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⑤

2019년 6월 3일 업데이트: 2019년 7월 9일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 항의, 부패 반대, 민주화 요구 단식으로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운동'이 베이징에서 시작돼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운동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은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이 자행한 '6.4 대학살'을 역사의 증언대에 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당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류젠(劉建, 19세, 학생)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진상을 밝혀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당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30년간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작성하고,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베이징 당국, 단식 대학생과의 대화 ‘결렬’

(4편에서 계속)

5월 13일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대 등 단식 청원에 참가한 13개 대학생 300여 명은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햔 뒤 오후 5시 40분부터 단식 돌입했다. 이후 민중들의 지지와 성원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정부에 대화단 대표와의 신속한 대화를 요구하면서 ‘동란’으로 매도한 학생운동의 명분을 바로잡고 애국 민주화 학생운동을 긍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이징 당국은 5월 14일 오전 2시 반, 리톄잉, 리시밍, 천시퉁 등이 톈안먼 광장으로 출동해 단식 학생들에게 학교 복귀를 권유했다. 일부 학생들은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오늘이 올 줄 알면서 애초에 왜 그랬어!"라고 외쳤다.

단식 학생 수는 천여 명으로 단번에 늘어났다. 톈안먼 광장은 낮에는 2만 명, 밤에는 10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함께 참여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단식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고, 특히 베이징 지식층의 반향이 컸다.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단식 청원 학생들을 성원하고 나섰다. 베이징대, 베이징사범대 등 일부 교수는 '모든 교수에게 수업 중단을 제의한다'는 대자보를 붙여 "오늘 밤 11시 이전에 정부가 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15일 수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먼저 톈안먼 광장에 도착한 베이징 소재 대학 젊은 교수들은 대학생들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정법대 교수들은 광장을 한 바퀴 행진하며 '우리는 학생들과 함께한다' '우리는 학생들을 자랑스러워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베이징 민중들도 단식 학생들을 위해 끓인 물, 사이다, 설탕, 의약품을 지원하고 나섰다.

사진=류젠 제공

단식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기자들은 물론 일부 외국 기자들도 톈안먼 광장을 찾아 단식 활동을 지켜봤다.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5월 13일 오후 10시 경, 단식하던 학생 10여 명이 쓰러져 응급처치센터로 실려 갔다.

이에 당황한 자오쯔양, 양상쿤, 리펑, 차오스, 후치리 등은 다시 긴급회의를 소집해 베이징 30여 개 대학에서 추대한 대화단 대표와 만나기로 결정했다.

5월 14일 오후, 리톄잉, 옌밍푸, 웨이젠싱이 학생 대화단 대표 및 단식 학생 대표 수십 명과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요구와 TV 생중계를 해달라는 학생들의 두 가지 요구 모두 충족되지 않아 대화는 결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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