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영국식 민주주의의 양대 기둥, 군주와 의회

대헌장, 명예혁명, 권리장전으로 이어진 입헌군주제 여정
최창근
2022년 09월 14일 오후 1:33 업데이트: 2022년 09월 14일 오후 2:58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여왕 서거와 찰스 3세(Charles III) 국왕 즉위로 영국과 영국 왕실, 영국식 정치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 정치는 공화정과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 낯설기도 하다.

영국은 웨스터민스터 모델로 불리는 입헌군주제하 의원내각제의 원조 국가이다. ‘군림하되 통치 하지 않는’ 국왕(여왕)이 존재하며 실질 통치는 의회와 내각에 의해 이뤄진다.

군주와 의회는 영국식 민주주의의 양대 축이다. 오늘날은 의회의 신임에 의해 성립하는 총리와 내각의 권한이 강력해졌다. 800년 역사의 영국식 민주주의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확립되어 왔을까.

영국 의회 개원식에 참석한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 고 필립공. 영국 의회 개원식은 관례대로 상원 의사당에서 개최된다. | 영국 의회.

영국 의회((Parliament)의 기원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왕 존(John)은 연이은 실정으로 귀족들의 신임을 잃었다. 영국은 프랑스 영토의 절반 이상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지마 존의 재임기에 연속된 전쟁 패배로 프랑스령 대부분을 상실했다.

존은 프랑스와 소모적인 전쟁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징병을 했다. 그러나 1215년 영국은 다시 한번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배했고 불만이 누적된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존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했다.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원문. | 영국 의회.

대헌장에서는 “어느 자유민도 그 동료의 합법적 재판에 의하거나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감금·압류, 법외 방치 또는 추방되거나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않는다. 짐(국왕)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도록 시키지도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즉 “국왕이라 할지라도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군주권에 제한을 둔 것이다. 대헌장은 이후 영국 헌법 기본 정신을 대표하게 된다.

존의 사후 아들 헨리 3세((Henry Ⅲ)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가 서명한 대헌장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귀족대표, 시민대표를 소집했다. 오늘날 영국 의회의 시초이다. 이후 14세기 들어 고급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상원(귀족원), 하급 귀족(젠트리)과 시민대표로 구성된 하원(서민원)으로 나눠진 양원제 의회로 발전했다.

튜더 왕조의 두 번째 국왕 헨리 8세.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연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이다. | 영국의회.

영국에서 전제왕정이 수립된 것은 헨리 8세(Henry Ⅷ) 재위기이다. 앞서 선왕(先王)인 헨리 7세(Henry Ⅶ·헨리 튜더)는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요크파 귀족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튜더(Tudor dynasty)를 개창했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 교황청과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성공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했다. 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여 전제왕정을 수립했다.

헨리 8세 사후 왕위는 아들 에드워드 6세(Edward VI), 딸 메리 1세(Mary I)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로 이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 재위기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등 훗날 대영제국(大英帝國)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사망 후 왕위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James Ⅰ)에게 이어져 스튜어트(Stuart Dynasty)가 열렸다. 제임스 1세 사후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권신수설 신봉자였던 찰스 1세는 아버지에 이어 의회를 무시하는 통치를 지속했다. 의회를 무시하며 부당한 세금을 걷었고 의회 내 청교도 신자들을 박해했다. 이에 의원들이 “국왕의 명령보다 의회의 동의와 법이 앞선다.”는 내용을 담은 ‘권리청원’을 제출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찰스 1세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의회를 해산하자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의회파는 청교도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를 ‘청교도혁명’이라고 한다. 내전에서 의회파는 승리했고 청교도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스스로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영국을 통치했다. 이후 11년간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이 없는 시대가 지속됐다. 금욕주의적 청교도였던 크롬웰은 정치·사회 분야에서 독재를 단행했고 이 속에서 영국인들의 왕정을 그리워하게 됐다. 결국 크롬웰이 세상을 떠난 1660년 왕정이 복고되어 망명 중이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Charles II)가 즉위했다.

올리버 크롬웰.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찰스 1세를 처형하고 호국경으로서 영국을 통치했다. | 영국의회.

찰스 2세는 의회와 대립하다 사형당한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의회와 대립을 자제했다. 그러다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제임스 2세(James Ⅱ)가 왕위를 이었다. 제임스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즉위 후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와 수교를 적극 추진했고 왕권 강화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청교도·성공회 신자가 주류인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 공주(훗날 메리 2세)와 부군 네덜란드의 통치자 오라녜 공 빌렘(윌리엄 공)에게 “왕위를 양도한다.”는 밀서를 보냈다. 윌리엄 공은 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잉글랜드에 상륙하였고 제임스 2세는 폐위됐다. 유혈(流血) 사태 없이 성공한 이 혁명은 ‘명예혁명’이라 불리게 된다. 명예혁명 결과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1689년 ‘권리장전’이 선포되고 군주도 헌법의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제의 시초가 됐다.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의회로부터 영국 왕관을 받는 장면. | 영국의회.

1702년 윌리엄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제임스 2세의 차녀이자 메리 2세의 여동생 앤(Anne) 여왕에게로 이어졌다. 앤 여왕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스튜어트 왕조도 대가 끊기고 독일 귀족 가문인 하노버(Hannover) 선제후 게오르크 폰 하노버(게오르크 1세)가 1714년 영국 국왕 조지 1세(George I)로 즉위하여 하노버 왕조(Hannover Dynasty)가 시작됐다.

본디 독일인으로서 영어를 구사할 수 없었던 조지 1세는 정치를 내각과 의회에 위임했다. 1721년 정치가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을 ‘제1대장경(1st Lord of the Treasury)’으로 임명하여 각료회의를 주재하게 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각료회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 개념이 확립됐고 이는 오늘날 ‘총리(Prime Minister)’ 제도의 원형이 됐다.

로버트 월폴. ‘총리’의 기원이 되는 제1 대장경이 되어 내각을 통솔했다. 오늘날도 제1 대장경은 총리가 가지는 공식 직함 중 하나이다. | 영국정부.

로버트 월폴이 영국 역사상 첫 총리가 되면서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되는 계기가 됐고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가 영국에서 뿌리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습에 불과하던 총리의 직함과 권한은 20세기에 들어서 성문화됐다. 발단은 제1차 세계 대전이다. 당시 영국은 협상국의 중추로서 협상국들에게 총리 명의로 각종 외교 서한들을 보냈는데, 영국 ‘총리’의 직위가 명확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상대국 국가원수나 행정수반과 회견 시 의전 문제도 있었다. 결국 총리직을 명문화하는 정부조직법 제정안을 1914년 통과시켰다. 이후 1968년 총리를 정부수반으로 명백히 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국가공무원부장관(Minister for the Civil Service)’ 직책을 만들고 이를 총리(제1재무경)가 겸하게 했다. 이로써 명실상부하게 총리제가 확립됐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의 총리 임명 권한은 전적으로 국왕에게 있다. 다만 관습에 따라 국왕은 총선에서 하원 과반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 집권당 당수(대표) 교체 시에는 차기 당수가 총리직을 이어받는다.

총리에 선출될 수 있는 것은 하원(서민원) 의원으로 한정되며 상원(귀족원) 의원이 임명된 사례는 없다. 이 역시 명문화된 것은 아니고 관습이지만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1963년 알렉 더글러스흄(Alexander Douglas-Home)이 백작이자 상원 의원 신분으로 총리에 임명된 것이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그는 총리 임명 4일 후에 백작 작위를 포기하고 하원 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하원 의원 신분으로 총리직을 수행해 나가게 된다. 이는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귀족 작위(상원 의원 신분)를 포기해야 한다는 관례를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1940년 전시 내각 총리 취임 후 의회에서 연설하는 처칠.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영국정부.

제2차 세계대전 시 전시 내각 총리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은 1945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당시  국왕 조지 6세(George VI)는 처칠이 명문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의 후예인 점과 공적을 고려하여 ‘도버공작(Duke of Dover)’이라는 최고 귀족 작위를 수여하려 했지만 다시 한번 총리가 되고 싶었던 처칠은 작위를 거절했다. 결국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승리했고 처칠은 생애 두 번째 총리로 취임하여 1955년까지 재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공작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다시 한번 거절했다.

영국 하원 의사당 내부. 바닥에 붉은색 ‘소드 라인’이 보인다. 여야 의원 누구도 이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 연합뉴스.

영국 정치의 중심 영국 의회는 지난날 의회 폭력으로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를 방증하는 것이 이 영국 하원 의사당에 그려진 ‘소드 라인(Sword Line)’이다. 소드 라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여야 의원들은 이 선을 절대 넘어선 안 된다. 과거 칼을 찼던 의원들 간 싸움을 막기 위해서였다. 욕하는 의원도 많아 이들을 의사당 시계탑 빅벤 내 작은 방에 가뒀다. 이들은 의회 모욕죄로 엄청난 종소리를 견뎌야 했다. 엄격한 규제로 물리적 폭력은 사라졌지만 ‘언어 폭력’은 여전하다. 매주 수요일 하원에서 열리는 총리 질의응답 (PMQ)에서는 마주 보고 앉은 여야 의원들이 날선 공방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