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화궈펑 출생 100주년 기념좌담회 개최… 시진핑 왜 불참했나

편집부
2021년 2월 26일
업데이트: 2021년 2월 27일

화궈펑(華國鋒) 출생 100주년, 중국 당국은 ‘크게 기념’했지만, 시진핑 중공 총서기는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 20일 중공 당국은 왕후닝(王滬寧), 한정(韓正)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2명과 천시(陳希), 쑨춘란(孫春蘭), 장여우샤(張又俠) 정치국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베이징에서 화궈펑 출생 100주년 기념좌담회를 열었다.

화궈펑은 중공 최고 지도자를 지낸 뒤 중공 원로 덩샤오핑(鄧小平) 등과의 내분에서 밀려나 정치 무대를 빠져나갔다.

중공 당국이 화궈펑의 출생을 ‘크게 기념’하자 이는 해외 중국어 매체의 관심을 끌었고, 이들은 ‘화궈펑 탄신 기념’ 등을 제목으로 달아 부각했다.

하지만 현 중공 최고 지도자 시진핑은 참석하지 않았다. 중공 최고 지도자의 탄생 100주년이 되면 현 총서기 외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참석하는 게 중공의 관례다.

중국 문제 연구가 쉐츠(薛馳)는 에포크타임스 기자에게 “화궈펑 탄생 100주년에 시진핑은 참석했어야 하는데 불참했고, 상무위원 2명만 보냈다. 여기엔 눈여겨볼 점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쉐츠는 “화궈펑에 대해서 시진핑은 아직 입장을 밝히기가 어렵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말년에 지명했지만, 덩샤오핑이 내려 보냈다. 시진핑은 몇 년째 왼쪽으로 돌고 있는데, 덩샤오핑(노선)을 보류하고 수정했지만 아직 (덩샤오핑) 깃발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쉐츠는 “숨 고르기에 급급한 게 현재 중공의 실상“이라며 “시진핑이 원하는 것은 중공의 연명으로, 마오쩌둥 시대로의 복귀는 물론 자신의 지위도 덩샤오핑을 제치고 마오쩌둥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진핑이 어떻게 화궈펑에게 자리를 주겠는가? 그래서 화궈펑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한 채 2명의 상무위원을 출석시킨 것이다. 화궈펑은 그래도 한동안 중공의 최고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냥 사망한 중공 원로와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쉐츠는 이번 좌담회에서 돌연 마오쩌둥이 화궈펑에 대해 ‘솔직하고 참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방금 출간된 시진핑의 ‘중국 공산당 역사를 논하다’란 책을 보면 시진핑에게 있어 주제는 단 하나로, 시진핑의 말을 듣고 시진핑을 따르는 것”이라고 밝혔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 ‘투명인간’이 된 화궈펑을 이번에 중공 당국이 크게 기리는 건 어쩌면 중공 당 역사에서 화궈펑의 이름을 바로잡아 ‘탈(脫)덩샤오핑화(化)’하려는 의도라는 평가도 있다.

내분 중 무대에서 내려간 화궈펑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임종 전 지명한 후계자였지만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사망한 지 한 달도 안 돼 예젠잉(葉劍英) 당시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왕둥싱(汪東興) 중앙위원회 사무국 주임 등과 함께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青), 왕훙원(王洪文) 당 부주석 등, 당 정치국 위원들을 체포하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4인방’ 체포 이후 화궈펑은 중공 당∙정치∙군사 최고 지도자가 되어 중공 중앙 주석, 국무원 총리, 중앙 군사위 주석을 겸직했다. 하지만 덩샤오핑 등 중공 원로들이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하자 화궈펑은 덩샤오핑에게 쫓겨났다.

화궈펑은 1980년 자오쯔양(趙紫陽)에게 총리직을, 1981년 후야오방(胡耀邦)에게 당 주석직을, 덩샤오핑에게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준 뒤 점차 중공 정계를 떠났다.

1981년 6월 중공 제11기 6중전회에서 채택된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는 화궈펑에 대해 ‘1 긍정 4 부정’ 평가를 내렸는데, ‘4인방’ 타도에 기여한 공로를 제외한 3개 항목은 전부 ‘양개범시(兩個凡是·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는 모두 옳다며 내세운 정치 구호)’의 추진과 늑장 대처, 개인숭배 등에 대한 비난이었다.

덩샤오핑은 “화궈펑은 하나의 과도기(인물)일 뿐 하나의 세대라고 할 수 없다”며 “그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그저 ‘범개양시’뿐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화궈펑 사망 당시, 중공 당국은 화궈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적지 않은 중공 학자들이 당시 ‘양개범시’는 화궈펑과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하늘과 땅 차이인 화궈펑과 자오쯔양의 대우

하지만 6∙4 사건으로 물러난 자오쯔양 전 중공 지도자와 비교해 이야기해 보자면, 화궈펑과 자오쯔양의 처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자오쯔양은 1987년 1월 후야오방의 뒤를 이었지만 6∙4 학생 운동에 찬동하면서 1989년 6월 하순 쫓겨나 2005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중공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당국은 2019년 10월 17일 자오쯔양의 출생 100주년 당시 기념회를 열기는커녕 경찰차와 사복 경찰을 대거 자오쯔양의 베이징 생가에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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