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재 대상된 신장 위구르 당서기 교체… 경질? 영전?

최창근
2021년 12월 28일
업데이트: 2021년 12월 28일

천취안궈 전격 교체… 후임 마싱루이 광둥성장
시짱 티베트-신장 위구르 자치구 철권 통치로 악명
중국 정치전문 매체 “내년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 유력”

천취안궈(陳全國)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국 공산당 위원회 서기가 전격 교체됐다. 후임자로는 마싱루이(馬興瑞) 광둥(廣東)성 성장이 임명됐다.

12월 25일, 중국 관영통신 신화사(新華社)는 천취안궈가 조만간 새 보직을 맡을 것이라고 보도했으나 구체적인 직책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책성 인사인지 추후 영전을 염두에 둔 것인지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영국 로이터는 이번 인사 조치가 미국 등 국제사회가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난 2016년부터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국공산당 서기직을 맡아온 천취안궈는 자치구 내 인권 탄압 문제에 연루된 최고 책임자로 평가됐고, 지난해 미국 정부의 제재 명단에 올랐다.

천취안궈 교체 배경이 갈등이 고조된 미중 관계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2월 23일, ‘위구르족 강제노동 금지법’에 서명했다. 대통령의 서명으로 즉시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해당 법은 신장 위구르 지역 생산 제품의 수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인권 탄압의 책임을 들어 천취안궈를 미국 입국 금지 인사 명단에 올리기도 했다.

천취안궈는 테크노크라트 출신이다. 고향은 허난(河南)성, 중국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이다. 어린 시절 허난성에서 성인 8명 중 1명꼴로 기아·구타·자살 등으로 죽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1973년 12월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육군 3사단 포병연대 병사로 4년 복무했고, 제대 후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했다. 1978년 정저우(鄭州)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고, 훗날 주경야독하여 우한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중국 공산당 입당 후 고향인 허난성 공산당 기층 조직에서 활동했다. 허난성 쑤이핑(遂平)현 서기, 뤄허(漯河)시 시장 등을 역임했다. 1998년 허난성 부성장이 돼 당시 성장이던 리커창(李克強) 현 국무원 총리를 보좌하며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세대 지도부로 꼽히던 리커창의 신임하에 2000년 허난성 공산당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을 맡았고, 2003년 당 부서기로 승진했다. 이후 허난성 당·정 요직을 맡다 2009년 대리 성장을 거쳐 2010년 허난성 성장으로 승진했다.

허난에서 잔뼈가 굵은 천취안궈는 2011년 중국 공산당 중앙의 결정으로 시짱(西藏) 티베트 자치구 당 서기로 전보됐다. 이듬해는 시짱군구 당위원회 제1서기도 겸하며 군·정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

소수민족 티베트족 거주지 시짱 자치구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정교(政敎)일치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티베트 독립 세력을 후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짱 자치구에 당 서기로 부임한 천취안궈는 ‘티베트 사회 안정’을 정책 기조로 제시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혼란을 진압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길 바랐다.

천취안궈는 시짱 자치구 당정 간부들을 티베트 각 마을과 티베트 불교 사찰로 파견하여 숙식하게 했다. 2015년까지 약 10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 간부들을 티베트 마을에 배치했으며 1700개 사찰에서 공산당 조직을 건설했다. 2011년 부터 2016년까지 공안(경찰) 인력을 1만2313명으로 약 4배 늘렸다. 더하여 티베트불교가 중국의 사회주의 문명에 적응해야 한다며 각 사찰에 오성홍기와 공산당 지도부 사진을 걸게 했다.

천취안궈의 당 서기 재임 기간 동안 시짱 자치구는 경제 부문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2012~2016년 자치구 연평균 소득 증가율은 11% 내외로 전국 성·시·자치구 중 1위를 기록했다. 이를 두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안정된 시짱 자치구 사례는 전 국가의 모범 사례로 삼아야 한다”고 호평했다.

시짱 자치구가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염원대로 ‘안정’되자 천취안궈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 중국의 화약고로 떠오른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문제 해결이었다. 무슬림 소수민족 위구르족은 분리·독립 운동을 본격화했다. 2009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로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89년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최대 규모였다.

시진핑 입장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반드시 진압해야 할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시진핑의 핵심 사업인 일대일로 전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시진핑은 시짱 자치구에서 ‘성과’를 보여준 천취안궈의 능력에 주목했다.

2016년 8월, 천취안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서기로 전보됐다. 부임 후 시짱 자치구에서의 ‘성공’ 사례를 적용했다. 방법 면에서는 더 강압적이었다. 그는 “위구르족 분리주의자를 색출하고 테러리스트를 인민 전쟁의 바다에 묻어 벌벌 떨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천취안궈는 강력한 보안 조치와 재교육을 수단 삼아 공포 정치를 폈다. 그는 모든 위구르족을 잠재적인 테러 용의자로 간주했다. CCTV, 안면인식 기술, 위치 추적 장치 등 첨단 기술도 동원하여 이른바 ‘디지털 독재’도 실현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곳곳에는 경찰서·파출소가 설치돼 주민들을 감시했다. 불심 검문은 일상이 됐다. 천취안궈는 무작위로 경찰서나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신고를 제대로 접수하는지, 신고를 받은 경찰이 몇 분 내에 출동하는지 체크했다.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경찰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천취안궈는 구금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최단 3개월에서 최장 2년간 이뤄지는 중국 당국의 교육 프로그램은 위구르족이 국가에 충성하고 극단주의자를 고발하도록 세뇌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를 위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규모 수용소가 세워졌다.

위구르족 강제 수용소에 대한 외부의 비판에는 “재교육 차원에서 직업 교육을 하는 시설”이라고 일축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이른바 ‘직업 캠프’ 2017년 4월부터 본격 운영됐다. 그해 천취안궈는 제19차 중국 공산당 대회 때 25명으로 구성된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에 포함돼 차기 지도자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진핑과 당 지도부 신임의 방증이었다. 이런 천취안궈를 두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19년 분석 기사에서 “시진핑의 쇠망치”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시진핑의 쇠망치’의 향후 진로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천취안궈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기직에서 용퇴시킨 것이 미국발 신장 제재를 일단 피하고 보자는 ‘전술적 후퇴’인지, 더 큰 영예를 안기기 위한 ‘무대장치’인지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 가운데 미국에 본사를 둔 중국 정치전문 매체 둬웨이신문(多維新聞)의 12월 25일 자 분석이 눈길을 끈다. 둬웨이는 “천취안궈가 내년 ‘입상(入相·재상의 반열에 오름,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 의미)’의 유력한 경쟁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재상은 반드시 지방에서 나오고 맹장은 반드시 병졸 중에서 나온다(宰相必起於州部, 猛將必發於卒)”는 시진핑 국가 주석의 인사 철학을 근거로 제시했다.

천취안궈의 후임 당 서기 마싱루이 신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 서기는 국제우주항공과학원 원사(院士·중국 최고 과학자)인 항공우주 분야 테크노크라트이다. 2013년 중국 최초 달 표면 착륙 프로젝트 ‘창어 3호’ 계획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중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광둥성 성장을 5년간 지낸 후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전보됐다. 송샤와좡 선전대 홍콩·마카오기본법센터 교수는 “마상루이의 경험이 신장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강제노동이라는 해외의 비난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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