은 전통적인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뒤집어엎었으며, 더구나 폭도들이 한 차례 광란을 시작했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하에서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혁명은 바로 일부 사람이 창, 총칼, 대포, 즉 매우 권위적인 수단으로 다른 일부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다. 승리한 정당이 자신들의 노력의 결실을 잃지 않으려면 무기로 반동파에 두려움을 느끼게 해 자신의 통치를 유지해야 한다.”[10]

프랑스 대혁명 후 권력을 잡은 자코뱅파는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무려 7만 명을 죽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완전히 무고한 사람이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죽은 후 그의 묘비에는 “지나가는 행인들,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 내가 살아있다면 당신들은 한 사람도 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있다.

자코뱅파가 실시한 세 가지 방면의 공포 정책은 모두 훗날의 공산당과 매우 유사하다. 그것은 정치 공포, 경제 공포, 종교 공포를 포함한다.

그 정치적 공포 수법은 레닌과 스탈린 시기의 숙청과 똑같다. 혁명가들이 혁명 법정을 개편한 점, 파리와 각지에 단두대를 설치한 점, 혁명위원회에서 피의자 신분을 결정한 점, 중앙 특파원이 각 지방과 군대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점, 무산계급이 정치생활에서 그 지위가 매우 높다는 점, 각 혁명 단체가 적에 대한 투쟁을 강화한 점 등은 모두 정치적 공포의 주요 내용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1794년 6월 10일에 제정된 ‘프레리알 22일 법(Law of 22 Prairial)’이다. 이 법령에 따라 예심제와 변호인제를 취소했고, 징벌 방법은 일률적으로 사형으로 정했으며, 재판 과정에서 물증이 부족하면 의식상의 근거와 내면의 관념에 따라 추정하고 판결할 수 있다. 프레리알 22일 법을 실시함으로써 공포가 극도로 확대됐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공포 시기에 약 30만~50만 명이 용의자로 몰려 수감됐다.[11]

그 경제정책 수법은 레닌의 전쟁 시기 공산주의 정책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1793년 7월 26일 통과된 매점매석 금지 법령은 이렇게 규정했다. “상품이나 생활필수품을 사재고, 상품의 품질을 손상하고, 물건을 숨겨두고 판매하지 않는 자 등은 모두 형사죄로 처리한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는 그 상품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한다.”[12]

그 종교정책은 천주교를 파괴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프랑스는 원래 천주교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그러나 자크 에베르와 피에르 쇼메떼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은 일종의 무신론 신앙을 창립해 이성 숭배(理性崇拜, 이른바 계몽시대가 자랑하는 이성)라고 칭하며 천주교 소멸을 그들의 목표로 삼았다.[13] 1793년 10월 5일 국민공회는 기독교력(曆)을 폐지하고 공화력을 시행했다. 11월 10일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이성(理性)의 성당으로 바뀌었고, 한 배우를 이성의 여신으로 분장시켜 경배를 받게 했다. 무신론을 근거로 한 이 새로운 이성교(理性敎)는 파리에서 빠르게 퍼졌고 일주일 사이에 교회 세 개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파리에서 폐쇄됐다. 종교 공포 운동이 아주 빠르게 전국 각지에 퍼졌으며, 한 무리 성직자가 체포됐고 그중 일부는 처형됐다.[14]

프랑스 대혁명의 수법은 훗날 파리 코뮌과 레닌이 수립한 소비에트 정권에 본보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형성과도 내재적 연관성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을 직접 경험한 공상(空想)사회주의자 바베프는 사유제 소멸을 구체적으로 제출했다. 마르크스는 그를 최초로 진정한 능동적 공산주의 정당의 기초를 다진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프랑스는 19세기에 사회주의 사조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는데, 바베프 사상의 영향하에 비밀 단체 무법자동맹(League of Outlaws)이 파리에서 빠르게 커져갔다. 독일 재봉사 빌헬름 바이틀링이 1835년 파리에 도착해 이 단체에 가입했고, 그의 지도로 1836년 무법자동맹은 의인동맹(League of the Just)으로 바뀌었다.

1847년 6월의 한 대회에서 의인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년 전 설립한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와 합병해 두 사람이 이끄는 공산주의자 동맹이 됐다. 1848년 2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문헌인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 유럽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곳곳에서 이른바 혁명이 일어났다. 나폴레옹 정권이 전복된 이후로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폴란드 등이 모두 혁명의 폭풍에 휩쓸렸다. 1848년에 이르러서는 혁명과 전쟁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러한 불안한 정세는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매개체가 됐다.

1864년 마르크스 등은 제1인터내셔널이라 불리는 국제노동자협회를 건립했는데, 마르크스가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통해 노동자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가 됐고 <공산당 선언>은 크게 성행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지도자인 마르크스는 규율이 엄격한 혁명가들로 구성된 핵심 조직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선동하는 한편, 이 새로운 조직에서 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자들을 제거했다. 예를 들어, 바고닌은 혁명에 관심이 많은 최초의 러시아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열광적으로 선전했다. 그의 리더십으로 제1인터내셔널의 수많은 멤버가 그에게 몰리자 마르크스는 그를 러시아 차르(황제)가 보낸 스파이로 몰아 제1인터내셔널에서 제명했다.[15]

제1인터내셔널 최대의 공산주의 운동은 프랑스 지부가 이끈 1871년의 파리 코뮌 운동이었다.

4. 파리 코뮌은 공산주의가 세상에 발을 내디딘 시발점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인들이 파리를 포위한 것이 파리 코뮌이 발발한 배경이다. 프로이센은 곧 철수했지만, 패전의 치욕과 장기적으로 축적된 프랑스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새로 설립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임시 행정관 티에르는 베르사유로 물러났고 파리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1871년, 파리 코뮌은 사회 최하층의 폭도와 깡패들이 주도한 무장 반란으로 시작됐고, 그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와 형형색색의 급진주의자로 이뤄졌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이론이 뒷받침하고 제1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가 직접 참여하면서 그들은 무산자들을 이용해 사회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전통을 훼손하고 사회의 정치‧경제 제도를 바꾸려고 했다. 그들은 대규모의 살육과 파괴를 개시했다. 파리 및 성에 있던 수많은 문물과 유적지, 예술품을 훼손해 프랑스 문화를 크게 파괴했다. 일찍이 한 노동자가 반문했다. “나는 입장권 살 돈이 없는데 유적지, 오페라 하우스, 카페가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16]

한 증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파리 코뮌은 잔인하고 비정한 것으로, 1789년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유산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본 죄악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 혁명이다. 이 유혈 폭력혁명에 참여한 자는 망명자, 강도, 무신론자, 미치광이 등으로, 그들은 알코올과 피에 취해 있었다.”[17]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자 프랑스 내부는 곧바로 전통과 반(反)전통의 대립이 형성됐다. 파리 코뮌의 명예주석이 말했다. “프랑스를 둘로 갈라놓는 데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정통의 원칙이고, 또 하나는 인민주권의 원칙이다. 인민주권의 원칙은 모든 미래를 쟁취하는 인민 대중을 단결시킨다. 그들은 착취의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을 숨 쉬지 못하게 누르고 있는 틀을 깨버려야 한다.”[18]

그들 신념의 일부는 공상사회주의자 생시몽의 원한에서 비롯됐다. 그는 “국가에 노동자 한 명이 줄어들면 빈곤해지고, 놀고먹는 사람 한 명이 없어지면 부유해진다. 그러므로 부자가 죽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무산자들이 도적처럼 재산을 빼앗을 준비가 돼 있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국의 직접적인 대립물(對立物)은 바로 코뮌이다. 즉 계급통치의 군주제 형식뿐만 아니라 계급통치 자체를 대체할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 코뮌이 바로 이 공화국의 추호도 모호함이 없는 형식이다. 코뮌은 다수자의 노동을 소수자의 재부(財富)로 바꾸는, 그러한 계급 소유제를 없애고자 한다. 만약 이것이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무엇이 또 공산주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19]

파리 코뮌은 공산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프랑스 영웅 나폴레옹을 기념하는 방돔(Vendôme)을 파괴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를 학살했다. 학교에서는 종교 내용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상(神像)에 현대적인 옷을 입히고 담뱃대를 물렸다. (이것은 훗날 공산 독재국가에서 무력으로 국가 무신론을 관철해 종교와 전통 신앙에 전례 없는 재앙을 안겨준 것과 얼마나 얼마나 비슷한가.) 당시 우익 인사들이 보기에 코뮌은 부자의 재산을 모아 재분배하는 공산주의의 대명사였다. 페미니즘도 널리 성행했는데, 여자들은 심지어 방화하고 예술품을 파괴하도록 남자들을 부추겼다. 중국인 장더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포악했다. 그들이 사는 곳은 고층 빌딩이었고, 먹는 것은 진수성찬이었으며, 눈앞의 향락에 빠져 죽음을 잊었다. 전세가 기울자 건물을 불태워 진귀한 물건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현장에서 여성 반군 수백 명이 체포됐는데, 불을 질러 체포를 거부한 것이 자신들의 계략임을 신속히 자백했다.”[20]

이런 점에서 볼 때, 파리 코뮌의 멸망 직전 광기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871년 5월 23일, 코뮌 당국은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 뤽상부르궁전(프랑스 상원 소재지), 튀일리궁전, 루브르박물관, 오페라 가르니에, 파리 시청, 내무부, 사법부, 왕궁 및 샹젤리제 거리 양쪽의 디럭스 호텔과 고급 아파트를 불태워 버리라고 지시했다. 차라리 파괴할지언정 적에게 남겨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후 7시, 코뮌 멤버들이 타르와 기름을 들고 여러 곳에 불을 질렀다. 금빛 찬란하던 튀일리궁전(부르봉 왕조와 제 2제국의 정궁)이 초토화됐다. 방화범들은 인근에 있던 루브르 박물관도 불사르려 했으나, 다행히 티에르 부대가 제때 도착해 화재를 진압했다.[21]

파리 코뮌 이후, 마르크스는 신속하게 이 사건에 근거해 자신의 이론을 재점검하고 ‘공산당 선언’에 유일한 수정을 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기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때려 부숴야 한다고 했다.

5. 공산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다

공산주의는 이로 말미암아 더욱 파괴적으로 변했고 영향을 끼친 범위도 더욱 넓어졌다. 마르크스가 죽고 6년 후인 1889년, 제 1인터내셔널 해체 13년이자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되는 해에 국제노동자협회가 부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시 모여 이른바 제 2인터내셔널을 만들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토대로 인류 해방과 계급 폐지 등의 기치를 내걸었고, 19세기 말에는 마르크스의 이름과 연결된 유럽 노동자 운동은 빠르게 성장했다. 레닌은 이렇게 평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공적은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에 자아인식과 자기의식을 가르쳤고 과학으로 환상을 대체했다.”

악마가 거짓말과 세뇌를 통해 공산주의를 인간의 이데올로기에 입력함으로써 갈수록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14년에 이르러 세계에는 이미 30개에 가까운 사회당이 있었고, 각국은 노동조합 조직과 협동조합 조직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노동조합원이 1000만 명 이상이었고, 협동조합 사원도 700만 명이 넘었다. 이들 유럽 국가 중 거의 모든 사회사상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노동운동과 정치적으로 연관돼 있든 연관돼 있지 않든, 마르크스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22]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는 유럽을 통해 러시아와 동양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1886년에서 1890년 사이, 러시아의 레닌은 칼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을 접하기 시작했고, 그 후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레닌은 감금과 추방을 당한 후 서유럽에 거주하며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세계적인 전쟁은 공산주의를 보급하는 편리한 도구가 됐다. 니콜라이 러시아 차르가 1917년 2월 혁명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레닌은 스위스에 갇혀 있다가 반년 뒤 10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세상에 공산주의 기지를 건립했다. 그게 바로 러시아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고 오랜 전통 및 대량의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는 당시 세계에서 땅이 가장 넓은 나라였는데, 공산주의 국가가 됐다.

이때, 공산주의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성장했다. 소련과 동아시아는 인접해 있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리적 이점을 타고 동아시아에 전해져 중국 본토에도 공산당이 생겨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공산당이 러시아 정권을 탈취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공산 세력이 홍수처럼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되게 했다.

소련 공산당은 세계정세를 통제하고 군사 및 외교적 수단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전 세계로 확장했다. 스탈린은 “이번 전쟁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다. 누구든 영토를 점령하는 사람은 그 영토에 자신의 사회제도를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23]

1946년 3월 5일,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국의 승리로 밝았던 대지에 이미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련과 공산주의 국제조직이 가까운 장래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그들이 공산주의 사교를 확장하고 전파하는 종착점이 어디인지 아무도 몰랐다.”[24]

냉전 기간 공산국가는 4개 대륙에 널리 퍼져 있었고 자유 세계와 공산 진영이 격렬하게 대치했다. 전 세계는 마치 하나의 태극 문양처럼 절반은 차가운 공산주의, 절반은 뜨거운 공산주의였다. 자유세계의 국가는 표면상으로는 공산 국가가 아니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즉, 공산주의 초기단계)를 실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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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대한 시대-예언 중의 오늘」, 정견망 https://www.zhengjian.org/node/14087

[2] Robert McKee, Story: Style, Structure, Substance, and the Principles of Screenwriting (New 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1997).

[3] Richard Wurmbrand, Marx & Satan (Westchester, Illinois: Crossway Books,1986).

[4] Karl Marx, “Book of Verse Scenes from Oulanem”, Early Works of Karl Marx. (Marxists Internet Archive).

[5] Robert Payne, Marx.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68).

[6] Eric Voegelin, The Collected Works of Eric Voegelin, Vol. 5, Modernity without Restraint (Baton Rouge: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989).

[7]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Das Wesen des Christentums(기독교의 본질)』, 룽전화(榮震華), 베이징 상무인서관(1984)

[8] 『마르크스 엥겔스 문집(马克思恩格斯文集) 제9권』, 베이징 인민출판사(2009)

[9] 『마르크스 엥겔스 문집 제10권』, 베이징 인민출판사(2009)

[10] 『권위론, 마르크스 엥겔스 문집 제18권』, 중문 마르크스 문고

[11]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Vol.IX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1965), 280-281.

[12] Miguel A. Faria, Jr.,“The Economic Terror of the French Revolution”, Hacienda Publishing, http://www.haciendapub.com/articles/economic-terror-french-revolution.

[13] Gregory Fremont-Barnes, Encyclopedia of the Age of Political Revolutions and New Ideologies, 1760-1815 (Greenwood, 2007).

[14] William Henley Jervis, The Gallican Church and the Revolution, 239-241.

[15] W. Cleon Skousen, The Naked Communist (Salt Lake City: Izzard Ink Publishing, 1958, 2014).

[16] John M. Merriman, Massacre: The Life and Death of the Paris Commune (New York: Basic Books, 2014).

[17] John M. Merriman, Massacre: The Life and Death of the Paris Commune (New York: Basic Books, 2014).

[18]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프랑스), 『블랑키 문선』, 베이징 상무인서관(1979)

[19] Karl Marx, The Civil War in France (Marxists Internet Archive).

[20] 장더이(張德彝), 『삼술기(三述奇)』, 상하이고적출판사(1995)

[21] John M. Merriman, Massacre: The Life and Death of the Paris Commune Massacre (New York: Basic Books, 2014).

[22] Eric Hobsbawm,How to Change the World: Reflections on Marx and Marxism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11).

[23]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 유고슬라비아), 『Conversation with Stalin(스탈린과의 대화)』

[24] Winston Churchill, “Sinews of Peace” (Speech at Westminster College, Fulton, MO March 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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