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와 공급의 관점에서 본 美 대학 내 인종차별 자작극

디네시 디수자
2021년 4월 21일
업데이트: 2021년 4월 21일

미시간주 앨비언 대학에는 몇 주 전 교내 기숙사에서 인종차별적, 반유대적 낙서가 발견돼 교수와 교직원, 학생들이 큰 충격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낙서를 찍은 사진이 지역 소식을 알리는 페이스북에까지 게재되면서 사건의 충격은 일파만파 확산됐다. 해당 게시물에는 ‘백인 만세'(White Power) ‘KKK'(백인 우월주의 비밀결사)라는 글도 적혔다.

사건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캠퍼스 경찰 조사 결과 이 대학에 재학 중인 흑인 학생(21)이 벌인 자작극으로 들통났기 때문이다.

경찰은 “용의자가 자신의 행위임을 시인했고 영상으로 증언도 남겼다”고 발표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 사건을 접한 필자의 반응은 “또 시작이군!”이었다.

가짜 인종차별 사건, 소수인종인 용의자가 백인 가해자를 꾸며내는 사기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다.

재작년(2019년)에 벌어진 ‘주시 스몰렛'(Jussie Smollett·게이라는 이유로 거리에서 흑인에게 폭행당했다고 주장한 배우)의 자작극과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가짜 인종차별 사건은 이제 미국의 학교나 대중문화계에서 흔한 일이 됐다.

도대체 이들은 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끔찍한 사건을 조작하려 했을까?

스몰렛부터 앨비언 대학의 흑인 학생에 이르기까지, 조작극으로 관심을 끌거나 사회적 경각심을 환기하는 방식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흑인들은 차별과 구타를 따로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는 수많은 흑인을 대상으로 비극적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왜 스몰렛과 흑인 학생은 자신들이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꾸며내 무고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씌우려 할까?

이 기이한 현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제학, 특히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대학 캠퍼스와 문화계 모두 인종차별에 대한 수요가 치솟고 있지만, 정작 공급은 그렇지 못하다. 이들에게는 인종차별을 찾아내려는 엄청난 욕망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인종차별 사건이 그만큼 충분하지 않다.

진보적인 학생들이 많은 캠퍼스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

미시간주 앨비언 대학은 확실히 진보주의 교수와 학생들이 많다. 이런 학교 백인 학생들은 흑인과 그외 소수 인종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 바꾸기를 시도해왔다.

이 학교에서 흑인 학생들이 백인에게 다가가 발등에 키스해달라고 요구하는 사회학적 실험을 벌인다면 흥미로운 반응이 예상된다.

하지만 만약 그 반대의 실험을 한다면? 백인이 흑인 학생에게 발등에 시크해달라고 요구하는 실험을 한다면 국가적인 소동이 일어날 게 뻔하다.

자작극을 벌인 학생은 분명히 캠퍼스 내에서 인종차별 사례를 찾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작극을 펼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인종차별주의 사례를 캠퍼스 내에서 찾을 수 없었다는 개인적 실패에 진심으로 좌절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숨겨져 있다고 열렬하게 믿었던 것을 수면 위로 드러내게 하려고, 자기 스스로를 캠퍼스 내에서 절대 구분할 수 없었던 사악한 세력의 희생자로 만들면서 자아 인식에 대한 확증적인 사실을 찾아냈다.

그 학생이 어떤 방법으로든 심리적으로 동요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필자는 그 학생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인종차별적 피해의 전형적인 인물로 대중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거짓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찾고자 하는 증거를 미리 심어놔서 자신이 유죄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체포하는 경찰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끔찍한 권력 남용이다.

이 같은 일련의 인종 사건들은 매우 흔하게 발생하는 가짜 ‘미투(#MeToo)’ 고발들을 상기시켜 준다. 이들의 동기는 미리 인식된 공격이나 경미한 사건에 대해 누군가에게 복수하려는 욕망이 가득한 심리적인 요인에서 나온 것이다.

또는 정치적인 요인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즉, 광범위한 성차별에 대한 주장을 입증하려는 시도, 심지어 ‘로 대 웨이드'(Roe v. Wade·낙태 합법화 판결이 난 사건) 판결을 뒤집기 위해 투표할 수 있는 지명자를 대법원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앨비언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학생의 자백 이후 앨비언 대학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학교 측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번에 일어난 인종차별 행위가 특정 인물이나 하나의 특정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학교 내에 인종적 고통과 정신적 외상의 중대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지역사회를 회복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공식 성명은 표면상으로는 거짓말에 해당된다. 교내에서 발생한 ‘인종차별 행위’는 없었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만들어 내려는 일련의 조작된 행동만 있었다.

이는 사실상 한 특정 인물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앨비언 대학은 인종차별의 역사 때문에 그 학생이 자작극을 펼쳤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사악한 행동을 축소하고 잘못을 대신 뒤집어썼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대학 측은 사실인 것처럼 취급해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 당시 연방대법관 후보가 성폭력 의혹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자신에게 귀속된 구체적인 행동이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어찌 됐든 10대 때 취했던 무감각적이고 성차별적인 행동을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성적 약탈자가 되는 책임을 떠맡고 있는 것과 같다. 아무튼 인종차별 행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고, 대학은 왜 그런 취지의 발표를 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대학을 대신해 필자가 설명해보겠다. 앨비언 대학과 같은 학교는 대부분 우리 문화의 다른 여러 기관과 마찬가지로 관료주의 내에서 거대한 인종 산업을 만들었다.

대학들은 전형적으로 수많은 학장과 관료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정규직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종차별과 맞서 싸운다. 교수들은 인종차별 반대 위원회를 열기도 하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종차별 컨설턴트도 따로 있다. 학생 단체들도 인종차별과의 전쟁에 동참했다.

우리는 이 같은 ‘인종 산업’이 인종차별이 거의 없거나 뒤져도 나오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볼 수 있었다. 있지도 않은 백인의 인종차별 사건을 꾸며낸 21살 철부지의 자작극은 결국 그 학생에게도, 학교 관료들에게도 도움이 됐다.

이들은 이러한 사건(인종차별)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행동을 개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왜 애초에 학교에 인종 관료체제가 존재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필자는 이 사건이 자작극으로 판명 났을 때, 인종 전문가들이 느낄 좌절감과 실망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캠퍼스 내 인종차별이 너무 부족한 나머지 사례를 만들어내야 했다는 학생의 자백은 학교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이제 앨비언 대학은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인종 산업과 그것을 유지하는 데 지원한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요점을 말하자면, 인종차별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한, 인종 사기 사건 시장은 계속 열릴 것이다.

아울러 이번 앨비언의 경우처럼, 대학은 가해자(사건을 꾸며낸 철부지)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만약 가해자가 백인 학생이나 백인 우월주의자였다면 학교 측은 지금처럼 관용하고 인내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학교 측은 해당 학생에 퇴학 조치가 아닌 일시 정학 조치를 내렸고, 학교도 경찰도 그 학생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다.

원제 The Racist Incident That Wasn’t

이 글의 저자 디네시 디수자(Dinesh D’Souza)는 일간 ‘디네시 디수자’ 팟캐스트 작가이자 영화제작자 겸 진행자이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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