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감정·민족주의 선동 매체, 中 환구시보 편집인 사퇴

최창근
2021년 12월 20일
업데이트: 2021년 12월 27일

거친 입’ ‘막말 논란’ 후시진 환구시보 총편집인 퇴임
톈안먼 시위 참여했지만, 자아비판 후 공산당의 입으로

웨이보 팔로워 2400만명, 국제사회에도 일정 영향력
胡 내보낸 환구시보는 사장직 신설…40대 파격 발탁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진 것이냐” “일본도 이미 중국이 모든 면에서 넘어섰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중국인의) 감성을 리셋할 때가 됐다”

“호주는 항상 소란을 피우며 중국의 신발 밑에 붙은 씹던 껌처럼 느껴진다. 가끔 돌을 찾아서 문질러줘야 한다” “영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 주권을 침해한다. ‘매를 버는 계집애’처럼 취급해야 한다”

“중국이 속임수와 도둑질에 맞서 싸울 때 미국인의 조상은 원숭이의 본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인지 수준이 여전히 원숭이만큼 낮다”

‘막말’에 가까운 거친 언사를 쏟아낸 장본인은 스스로 ‘라오후(老胡·늙은 후)’라 칭하는 후시진(胡錫進) 환구시보 총편집인이다.

환구시보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자매지다. 1993년 1월, 인민일보가 자사 해외 특파원들의 기사를 내보내기 위해 창간했다. 환구시보는 현재 200만 부 가까이 팔리는 거대 신문으로 성장했다. 환구시보 성장의 주역은 2005년부터 ‘편집인’을 맡았던 후시진이다.

후시진은 1960년 허난(河南)성 루저우(汝州)의 가난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8세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군 간부 교육기관인 난징(南京) 중국인민해방군국제관계학원(中國人民解放軍國際關係學院)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하여 중국인민해방군 제87153부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제87153부대는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건 진압 주력 부대 중 하나였다.

교관 생활과 병행하여 베이징외국어대학 석사 과정에서 공부하던 ‘현직 장교’ 후시진은 톈안먼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애국운동’이라고 규정 짓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당시 자신의 행동이 ‘위험한 어리석음’이었다며 자아비판 했다.

1989년 여름, 대학원을 졸업한 후시진은 군복을 벗고 펜을 들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국제부에 입사했다.  톈안먼 시위에 참여했던 그가 ‘공산당의 입’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국제부 초임 기자 시절, 전공 언어를 살려 주로 소련과 동유럽 관련 기사를 썼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는 유고슬라비아 특파원으로 일했다. 보스니아전쟁(1992~1995) 취재는 ‘기자’ 경력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훗날 특파원 생활을 회고하며 ‘보스니아전쟁 취재 수기’ 책을 썼다. 회고록에서 그는 “그곳에서 ‘중국 기자는 왜 각광을 받지 못하는가’ 생각했다”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무시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아울러 “국가 분열과 혼란을 미연에 막기 위해 권위주의 통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를 두고 “회고록에는 당시 후시진의 서방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이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평가했다.

1996년 귀임 후 환구시보 부총편집인으로 승진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시진은 서방 중심 국제 뉴스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는 환구시보가 세를 확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9년 5월 7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부 소속 미군이 세르비아 중국대사관을 폭격, 중국 기자 세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비극적 사고”라고 해명하며 ‘오폭(誤爆)’이라 주장했지만, 환구시보는 이틀 뒤 특별판을 발행해 해당 사건이 고의적 테러일 수 있다는 의혹 제기 기사를 내보냈다.

중국 내 반미 정서 불붙이며 신문사 키워

후시진이 필봉(筆鋒)을 휘두른 환구시보 특별판은 중국 내 반미 정서에 불을 지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일반 대중까지 호응했다. 당시 리자오싱(李肇星) 국무원 외교부장은 “저널리즘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자는 모국어가 있다”며 환구시보를 호평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 해외전선부장은 환구시보 애독자임을 공개 천명했다.

환구시보의 인기는 고공 행진을 했다. 국수주의가 곧 돈이 된다는 후시진의 논리가 현실에서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2005년 총편집인으로 승진했고, 2009년 창간된 영문판 자매지 글로벌타임스 총편집인도 겸임했다.

환구시보·글로벌타임스 총편집인으로서 그는 ‘강성 반미(反美)’ ‘애국주의’ 성향 글로 화제를 일으켰다. 반면 지나친 민족주의 성향으로 “중국은 늘 옳고, 서방은 무조건 나쁘다”는 이분법적 논리를 펴서 중국 내에서도 “건전한 국가 발전에 악영향을 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후시진의 입은 국제사회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트위터·웨이보를 통해 전달하는 주장이나 환구시보 논평을 외신이 인용해 보도하고, 이를 통해 해당 국가와 국제 사회에서 반중(反中) 정서가 점화되면 환구시보는 이를 재인용해 반박하여 중국과 해당국 여론이 충돌하는 구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대표 사례는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BTS)의 ‘밴플리트 상’ 수상 사건이다. BTS가 수상 소감에서 “한·미 양국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언급한 것을 일부 중국 네티즌이 문제 삼았다. 환구시보는 이를 받아서 “BTS가 6·25전쟁에서 희생된 중국 군인을 존중하지 않고 중국을 모욕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도하며 사태를 키웠다. 이 문제를 놓고 양국 간 여론이 악화하자 중국 외교부가 브리핑을 통해 갈등이 확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진화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자 후시진은 “한국 언론이 중국 네티즌의 반응을 선정적으로 보도한 것”이라며 재반박했다.

이런 후시진의 별칭은 ‘중국 공산당 비공식 대변인’이다. 화춘잉·자오리젠·왕원빈 등 중국 외교부 ‘공식’ 대변인들조차 차마 할 수 없는 수위의 발언을 하거나, 인민일보, CCTV, 신화사 등 관영 매체를 통해 전하지 못하는 거친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당국이 후시진의 공격적 성향을 우회적으로 활용하여 속내를 전달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는 후시진이 “중국의 ‘전랑(戰狼·늑대 전사) 외교관’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후시진의 필설이 논란을 일으킬 때마다 중국 정부 관계자들은 “당이나 정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해 왔다. 다만 미·중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중국 언론은 자신의 의견을 낼 자유가 있다”며 후 편집인 유(類)의 강성 논조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해 5월, 후시진이 “중국의 핵탄두를 1000기로 늘려야 한다”고 공개 주장했다.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중국도 참여하는 (핵)군비 통제협정의 필요성”을 거론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하루 만에 나온 발언이었다. 후시진의 폭탄 선언에 외신들이 중국 정부의 입장을 묻자,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현 부장조리)은 “중국에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며 두둔 발언을 했다.

사생활 폭로되며 위상 흔들…교체설 부각

‘거친 입’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던 후시진은 ‘내부자’에 의해 타격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돤징타오(段靜濤) 환구시보 부총편집인이 그의 혼외자를 당국에 고발했다. 돤징타오는 “후시진이 오랫동안 전현직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2명의 혼외자를 두고 있다” 폭로했다. “언론인으로서 모으기 힘든 거액의 자산을 축적했다”는 의혹도 일었다.

폭로 후 후시진은 “근거 없는 모함이다”고 항변했다. 감찰 당국도 지난 1월, “고발 근거가 없다”고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다만 논란 후 ‘후시진 교체설’은 지속 제기 됐다.

12월 16일, 후시진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퇴직 수속을 밟아 환구시보 편집인을 맡지 않는다”고 썼다. 자기 소개도 ‘환구시보 특약 평론원’으로 바꾸었다. 후임은 우치민(吳綺敏) 인민일보 국제부 부주임이 내정됐다. 환구시보는 ‘사장(社長)’직을 신설해 1980년생인 판정웨이(範正偉) 인민일보 논설부 부주임을 임명했다.

환구시보와 공식 관계를 청산한 후시진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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