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사태의 교훈과 ‘키신저 방식’의 문제점

김태우
2021년 8월 27일
업데이트: 2021년 8월 31일

2021년 8월 15일 카불이 다시 탈레반의 수중으로 들어가면서 1975년 5월 자유베트남 패망시 사이공에서 벌어진 아비규환 대탈출극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로 도피한 상황에서, 아직도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카불 국제공항에서는 미 공군의 C-17 수송기들이 대피를 원하는 아프간인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다.

영국과 러시아가 패권을 다투던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동안 영국은 아프간을 러시아의 남진(南進)을 막는 요충지로 보고 세 차례나 점령했었다. 아프간이 아시아와 중동을 잇는 통로이자 석유가 매장된 카스피해 지역으로 가는 출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직후 테러의 배후인 빈 라덴을 잡기 위해 나토(NATO) 국제안보지원군과 함께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펼쳐 탈레반을 몰아내고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고, 30만 명의 정부군도 양성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군이 철수한 2021년 4월 탈레반의 공세가 시작되자 정부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미국의 아프간 철군은 또 한번의 ‘키신저 방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1970년대 초반 키신저(Henry Kissinger) 미 국무장관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잡아야 한다며 ‘핑퐁외교’를 펼쳤고, 북베트남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1973년 파리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베트남전쟁을 종료한 공로로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공산베트남도 미국의 친구가 될 수 있으므로 남베트남을 포기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워싱턴의 ‘키신저의 후예들’은 아프간에서도 동일한 방식을 적용했다. 종합컨대, 아프간 사태는 적어도 세 가지의 큰 교훈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한반도에 대한 시사점은 막중하다.

흑심을 가진 상대와의 평화협정은 비극을 초래한다

미국은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으로 베트남전쟁을 마감하면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많은 조치들을 취했다.

미국, 남북 베트남,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 등 4대 교전당사국 이외에 8개국을 더하여 도합 12개국이 서명하도록 했다. 휴전감시위원단 250명을 하노이와 사이공에 체류시켰고, 북베트남에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으며, 남베트남과 별도의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남베트남에 많은 군사장비도 남겨주었다.

아프간에서도 그랬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0년 2월 29일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일방적으로 철군을 약속해주었다. 그러나 파리평화협정은 1975년 북베트남이 남침을 재개하면서 휴지가 되었고, 미-탈레반 평화협정 역시 13개월 후 탈레반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공산통일 이후 베트남에는 끔찍한 ‘죽음의 산야(killing field)’가 펼쳐졌고, 지금 아프간에서도 탈레반에 의한 살육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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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무장반군인 탈레반 대원들이 카불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2021.8.18 | AP/연합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나 1941년 일소 중립화조약과 같은 과거 사례들을 보더라도 평화협정은 어떤 상대와 어떤 상태에서 체결하느냐가 관건이다. 즉, 군사적 상호억제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흑심을 품은 국가와 체결한 평화협정은 대개의 경우 다른 일방의 패망과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허울좋은 문서 한 장을 믿고 평화무드와 방심을 즐긴 상대방은 망국과 함께 대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는 모든 국가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지만, 한반도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한국과 워싱턴의 ‘키신저의 후예들’이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6·25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키신저식 방식’으로는 ‘미국의 시대’를 이어갈 수 없다

중국은 키신저의 이니셔티브에 화답하여 미국과 협력하여 소련을 견제하는 협미항소(協美抗蘇)를 택했고, 세계시장 진출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급성장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정치·군사대국으로 ‘굴기’하여 미국을 상대로 ‘신냉전’을 벌이고 있고, 주변국들에게는 수직적 질서를 강요하는 팽창주의 위협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미어쉐이머(John Mearsheimer) 교수는 저서 ‘대착각’(The Great Dellusion)에서 중국을 국제질서에 편입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만들어주면 평화를 사랑하는 안정적인 민주국가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실토하고 있다. 크게 보면, 현재의 ‘미·중 신냉전’은 키신저와 같은 사람들이 중국의 미래를 잘못 예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키신저 방식’의 또 다른 문제점은 베트남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통일베트남은 그가 예상했던대로 중국의 시녀국이 되기보다는 팽창주의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이념과 체제가 다른 미국과 친구가 되었고 한국에게도 소중한 파트너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방식의 해결은 미국이 떠나간 후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인도주의 측면에서도 큰 문제를 수반한다.

베트남의 공산통일 후 6백만여 명이 감금,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 1백만여 명이 보트피풀이 되었지만 그중 상당수는 육지를 밟아보지 못하고 상어밥이 되었다.

아프간의 경우도 그렇다. ‘키신저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이 중국 편에 설 가능성보다는 중국이 위구르지역의 독립 무장세력이 탈레반과 연계될 가능성을 우려해야 할 측면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인도주의 측면에서는 막중한 문제점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될지는 모르지만 탈레반의 피바람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런 방식이 반복된다면 미국은 해외개입시 현지 주민들의 협력을 얻기 어려울 것이며, 이는 ‘미국의 시대(Pax Americana)’를 이어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나라에게는 미래가 없다

파리평화협정 이후 남베트남은 부패와 혼란 그리고 분열의 도가니였다.

평화무드 속에서 반미·반정부 데모와 분신자살이 일상이 되었고, 부패 공무원들이 득실댔다. 남베트남군도 조국수호 의지나 충성심과는 거리가 먼 만신창이 군대였다.

북베트남의 첩자들이 정부와 군대, 시민단체, 종교단체, 언론 등에서 암약하면서 겉으로는 평화주의자나 민족주의자로 활동했다. 1975년 북베트남이 재침을 개시하자 남베트남군은 56일만에 항복했고 자유베트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아프간도 마찬가지다. 아프간은 파슈툰족,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족 등 다양한 종족과 30여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다. 정부의 요직들이 종족 간에 배분되면서 정부는 분열에 시달렸고, 정부의 부패로 정부군은 월급과 식량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30만 명의 아프간 정부군은 7만5천 명 탈레반에 의해 4개월만에 붕괴되었다.

대통령은 해외로 피신했으며 동생은 탈레반에 충성을 맹세했다. 남베트남군과 아프간 정부군은 공히 엄청난 양적·물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피침과 동시에 신속하게 무너져내린 것이다.

영혼이 떠나간 군인들에게 미군이 제공한 첨단무기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런 나라들을 무한정 지원할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자위(自衛) 의지와 동맹의 소중함 일깨워 준 아프간 사태

한국이 미국 세계전략의 린치핀이자 70년 역사의 동맹조약을 맺고 있는 신냉전 시대의 전략요충지라는 점에서 ‘서울 엑소더스’에 대한 걱정은 일단 기우로 차치할 수 있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도 “나토(NATO)와 대만 그리고 한국은 아프간과 다르다. 피침시 즉각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프간 사태는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다.

카불 엑소더스는 스스로를 방어하는 안보역량과 의지 그리고 굳건한 동맹의 소중함을 유감없이 일깨워 주었다. 적화통일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고 핵무장까지 한 북한을 상대로 하는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환상’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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