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특집] 쑨원·장제스 등 중화민국 국적자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받은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한 중화민국
최창근
2022년 08월 15일 오전 9:19 업데이트: 2022년 08월 15일 오후 12:45

1945년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3년 뒤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과 ‘새로운 공화국’ 건국을 위해 애쓴 유공자들을 기려 각종 훈·포장을 수여했다. 그중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대한민국의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독립유공자 중에서 총 32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장이 수여됐다. 32인에는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통령, 안중근 의사 외에도 ‘중화민국(대만)’ 국적자도 5인이 포함된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을 비롯한 중화민국 국적자들이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중화민국 정부는 대한민국과 어떤 인연이 있을까.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 명의로 발표된 ‘한국광복군 창군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략)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중략)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자(玆)에 선언한다.” 글에는 “장제스 총통이 한국 민족에 대하여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여 감사의 찬사를 보낸다.”는 내용도 있다. 중국 국민정부 주석을 지낸 장제스(蔣介石·1887~1975)가 광복군 창설에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이역(異域)에서도 이어졌다. 그중 1932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벌어진 윤봉길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훙커우(虹口) 의거 후 장제스 총통은 “중국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에 지나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지속했다.

중산 쑨원.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장제스는 김구(金九)가 이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정통성도 인정했다. 1943년 11월 개최된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독립 확약을 이끌어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도 중화민국 정부는 역할을 다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TCOK) 7개국 중 하나로 참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신생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49년 6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책 역할을 했던 샤오위린(邵毓麟)이 초대(初代) 주한국중화민국대사로 부임했다. 앞서 1948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 광저우(廣州)에 정환범을 초대 특사(特使)로 임명하여 주(駐)중화민국대한민국특사관을 개관했다. 이는 대한민국 제1호 재외공관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국가보훈처는 장제스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해 공동으로 항일전을 수행했고 △한국광복군 창설을 절대적으로 지원했으며 △중국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해 군사를 양성토록 하고 △여러 차례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고 △1943년 10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안’을 통과시키고자 노력했다.

중화민국 국부(國父)로 중산(中山) 쑨원(孫文)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다. 쑨원은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1921년 쑨원이 중국 광둥정부 대총통을 맡고 있을 때, 중국 정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임정을 승인한 점 등이 높게 평가됐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 무대에서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중국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 겸 외무·법부총장이던 신규식을 특사로 파견했다. 쑨원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임시정부와 광둥정부 간 상호인정 요구에 즉각 동의했다. 쑨원은 또 한국 학생을 중국군관학교 학생으로 받아들여 우리나라가 항일투쟁을 위한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줬다.

장제스-쑹메이링 부부의 결혼 사진.

또 다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는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다. 쑹메이링은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한국 광복군 창설 당시 쑹메이링 여사가 중국 돈 10만 위안(元)을 특별성금으로 보내왔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쑹메이링은 이외에도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한인애국단에 10만 위안(元), 1942년 광복군 출정 군인 가족에게 10만 위안(元)을 보내는 등 여러 차례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쑹메이링은 ‘통역’ 자격으로 동행했다.

동생 천리푸(陳立夫)와 더불어 ‘CC파’ 혹은 국민당의 형제 대부(代父)로 불리던 천궈푸(陳果夫)도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국민당 조직 부장 등을 맡으면서 당권을 장악했던 천궈푸는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한 항일결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한 친한파 인사였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 신변 보호, 및 자금 지원 등에 앞장섰다. 천궈푸는 1942년 중국에서 열린 중한문화협회 창립대회에서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등과 함께 명예이사로 추대되기도 했다.

중화민국 국적을 가진 독립유공자 가운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마지막 한 명은 천치메이(陳其美)다. 중국혁명동맹회의에서 활동한 혁명가로서 신규식과 교류한 천치메이에게는 신아동제사에 참여하는 등 한국 독립 및 한중 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1968년 이 훈장이 추서됐다.

이렇듯 중화민국 국적자로서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은 이들은 국권 상실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주권을 되찾는 데 물심양면 도움을 준 은인들이다.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에 도움을 준 ‘외국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