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카메라에 잡힌 中교도소 내 ‘파룬궁 박해’ 실태

Jennifer Zeng
2019년 5월 29일 업데이트: 2019년 10월 26일

1999년 이래 중국 공산당이 중국 노동교양소, 구류센터와 같은 감옥 안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자행한 끔찍한 고문은 이미 보도된 바 있다. 하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이러한 범죄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해 폭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반인류 범죄가 영원히 묻히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잔혹한 박해를 직접 겪은 위밍(于溟)이라는 파룬궁 수련자가 그 ‘과제’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마침내 악명 높은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와 랴오닝 번시(本溪) 감옥 안에서 고문 장면을 촬영해 해외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파룬궁 수련생 두 명이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하는 ‘실제 상황’이 위밍의 ‘몰래카메라’에 기록됐다.

다음은 그들의 이야기다.

후궈젠(胡國艦, 향년 48세)

파룬궁 수련자 후권젠. | 밍후이왕

2017년, 위밍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랴오닝성 번시감옥 병원에 구금됐다. 벌써 네 번째 투옥이었다. 그곳에서 위밍은 파룬궁 수련자 후궈젠(胡國艦)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당시 45세(1970년 6월생)였던 후궈젠은 동북 랴오닝성 푸순(撫順)시에서 파룬궁을 수련했다. 그는 2015년 7월 7일에 체포됐다. 그는 그전에 이미 1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이번에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5월 4일, 후궈젠은 번시감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강제노역에 처해졌고, 수면을 박탈당하고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19일 후, 그를 면회한 그의 아내는 아연실색했다. 90kg를 웃돌았던 몸이 50kg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야위었기 때문이다.

5월 26일, 후궈젠은 ‘관사 죄수(管事罪囚‧간수를 도와 죄수를 관리하는 죄수. 이하 ‘죄수’)’인 왕신강, 웬더자, 위창룽 등에 의해 세면실에 끌려갔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의 머리에 계속 찬물을 끼얹었다. 후궈젠은 추워서 온몸을 떨었다. 그러고 그들은 후궈젠을 쪽걸상에 앉히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그날 밤 10시경, 후궈젠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죄수’들은 그의 머리를 발로 차면서 윽박지르고 욕을 해댔다.

그가 깨어나지 않자 번시도심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그는 심각한 뇌출혈이 있어 신경외과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후궈젠은 번시감옥에 옮겨진 지 22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졌다.

8개월 후, 후궈젠은 식물인간 상태가 됐지만 경찰은 그를 강제로 퇴원시켜 감옥에 감금했다.

바로 이 기간에 위밍은 후궈젠이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몰래 찍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2017년 10월 31일, 위밍은 4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그는 후궈젠의 가족에게 연락했고, 후궈젠을 위해 정의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2018년 5월 14일 새벽, 감옥 측은 갑자기 후궈젠이 위급해 번시병원에 이송했다고 후궈젠 가족에게 통보했다.

후의 가족과 위밍이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 도착하자마자 위밍은 비밀리에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영상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현장에는 경찰 십여 명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위밍의 ‘작업’을 눈치챘다.

경찰은 분노하며 카메라를 압수하려 했다. 위밍은 카메라를 꽉 잡고 버텼다. 힘을 너무 세게 쓰는 바람에 손이 베였다. 위밍은 결국 카메라를 뺐기고 말았다.

위밍에게는 사실 몰래카메라가 두 개 있었는데, 경찰이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은 그의 셔츠에 끼인 카메라만 가져갔고, 그의 손목에 있는 다른 하나는 보지 못했다.

후궈젠의 가족이 병원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뒤, 후궈젠은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도 후궈젠의 시신은 영안실에 냉동돼 있다. 그의 가족은 시신 화장을 거부했다. 남편의 사인이 구타에 의한 것임을 밝힐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정의를 되찾으려고 한다.

당국은 후궈젠의 가족에게 보상금 10만 위안(1700만 원)으로 ‘합의’할 것을 제안하면서 시신을 화장하려 했으나, 그의 가족은 거부했다.

위밍은 후궈젠의 가족이 후궈젠이 죽은 후 큰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낙담한 나머지 반신불수가 될 정도로 뇌혈관 질환이 악화됐다. 그의 아들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아내는 직업이 없어 가정을 지탱하기가 매우 어렵다.

후궈젠의 어머니는 요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며느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며 늘 자살하려고 했다.

육원봉(陸遠峰, 향년 63세)

파룬궁 수련자 육원봉(陸遠峰). | 밍후이왕

위밍은 또 육원봉(陸遠峰)이 가혹한 고문을 받아 사망한 모습도 기록했다.

2016년 말, 역시 번시감옥 병원에서 위밍은 랴오닝성 선양(沈阳)시 조선족 마을의 62세 농민 육원봉을 만났다.

육원봉은 방금 아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45분 동안 고압 전기봉으로 전기 충격을 받았고, 독방에 감금됐다. 고혈압을 앓고 있음을 의사가 안 후,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육원봉은 나중에 위밍의 격려로 고소장을 썼다. 그는 번시감옥 2감구(監區) 경찰대장 자창하이(賈長海, 경호 2151227) 등이 그를 박해한 과정을 진술했다.

“2016년 11월 9일 오전 10시, 자창하이는 왕커빈(王可賓)에게 2감구 교도관 사무실로 나를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간 뒤 자창하이는 나에게 여전히 파룬궁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믿는다’고 했다. 그 뒤에 자창하이는 뉴다이(牛岱)라는 또 다른 교도관과 함께 내 손을 등 뒤로 젖혀 수갑을 채운 다음 나를 땅에 눕히고 눌렀다. 그러고는 전기봉으로 내 등, 앞가슴, 머리와 손에 전기가 다 나갈 때까지 십여 분 동안이나 감전시켰다. 머리, 등, 심장에 심한 통증이 계속되는 동안 뉴다이는 줄곧 내 머리를 밟고 있었다.”

고소장을 쓴 뒤 육원봉은 볼펜을 깨고 꺼낸 잉크를 엄지손가락에 묻혀 고소장에 손도장을 찍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르면 이렇게 하면 편지를 ‘합법화’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정식으로 서명했다.

실제로 자창하이 일당은 그 후 세 번째 전기봉의 전기가 소진될 때까지 육원봉에게 30여 분 동안 전기충격을 가했다. 육원봉이 어쩔 수 없이 파룬궁 신앙을 포기한다고 한 후에야 고문이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뉴다이의 발은 시종 육원봉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육원봉은 교도소 병원에서 열흘 만에 교도소로 송환됐고, 그 후 계속 고문을 받았다.

2017년 8월 26일 육원봉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다리뼈가 부러졌다. 교도소 측에서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감옥 밖으로 내보냈지만, 어떤 의료 처치도 해주지 않았다.

2018년 11월 19일 육원봉이 풀려났을 때, 그의 병세는 이미 상당히 나빠져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다리가 마비됐다. 그리고 그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21일 후, 육원봉은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밍은 육원봉의 고소장을 감옥에서 내보낼 수 없어 육원봉을 찾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육원봉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가 막 세상을 떠난 후였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록한, 박해로 세상을 떠난 사망 사례는 두 사건 말고도 많습니다. 최소한 내 옆에서 죽은 십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더 죽어야 이 살육이 멈출까요?” 위밍이 던진 이 말의 무게를 우리는 얼마나 절감할 수 있을까?

위밍은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 공산당 감옥 내의 파룬궁 수련자 박해 범행을 촬영했다. 그는 폭스뉴스 11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통해 파룬궁에 대한 20년간의 박해를 제지시키고 싶다”고 했다. | 장린다/에포크타임스

파룬궁은 ‘파룬따파’라고도 하며, 1992년 파룬궁 창시자 리훙즈 선생이 중국 사회에 공개 전수하기 시작한 심신 수련법이다. 이 전통 수련법은 수련자에게 일상생활에서 ‘진선인’의 원칙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또 명상을 포함한 5장 공법이 있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것이 전 중국 공산당 지도자 장쩌민의 시기심을 촉발하는 빌미가 됐다. 특히 파룬궁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중국 공산당의 무신론, 유물론과 대비돼 더욱 많은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99년 7월, 시기심과 두려움에 빠진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집단학살적 탄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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