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하나의 중국? 하나의 중국과 하나의 대만? 1992 컨센서스를 둘러싼 논란

92공식 30주년 양안 입장 차 분명
최창근
2022년 07월 29일 오후 5:38 업데이트: 2022년 07월 29일 오후 5:38

대만해협을 둘러싼 긴장 수위가 고조되고 있다. 갈등의 핵심에는 공식적으로 ’92공식(九二共識)’이라 칭하는 1992 컨센서스가 자리한다. 1992년 중국과 대만이 합의한 공통인식이라는 의미의 1992컨센서스는 중국과 대만 대표자가 구두(口頭) 합의한 양안관계 원칙 중 하나이다.

1988년 1월, 장제스(蔣介石)의 장남으로 1978년부터 총통으로 재임했던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사망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헌법에 따라 총통직(職)은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승계했다. 본성인(本省人·국민당 정부 천도 이전 대만섬 거주 대만인) 출신의 리덩후이는 장징궈 총통 재임기부터 시작된 민주화·본토화(대만화)를 본격 추진했다.

장징궈(우) 총통과 리덩후이(좌) 부총통. 장제스의 장남으로서 1978년 총통이 된 장징궈는 국민당 정부의 본토화(대만화)를 추진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본성인(대만인) 태생 농업경제학자 리덩후이를 요직에 발탁했고, 유고 시 총통직을 계승할 수 있는 부총통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1988년 장징궈 사망 후 리덩후이는 총통직을 승계했고 3연임을 하면서 2000년까지 집권했다.

리덩후이 총통은 양안관계에서도 새로운 원칙을 정립하고자 했다. 1990년 행정원(行政院) 산하에 중국 문제를 전담하는 대륙위원회(大陸委員會)를 신설하고 1991년 4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반란평정시기임시법)을 폐지하며 중국 공산당 정부의 본토 지배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종전 국민당 정부는 공비(共匪·공산 비적)에 불과한 중국 공산당은 인정할 수 없으며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만이 전(全) 중국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강조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반공대륙(反攻大陸·중국 본토 무력 수복)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리덩후이가 동원감람시기임시조관을 폐지함으로써 대만의 중국 본토 무력 수복 계획도 공식 폐기됐다.

리덩후이 정부는 양안 간 교류·대화 추진에도 나섰다. 1992년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海峽交流基金會·해기회),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兩岸關係協會·해협회)가 양안관계 원칙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두 기구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양안관계 전담 기구였다.

1992년 11월 16일, 중국 해협회는 대만 해협회에 다음의 3가지를 제안했다. ▲해협 양안은 모두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다는 전제 아래 국가의 통일을 추구한다. ▲해협 양안의 실무적 협상을 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국’의 정치적 의미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양안의 협정서 작성 혹은 기타 협상 업무의 타협책을 찾는다.

쑤치(蘇起) 대만 단장대학 교수. 대만의 국제정치학자이자 양안관계 전문가이다. 리덩후이 총통 재임 시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을 지냈다. | 중국시보.

이후 중국과 대만은 ‘일개중국각자표술(一個中國各自表述·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 그 표현은 양안 각자의 편의대로 한다)’ 원칙에 합의했다. 즉 ‘중국(中國)’을 표현함에 있어서 본토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대만에서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의미한다는 아전인수식 해석이 가능하게 됐다. 중국은 대만의 분리 독립에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국민당은 대만도 중국을 대표한다는 명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상기 구두 합의를 두고 당시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통일부 장관 해당)을 역임한  쑤치(蘇起)는 2000년 ‘92공식(1992 컨센서스)’라고 명명했고 올해로 92공식은 30주년을 맞이했다.

양안 간 합의에 따라 이듬해인 1993년 4월, 싱가포르에서 왕다오한(汪道涵) 중국 해협회 회장, 구전푸(辜振甫) 대만 해기회 이사장 간 첫 양안 회담이 개최됐다. 이후 22년 후인 2015년 11월, 당시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사상 첫 양안 정상회담도 개최됐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마잉주와 시진핑은 1992컨센서스가 양안관계의 근간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2015년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양안 정상회담을 개최한 마잉주 대만 총통(좌)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두 사람은 ’92공식’을 재확인했다.

2016년 대만 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정부 출범 후 양안 간 긴장 수위가 고조됐다. 이 속에서 30주년을 맞이한 ‘92공식(九二共識)’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만은 첨예한 인식 차이를 보이고 있다.

7월 26일,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는 홈페이지 게시 글을 통하여 “중국 공산당이 오랜 기간 대만의 민주 가치와 생활 방식을 위협했다. 92공식은 중화민국(대만) 주권을 부정하려는 기도이기에 수용한 적이 없다. “양안이 서로 예속되지 않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자 현상이다.”라고 주장하며 92공식을 부정했다.

중국도 반박에 나섰다. 7월 27일,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중국 공산당 서열 4위인 왕양(汪洋)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7월 26일 열린 92공식 30주년 좌담회에서 “92공식을 견지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에 찬성함으로써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저버리면 대만 동포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왕양은 또 “대만 당국이 92공식 인정을 거부하고 일부 국가는 대만 독립 분열 세력을 선동하고 도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만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는 입장하에서 대만이 중국에 편입되는 형식의 ‘흡수통일’을 강조하며 92공식을 언급한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92공식을 두고 미국으로 도피한 중국 반체제 재벌 궈원구이((郭文貴)는 2021년 자신의 인터넷 방송에서 “지난날 공산당이 장제스를 속인 것과 같다.”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지난 30년 간 양안관계 기본원칙이었던 92공식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