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김치를 아시나요? 빛 고을에 터 잡은 고려인 마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동포에게 보금자리 되어 주기도
최창근
2022년 05월 20일 오후 3:35 업데이트: 2022년 05월 20일 오후 4:56

‘마르코프차’는 당근으로 만든 김치다.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이 구 소련 시기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면서 한국인의 소울 푸드(soul food)라 할 수 있는 김치의 재료인 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당근으로 김치를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당근김치는 전 세계 고려인들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재외동포다. 러시아 연해주에 이주해 살던 조선인들은 1937년 당시 스탈린의 이주 명령에 따라 17만여 명이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연해주로부터 기차로 6000㎞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뿌리를 뽑힌 디아스포라(이산인·離散人)로 힘겹게 살아왔다. 그중 일부는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으로 귀환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당근김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빛고을’ 광주다. 이곳에는 고려인 마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로 불리는 고려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은 2000년 즈음이다. 광주광역시 외곽 광산구 월곡동과 산정동 일대에 고려인들이 하나둘 터 잡기 시작해 ‘고려인 마을’을 일궜다.

월곡동·산정동 일대가 고려인 마을이 된 이유는 주택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인근 한남공단, 평동공단, 소촌공단 등 산업단지의 배후 주거지이다. 자연 이곳에 터 잡고 사는 고려인들도 대부분 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다. 고려인 마을 관계자는 “이곳이 주택 가격이 저렴하여 진입 장벽이 낮고 인근 공단에 일자리가 풍부한 것이 장점이다.”라고 설명한다.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이 2015년 펴낸 ‘고려인 마을 이야기’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고려인은 주로 경제적이 이유로 이주한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다. 큰 공단은 아니지만 광주에는 하남공단, 평동공단 등이 있다. 물가 수준도 고려한다. 사실상 광주에 거주하는 고려인 대부분은 주택가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의 개인 주택 방 1~2개를 월세로 살고 있는데, 이 경우 주거비용은 월 20~30만 원 수준이다. 광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공장에서 받는 임금 수준과 임금 대비 한국의 물가를 고려할 경우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사는 것보다 광주에서 사는 생활비가 더 적게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고려인들이 모여 살면서 이 마을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고려인 네트워크가 작동하면서 광주를 정착지로 여기고 입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내에서도 타지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 경기도 안산시에 형성된 고려인마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고려인 거주지이다. 고려인 외에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태국, 네팔 등 동·서남아시아에서 온 이들도 급격히 늘어 7000명 선을 헤아리고 있다.

광주 고려인 마을 조성의 두 주역은 이천영 목사와 신조야 광주고려인마을 대표다. 두 사람은 광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대부(代父)·대모(代母)인 셈이다.

광주 고려인 마을 대부로 통하는 이천영 목사(오른쪽)와 대모로 통하는 신조야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대표(왼쪽)

2002년 이천영 목사와 개신교인 활동가들이 운영하던 (사)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를 한 고려인 ‘불법체류자’ 여성이 찾았다. 당시 불법체류 신분 때문에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신조야 대표였다. 고려인 3세인 신조야 대표는 2001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거주하던 딸을 만나러 한국에 들어왔다가 3개월 관광비자 만료로 불법 체류자로 분류됐다. 그의 조부모는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지만, 당시 한국 법무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체류 중인 고려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던 이천영 목사는 신조야 대표를 설득하여 고려인 동포 돕기에 발 벗고 나섰다. 자원봉사자를 모으는 한편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도 시작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의료보험 가입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려인들을 하나둘씩 모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입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고려인들 수가 점차 늘어나자 이천영 목사는 신조야 대표와 함께 고려인지원센터를 설립했다. 시작은 광산구 월곡동 주택가에 상가와 작은 방이 딸린 1층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밥을 해 먹으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고려인들은 이름 그대로 ‘식구(食口)’가 된 것이다.

센터 운영은 하루하루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천영 목사가 사재를 털고 고려인들이 매월 소액 기부를 해서 근근이 운영해 나가는 형편이었다. 이천영 목사는 지방자치단체, 농협 등에 도움을 청하여 쌀과 부식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 사이 센터 식구는 나날이 늘어나 명실상부한 광주 고려인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했다. 신조야 대표도 고려인동포 지원사업에 헌신했다. 출입국, 산재, 의료, 체불, 통역, 송금 업무 지원 등 하루 평균 20여 건 연간 5,000건이 넘는 상담을 처리했다. 또한 한국산업인력공단, 광산경찰서, 출입국관리소 등 15개 관공서와 192개 기업체의 통역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세계인의 날에 이천영 목사가 2018년 세계인의 날에는 신조야 대표가 대통령상을 각각 수상하기도 했다.

이천영 목사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위한 대안학교 ‘새날학교’를 개교하기도 했다. 2004년 한 외국인 노동자가 두고 가버린 7살짜리 아이를 돌본 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다문화 가정 어린이 수용과 한국어·한국문화 교육 시설이 필요하다 판단한 이천영 목사는 학생 2명과 함께 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개교 후 고려인 동포 자녀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러시아 출신 학생, 중국 동포 자녀들이 모여들었다. 이 속에서 지역 언론인, 교육계 종사자, 정치인들이 뜻을 함께하면서 2011년 6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공식 학력 인정학교 인가를 받았고 2013년부터 대학 입학생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사단법인 고려인마을은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고려인마을어린이집, 월곡고려인문화관, 고려미디어센터 등을 두고 있고 부속기관으로 법률지원단, 진료소, 노인복지센터, 학교, 출판사, 고려방송(GBS) 등을 운영하고 있다.

고려인 마을에 도착한 우크라이나전쟁 난민 동포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하고 있다. | 고려인마을 제공.

올해 들어 광주 고려인마을은 전쟁 참화로 고통받는 동포들에게도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3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들도 전쟁 난민 신세가 됐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4세 전올가 씨가 이천영 목사에게 500만 원을 선뜻 건넸다. 이후 이천영 목사와 신조야 대표는 한국행을 희망하는 우크라이나 고려인 난민 동포 구호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는 돈이 부족해 피란하지 못하는 현지 동포들의 소식을 듣고 주변에 알렸다.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항공권 15장을 지원했고 광주YMCA, 고려인마을법률지원단, 일반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1300만 원을 모아 광주고려인마을에 기탁했다. 이천영 목사는 모금액으로 온라인 항공권을 구입해 피란민들에게 메신저로 보냈다. 이후 이어진 모금 운동을 통하여 5월까지 3억 5000만 원 이상이 모금됐고 320명이 넘는 전쟁 난민 동포에게 항공권을 지원했다.

이천영 목사는 “삶의 터전을 잃고 낯선 고국의 땅으로 향하는 고려인 동포에게 정성을 보여준 여러 기관과 단체를 비롯해 광주 시민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면서 “고려인들도 그 사랑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