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사건접수 제도 변경 후 장쩌민 고소 급물살… 한 달 새 6만여 건 접수

2015년 7월 17일
업데이트: 2020년 4월 24일

“메스가 가슴을 한 번 긋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심장의 혈관을 자르자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2002년 4월 9일 오후 5시, 선양 군구 총 병원 15층의 한 수술실에서 두 군의관(한 사람은 선양 군구 총 병원 군의관이고, 한 사람은 군의 대학을 졸업한 젊은 군의관)은 마취 없이 살아 있는 30대 여성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했다. 이 파룬궁 수련자는 이미 일주일간의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 2009년, 랴오닝성 진저우시에서 현장 경비를 담당했던 목격자가 파룬궁 박해 추적 조사 국제 조직에 제보한 내용.

헤이룽장성 완자(萬家) 노동교양소에 수감된 임산부가 발끝을 의자에 디딘 채 대들보에 매달려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임신 6~7개월이었다. 경찰이 의자를 차버리자 몸은 순식간에 허공에 떠버렸다. 굵은 밧줄이 3m 높이의 대들보의 도르래를 지나 경찰의 손에 쥐여 있었다. 줄을 당기면 그녀의 몸은 번쩍 들렸고 줄을 놓으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은 그녀가 유산할 때까지 계속됐다. 경찰은 그녀의 남편을 데려와 이 광경을 지켜보게 했다. 
– 2004년 11월 5일 완자 노동교양소에서 100여 일 혹형을 당한 왕위즈(王玉芝)에 대한 밍후이왕 취재 보도.

2000년 10월,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는 여성 파룬궁 수련자 18명의 옷을 모두 벗긴 채 남자 감방에 집어넣어 죄수가 윤간하게 했다. 한 목격자는 여러 죄수가 한 수련자를 덮치는 것을 목격했다. 며칠 후 그중 한 명이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됐다. 이 사건으로 5명이 사망하고 7명이 정신 질환에 걸렸으며, 나머지는 불구가 됐다. 그 후 이 광적인 악행은 기타 교양소 및 감옥으로 확산됐다. 마싼자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경찰은 수감된 파룬궁 수련자에게 “강간을 당해도 고소하지 않아야 ‘참음’이다.”라고 말했다. 
– 2001년 2월 UN 인권위원회 부녀 혹형 특별 조사 보고서.

1999년 7월 중국 공산당 주석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시작했다. 많은 파룬궁 수련자가 혹형과 고문, 생체(生體) 장기 적출, 약물 강제 주입 등을 포함한 여러 방식의 탄압으로 사망했다. 이상의 탄압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쟁해 온 파룬궁 수련자들은 올해 5월부터 전국적으로 장쩌민을 고소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민중이 고위관료를 대규모로 고소하는 현상은 유례없는 일이다.

5월 1일, 중국 법원은 공식적으로 “소송이 있으면 반드시 심리하고, 안건이 있으면 반드시 입건한다”고 밝혔다. 7월 15일 현재 6만 명 이상의 파룬궁 수련자와 친족이 각종 경로를 통해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최고 검찰원, 최고 법원에 형사 고소장을 제출해, 반(反)인류죄, 혹형죄, 집단학살죄 등의 죄명으로 장쩌민을 고소하고 파룬궁 탄압을 주도한 장쩌민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가 궁금할 것이다. 장쩌민은 왜 이번 탄압의 원흉으로 지목돼 법정에 서게 될 날이 머지않게 되었을까? 장쩌민은 왜 파룬궁을 탄압하려 했을까?

장쩌민의 수치스러운 성공

1942년,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걱정한 많은 청년이 항일 구국 운동에 뛰어들어 전선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17세 장쩌민은 오히려 왕징웨이(汪精衛)의 친일 정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장쩌민 그 사람(江澤民其人)’이란 책과 여러 조사에 따르면 장쩌민의 친부 장스쥔[江世俊·일명 장관첸(江冠千)이라고도 한다]은 일본의 난징 점령 기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선전기구 간부였다.

소련 붉은 군대는 1945년 창춘에서 일본 육군 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거느린 특수요원에 대한 서류를 조사했다. 그는 1913년부터 중국에서 침략, 음모, 획책 활동을 벌인 바 있다. 그 자료 중에는 중국 침략 특수 요원을 양성하는 위 중앙대학 ‘청년 간부 양성반’에서 장쩌민이 교육을 받았다는 언급과 사진과 관련 서류가 있었다. 후에 조사를 거쳐 장쩌민이 장관첸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소련 유학 기간에 장쩌민은 KGB 미녀 스파이의 유혹에 넘어갔고, 소련은 그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장쩌민을 KGB 극동국에 가입시켰다.

역사학자이자 중국의 2차 세계대전사 연구원인 뤼자핑(呂加平)은 ‘장쩌민의 ‘두 가지 간사함과 두 가지 거짓(二奸二假), 정치 기만 문제에 대한 조사를 호소한다’는 문장에서 ‘첫 번째 간사함(奸)’은 장쩌민 본인과 친부는 모두 일본의 앞잡이로 매국노(漢奸)라는 점이고, 두 번째 간사함은 장쩌민이 소련 정보기구에 충성을 하고자 중국의 넓은 영토를 넘긴 사실을 말한다.

첫 번째 거짓은 장쩌민 자신이 1949년 전인 1946년에 중공 지하당에 가입했다고 속인 사실로 실제로는 가짜 당원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 거짓은 자신을 애국열사의 아들로 위장한 것이다. 장쩌민은 줄곧 자신을 중공에 가입해 활동하다 훗날 토비의 총격에 사망한 장상칭(江上靑)의 아들이라고 거짓말했다. 장상칭은 실제로는 숙부이며, 친부인 장스쥔의 친일 행적은 장쩌민이 숨기고 싶은 가족사였다.

장쩌민과 장스쥔은 매국노로 더러운 그들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에게 조금의 미안함도 없었다. 오히려 함부로 중국인을 학살함으로써 본성을 드러냈다. 가장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것이며, 파룬궁을 탄압하고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를 은폐한 문제이다.

1991년부터 중국과 러시아 양국은 국경선 답사에 착수했다. 당시 장쩌민은 차르 러시아와 전 소련의 중국에 대한 침략을 모두 승인하고 ‘아이훈 조약’부터 시작된 모든 중·러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에 넘긴 중국 영토는 타이완 면적의 40배에 달한다.

장쩌민은 장상칭의 후광에 힘입어 몇 년 만에 처장급 간부에서 전자공업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벼슬길에는 아첨이 늘 함께했다. 특히 장쩌민은 리센넨(李先念), 천윈(陳雲) 등 당내 원로에게 공을 들였다. 장쩌민은 일찍이 상해 시위원회 서기 신분으로 리센넨에게 생일케이크를 건네주기 위해 눈 속에서 몇 시간 동안 공손히 서 있기도 했다.

1989년은 장쩌민 정치 생애에서 가장 관건적인 1년이었다. 그는 직언한 ‘세계 경제도보’를 탄압하고, 완리(萬里) 전 전인대위원장을 연금했고, 톈안먼 학생운동 탄압을 지지했으며, ‘6·4’ 전야에 덩샤오핑에게 비밀 회신을 보내 ‘과감한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망당망국(亡黨亡國·당과 국가를 망하게 한다) 할 것’이라고 했다.

‘6·4’ 사건은 퇴직을 준비하던 장쩌민을 단번에 시위 서기에서 당·정·군 최고 권력을 손에 쥔 핵심에 오르게 했다. 그 후, 장쩌민은 ‘안정은 일체를 압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신앙인을 함부로 학살했는데 그 중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연좌 탄압은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이래 중국 국민에게 가한 가장 규모가 크고 잔혹한 박해였다. 이 박해는 수억 명에 영향을 미쳤다.

약속 뒤집고, 탄압 강행

1980년대 초반 중국에는 기공 붐이 일기 시작했다. 중공 당국은 내부적으로 기공에 대해 ‘세 가지를 하지 않는정책’ 즉 “간섭하지 않고, 선전하지 않고, 때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1992년부터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중국에서 공개적으로 전수를 시작했다. 파룬궁은 뚜렷한 건강증진 효과와 더불어 진(眞)·선(善)·인(忍)을 원칙으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쳤다. 내적인 승화에서 비롯된 감화력은 민심을 움직였고, 1억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파룬궁을 수련했다.

1998년 당국의 보수적인 추측으로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의 수는 당시 중국 공산당원 7000만 명 보다 많았다. 인원수가 갈수록 많아짐에 따라 중공 고위층은 파룬궁 현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차례 토론했고, 중국 공산당 역시 당시 대량의 특무(스파이)를 파룬궁 수련 단체에 잠입시켜 정황을 조사했다.

1998년 중국 공산당 국가 체육총국, 안전부 등 여러 부서가 파룬궁 내부 조사 서류를 중난하이에 보냈다. 장기적으로 중국 공산당 국가 안전을 책임진 차오스(喬石) 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주도한 조사 보고서도 여기에 포함됐다. 보고서에는 ‘파룬궁은 중국사회에 유익하고, 파룬궁 단체는 정권에 대한 어떤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중공 고위층은 토론을 거친 후, 기공 단체에 대한 ‘세 가지를 하지 않는다’는 정책이 파룬궁에도 유효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중공 내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뤄간이 책임진 정법 계통은 파룬궁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중국 각지에서 파룬궁 수련자가 매를 맞고 단체 연공(기공)이 교란을 받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장쑤, 랴오닝 그리고 산둥 등 일부 지방에는 공안국에서 파룬궁을 연공하는 군중을 쫓아버리고 연공에 참여한 사람을 불법 체포, 심문, 수감하는 일이 발생했다.

1998년 7월 공안 1국은 통지를 하달해 파룬궁에 대해 규정하고 탄압을 위한 죄명도 정했다. 그 후, 톈진 공안국이 40여 명 파룬궁 수련자를 무리하게 체포하고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련자들이 톈진 지방 정부에 상방(민원의 일종)해도 효과가 없었고, 톈진 공안국은 베이징에 가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다.

중앙 정부에 진상을 알리면 고위층이 합리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전국에서 파룬궁 수련자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1999년 4월 25일 베이징 중난하이 인근는 중앙 민원 사무실 앞에 약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모였다. 당시 중국과 해외를 놀라게 한 이른바 ‘4·25 중난하이 1만 명 청원 사건’이다.

당시 중국 국무원 총리였던 주룽지(朱鎔基)는 파룬궁 수련자 5명 대표를 접견한 뒤, 톈진 공안국의 불법 체포 사건을 타당하게 처리하고 아울러 체포됐던 40여 명 파룬궁 수련자를 석방했다. 쌍방은 협의에 도달했는데 파룬궁 수련자 대표는 정부 고급 관료의 보증을 얻었다. 즉 ‘정부는 군중의 건강을 증진하는 기공(연공)을 지지하며 아울러 파룬궁을 반정부 조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6월 14일, 중앙 민원사무실과 국무원 민원실은 ‘파룬궁에 대한 탄압은 지금껏 없었고 금지하지도 않았으므로 파룬궁 수련자는 유언비어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연합통지를 발표했다.

7월 13일, 중국 당국은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안심할 것을 요청하면서, 연공은 미신이 아니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으로 위법이 아니라고 거듭 천명했다. 하지만 7월 20일 새벽이 되자 중공 공안은 전국 각지에서 책임자로 지목된 파룬궁 수련자를 납치하고 감금했다.

7월 22일, 중국 당국은 갑자기 파룬궁을 ‘불법 조직’이라 선포하고 ‘금지한다’고 밝혔다. 일주일 전 부인했던 유언비어가 사실로 바뀌었고 유언비가 기입된 서류가 전국으로 발송됐다. 그날 오후, 전국 각지 라디오 텔레비전은 모두 이 중요 소식을 반복 방송했다.

1999년 4월 25일부터 1999년 7월 20일까지 3개월 동안 장쩌민은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한 일련의 지휘 계통을 만들었다. 6월 10일 ‘중앙 파룬궁 문제 처리 영도소조’(일명 610사무실)를 설립했다. 장쩌민은 직접 편지를 쓰고 연설을 발표해 당의 각급 조직을 총동원했다. 잔혹한 투쟁 방식으로 파룬궁을 탄압했고, 장쩌민 개인 결정을 당내 공동 인식으로 통일하려 했다.

파룬궁 탄압, 시작과 끝 ‘장쩌민’

미국 인권법률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장쩌민의 손에서 나온 세 건의 중공 내부 서류는 전달 범위가 가장 넓은 탄압 지령이다.

●서류1: 1999년 4월 25일 서신

1999년 4월 27일, 중공 중앙 판공청은 ‘장쩌민 동지의 정치국 상위 및 기타 관련 지도자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송했다. 이 통지는 중공 지도자는 장쩌민이 1999년 4월 25일 야간에 쓴 편지를 학습할 것을 요구했다. 또 중공 지도자는 편지 중 언급한 방침을 관철 실행할 것과 또 중공 중앙에 관련 진척 상황을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이 편지에서 장쩌민은 중공 지도자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번(4.25 평화청원사건)은 해외 서방 국가와 관계가 있지 않은가? 막후에 지휘와 획책이 있지 않은가?”

“그래 우리 공산당이 구비한 마르크스 이론, 신봉하는 유물론, 무신론이 ‘파룬궁’이 선양하는 일련의 것을 싸워 이길 수 없단 말인가? 가령 그렇다면 굉장한 웃음거리가 아닌가!”

장쩌민의 편지와 통지가 표명한 바에 따르면, 그는 개인의 관점을 중공 중앙 기타 지도자에게 강요하고자 했다. 그가 사용한 이런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언어는 폭력적인 탄압을 발동하려는 신호를 보낸 것이며, 평화적인 청원 활동에 대해서는 조사할 생각조차 없었음을 의미한다.

●서류2 : 1999년 5월 8일 비망록

두 번째 서류는 1999년 5월 23일 발송한 《‘장쩌민 동지 중앙 정치국, 서기국, 군위의 모든 동지에게 보낸 서신’의 인쇄 발행에 관한 중공 중앙 판공청 통지》로 내용은 장쩌민이 5월 8일 파룬궁 문제에 대한 지령이다.

●서류3 : 1999년 6월 7일 연설

세 번째 서류 역시 중공 중앙 판공청에서 발송한 것이다. 서류는 중공 지도자에게 ‘장쩌민 동지가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파룬궁’ 문제를 바짝 틀어잡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연설’을 학습하고 관철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서류 날짜는 1999년 6월 7일이다. 이 연설에서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는 아주 깊은 정치회 배경과 심지어 복잡한 국제 배경을 갖고 있다. 이는 1989년의 정치 풍파 이래 가장 심각한 한 차례 사건이다. 우리는 반드시 진지하게 대하고 깊이 연구하며 유력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연설에서는 파룬궁 수련자를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항의자와 같다고 했다. 그들은 평화적으로 항의했으므로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이 역시 장쩌민이 중공의 파룬궁 탄압을 추진한 다른 하나의 명령인 것이다.

장쩌민 단독 결정으로‘610 사무실’ 건립

이번 강화에서 장쩌민은 거듭 선포했다.

“(중공)중앙은 이미 리란칭(李嵐淸) 동지가 책임지고 파룬궁 문제를 처리할 지도 소조를 세우는 것에 동의했다. 리란칭이 팀장을, 딩관건(丁關根), 뤄간(羅幹)이 부팀장을 맡고 유관 부서 책임자를 구성원으로 하며, 파룬궁 문제의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 조치를 통일적으로 연구하고 해결한다. 중앙과 국가 기관 각 부서, 각 성, 자치구, 직할시는 밀접히 협력해야 한다.”

여기에 언급된 지도 소조를 후에는 ‘파룬궁 문제 처리 영도소조’라 불렀으며 장쩌민의 6월 7일 연설은 6월 10일 이른바 ‘610 사무실’이 세워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기구는 법과 제도 밖의 기구로서 정식 명칭 대신 ‘610’이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이 연설에는 두 개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는 ‘610 사무실’ 건립은 장쩌민 개인의 결정이다. 통상 중앙이라는 것은 중앙 위원회 혹은 정치국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연설에서 언급한 중앙은 중앙 위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국에서 회의를 열고 안건을 논의한 후에야 중앙위원회는 비로소 회의를 개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앙’이 가리키는 것은 마땅히 정치국 회의여야 한다. 하지만 장쩌민이 연설할 때 정치국은 한창 회의 중에 있었다. 장쩌민의 ‘지도 소조’를 건립하는 것에 관한 연설은 다만 정치국에 이미 형성된 결정을 알리는 것이지 회의 중에 예정 이외의 안건을 제의한 것이 아니다.

가령 회의 전에 정치국에서 이 안건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면, 장쩌민이 정치국에 다시 결정 사항을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정치국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을 독단적으로 결정했음을 알려준다.

장쩌민은 연설에서 “(중공)중앙위원회, 각(중공) 부(部) 위원회, 성, 지치구와 직할시는 반드시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기존 중공 행정체제와 국가체제 이외의 극히 큰 권한을 각급 지도소조에게 준 것이다. 왜냐하면 중공 중앙위원회와 각 국가급 부(部) 위원회는 모두 반드시 지도소조의 지시와 연설에 복종해야 하고 소조는 단지 장쩌민 한 사람만 책임지기 때문이다.

해외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칼럼에서 ‘중앙 X교 문제와 처리 지도소조’ 직속인 상설 사무실 ‘중앙 X교 문제와 처리 지도소조사무실’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은 ‘국무원 X교 문제와 처리 지도소조사무실’이지만, 사실상 이 기구가 성립된 후 주룽지로부터 원자바오, 리커창에 이른 총리 세 명 중 누구도 이 기구의 정·부 전직 책임자의 임명에 서명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일찍이 ‘파룬궁의 억울한 안건을 바로 잡지 않으면 국난은 끝이 없을 것’이란 글을 발표한 바 있는 베이징 변호사 세옌이(謝燕益)는 헌법, 법률, 정보조직법 등 관련 법조문에 의거해 볼 때 ‘610’은 불법 조직이며 존재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 사조직, ‘혈채방’

한편,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의 죄를 추궁당해 장래 숙청당할 것을 지극히 두려워했으며, 탄압에 앞장설 이른바 혈채방의 핵심 멤버를 직접 발탁해 권력의 연속성과 탄압 정책의 지속성을 보장하려 했다. 이 핵심 구성원에는 장쩌민, 쩡칭훙(曾慶紅), 뤄간, 저우융캉(周永康), 보시라이(薄熙來), 류징, 리란칭 등이 있다.

610 사무실 상급기관은 ‘중앙 X교 문제와 처리 지도소조’이다. 전 3임 팀장은 중공 정치국 상위 리란칭과 전후임은 중공 정법위 서기 뤄간, 저우융캉이 직접 장쩌민의 통제를 받았다. 중공 610사무실 역대 주임은 왕마오린(王茂林) 당시 공안 부부장이며, 당위서기(정부장급)로 전 공안 부부장인 류징, 정법위 위원을 역임한 중앙 X교 문제와 처리 지도소조 부팀장인 리둥성 등이다.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대)를 앞두고 중난하이의 격렬한 권력 투쟁 핵심은 장쩌민, 저우융캉이 권력 계승자 보시라이를 중공 최고 권력층에 밀어 넣는 것이었고, 아울러 정변을 통해 보시라이가 시진핑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2년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저우융캉과 보시라이의 정변 계획은 무산됐다.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 탄압에서 저지른 죄악이 너무나 크다. 때문에 어느 집정자도 모두 장쩌민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려 하지 않았고 모두 도피처를 남겼다. 보시라이, 저우융캉, 쉬차이허우(徐才厚), 리둥성 등 파룬궁 탄압 혈채방 주요 구성원이 연달아 부정부패 죄명으로 낙마하면서 장쩌민 세력은 서서히 숙청당하기 시작했다.

불법 조직 ‘610’이 빚어낸 참극

‘610’은 불법 조직이며 그 탄생과 생존마저 법률적 근거가 없다. ‘610’은 직접 각급 당정 기관과 공안, 검찰, 법원, 감옥, 노동교양 부서, 국안 부서 그리고 외교 및 선전기구, 언론매체를 지휘 통제했는데 중앙에서 지방까지 엄밀하고 계통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한 총 지휘부서다.

610 사무실은 파룬궁 탄압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한 치사, 혹형,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생체장기적출, 불법 구금, 노동교양, 벌금 등 무수한 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양리룽(楊麗榮·여·34세)은 허베이성 바오딩 딩저우시 베이먼제 사람으로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가족은 늘 경찰의 협박을 받았다. 2002년 2월 8일 저녁, 경찰이 떠나간 후 계량국 운전기사인 남편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튿날 아침 가족이 없는 틈을 타 아내의 목을 졸랐다. 남편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숨이 붙어 있는 양리룽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했다. 꺼낸 장기는 온기가 남아 있었고 선혈이 줄줄 흘렀다. 양리룽은 이렇게 10세 아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를 두고 정저우 공안국의 한 관리는 “그게 어디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것인가. 원래 산 사람을 해부했던 것이다”고 비판했다. (밍후이왕 2004년 9월 22일 보도)

익명을 요구한 중공 전인대 대표는 당시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소조‘ 부팀장인 정법위 서기 뤄간과 장쩌민이 나눈 대화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그들(파룬궁 수련자)에 대해서는 사나워야 하고 특히 상방을 하고 무슨 진상을 배포한 사람을 체포하면 때려라. 죽도록 때려라. 맞아 죽으면 자살로 친다. 신원 조사 없이 즉시 화장하라. 이 문제에서는 압제할 수만 있다면 일체 수단을 가리지 말고, 어떤 단속(법률을 포함)도 받지 마라. 죽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내가 파룬궁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고’ ‘육체를 소멸하라’ 문건을 발급하지 말고 암호를 사용해 팩스를 하거나 구두로 전달하며, 서명하지 말고, 일률로 ‘중앙 지시 전달’이라고 하면 된다!”

●‘명예를 실추시키다’

‘명예 실추’는 중공이 전면 통제하고 있는 매스컴을 통해 진행됐다. 당시 중국에는 2000여 종의 신문과 1000여 개의 잡지, 텔레비전 방송국 등 선전기구가 있었다. 중앙 CCTV에는 전국 인구의 90%가 시청하는 12개 텔레비전 채널이 있었고 시청자 수는 최소 11억 명에 달했다.

1999년 7월부터 8월까지 30일 사이에 인민일보에서만 347편의 파룬궁 비판 기사와 칼럼이 발표됐다. 평균 매일 10편이 넘는 양이다.

CCTV와 각 성시의 100여 개 텔레비전 방송국은 매일 24시간 반복해 파룬궁을 금지한다는 결정과 파룬궁을 모함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또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선생의 연설을 대량 왜곡 수정하는가 하면 이른바 ‘자살’ ‘타살’ 등 각종 조작 사건을 보도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파룬궁과 창시인를 비난했다.

예를 들면, 리훙쯔 선생이 한 공개 장소에서 발언한 “이른바 지구가 폭발한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不存在)”에서 ‘不’를 삭제해 이것으로 파룬궁이 ‘세계 종말’을 선전한다고 보도했다. 또한, 일반적인 형사범죄를 파룬궁 수련자가 저지른 것처럼 보도해 인민을 기만했다. 베이징의 정신질환 살인범 푸이빈(傅怡彬)과 저장성 거지 독살 사건 등이다.

가장 악렬한 모함 사례는 2001년 1월 23일, 장쩌민파(波) 원로 저우융캉의 부하이자 전 CCTV 부국장이던 리둥성이 직접 감독하고 장쩌민, 쩡칭훙, 뤄간이 연출한 CCTV의 ‘톈안먼 분신자살 조작극’이다. 유엔 국제교육개발(IED)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는 이 영상이 날조됐다고 지적했다. 유엔 IED는 2001년 발표한 성명서에서, 중공 당국이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이른바 분신자살사건을 파룬궁을 탄압하는 근거로 삼고 있지만, 비디오를 분석한 결과 이것이 정부가 조작한 영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단은 명확한 증거 앞에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성명은 유엔에 접수됐다.

이 밖에도 중앙과 지방 각급 정부는 전담 기구를 설립해야 했으며, 파룬궁 비판을 강요당했다. 모든 공장, 기업, 학교, 주민위원회는 주민 단체를 조직해 파룬궁을 비판하는 뉴스와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 관영 신화사, 중신사, 중통사와 해외 관영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배포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6개월 사이에 중국 관영 언론이 중국과 해외에 파급한 파룬궁 비난 뉴스는 약 30만 건에 달했다.

세계 각국의 중국 대사관은 현지 중국인을 포섭해 선전을 시작했고 또 각국 정부에 파룬궁을 모함하는 자료를 배포했다. 전 중공 관료는 “세상에는 그처럼 국가 기구를 사용해 자국민을 탄압하고도 아무런 단속도 받지 않은 정권이 없다”고 비난했다.

●‘경제적으로 무너뜨리다’

여러 해 동안 지속된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중공의 경제적인 탄압은 수련을 포기하게 하는 일종의 수단이다. 그 어떤 법률 조항 근거 없이 많은 수련자에게 수천에서 수만 위안의 벌금이 부과됐다. 이는 지방정부, 직장 조직과 파출소, 공안국에서 마음대로 정한 것으로 벌금을 부과받은 사람도 영수증을 받지 못했고 해당 법적 근거에 관해 듣지도 못했다.

경찰은 불시에 파룬궁 수련자의 집을 수색할 수 있었고, 경찰은 현금과 재물을 약탈해 갔다. 한 농촌 수련자는 양식마저 빼앗겼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약탈해 간 재물에 대한 아무런 압수 문건이나 영수증도 없었고, 수색 임무를 집행한 사람이 착복하거나 상여금으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동시에 많은 파룬궁 수련자는 부당해고로 일자리를 잃고 취업 권리를 박탈당했다. 농민은 땅을 빼앗길 위협을 당해야 했고, 퇴직한 노인은 퇴직금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금액이 줄어들었다. 거주하는 집을 빼앗고 재산을 몰수하고 은행 예금을 동결했다.

이런 정책을 집행할 때 중공은 또 연좌제를 동원했다. 직장 내에 파룬궁 수련자가 있으면 직장 관리자와 직원은 상여금을 받지 못하고 승진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를 통해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수련자를 고립시키려 했다. 수련자의 가족이 직장을 잃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이후 직장의 상관, 파견을 받고 온 동료와 가족은 폭풍우가 몰아치듯 나를 향해 수련을 포기하라고 했고, 나는 극도의 정신적인 압력을 받았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로 직장에서 이유 없이 해고당했다” “당시 고압적인 탄압 환경에서는 취업을 위해 여러 곳을 옮겨도 그들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을 알게 되면 감히 나를 쓰지 못했고 별수 없이 나는 삼륜차를 몰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교양으로 탄압을 당할 때 아이가 태어난 지 4개월이 됐고 직업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상은 지난 6월 25일 밍후이왕에 보도된 산둥 웨이팡 창다그릅 엔지니어 천텐성(陳天聖)의 장쩌민 기소장 내용이다.

●‘육체를 소멸하라’ 

국제사회가 중국 내에서 자행되는 고문과 혹형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장쩌민은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한편으로는 요구를 수용하는 듯 쾌적한 환경의 노동교양소를 만들어 외부에 공개했고, 뒤에서는 혹형의 강도를 오히려 강화했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자에게는 40여 가지 이상의 혹형을 사용했다.

혹형 대상에는 부녀자와 노인이 상당수였고, 그 잔혹함은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각종 혹형에는 구타, 채찍으로 때리기, 전기고문, 냉동, 묶기, 장시간 족쇄·수갑 채우기, 불로 지지기, 데우기, 매달기, 장시간 서 있거나 꿇어 앉히기, 성적 학대, 강간 등이 포함된다.

혹형의 수단은 극히 잔인한데 예를 들면, 여러 개의 고압 전기봉으로 동시에 장시간 전기충격(그중에는 파룬궁 수련자 입안에 전기봉을 넣고, 가슴, 겨드랑이, 유방, 생식기 등에 전기 충격을 가한 사례도 보고됐다)을 가하는 것이다.

그중 악명 높은 것이 정신과 질환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향정신성 의약품을 투여하는 고문이다. 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수련자를 정신 병원에 보내고, 중추신경 계통을 파괴하는 정체불명의 약물 주사한다. 어떤 사람은 전신이 마비되거나 국부가 마비되며, 실명되고 두 귀가 먹으며, 신체, 내장 기관이 괴사하는가 하면, 부분적 혹은 전체 기억을 잃고 치매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실제로 정신 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장프전(張付珍·여·38)은 전 산둥성 핑두시 센허공원 직원으로 2000년 11월 베이징 상방을 다녀와 납치됐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공안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모욕했다. 그녀를 큰대자로 침대에 묶어놓고 대소변도 침대에서 보게 했다. 후에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사했으며 그녀는 미친 듯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가 사망했다. 전체 과정을 ‘610’ 직원들은 현장에서 모두 구경했다. (밍후이왕 2004년 5월 30일 보도)

우한시 양위안 ‘세뇌반’에서 가오순친(高順琴)은 회의실 책상에 눌려 있었고, 왕 씨 성의 여의사가 가오순친에게 주사를 놓았다. 가오순친은 회의실 문밖에 우한시 ‘610’의 후사오빈, 세뇌반의 천이치와 한 경찰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

“나에게 놓은 것이 무슨 주사인가?” 그들은 말했다. “공(功)을 파괴하는 주사이다” “영양주사이다” 그녀는 또 의사에게 물었으나 그 여 의사는 모른다며 대답을 피했다.

가오순친에 따르면 주사액은 처음 반응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으나 후에 서서히 발작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격렬해졌다. 6월, 그녀는 허완 노동교양소로 이송됐다. 11월이 되자 그녀의 두 발이 시리고 그런 다음에는 온 몸에 열이 나고 동통이 왔다. 극심한 통증에 그녀는 밤새 잠들 수 없었다. 후에는 발이 아파 설 수 없었고 걷지 못하게 됐다. 게다가 치아가 흔들리고 빠졌으며 몸에는 부종이 생기고 대뇌는 늘 텅 빈 것 같았으며 이런 상태가 3~4개월 지속됐다. 이상은 2015년 6월 중국 우한시를 벗어나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 온 파룬궁 수련자 가오순친이 중공 고등법원, 고등 검찰원에 우송한 장쩌민 형사 고소장의 내용 일부이다.

1999년 7월 20일부터 2015년 6월 26일까지 민간 경로로 수집된 통계에 따르면, 이름이 알려진 파룬궁 수련자 3864명이 탄압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박해 치사한 사례는 전국 30여 개 성, 자치구, 직할시에 고르게 분포돼 있다. 여기에 수집한 치사 사례는 중국 공산당이 쳐놓은 겹겹의 봉쇄를 뚫고 알려진 사례로 실제 탄압 사례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중공은 극구 범죄 사실을 덮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례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으며, 대량의 생체장기적출 사례는 더더욱 그렇다. 장쩌민은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한 생체장기적출 명령을 내렸다.

2006년 3월 이래 복수의 제보자에 따르면, 중공은 랴오닝(遼寧省) 선양(沈陽)시 쑤자툰에 비밀 수용소를 설립하고 수천 명의 파룬궁 수련자를 수감한 후 대량의 신장, 간장, 각막 등 장기를 강제로 적출해 비싼 값에 팔고, 시체는 소각해 흔적을 없앴다. 2006년 3월 9일, 대기원시보는 전 선양 주재 일본인 기자 진중(金鐘·가명)의 조사 보고서인 ‘선양 수용소, 시체 소각실 설립해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팔다’를 게재했다. 그는 중공이 선양시 쑤자툰에 비밀 강제 수용소를 설립하고 6000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를 수감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동북 3성과 중부 지역의 파룬궁 수련자는 늘 이곳으로 이감됐다. 그 비밀 감옥에는 시체 소각로가 있었다. 제보자에 따르면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 중 살아서 나간 사람은 없으며, 시체를 태우기 전에 내장 기관을 모두 적출했다.

3월 20일, 대기원시보는 ‘수술 집도의 아내가 폭로한 쑤자툰 장기적출의 흑막’을 보도했다. 제보자 애니(가명)는 전남편이 파룬궁 수련자 생체장기적출 수술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쑤자툰 수용소는 쑤자툰 랴오닝성 혈전 중서의 결합 병원에 설립됐다. 2001년과 2003년 사이 병원에 파룬궁 수련자 약 6000명이 수감됐고, 4000명 이상이 산 채로 장기를 적출당한 뒤 병원 뒷마당에 있는 소각로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애니의 전남편에 따르면 쑤자툰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은 모두 파룬궁 수련자였다.

애니는 “일반인은 설령 사형수라 하더라도 모두 가족의 허가가 있어야 장기 적출 수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자만은 그 어떤 수속 없이 수감하고 장기를 적출할 수 있었다. 수술에 참여한 의사는 모두 그들이 파룬궁 수련자임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대기원시보는 연이어 ‘선양군구 군의관, 쑤자툰 수용소 내막 폭로’란 기사를 발표했다. 제보자 군의관은 “쑤자툰 병원이 중국 36개 수용소의 일부일 뿐”이라며, “전용 열차와 외부와 단절된 화물 철도를 이용해 하루에 5000명을 이송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군의관은 쑤자툰의 파룬궁 수련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송됐다고 폭로했다. 그는 “쑤자툰 지하 수용소는 확실히 존재하며, 장기 적출과 시체 소각은 아주 보편적이고, 심지어 산 사람을 소각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폭로했다. 이후 이 군의관은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훔쳐 파는 중국 당국의 진행 과정을 폭로하고, 중공 군부가 직접 참여한 장기 매매 행위를 증언했다.

그는 “(쑤자툰에서) 내가 본 서류에는 6만여 건의 위조 대리 서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즉, 6만 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위조된 대리 서명을 통해 장기를 강제로 적출당했다는 의미다.

2006년, 캐나다 저명 인권 변호사 데이비드 메이터스(David Matas)와 캐나다 8선 의원 출신의 전 아시아 태평양 국무장관 데이비드 킬고어(David Kilgour)는 수집한 대량의 자료를 통해 중국에서 장기 이식에 필요한 장기를 공급할 대규모의 예비 인원이 존재함을 입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중국 공산당국이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한다는 제보는 입증한 것으로 대규모 강제 장기 적출은 지금도 암암리에 진행 중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4년부터 1999년 사이에 진행한 장기 출처가 분명한 장기 이식 수술은 1만 8500건에 불과했지만,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장기 이식 수술은 4만 1500건으로 급증했지만 장기 출처가 불분명하다.

2009년 11월, 데이비드 메이터스와 데이비드 킬고어는 수년간의 추적 조사를 토대로 ‘피에 물든 장기 적출: 장기를 위해 파룬궁 수련자를 살해하다(Bloody Harvest: the killing of Falun Gong for their organs)’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메이터스는 이 범죄를 지구 상에서 있어 본 적이 없는 사악이라고 표현했다.

2013년 8월, 중국인 바오광(鮑光·가명)은 한 외신과 인터뷰에서 “2006년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 서기 당시 방독 기간에 장쩌민으로부터 파룬궁 수련자 생체 장기 적출 명령을 받았다”고 시인한 전화녹음을 공개했다. 중국 당국이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강제로 적출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것은 장쩌민의 명령이 있어 가능했음이 다시 한 번 증명한 사례다.

해외 파룬궁 박해 추적조사 국제 조직(WOIPFG)이 2014년 9월 발표한 녹음 파일에 따르면 장쩌민이 이번 죄악의 장본인이다. 전 인민해방군 병참부 위생부부장 바이수중(白書忠)은 군대가 살아 있는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강제로 적출해 이식한 일이 있느냐는 WOIPFG 조사원의 물음에 “장쩌민이 직접 파룬궁 수련자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해 이식하라고 지시했다”고 시인했다.

바이수중은 “당시 장 주석의 지시가 있었고, 장기 이식이란 이런 일을 전개하라고 했다 … 지시 후에 일부 사람은 많은 사업을 벌였다”고 실토했다. 바이수중의 발언은 대기원시보에 공개된 녹음 파일로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6월 24일, 장쩌민 비서 신분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 중이던 상무부총리 장가오리(張高麗)는 WOIPFG 조사원에게 “장쩌민 동지는 수백만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하라고 명령했다”며 “장쩌민은 장가오리에게 정치국에서 토론할 때 누군가 이 일을 추궁할 경우 적극 제지하라는 요구를 했고, 그렇게 하겠다. 마음을 넓게 가지시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장가오리와의 전화통화 내역 또한 대기원시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WOIPFG는 중공 군부, 경찰과 병원계통에서 온 대량의 생체장기적출 녹음 증거를 입수해 공개했다. 황제푸(黃潔夫) 전 위생부 부부장은 2015년 양회 전 봉황 TV와 인터뷰에서 “사형수 장기 이식으로 형성된 이익 사슬이 더럽게 변했다”며, “이 추악한 이익 사슬은 저우융캉이 낙마한 후 끊어졌다”고 밝혔다.

2006년 중공이 살아 있는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강제로 적출한 흑막이 보도된 이래, 국제 사회는 이를 저지하는 행동을 전개했다. 이스라엘, 스페인, 이탈리아, 호주, 캐나다, 미국, 타이완 등지에서는 중국 원정 장기 이식과 관계있는 행위를 전면 금지하거나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2015년 6월 25일, 미국 제114회 의회 제1차 회의에서 양당 하원의원은 343호 결의안을 발의해 중공에 파룬궁 수련자와 기타 양심범을 대상으로 한 강제 장기 적출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장기 이식 분야에 대한 믿을 수 있고 투명한 독립조사를 진행할 것을 중공 당국에 요구했다. 또한 16년간 지속하고 있는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파룬궁은 진(眞)·선(善)·인(忍)에 따르고 사람에게 선(善)을 가르친다. 이렇게 살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장쩌민은 왜 한사코 탄압을 감행했을까? 이에 대해 많은 고찰이 있었다. 그중에는 당시 외교 문제와 내정 위기를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장쩌민 본인의 질투심과 권력 유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란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