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냐 건국이냐…대한민국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

남창희
2008년 09월 3일 오후 10:23 업데이트: 2024년 02월 9일 오후 11:02

지난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 63주년”과 “건국 60주년” 명칭을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논란의 중심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있었다. 독재자와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진 대통령이란 두 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그를 가장 잘 아는 이인수 박사에게 그와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를 다진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현재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이화장에 머무르고 있다. 이하 이인수 박사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꿈은 젊어서부터 오직 우리나라의 개화독립이었다. 우리나라는 1876에 일본과 1882년엔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이전까지 쇄국정책 때문에 우리나라는 국외 정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당시 청년이었던 이승만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문을 공부하고 있었다. 갑오경장 즈음엔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영민했던 그는 영어학과에 들어가 4개월 만에 초급반 영어를 졸업했다.

▲ 서울 이화장 안뜰에 세워진 이승만 박사 동상. 2008.8.19 | 남창희/에포크타임스

당시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 만드는 것을 보고 그는 협성회보를 만들었다. 매일신문, 제국신보 등 언론활동에 참여하면서 우리나라 정치를 개혁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독립 협회 초대의원으로서 만민공동회를 열고 대중을 동원해 정부에 개혁요구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이승만을 반정부요인으로 판단했고, 1899년부터 5년 7개월 동안 그는 한성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부지런했던 이승만은 감옥에서도 영어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자신을 다졌다. 고문을 받으며 사형직전까지 가는 위험한 상황에 몰리면서 배재학당 시절 접촉했던 기독교를 떠올렸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승만은 지식인으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그는 독립정신을 쓰면서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독립을 해야 하는지를 모색했다.

1904년, 이승만은 출옥했다. 민영환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 그가 독립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는 고종 황제의 뜻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 조선의 독립을 보전해달라고 요구했다. 1882년에 대한제국이 미국과 맺은 한미 수호조약에는 대한제국이 제3국에 의해 불합리한 일을 당할 경우 서로 돕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국력이 강성할 때였고, 대한제국은 왕비인 명성황후의 시해마저 막지 못할 정도로 약한 나라였다. 미국은 대한제국을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에 넘겼다. 그 대가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의 태도에서 자신의 외교적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공부에 눈을 돌렸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하바드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역사상 첫 정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의 졸업 논문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출판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5년 반 만에 끝마쳤다. 청년 이승만은 뛰어난 재목이었다.

1910년 10월,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8월에 대한제국은 이미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다. 당시 그를 맞이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켜 줄 사람은 이승만 박사밖에 없다며 환영했다. 1911년 전국 전도 여행을 떠난 이승만 박사는 일제에 자유를 빼앗긴 민족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지도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역량을 두려워해 기독교 지도자 105인을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씌워 잡아들였고 주동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승만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를 잡아들이면 세계적인 비난을 당할 것이라 경고하며 1912년에 미국 미네아 폴리스에서 열리는 세계 감리교 평신도 한국대표로 그를 파견했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을 빠져나간 이승만 박사는 이로부터 33년 동안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이승만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합법적인 외교를 중심으로 미국에 있는 교포를 교육하는 일에도 매진했다. 그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국이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홍보했다. 이는 세계의 양심에 호소하는 일로 가장 현대적인 지식과 인성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국제 정세에서 힘의 역학관계를 이용해 독립의 기회를 찾으려 했다. 교포에게는 우리나라 독립의 필요성에 대해 꾸준히 교육하고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이승만 박사는 장기적인 독립전략으로 각종 단체를 이용했다. 한인 기독교회를 세우고, 한인교육기관과 한인 동지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펴 나갔다.

▲ 이인수 박사의 사무실 가장 높은 곳에 故 이승만 박사 사진이 걸려 있다. 2008.8.19 | 남창희/에포크타임스

하지만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 가는 데는 큰 걸림돌이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 조약을 맺은 후 일본은 “한국은 지극히 미개한 나라이므로 일본이 통치를 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정치에 매우 만족하고 행복해한다”고 선전했다.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통치 아래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무 소요가 없자 외부에서는 일본의 말이 맞다고 인식했다. 이것은 이승만 박사의 해외 독립운동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정치에 만족하는 한국은 독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1919년,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파리 강화조약에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언급했다. 각 나라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투표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1차 대전 직후 유럽 여러 나라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도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는 이 기회를 빌어 한국이 일본에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겨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기독교 지도자와 천도교 지도자들은 조문 모임을 가장한 3·1 독립운동을 기획했다.

이승만 박사는 폭력을 싫어했다. 국민들이 다칠까 봐 폭력 대신 평화적인 시위를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3·1 운동 당시 반수 이상이 기독교계였고 나머지 반수가 33인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 선교사가 있던 병원 원장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에 평화적인 시위를 해달라라고 요구했다.

3·1 운동 후, 잔인한 고문과 박해가 뒤따랐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이 운동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일본의 압제 아래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을 원한다는 걸 세계에 알렸기 때문이다. 러시아, 상해, 서울에서 세 개의 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이인수 박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 뒷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다.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를 지금에 와서 누가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인수 박사의 이야기에서 폭력이 아닌 인류의 마음속 정의에 호소했고, 바깥에서 일하는 자신들만 아니라 내부의 국민들을 생각한 선구자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또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후손들을 교육하며 몇 세를 기약했던 이승만 박사의 혜안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