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싼자에서 온 편지’를 연재하며(1)  

윈자오(雲昭.작가)
2017년 11월 4일
업데이트: 2020년 4월 24일

1. 

나는 ‘마싼자에서 온 편지’ 책을 쓴 윈자오(雲昭)이다. 어떤 일로 마싼자 노동교양소 구금 경력이 있는 책의 주인공과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우연히 그에게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에서 보내온 한 통의 구원 요청 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미국 여성이 4년이 지나서야 이 편지를 받았다고 하자 그는 차분하게 “그 편지는 제가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정말 놀랐다.

나는 스스로를 정상적인 사람이라 여겼다. 친구와 직장이 있고, 친구들과 웨이신을 통해 좋아하는 음식, 건강여행, 친환경과 애완동물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또 좋은 글귀를 공유하곤 했으니 말이다. 이에 비하면 구원 요청 편지에 담긴 내용은 정말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를 말해줬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긴 했지만 이내 본래의 화제로 돌아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치 우리와 관계없고 또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 발생했고 나는 알게 된 이상 이를 회피할 수는 없으며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련자들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그들의 진술을 통해 마싼자 남자 노동교양소의 ‘그대로의 모습’에 접근해 보려고 시도했다.

2. 

나는 2013년 7월 3일부터 원고가 완성될 때까지 녹음기를 사용해 인터뷰를 계속했다.

인터뷰를 해본 경험은 별로 없었다. 원래 갖고 있는 능력만으로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접촉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1년 남짓한 기간에 30여명의 ‘구두 진술’ 기록을 얻을 수 있었다. 진술한 사람은 파룬궁 수련자, 일반 수감자, 파룬궁의 결백을 주장하며 청원했던 사람, 파룬궁 수련자의 가족과 친구, 마싼자 노동교양소 경찰과 운전기사, 마싼자의 행상, 상점주인, 현지 주민 등등이다. 그들을 통해 100시간이 넘는 녹음 자료를 얻었고 당사자가 제공한 많은 양의 서류, 법률 문서,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 몰래 갖고 나온 영상 자료와 사진들도 모을 수 있었다.

주인공은 마싼자 노동교양소의 지리적 위치, 공간 배치, 잔혹한 고문 시연과 고문 도구 등의 그림 자료도 직접 제작해 내게 줬다. 덕분에 나는 더욱 구체적인 정황을 서술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암호화된 메일을 통해 주인공과 서면 인터뷰를 하면서 거의 100개에 달하는 사실에 대해 자세한 실태를 조사해 나갔다.

나는 마싼자 교양소와 관련한 중국 내의 많은 보도를 참고했고 오리건주 신문, CNN, 뉴욕타임스, 대기원시보, NTDTV, 희망의 소리 국제 라디오 방송 등 해외 매체의 보도도 참고했다.

그 외에도 마싼자교양소와 관련한 국내의 사료들을 모두 수집했다. 그 중 <랴오닝성 마싼자노동교양소 간행물(1957~1997)>, <마싼자 진 간행물(馬三家鎭志)>, <비바람 60년(전 선양 마싼자교양소 정치위원 회고록)> 등의 자료는 내게 큰 도움이 됐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당사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등장인물의 실명을 밝힐 수는 없었다. 다만 시의 적절하게 관련 실증 자료만 공개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떤 문체로 이 소재들을 정리해야 할까? 이전에 나는 르포르타주(보고문학) 문체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경험에서 나는 글 배후의 뜻을 전달하는 것은 단지 문법적 수사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해 내느냐 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르포르타주 문학’은 분명 나의 선택지는 아니었다. 나중에야 나는 나의 서술 방식이 중국에서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일종의 ‘논픽션 문학’과 상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결국 ‘논픽션 문학’과 같은 문체를 채택하게 된 것은 내가 수집한 소재들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서술은 어떠한 허구로도 다다를 수 없는 생동감이 있었고, 말 속의 어조와 끊김, 심지어 숨기고 덮어두고 싶어하는 것까지도 이미 벌써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만 현실의 진실과 풍부함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본래 그대로 표현하려고 나는 인터뷰 녹음을 반복해서 들었다. 원래의 말과 어조를 최대한 살린 결과 책은 내가 처음 쓰려고 한 내용보다 훨씬 더 잘 표현됐음을 볼 수 있었다.

3.

나는 주로 지하철 입구에서 주인공을 만났다. 그는 항상 제시간에 낡은 노트북 가방을 들고 앉아 있었다. 보통은 하얗게 바랜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어떤 때는 80년대 양복을 입기도 했다. 노트북은 가방끈이 거의 다 닳아서 투명 테이프로 감아서 가지고 다녔다.

우리는 암호화된 메일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그는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세련된 사람들 속에서 그는 시류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감자들의 묘사에 의하면 그는 “공포의 어둠속에 나타난 한줄기 빛” “마싼자에 있는 동안 혹형을 가장 심하게 받은” “고문 당할 때도 고통의 비명 소리 한번 지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매번 잔혹한 고문에 대해 얘기할 때도 그의 말투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는 이성적이고 신중했으며, 때로는 딱딱하고 지나치게 단순했지만 존귀하고 장엄함이 넘쳐났다.

루다칭(魯大慶)이란 사람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 생체 장기 적출을 당할까 두려워 경찰 앞에 무릎 꿇고 이마를 조아리며 선서란(宣誓欄)에 서명하고 선서했지만, 이내 “핍박한다고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장기 적출보다 더 무섭다!”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선서란에 있는 자신의 서명을 지웠다.

그는 마싼자 노동교양소가 자행하는 ‘큰 대자로 달아매기(대괘, 大掛)’고문을 가장 오랜 기간 받았고 가장 오랜 시간 견뎌냈던 사람이다. 8개월 가까이 서서만 있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이 먹고 남은 국물을 얻어먹었다. “나는 무너질 수 없었어요. 똑바로 서있어야만 했어요”라고 말했다.

톈구이더(田貴德)는 내가 인터뷰한 사람 중에 가장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박해를 받아 이미 사망했고, 자신도 마싼자에서 잔혹한 고문을 겪었지만 그는 늘 수련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자비심이 아직 부족해” 그를 학대한 경찰에 대해 때로는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내 주변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적극적이고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공동 준칙을 지키고 미래의 아름다움을 소망한다. 그들의 입에서는 현실에 대한 풍자나 조소를 들을 수 없었고, 원망이나 절규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대항하는 것은 불공평한 체제와 제도가 아니라 자신의 인성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극복하려는 것뿐이었고 스스로를 이기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늘 사람들 속에 함께 있었다.

한 번은 한 파룬궁 수련자와 인터뷰가 끝난 후 같이 정류장으로 가는데 잠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던 일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 속에서 그는 그처럼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가 한 일을 당시 그 거리에 있던 어떤 남자도 해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4.

인터뷰 과정에서 ‘18차 당대회’ ‘임기 교체’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6.4(1989년 6.4 톈안먼 사태)’ ‘4.25(1999년 4.25파룬궁수련자 평화대청원 기념일)’ ‘전운회(全運會,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운동회의의 약칭)’ 가 이어지는 시기를 만나 나의 인터뷰 환경이 더욱 어렵게 변하기도 했다. 이 같은 민감한 날이면 주변의 관련된 사람들이 잡혀갔다. 둥팡하오(東方昊)를 인터뷰한 지 10여 일이 지나 그는 잡혀갔다. 잡혀가던 도중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지만 다시 붙잡혀 지금도 선양(沈陽)에 구금되어 있다. 늘 조심했던 위샤오항(餘曉航) 마저도 인터뷰를 하고 2개월 후에 체포됐다. 현지 파출소는 ‘안정 유지’를 구실로 그가 ‘상팡’(上訪-하급기관 민원처리에 불복해 상급기관에 직접 민원을 내는 행위) 할까 두려워 또 다시 그를 구금했다.

올해 3월 양회 기간 내가 인터뷰했던 한 파룬궁 수련자가 베이징으로 가던 도중 납치됐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전화가 아닌 암호화된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 대상자와 연락을 취했다. 노트북을 지니고 다니면서 안전한 곳을 찾으면 인터뷰 내용이 담긴 녹음 파일을 암호화된 하드 디스크에 옮겨 담곤 했다.

하지만 어려움은 정부 측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올 때도 있었다.

한 파룬궁 수련자의 딸은 그녀의 아버지와 나의 만남을 저지하며, “우리 아버지가 겨우 살아서 마싼자에서 나왔는데, 절대로 다시 들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녀는 고맙게도 아버지의 자술 내용을 문자로 전해 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어요. 그가 이야기하는 마싼자를 차마 믿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쫓겨난 적도 있었다. 헝겊 커튼을 칸막이로 한 민가에서 나는 그저 일반 수감자에게서 마싼자의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해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가 마싼자의 “다파(大發:곰팡이 빵)”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커튼 뒤에서 “입 다물어요!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돼요!”라고 소리 질렀다.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두려워했다. 자신의 남편이 마싼자에 대해 말했다가 곤란을 겪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몇 분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한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나는 여러 번 장량(張良)의 아내와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이웃인 관슈(關叔)와는 만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개나 닭에 대한 이야기만 꺼냈다. 술을 마신 후에도 ‘6.4 톈안먼 사태’에 대해서만 언급했지 ‘파룬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당초 혹형과 노예노동 박해에 관해 글을 써 내려가고 싶었던 나의 생각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큰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느낌이다. 어떤 일들은 내가 접촉할 수는 있지만 그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내가 더욱 잔혹하다고 느낀 것은 혹형 자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소리 없이 양다즈(楊大智)를 망가뜨렸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아주 많은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

세계의 다른 한쪽에서는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 보내는 구조요청을 들을 수 있었지만, 수용소 입구에 있는 운전기사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담장 안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오히려 단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마싼자교양소의 간부 경찰도 노동교양제도가 위법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록 얼마나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확실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느끼게 했다.

줄리 키스(Julie Keith) 씨가 공개한, 쑨이 씨가 쓴 SOS 편지

5.

1년 남짓 동안 인터뷰하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찾지 못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러했다. 50여 년간 실시해온 노동교양제도의 폐지가 선포되고 교양소 또한 간판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런 보통 사람들의 공포, 변이된 반응과 정신적 상처는 노동교양제도를 해체했다고 해서 사라질 수는 결코 없다.

다만 노동교양제도, 노예노동 박해, 혹형, 파룬궁 단체의 처지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이 놀랍게도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노동교양소의 안과 밖의 차이는 단지 정도가 다를 뿐이다. 주인공은 미국 줄리 키스(Julie Keith) 여사의 응답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나 자신은 잠시 지옥 최하층의 박해 환경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공산 제도의 그늘에서 생활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통치하의 중국은 마치 하나의 큰 노동교양소와 같고, 노동교양소는 마치 이 큰 노동교양소 안의 독방과 같다. 중국의 법률은 유명무실하다. 국민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의 보장을 박탈당했고, 그 정도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비록 노동교양소에 비해 외부 환경이 다소 느슨해 보이지만, 독재 정치의 감시 카메라는 시시각각 유령처럼 당신이 생활하는 주변 환경, 수화기 너머, 인터넷 감시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만약 우리 각자가 자신이 놓여 있는 처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타당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유형의 노동교양과 무형의 질곡은 여전히 우리 모든 중국인을 결박할 것이다. 결코 노동교양 제도의 해체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이 체제가 우리에게 조성한 공포와 부득이 함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박해와 고난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더욱 슬픈 것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5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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