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가정편 (상)

9평 편집부
2018년 7월 7일 업데이트: 2019년 7월 21일

목차

머리말
1. 신이 인간에게 남겨준 전통가정
2. 공산주의는 가정 소멸(消滅)을 목표로 한다
3. 공산주의의 음란한 유전자
4. 공산정권 하의 공산공처(共產共妻) 실천
1) 구소련의 공산공처(共產共妻)
2) 옌안(延安)의 성해방
5. 공산주의는 어떻게 서방의 가정을 파괴했나
1) 성해방을 선동하다
2) 여권(女權)을 부추기고 전통가정을 버리도록 선동하다
 

* * *

 

머리말

1960년부터 현대 페미니즘, 성해방, 동성애 권리를 포함한 다양한 반전통적인 운동이 서구에서 급부상했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전통가정이었다. 미국의 경우 1969년 캘리포니아주 이혼법이 일방적 이혼(이혼무책주의, 즉 부부 한쪽의 책임 유무와 관계없이 이혼을 인정하는 입법주의로, 파탄주의라고도 한다)에 청신호를 켜주었고, 각 주(州)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 결과 이혼비율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50년대에 결혼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약 11%가 부모의 이혼을 목격했지만, 70년대에는 50%까지 치솟았다.[1]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6년 미국 신생아 중 40% 이상이 혼외출산에 속했다. 하지만 60년 전인 1956년에 이 수치는 5% 미만이었다.

동서양의 전통사회에서는 순결한 남녀관계를 미덕으로 여겼으나, 오늘날에는 조롱당하는 가소로운 관념으로 변했다. 여권운동을 수반한 ‘동성결혼 권리’ 운동은 법률적으로 가정과 혼인을 새롭게 정의할 것을 더욱 강구했다. 심지어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의 현임 위원인 한 법학교수는 2006년에 <동성결혼을 넘어: 모든 가족과 관계를 위한 새로운 전략적 비전>라는 선언문을 개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어떠한 형식의 새로운 가정(복혼 가정, 두 쌍의 동성애자가 한 가정을 이루는 등을 포함)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통적인 혼인 가정이 다른 어떤 형식의 가정보다 더 많은 법권을 누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

공립학교에서는 수천 년간 전통사회에서 수치스럽게 여겼던 혼전 성행위와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교육했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아예 어떤 형태이든 전통적인 이념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대역무도로 간주함으로써 아이의 성적 성향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면 2012년 로드아일랜드 학구가 공립학교에서는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이 파트너로 참석하는 무도회를 열 수 없다고 선포한 것처럼 여자아이는 춤을 좋아하고, 남자아이는 야구를 좋아한다는 식의 관념을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주입할 권리가 없다고 공표하는 것 등이다.[3]

전통가정이 점차 파괴되는 추세가 뚜렷하고, 공산주의가 선전하는 ‘가정소멸’은 ‘계급소멸’에 앞서 현실이 돼가고 있다.

서방 사회에서 가정을 파괴하는 요소는 여러 방면에 있다. 페미니즘, 성해방, 동성애 운동 등 현대사회에서 변이된 관념이 이에 대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또 좌파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등 ‘자유’ ‘공평’ ‘권리’ ‘해방’ 이라는 기치를 내건 변이된 법률제도와 경제정책을 각종 명시적 혹은 암시적 형식으로 조장해 사람들이 전통적인 혼인 가정의 관념을 바꾸고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이른바 현대 사조(思潮)와 운동은 19세기 초부터 시작돼 공산주의 요소가 깊게 각인돼 있다. 공산사령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기만하는 데 뛰어나다. 따라서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듣기 좋은 그들의 구호에 현혹돼 결국은 그들이 파놓은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지고 만다. 우리가 오늘날 본 전통가정 파괴와 인간의 마음이 변이된 국면은 사실상 공산사령이 근 200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하고 점차적으로 실행한 성과이다.

이 국면이 초래한 직접적인 결과는 사회 안정의 기본 단위인 가정이 파괴됐고, 신의 가르침으로 확립된 전통도덕이 무너졌으며, 가정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통신앙과 가치 이념을 전승하고 훈도하는 기능을 상실했다. 이로 인해 젊은 세대는 전통이념의 구속이 없게 돼 공산사령이 직접 그들의 영혼을 장악하게 했다.

1. 신이 인간에게 남긴 전통가정

동서양의 전통문화에서 혼인은 바로 신이 정한 ‘천생연분’으로 파기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든 것이므로 신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인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신은 남녀를 생리적으로 다르게 만들었고, 남녀 모두에게 각자의 역할을 규정해 주었다. 서방 전통에서 여자는 남자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 따라서 남자는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아내를 지켜야 한다. 반면 여자는 반드시 남편에게 호흡을 맞추고 도와주면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남자는 밖에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살 수 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데, 모두 인간의 서로 다른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 남자는 양(陽)이어서 하늘처럼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강건하고자 쉼 없이 노력함)의 정신으로 비바람을 이겨내고 가정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여자는 음(陰)이어서 대지처럼 후덕재물(厚德載物: 덕을 두터이 하여 만물을 포용함)의 자세로 유순하고 자상하며 남편을 공경하고 자식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 남녀는 각자 자기 위치에 있어야 음양이 화합을 이룰 수 있고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전통가정은 신앙과 도덕을 계승하고 사회안정을 유지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가정은 신앙의 요람이자 가치 전승(傳承)의 연결 고리다. 어린아이의 인생에서 첫 번째 선생님은 바로 부모다. 자녀가 부모의 말과 행동에서 사심이 없고, 겸손하고, 은혜에 감사하고, 강인한 등의 전통적 미덕을 배운다면 반드시 평생 그 혜택을 받을 것이다.

전통적인 결혼생활은 남·여 자신의 품행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촉진한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새로운 태도로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대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포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변이된 동거생활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사람의 감정은 항상 변덕스럽다. 두 사람이 기쁘면 같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헤어지는 이런 관계는 일반적인 친구 관계와 다를 바 없어 결혼으로 구속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는 감정적으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성애(性愛)’[4]를 표방했는데, 당연하게 전통혼인을 해체하고 가정을 소멸하려 하는 것이다.

2. 공산주의는 가정 소멸을 목표로 한다

공산주의는 가정을 사유제의 존재형식으로 간주한다. 사유제를 없애려면 반드시 가정을 소멸해야 한다. 정통공산주의는 경제적 요인을 가족 관계를 주도하는 관건으로 삼았고 현대의 마르크스-프로이트주의는 인간의 성욕을 가정 문제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았다. 이 양자의 공통점은 모두 인간의 기본 윤리 도덕을 한쪽으로 제쳐 두고 물질과 욕망을 숭상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고 인간의 이념을 변이시켜 가정을 파괴한다.

공산주의에는 사람들을 매우 현혹하는 학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 인류를 해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경제적 의미에서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인류 자신의 ‘해방’도 포함된다. 해방의 반대말은 억압이다. 그럼 인류 자신의 ‘해방’ 중에서 억압은 어디에서 오는가? 공산주의가 내놓은 대답은 ‘압박은 자신의 관념에서 오고, 이 관념은 사회의 전통적인 도덕에 의해 강요된다’, 즉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 관념은 여성을 억압하고 전통적인 성도덕은 인간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내세운 ‘자신을 해방하라’는 이론은 후세의 페미니즘, 동성애 권리운동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 그리하여 전통적 혼인가정을 반대하고, 성 해방과 동성애 등 반(反)전통적 관념이 크게 성행해 악마가 가정을 소멸하는 중요한 도구가 됐다. 공산주의는 모든 전통적 도덕관념을 뒤엎으려고 하는데 이 점은 <공산당 선언> 중에 확실하게 명시됐다.

3. 공산주의의 음란한 유전자

공산사령은 별의별 궁리를 다 해 전통가정을 파괴했다. 일찍이 19세기 초, 악마는 ‘공상적 사회주의’ 대표인물을 선택해 그들 사상의 씨앗을 뿌렸다. 공산주의사상의 개척자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1824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뉴하모니(New Harmony)’라는 유토피아 공동체를 설립했다(2년 후 실패로 끝남). 공동체를 설립한 날, 그는 공동체가 ‘삼위일체의 거대한 악마’ 중에서 인류를 구출했다고 선포했다. ‘거대한 악마’라는 단어에 대해 그는 “내가 가리키는 것은 사유재산,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하는 터무니 없는 종교, 혼인을 말한다”고 밝혔다.[5]

오언이 죽은 후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유토피아 공산주의자는 프랑스인 찰스 푸리에(Charles Fourier)였다. 그의 사상은 그 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은 그의 사상을 1848년 혁명과 파리코뮌에 도입했고, 그 후 또 미국에 퍼뜨렸다. 푸리에는 처음으로 ‘여성주의(프랑스어 féminisme)’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의 이상적인 공산사회(Phalanx, 팔랑스)에서는 전통가정은 코웃음을 당했고, 광란의 그룹섹스 파티는 인류의 내재적인 격정(passion)을 충분히 해방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공정한 사회는 ‘성(性) 소외자(예를 들어 나이가 많고 용모가 추한 자)’를 배려해 그들에게 성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한다고 표명했다. 그는 성학대, 심지어 가족 간의 근친상간이나 짐승과의 섹스를 포함해 그 어떤 형식의 성 만족이든 강제가 아니라면 모두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를 당시 동성애운동(LGBTQ)의 신흥 분파 퀴어이론(Queer Theory)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푸리에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미국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 공동체 수십 개가 잇따라 생겨났지만 대부분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 실패로 끝났다. 그 중 가장 오래 지속한 것은 푸리에의 이론을 기반으로 설립된 오네이다(Oneida) 공동체인데, 32년 동안 유지됐다. 이 공동체는 전통적인 일부일처 혼인을 경멸하고, 집단 혼인과 난잡한 성관계를 선동했다. 구성원은 매주 재분배를 통해 그가 흠모하는 사람과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얻었다. 결국 설립자 존 험프리 노이즈(Humphrey Noyes)는 교회의 소송이 두려워 몰래 도망쳤고,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공처제(公妻制)를 포기했다. 노이즈는 그 후 책을 저술해 이론을 정립하고 ‘성경 공산주의(Bible Communism)’의 시조가 됐다.

공산주의의 음란 유전자는 그 이론이 발전함에 있어 필연적이다. 처음부터 공산주의 악마는 인간이 신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신을 부인하고, 원죄를 부인하도록 유혹했다. 이런 논리에 따라, 본래는 인류 도덕의 타락으로 인해 조성된 사회적 문제임에도, 그 죄악의 근원을 사유제로 귀결시켰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없애버리면 사람들이 이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재산이 공유된 후에도 사람들은 배우자를 둘러싼 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공공연히 ‘공처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공산주의 전파자들이 만든 공산주의 ‘낙원’은 전통적인 가정에 직접 도전하거나 ‘공처제’를 부추겼기에, 각 지역사회와 교회, 정부는 이를 사회 윤리 도덕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겨 일제히 나서 제압했다. 공산주의 ‘공산공처(共産公妻)’라는 악명은 빠르게 알려졌다.

실패한 유토피아 공동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었다. 바로 음란한 공처제를 공개적으로 선동할 시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공산당 선언>에서 ‘가정 소멸’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호한 방식으로 가정파괴 이론을 설파했다.

마르크스가 죽은 후, 엥겔스는 가정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술<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을 완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혼인관에 대해 상세히 논술했다. 책에서 “역사상 일부일처제 출현은 개인적인 성관계의 결과물이 아니고 사유재산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이것은 일부일처제가 생긴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라고 지적했다. 엥겔스는 이런 일부일처제를 재산에 기반한 ‘고전(古典)’모델이라고 불렀다. 그는 재산을 공유한 후에 일종의 참신하고 순수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혼인모델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산의 속박 없이 완전히 애모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혼인이라니 듣기에 얼마나 고상한가!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명은 공산주의 실천가들에게 창백하고 무력하게 보였다. 감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이 사람을 사랑하고 내일은 저 사람을 사랑하면 이것은 성(性)문란을 고무하는 것이 아닌가? 구소련과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후 성문란(다음 절을 참조)은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한 결과이다.

부부의 정은 영원히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적 혼인은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다’고 맹세하는데, 이는 신에 대한 서약으로 결혼 출발 선상에서 장차 맞닥뜨릴 수 있는 곤경에 대비하고 또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결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혼인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사랑이다. 그러나 더욱 요구되는 것은 책임감이다. 배우자와 아이, 가정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도덕적 책임감이 있는 성숙한 부부로 변모시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에서 “공산사회에서는 재산을 공유하고 가사노동을 직업화해 아이를 낳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를 돌보고 교육하는 것은 국가가 책임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뒷걱정, 이를테면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경제적, 도덕적인 압력으로 처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것을 방해하는 문제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성관계가 가능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에 따라 사회는 순결의 영광과 정조를 잃은 치욕을 더욱더 너그럽게 대하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록 늘 ‘자유’ ‘해방’ ‘사랑’ 등의 단어를 사용해 그 진의를 숨겼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게 해 사람의 행위가 완전히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러나 푸리에 시대나 마르크스 시대의 대다수 민중은 아직 신의 가르침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아 공산주의 음란사상에 대해 여전히 상당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 자신도 20세기 이후의 인류가 어떻게 각종 핑계로 그 음란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가정을 소멸하는 목표를 실행할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붉은악마는 사람을 안배해 음란하고 변이된 씨앗을 뿌리게 했다. 또 체계적인 배치로 인류를 욕망에 굴복하도록 유혹함으로써 신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점차 타락해 최후에는 ‘가정을 소멸’하고 사람의 마음을 변이시키는 그들의 목표를 실현해 사람을 붉은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했다.

4. 공산정권 하의 공산공처(共産公妻) 실시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음란은 공산주의의 내재적 유전자이다.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는 하녀와의 불륜으로 아이를 낳아 엥겔스가 키우도록 했다. 엥겔스는 두 자매와 동거했다. 소련 공산당 총수 레닌은 이네사와 10년 동안 혼외정사를 했고, 프랑스 여성과도 부정한 관계를 가졌으며, 또 창녀와 놀아나다가 매독에 감염되기도 했다. 또 다른 당 총수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음란하기 짝이 없는데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

소련 공산당이 권력 탈취에 성공하자 바로 대규모 공산공처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은 서방의 ‘성해방’의 선도자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제10기 러시아 ‘조국(祖國)’ 잡지는 러시아 공산당 초기의 공처 현상을 전면적으로 폭로한 적이 있었는데, 성(性)혁명의 전형적인 표현은 지도자들의 사생활이라고 밝혔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 부하린, 안토노프, 콜론타이와 같은 이들의 사생활은 개들의 짝짓기처럼 제멋대로였다고 했다.

1) 구소련의 공산공처

일찍이 1904년에 레닌은 이렇게 썼다. “음탕함은 정신(精神)의 에너지를 방출하게 한다. 위선적인 가정의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승리를 위해 이 핏덩이(음탕함)를 던져야 한다.”[6]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당대표 회의에서 레프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일단 권력을 탈취하고 나면 새로운 양성(兩性)관계 원칙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공산주의 이론은 가정을 파괴하고 성적욕구의 자유 시기로 넘어가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자녀를 교육할 책임은 전적으로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911년 트로츠키는 레닌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성압박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주요 수단이다. 압박이 있는 한 진정한 자유는 있을 수 없다. 가정은 마치 자산계급 구조의 구성처럼 성의 자유를 완전히 잃게 만든다.” 레닌은 답신에서 “가정뿐만이 아니다. 모든 양성관계에 관한 금기는 반드시 모두 폐지돼야 한다…우리는 페미니즘에서 배울 수 있으며, 심지어 동성애에 관한 금지령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라고 했다.[7]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한 후, 1917년 12월 19일에 발표한 ‘레닌 수칙’에는 ‘결혼 폐지’ ‘동성애 처벌 취소’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8]

당시 소련에 ‘염치를 타도하자!’라는 매우 열광적인 구호가 있었다. 볼셰비키는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 ‘신(新)인류’를 만들기 위해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게 해 사람들의 사상을 변이시켰다. 그들은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열광적으로, 히스테리적으로 “염치를 타도하자!” “염치는 소비에트 인민의 과거 자산계급이다”라고 외쳤다.[9]

1918년 12월 19일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결혼 폐지’ 법령을 제정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레즈비언 단체들이 축하 행사를 열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레즈비언들의 축하 행진 소식에 레닌이 매우 기뻐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계속 노력하시오, 동지들!”이라며 더욱 더 많은 사람이 나체로 걸어 나오도록 격려하기도 했다.[10]

1923년 소련 소설 <삼대(三代)의 사랑>은 ‘물 한잔 이론’이라는 말이 순식간에 퍼지게 했다. 소설의 저자는 사회복지 인민위원회의 위원(부장)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었다. 콜론타이는 전통적인 가정에서 볼셰비키 진영으로 넘어와 ‘여성해방’이란 대의를 위해 싸운 투사였다. 소설이 선동하는 물 한잔 이론은 실질적으로 성생활 방종의 대명사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성적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처럼 간단하고 평범하다는 것이다. 물 한잔 이론은 노동자, 특히 청년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의 소련에서는 혼외정사가 크게 성행했고, 청년의 성생활 방종이 이미 공공연해져 성경험이 없는 대학생은 전체의 12%에 불과했다. 모스크바 노동대학 게리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남학생 중 15.7%, 여학생 중 44.8%가 장기간 성관계를 가지는 반면 남학생 중 84.3%, 여학생 중 55.2%가 단기간 관계 및 혼잡한 성관계를 가졌다.[11]

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 대규모 이혼운동이 일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924년에서 1927년 사이 이혼율은 5%에서 20%로 급증했으며, 그중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이혼한 경우가 33%를 차지했다. 모스크바에는 또 나체 행진을 하거나 남녀 여러 명이 동거하는 가정이 등장했으며, 강간 사건도 수시로 발생했다.[12]

구소련의 성 해방 기간에 ‘스웨덴 가정’이라는 현상도 등장했다. 많은 사람이 남녀 구분 없이 동거하는데 보통 10~12명의 봉사자로 ‘가정’을 구성한다. 스웨덴 가정이라고 불렸지만 스웨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수한 러시아식이었다. 이 현상은 난잡한 성관계와 성문란의 문을 활짝 열어 윤리붕괴, 가정분열, 동성애, 성병, 강간 등의 사건을 급증시켰다.[13]

사회주의 공동체가 발전함에 따라 스웨덴 가족도 전 소련에 전면적으로 보급됐다. 이 현상을 여성 ‘국유화’ 또는 ‘사회주의화’라고 부른다. 1918년 3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사회주의 여성’을 예로 들어 보겠다. 볼셰비키가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에 법령을 하나 발표했다. 이 법령에는 16~25세 사이의 젊은 여성은 모두 반드시 사회화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내무부 위원 브론스타인이 제안하고 추진한 것이다. 그리해 지휘관 카라셰프가 임무를 집행해 바로 젊은 여성 10명을 사회화시켰다.[14]

하지만 볼셰비키는 1920년대 말에 이러한 성(性)정책을 접었다. 레닌은 여성 활동가 체트킨과의 담화에서, 물 한잔 이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것에 ‘반(反)마르크스주의’ ‘반사회’라는 모자를 덮어씌웠다. 그 이유는 성해방이 대량의 부산물인 신생아를 가져왔고, 그들을 돌봐주고 키워주는 사람은 없어 가정이 해체되고 결국 사회붕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 옌안(延安)의 성해방

중국 공산당 탄생 초기의 상황은 소련과 유사했다. 물론 이것들은 같은 독나무에 열린 다른 독열매일 뿐이다. 초기 지도자 천두슈(陳獨秀)는 사생활이 방탕한 것으로 유명했고, 정차오린(鄭超麟)과 천바오란(陳碧蘭)은 회고록을 통해 취추바이(瞿秋白), 차이허썬(蔡和森), 장타이레이(張太雷), 샹징위(向警予), 펑수즈(彭述之) 등의 로맨스는 혼란하고, 성(性)에 대한 태도도 소련의 물 한잔 이론이 성행하던 시기와 비슷하다고 했다.

상류층 지식인 유형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초기에 개척한 중앙 소비에트 지구와 어위완(鄂豫皖: 후베이-허난-안후이 지역) 소비에트 지구의 일반인의 삶에서도 성자유가 충분히 드러났다. 여성 평등과 결혼‧이혼의 절대적 자유를 제창한 결과 성욕 충족으로 인해 혁명사업이 방해되는 상황이 대거 발생했다. 소비에트 청년들은 또한 ‘양어머니를 삼는다’는 핑계로 대중에게 다가가 연애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젊은 여성이 6~7명의 성 파트너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위완 소비에트 지구 혁명역사문서 모음집>에 따르면 훙안(紅安), 황마(黄麻), 황퍼(黄陂), 광산(光山) 등의 당(黨) 내 책임자의 4분의 3이 늘 수십, 수백 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15]

1931년 늦봄 장궈타오(張國燾)가 어위완 소비에트 지구의 정무를 주관한 후 매독이 널리 성행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쩔 수 없이 중앙에 보고해 ‘매독을 치료하는 의사’를 요청했다. 몇 년 후 그의 회고록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서 ‘여성을 희롱한 일’ ‘여성에게 제멋대로 한 일’과 일부 고급 장교들의 ‘정부(情婦)’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했다.

1937년 리커눙(李克農)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 베이징 주재 사무실 주임을 맡아 군인의 급여와 보급품, 의약품, 물자 등을 수령하는 일을 책임졌다. 한번은 국민당 정부 주관 부처가 팔로군 의약품 목록을 검토할 때 그 속에 성병을 치료하는 의약품이 상당히 많은 것을 발견했다. 업무 담당자는 리커눙에게 “설마 귀군 중에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이 많은 건 아니겠지요?”라고 묻자 리커눙은 잠시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현지 백성들을 치료할 것들”이라고 둘러댔다.[16]

1930년대의 중국 공산당의 성적자유도 마찬가지로 정권을 위태롭게 했다. 소련과 같은 사회 붕괴 문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한 홍군 전사들의 사기를 동요시켰고, 군에 입대한 후 아내의 외도와 재가에 대한 우려가 군의 전투력에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이런 고도의 성자유는 ‘공산공처’란 악명을 실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 지역에서는 비로소 군인의 혼인 보호, 이혼 횟수 제한 등의 정책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5. 공산주의는 어떻게 서방의 가정을 파괴했나

공산사령(邪靈)의 각종 변이된 사조는 서방에서 19세기부터 백 년에 걸쳐 탈바꿈하여 변화 발전한 후 1960년대에 먼저 미국에 대대적으로 등장했다.

1960년대는 신마르크스주의와 각종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공산사령이 조종하는 각종 사회문화 운동이 미국에 속속 등장했다. 이를테면 히피(hippie) 반(反)정통문화 운동, 신좌파 급진운동, 페미니즘 운동, 성(性)혁명 사조 등이다. 이러한 사조와 운동은 밀물처럼 미국의 정치체제, 전통적 가치체계, 사회조직을 격렬하게 흔들고 부패시킨 후 곧 유럽으로 파급됐다. 서방의 사회관념, 가정관념, 성관념과 문화적 가치 이념은 모두 거대한 변이가 발생했다. 이와 동시에 ‘동성애 권리’ 운동도 끊임없이 고조됐다. 이 모든 것들은 서방의 전통가정의 가치관을 끊임없이 약화했고 전통가정 모델을 날로 미약하게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불안은 일련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에로문화 범람, 마약, 성도덕 붕괴, 청소년 범죄율 상승, 사회복지단체 확대 등이다.

1) 성해방을 선동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성(性)해방(성혁명)은 이후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돼 인류의 전통 도덕 관념, 특히 전통 가정 관념과 성도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성해방이 서방사회에서 기승을 부리도록 하기 위해 공산사령은 충분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특히 ‘성적 자유운동(Free love, 성 급진주의라고도 함)’을 통해 점차 전통적인 이념을 무너뜨리는 포석을 깔아놓았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성적 자유는 전통가정의 도덕 관념을 경멸했으며, 어떤 형태의 성 활동이든 모두 간섭받지 말아야 하고 혼인, 낙태, 음란행위를 포함한 개인의 성활동도 정부와 법률의 제약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리에의 추종자이자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노리스는 처음으로 성적 자유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근대에 있어서 성적 자유의 주요 추동자는 거의 사회주의자이거나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성적 자유 선봉장은 사회주의 철학가 카펜터(Edward Carpenter)인데, 그는 초기 동성애 권리 운동 제창자이기도 하다. 이 운동의 가장 유명한 제창자인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익히 알려진 사회주의자로, 한때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 구성원이기도 했다. 그는 도덕이 인간 본능의 즐거움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면서 혼전‧혼외 성관계를 부추겼다. 프랑스 성적 자유의 가장 주요한 선구자는 에밀 아르망(Émile Armand)이다. 그는 초기에는 무정부 공산주의자였다가 후에는 푸리에의 유토피아 공산주의를 발전시켜 프랑스의 개인 무정부주의(넓은 의미로 보면 사회주의 범주에 속함)를 개척했는데 무분별한 섹스, 동성애, 양성애를 부추겼다. 무정부주의자 플레밍(Chummy Fleming)은 호주 성적 자유의 개척자이다.

‘성적자유운동’이 미국에서 거둔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1953년에 창업한 포르노 잡지 ‘플레이보이(Playboy)’였다. 이 잡지는 아트(art)인쇄지를 사용해 사람들에게 일종의 ‘예술’로 착각하게 했고 게다가 원가가 만만치 않은 컬러 인쇄를 함으로써 전통관념에서 천하게 여기던 저속한 성 문제를 단시간에 주류사회로 진입시켜 고급 레저 잡지로 만들었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그것은 성적 자유의 독소를 전 세계의 일반 대중들에게 퍼뜨리고 제멋대로 전통적인 성 도덕관념을 공격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히피문화가 유행하고 성적 자유 관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성혁명(성해방)’이 정식으로 등장했다. 성혁명은 공산주의 정신분석의 원조인 독일 공산당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처음 제기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을 결합해 전자는 ‘경제 압박’에서 사람을 해방하는 반면 후자는 ‘성압박’에서 사람들을 해방했다고 주장했다. 또 한 명의 성해방 이론 창시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 School)의 마르쿠제(Marcuse)이다. ‘사랑하라, 전쟁하지 말고(make love, not war)’라는 그의 슬로건은 60년대 서방의 반(反)문화 운동 중에서 성해방 관념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게 했다. 그 후, 동물학자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Kinsey)의 <남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of Human Male)>과 <여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이란 책의 출판과 경구피임약의 보편적 사용으로 성해방 관념은 60년대에 서방에 널리 퍼졌다. 특히 현대 학자들은 킨제이가 이른바 ‘인류 성행위 보고서’에서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등의 수법으로 통계 데이터를 왜곡해 많은 사람이 혼외 성행위, 동성 성행위 등을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성해방, 동성애 운동을 부추기는 작용을 했음을 발견했다.[17]

한때 성해방은 현대사회에서 유행하는 도덕적 가치관이 됐다. 청소년들 속에서 문란한 성생활은 정상으로 여겨졌고, 10대 소녀가 만약 자신이 처녀임을 밝힌다면 친구들의 비웃음을 살 수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1954년과 1963년 사이에 15세가 된 미국인 즉, 60년대 청년 중 82%가 30세 전에 혼전 성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8]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결혼 전에 처녀성을 지킨 신부는 단지 5%에 그쳤고, 18%는 결혼 전에 10명 이상의 섹스 파트너가 있었다.[19] 따라서 ‘성’이 대중문화에서 유행의 주제가 됐고, 성 묘사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문학작품이 넘쳐났으며,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가 극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2) 여권(女權)을 부추기고 전통가정을 버리도록 선동하다

① 여권신장운동 배후의 공산주의 사상

여권신장운동, 즉 페미니즘 운동은 공산사령이 가정을 파괴하는 데 이용하는 또 하나의 숙달된 도구이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1차 페미니즘 운동)은 18세기 유럽에서 발단했는데, 여성도 교육, 취업, 정치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중엽에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1차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통가정 관념의 사회적 기반은 여전히 견고했다. 이 시기의 페미니즘 운동은 전통가정에 직접적인 도전을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영향력이 두드러졌던페미니스트는 18세기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9세기 미국의 마가렛 풀러(Margaret. Fuller), 19세기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등이었다. 그들은 일반 여성은 결혼 후 가정을 위주로 해야 하고, 여성의 잠재능력은 주로 가정 분야에서 발전해야 하며, 여성이 자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은 가정을 위한 것(자녀 교육, 가정 관리 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별히 뛰어난 여성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자유롭게 재능을 발휘해야 하고, 심지어 남성과 경쟁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후, 여성의 선거권이 각국에서 법률로 인정되면서 1차 페미니즘 운동은 점차 잠잠해졌다. 이후 대공황의 충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페미니즘 운동은 거의 휴면 상태가 됐다.

이와 동시에 공산사령은 전통가정과 성도덕 관념을 파괴하는 씨앗을 일찌감치 심어놓았다. 19세기에 초기 공상(空想)사회주의자들은 현대의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방향을 잡아놓았다. 페미니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리에는 혼인이 여성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고, 오언은 혼인을 사악이라고 저주했다. 이런 공상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페미니스트 프란시스 라이트(Frances Wright)는 푸리에의 사상을 계승해 여성의 성 관념 자유를 실현할 것을 주장했고, 영국의 페미니즘 활동가인 안나 휠러(Anna Wheeler)는 오언의 사상을 계승해 ‘혼인이 여성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동시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활동가들도 19세기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간행물이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최초 페미니즘 일간지 ‘여성들의 목소리(La Voix des femmes)’ ‘자유의 여성(La Femme libre, 나중에 ‘여성 칼럼’으로 바뀜)’ ‘여성 정치(La Politique des femmes)’ ‘여성 평론(La Politique des femmes)’ 등인데, 이 간행물의 설립자들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생시몽(Saint-Simon)이나 푸리에의 추종자들이다. 당시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간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당국의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우리는 1차 페미니즘 운동이 왕성하게 진행되는 시기에 붉은악마도 각종 급진적인 사조를 동시에 배치해, 전통적인 가정과 혼인 관념에 충격을 주어 뒤이어 닥쳐올 더욱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포석을 깔아놓은 사실을 확인했다.

2차 페미니즘운동은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됐다. 그 후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파급되면서 신속하게 서방세계 전체로 확산됐다. 60년대 말엽의 미국 사회는 불안정한 시기에 처해 있어 민권운동, 베트남 반전운동과 더불어 각종 급진적인 사회 사조가 잇달아 고개를 들었다. 페미니즘은 이 기회를 틈타 더욱 급진적이고 변이된 모습으로 나타나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다.

페미니즘운동을 다져놓은 첫 번째 초석은 1963년에 출판된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와 이 책의 저자인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이 주도해 설립한 ‘전미여성조직(NOW, 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이다. 이 책의 저자는 교외 중산층 가정부의 각도에서 여성의 전통적인 가정 역할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전통적인 즐거움, 만족, 행복한 가정주부의 이미지는 이른바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낸 신화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중산층 교외 가정을 ‘미국 여성의 편안한 수용소’라고 정의하면서, 교육을 받은 현대 여성들은 남편을 돕고 아이를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는 성취감에서 뛰쳐나와 가정 밖에서 진정한 자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

수년 후 더욱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전미여성조직’을 지배하면서 베티 프리단의 페미니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들은 예로부터 모든 여성이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억압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성이 억압받는 근원을 가정에 귀결시키는 한편 사회제도와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변혁하고 경제, 교육, 문화, 가정 등 모든 분야에서 전 방위적으로 투쟁해 여성의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로 구분해 ‘투쟁’ ‘해방’ ‘평등’을 선동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핵심 요지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지위로, 신(新)페미니즘은 성별로 군중을 구분했다.

사실상 <여성의 신비>의 저자 베티 프리단은 자신의 책에서 암시한 것처럼 가정의 자질구레한 일에 권태를 느낀 중산층 교외 가정의 주부가 아니었다. 스미스대학(Smith College)의 교수 대니얼 호로위츠(Daniel Horowitz)는 1999년에 전기(傳記) <베티 프리단과 여성의 신비 만들기(Betty Friedan and the Making of The Feminine Mystique)>를 썼다. 그는 조사를 통해 프리담이 대학 시절부터 1950년대까지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좌익노동자운동 신문을 위해 글을 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호로위츠는 그녀가 당시 쓴 글들을 찾아냈다. 심지어 한때 그녀는 공산주의자이자 핵물리학자인 한 젊은이의 정부였다.[21]

미국 학자 케이트 웨이간드(Kate Weigand)는 <레드 페미니즘(Red Feminism)>이란 책에서, 실제로 페미니즘은 20세기 초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수전 앤서니(Susan Anthony), 엘레노어 플랙스너(Eleanor Flexner), 거다 러너(Gerda Lerner), 이브 메리엄(Eve Merriam) 등을 포함한, 공산주의 배경을 가진 한 무리의 레드 페미니즘 작가들은 이 시기에 이어서 도래할 제2차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다방면으로 이론적 포석을 깔아놓았다. 앤서니는 일찍이 1946년부터 마르크스의 분석 방법을 원용해 백인이 흑인을 억압하는 것에 비유하면서 남성도 마찬가지로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매카시(McCarthy)가 펼친 반공(反共) 활동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악평이 자자하자 그들은 이때부터 자신의 붉은 배경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22]

유럽에서는 프랑스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대표작 <제2의 성>이 제2차 페미니즘 열풍을 이끌었다. 보부아르는 초기에 사회주의자였으며, 1941년에 그녀는 공산주의자이면서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포함한 여러 작가와 함께 프랑스 지하 사회주의 조직인 ‘사회주의와 자유(Socialisme et Liberté)’를 창설했다. 1960년대에 페미니즘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지자 그녀는 사회주의를 더는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단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것만 인정했다.

그녀는 “여성은 생성된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성(sex)은 인간의 생리 특성에 의해 결정되지만, 성별(gender)은 사회성의 영향으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 인지적 심리 개념이라고 선동했다. 여자아이의 순종적이고, 영리하고, 애교 부리고, 모성이 넘치는 여성 기질은 모두 후천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정성 들여 설계한 ‘신화’에서 온 것으로, 가부장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전통적 이념을 타파하고 구속받지 않는 자아를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사상은 실제로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등을 위한 각종 변이된 관념에 온상을 제공했다. 그 후 각양각색의 페미니즘 사상이 쏟아져 나왔는데, 모두 여성의 불평등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기조를 계승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에게 전통가정의 혼인 관념은 여성평등을 실현함에 있어 주요 장애물이었다.[23]

보부아르는 혼인이 여성에게 남편의 제약을 받게 해 ‘창녀처럼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 평생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결혼은 거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또 다른 남자들과도 우연한 사랑을 유지했고 마찬가지로 사르트르도 다른 여성들과 우연한 사랑을 가졌다. 그녀의 혼인관은 당대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주류의 태도였다. 사실상, 이런 복잡하고 혼란한 성관계가 바로 유토피아 공산주의의 선구자인 푸리에가 19세기에 구상한 공처제인 것이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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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Bradford Wilcox, 「The Evolution of Divorce,」 National Affairs, Number 35, Spring 2018. https://www.nationalaffairs.com/publications/detail/the-evolution-of-divorce.

[2] 「Beyond Same-Sex Marriage: A New Strategic Vision for All Our Families and Relationships,」 Studies in Gender and Sexuality, 9:2 (July 1, 2006): 161-171. DOI:10.1080/15240650801935198.

[3] Victoria Cavaliere, 「Rhode Island school district bans father-daughter, mother-son events,」 http://www.nydailynews.com/news/national/rhode-island-school-district-bans-father-daughter-mother-son-events-article-1.1162289#nt=byline.

[4] 마르크스,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 구펑출판사(穀風出版社, 1989).

[5] Robert Owen, 「Oration Containing a Declaration of Mental Independence,」 Public Hall, New Harmony, Indiana (July, 4, 1826), http://www.indiana.edu/~kdhist/H105-documents-web/week11/Owen1826.html.

[6] Александр Мельниченко, Великая октябрьская сексуальная революция,http://ruskline.ru/opp/2017/avgust/21/velikaya_oktyabrskaya_seksualnaya_revolyuciya/.

[7] 위와 동일

[8] 위와 동일

[9] 위와 동일

[10] 위와 동일

[11] 夏侯(샤허우), 「공산주의의 음란한 유전자-성해방」, 대기원. http://www.epochtimes.com/b5/17/4/9/n9018949.htm。

[12] 위와 동일

[13] Александр Мельниченко, Великая октябрьская сексуальная революция,http://ruskline.ru/opp/2017/avgust/21/velikaya_oktyabrskaya_seksualnaya_revolyuciya/.

[14] 夏侯(샤허우), 「공산주의의 음란한 유전자-성해방」, 대기원. http://www.epochtimes.com/b5/17/4/9/n9018949.htm。

[15] 중국중앙당안관(中央檔案館) 등, 「어위완 소비에트 지구 혁명역사문서 모음집(鄂豫皖蘇區革命歷史)」, 후베이 인민출판사(1987).

[16] 양닝(楊寧), 「팔로군은 왜 대량의 매독약을 구입했을까?」, 대기원.

http://www.epochtimes.com/b5/18/1/18/n10069025.htm。

[17] Judith A. Reisman, Ph.D.; Edward W. Eichel, Kinsey, Sex and Fraud: The Indoctrination of a People (Lafayette, Louisiana: Lochinvar-Huntington House, 1990); “Dr. Judith A. Reisman and her colleagues demolish the foundations of the two (Kinsey) reports.”; “Really, Dr Kinsey?” The Lancet, Vol. 337 (March 2, 1991): 547.

[18] Finer LB, 「Trends in Premarital Sex in the United States, 1954–2003,」 Public Health Reports 122(1) (2007): 73-78.

[19] Nicholas H. Wolfinger, 「Counterintuitive Trends in the Link Between Premarital Sex and Marital Stability,」 Institute for Family Studies, https://ifstudies.org/blog/counterintuitive-trends-in-the-link-between-premarital-sex-and-marital-stability.

[20] Betty Friedan, The Feminine Mystique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63).

[21] Daniel Horowitz, Betty Friedan and the Making of The Feminine Mystique: The American Left, the Cold War, and Modern Feminism (Amherst, Massachusetts: Univ. of Massachusetts Press, 2000).

[22] Kate Weigand, Red Feminism: American Communism and the Making of Women’s Liberation (Baltimore, Marylan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23] Simone de Beauvoir, The Second Sex, trans. Constance Borde, Sheila Malovany-Chevallier (New York: Vintage Book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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