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① 대만이 핵 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이유는?

[기획연재] 대만의 핵 무장은 가능할까? 좌절된 대만의 핵 개발 진상 ①
최창근
2022년 08월 11일 오후 1:11 업데이트: 2022년 08월 12일 오후 1:49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간 긴장이 고조됐다. 핵무기 보유국이자 미국에 대적할 만큼 국방력을 증대해 오고 있는 중국에 비하여 대만의 국방력은 절대 열세이다. 이 속에서 대만 방위를 위해서는 핵 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대만 정부는 국제규범에 따라 핵무기 관련 생산·개발·획득을 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을 확인하고 있지만 핵무기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실제 대만은 독자 핵 개발을 시도했었고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나 내부 간첩으로 인하여 좌절된 역사가 있다. 비밀리에 추진됐던 대만 핵 개발 역사는 어떠했을까. ‘에포크타임스는 관련자 증언,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추적했다.

국공내전과 대만 천도

1949년 12월,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천도했다. 국부천대(國府遷臺·국민당 정부 대만 파천)이다.

대만 천도 이후, 중국 공산당 정부의 대만 무력 통일 시도는 계속됐다. 6·25전쟁 정전 5년 뒤 발생한 1958년 8·23 포격전이 대표적이다.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廈門)과 1.8km 남짓 떨어진 진먼(金門)섬에는 44일 동안 48만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진먼섬 포격은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때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장제스(좌) 대만 총통과 마오쩌둥(우) 중국 공산당 주석.

중국의 무력 도발 속에서 미국은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대만 방위에 힘을 쏟았다. 1954년 체결한 ‘중(대만)·미상호방위조약’은 1955년부터 발효했다. 대만에 미군이 주둔했고 각종 무기 지원도 이어졌다.

1958년 8·23 포격전 발발 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중국 본토 핵 무기 투하 방안도 고려했다. 대만은 남한과 더불어 아시아 대(對)공산주의 전쟁의 최일선이었다.

1960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만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처음 10여 기가 배치됐으나 이후 민주당 케네디-존슨 행정부에서 수가 늘어나 200여 기가 됐다. 그러다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상하이코뮈니케’를 발표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닉슨독트린’을 선언했고, 1974년 대만에 배치했던 핵무기를 완전 철수했다.

중국의 핵 개발

이 속에서 중국은 미국·영국·소련·프랑스에 이어 세계 5번째 핵 보유국이 됐다.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1949년 소련의 핵 실험 성공 후부터 중국은 핵 무기 개발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과의 관계도 악화됐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대국으로부터 안보 위협을 느낀 중국은 독자 핵 개발을 통하여 안보를 보장받으려 했다.

중국의 핵 개발 계획은 ‘양탄일성(兩彈一星·두 개의 폭탄과 하나의 위성)계획’으로 구체화됐다. 원자탄·수소탄 등 두 종류의 폭탄과 둥방훙(東方紅)이라는 인공위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인공위성 개발은 핵 투발 수단인 대륙간 탄도탄(ICBM) 개발과 직결됐다.

중국 정부는 재미(在美) 과학자들을 대거 귀국시켜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탄 개발에 주력했다. 1962년부터 본격화된 핵무기 개발은 1964년 10월,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롭누르 지역에서 최초의 핵실험인 596 프로젝트(원자폭탄)가 성공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3년 뒤 1967년 6월 17일, 미국, 소련, 영국에 이어 TNT 3.3메가톤 위력의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로써 중국은 원자탄·수소탄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핵 보유국이 됐다.

중국은 1964년 첫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영국-소련-프랑스에 이은 세계 5대 핵 보유국이 되었다.

신주계획과 타오위안계획

이 무렵 대만도 핵 개발에 나섰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을 역설했다. 대만 국민당 정부도 1958년부터 이 기조하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장기 목표는 원자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64년 중국의 원자탄 실험 성공으로 ‘전력 비대칭’이 현실화됐다. 장제스 총통은 ‘반공대륙(反攻大陸·중국 본토 무력 수복)’을 공언해 왔지만 현실은 대만 안보가 위협받는 처지였다. 장제스는 중국의 핵무기 한 발이면 대만이 사라져버릴 수 있고 미국이 보복을 한다고 해도 이는 너무 늦은 일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1966년 장제스는 행정원 국방부 산하 국가중산과학연구원(國家中山科學研究院)에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대만의 양대 공과대학인 국립칭화대학·국립교통대학을 비롯하여 과학기술단지가 자리한 대만 서부 신주(新竹)시의 이름을 따 ‘신주계획(新竹計畫)’이 입안됐다. 국립칭화대학 원자력공학과가 중심이 된 프로젝트는 5~7년 내 중수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대만 국가중산과학연구원. 한국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유사한 대만 방위산업 연구의 메카로 국방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이다.

신주계획의 모델은 이스라엘 ‘디모나계획’이었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평가받는 이스라엘은 디모나계획에 따라 프랑스 핵기술을 바탕으로 핵무기 보유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지하(地下)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폭탄을 만들었다. 1966년 가을에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핵폭탄 모형으로 실험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이때 이미 이스라엘은 수소(水素)폭탄과 중성자탄(中性子彈)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본다. 1967년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 무렵에는 이스라엘이 두 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만은 ‘이스라엘 핵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버그만(David Bergmann)을 영입했다. 장제스는 대만 중주 르웨탄(日月潭) 별장에서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3일간 면담하며 “이스라엘과 대만은 동병상련의 국제고아.”라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현실 문제가 따랐다. 그 시절 대만 과학기술 수준으로 단기간에 핵 개발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초과학·산업 육성이 우선이었다. 기초 체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전자, 정밀기계, 반도체 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키로 했다.

원자로 기술 조달도 난항을 격었다. 대만은 당시 원자력 개발을 ‘평화적 목적’이라고 강조했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핵 확산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기술 이전이 거부됐다. 대만 정부는 독일 등 다른 국가로부터 원자로와 핵심 기술을 수입하려 시도했다.

1966년 중반 대만은 당시 서독(西獨) 지멘스(Simens)사로부터 50mw 중수로 구입을 추진했다. 다만 미국의 압력으로 최종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대안으로 1969년 캐나다로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40mw 중수로 원자로를 건설했다. ‘대만연구용원자로’라고 이름 붙였다.

1971년 10월 25일,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제2758호 결의안에 의하여 유엔에서 퇴출됐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다. 대만의 외교적 고립은 극심해졌고 장제스는 더욱 자강(自强)에 집중했다. 핵무기를 개발하여 대중국 억제력을 가지는 것만이 대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했다.

장제스 총통은 종전 신주계획을 대신하는 비밀 핵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타이베이(臺北) 외곽 타오위안(桃園)시 스먼(石門)에서 1965년 ‘스먼과학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국방부 산하 과학기술연구기관을 개원했다. 연구원은 1969년 국가중산과학연구원 명칭으로 정식 개원했다. 국가중산과학연구원이 자리한 타오위안에서 유래한 ‘타오위안계획’의 목표는 핵무기 원료로 사용될 핵물질(우라늄·플루토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 등으로부터 기술 도입을 추진했다. 원자력공학 관련 인재 양성도 관건이었다. 해외 우수 인재들에게 귀국을 장려했고 후진들을 미국·영국 등에 유학시켰다. 귀국한 인재는 장제스·장징궈 부자가 친히 격려했다.

훗날 대만 핵 개발 계획을 수포로 만드는 장셴이(張憲義)도 계획의 일환으로 유학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대만 중정이공학원(中正理工學院·현 국방대학 이공학원)과 국립칭화대학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한 현역 육군 장교 장셴이는 1969년 미국 테네시대학 원자력공학에 입학하여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우려

원자력 기술 확보에도 진척이 있었다. 캐나다로부터 도입한 원자로에서 국가중산과학연구원은 자체 기술로 ‘플루토늄’으로 불리는 방사성동위원소-239 추출에 성공했다. 이후 1973~1974년 당시 핵개발을 추진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마침내 우라늄 100t을 구입했다.

1953년 12월, 유엔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주제로 연설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핵 무기화’의 관건인 핵 소형화 기술에도 진척이 있었다. 전폭기에 장착 가능한 핵탄두용 소형 핵 개발도 속도를 냈다. 단거리미사일(SRBM)을 자체 개발하는 ‘천마계획(天馬計畫)’도 수립했다. 부가적으로 F-16 전투기를 모델로 대만이 자체 개발 중이던 IDF(국산 방위전투기) 징궈호(經國號·AIDC F-CK-1)에 탑재 가능한 수준의 전술핵무기 개발도 추진했다.

타오위안계획은 원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미국도 대만의 핵개발을 우려했다. 1976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대만이 전술 비행기 외부에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핵무기를 2년이면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대만의 핵 확산 방지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