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판 나토가 창설됐다면? 미완의 꿈으로 끝난 ‘태평양동맹’

이승만-장제스 주도로 창설 시도... 세계민족반공연맹으로 결실
최창근
2022년 06월 30일 오후 7:00 업데이트: 2022년 06월 30일 오후 7:25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정상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인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대통령·총리도 초청됐다. 회의에서는  “중국의 명시적인 야망과 강압적인 정책이 우리의 이익, 안보,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며 ‘중국 위협론’을 명시하기도 했다. 북대서양을 사이에 둔 북미와 유럽 지역 국가 집단안보체제인 나토가 비역내 국가인 중국의 위협에 공동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명시적인 선언이다.

1949년 창설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휘장.

이 속에서 반세기 전 중국의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두 나라, 한국과 대만 주도로 창설을 시도했던 ‘태평양동맹’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미완의 꿈으로 끝난 태평양동맹의 의의는 무엇일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됐다. 미국·영국을 주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연합하여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전체주의(파시즘) 국가에 맞섰던 전쟁이 끝난 후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 구도로 재편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영국 전시(戰時) 내각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미국 미주리주 웨스터민스터대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평화의 원동력(Sinews of Peace)’이란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처칠은 연설에서 “발트해 슈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다. 이 선 뒤에는 중앙 유럽과 동유럽 옛 나라의 수도가 놓여 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이 유명한 도시와 이곳의 주민들이 소련의 세력권에 있으며, 그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영향뿐만 아니라 커져 가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했다. 훗날 동서 냉전체제의 상징이 된 ‘철의 장막’이다.

총리 퇴임 후인 1946년, 미국 미주리주 웨스터민스터대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평화의 원동력(Sinews of Peace)’ 연설을 하는 윈스턴 처칠. 연설에서 유명한 ‘철의 장막’이 언급 됐다.

처칠의 지적대로 날로 증대되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국은 새로운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했다. 1949년 4월 4일, 공식 출범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이다.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 12개국이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하였다.

소련과 공산주의 국가에 대응하여 창설된 나토(NATO)는 가맹국 중 한 국가 또는 다수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당사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즉각적으로 군사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군사동맹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신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나토 창설에 자극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미·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나토와 같은 집단 안보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3월 장면 주미국 한국대사, 조병옥 대통령 특사를 통하여 미국 정부에 ‘태평양동맹(太平洋同盟·Pacific Pact)’ 창설을 타진했다. 대만, 필리핀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지지도 얻었다.

1949년 3월 20일, 엘피디오 키리노(Elpidio Rivera Quirino) 필리핀 대통령은 “아시아에서도 태평양동맹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국공내전의 전세는 점차 국민당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이에 안정보장이 필요한 상황에서 지역 안보를 목적으로 한 태평양동맹의 결성은 중화민국 정부에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키리노의 초청을 받은 장제스(蔣介石)는 필리핀 바기오를 방문해 1949년 7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회담을 가졌다. 7월 11일, 장제스와 키리노는 아시아 각국에게 ‘태평양동맹’ 결성을 제창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이승만 대통령도 3월 23일, 태평양동맹 창설에 적극 찬동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태평양동맹의 조속한 결성을 원했던 장제스는 이승만의 초청을 받아들여 1949년 8월 6~8일 한국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후 8월 8일, 공동성명을 통하여 태평양동맹 결성을 주창했다.

태평양동맹안(案)을 두고 국제 사회의 의견이 갈렸다. 아시아 지역 국가 지도자 중에서 대표적으로 반대한 인물은 네루 인도 총리였다. 네루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나토와 같은 수준의 안보동맹 성립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무부도 네루 총리에게 동조했다. 그 이유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북미·유럽과 달리 각 국가들이 정치·경제 면에서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거나 신생 독립국가들의 내정이 불안하다 ▲동맹 결성을 위해서는 역내(域內) 국가 간 이해관계가 일치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태평양동맹 창설을 제창한 지도자는 이승만 대통령, 엘키리노 필리핀 대통령, 중화민국 총통 등이었다. 이들은 현실 조건은 미성숙 했으나 아시아·태평양 지역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이 나날이 팽창하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아시아판 나토’인 태평양동맹 창설에 반대했고, 주한 미군마저 철수했다. 이는 북한 김일성의 남침 적화 야욕을 자극했고, 1950년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6·25전쟁 중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집단안보기구 창설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51년 2월 2일 이승만은 국회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태평양 연안국들의 동맹결성’을 결의하도록 했다.

1953년 6.25 전쟁 정전 후, 이승만 대통령은 곧바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자간 안보동맹을 통해 공산주의의 침략을 원천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포츠담 회담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H. 트루먼에 의해 시작된 대(對)공산주의 봉쇄정책, 즉 집단적 안보체제를 통해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국제적 안보전략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1953년 11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장제스 총통 초청으로 대만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양국 지도자는 “반공 통일 전선을 결성한다.”는 요지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만을 공식 방문해 장제스 대만 총통과 함께 사열하고 있다. 대만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장제스 총통과 반공통일전선 결성을 발표했다.

그 결과 1954년 6월 15일, 한국 진해에서 아시아민족반공연맹(Asian Peoples Anti-Communist League·APACL)이 공식 창설됐다. 반관반민(半官半民) 기구로 출범한 연맹에는 한국, 대만(중화민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영국령 홍콩, 포르투갈령 마카오 그리고 미국 점령하의 오키나와 등 8개국이 참가했다. 중앙사무처는 서울에 두고 한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 5개국이 이사국이 됐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은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와의 투쟁,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정의, 민족자결 등 인간의 여러 권리의 확보·신장을 위한 활동 등을 설립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활동으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법 강구, 자유국가 국민의 반공투쟁 지원, 공산치하에 있는 국민의 해방운동 지원, 대(對)공산 정치 심리전 방안 연구개발, 자유국가 간의 문화·정보 교류와 상호 이해 증진, 반공지도자 양성 등을 내세웠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은 1967년 세계반공연맹(World Anti Com­munist League·WACL)으로 발전했다. 1954년 창설된 아시아민족반공연맹 한국지부는 1964년 1월 한국반공연맹으로 개편되었고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1977년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 개최된 세계반공연맹(WACL) 총회.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 대만 총통 등과 더불어 추진했던 ‘아시아판 나토’라 할 수 있는 태평양동맹 결성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미국은 지역 안전 보장을 위하여 필리핀(1951), 한국(1953), 대만(1954)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더하여 호주, 뉴질랜드와는 1951년 태평양안전보장조약(ANZUS)을 체결하여 역내 안전을 보장했다.

중국의 부상 속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 간 경제·안보 공동체 구성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 반세기 전에 태평양동맹이 구성되었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