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개혁개방 40년…성과에 가려진 2가지 진실

He Jian
2019년 1월 3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5일

최근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 40주년 기념대회’에서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이래로 중국이 눈부신 발전을 일궈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개인 소득, 교육 수준, 기대수명 등의 부문에서 이룩한 결과라며 상세한 수치를 공개했는데, 이때 중국 최고위 지도부는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중국인들이 굶주렸던 이유

1949년 정권을 잡은 중국 공산당은 교육, 역사, 문학, 예술 등에서 전방위적이고 체계적인 왜곡 작업을 진행했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구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주장하는 ‘구사회’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다는 1948년만해도 중국의 1인당 GDP는 세계 40위였다. 하지만 ‘신사회’ 개혁을 앞둔 1978년에 중국의 GDP는 세계 꼴찌에서 두번째로 추락해 당시 인도 GDP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30년 전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민들이 기근에 빠진 원인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권을 탈취한 초기부터 ‘토지개혁’, ‘삼반오반’, ‘공사합영’ 등의 운동으로 자본가들을 소멸시켰다. 또 ‘농업합작화’와 ‘인민공사 운동’을 통해 농민들의 토지를 철저히 빼앗았다.

1958년에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전국의 민중들은 공산당의 핍박과 유혹 아래 주동 혹은 수동적으로 제강·제철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본가 계층이 제거돼 상공업은 큰 타격을 입고, 농민은 토지를 잃어 농업 생산도 부진해 중국은 전대미문의 대기근에 빠졌다.

35년간 관영 신화사에서 탐사 기자로 근무한 양지성(楊繼繩.78)은 지난 1958~1961년 발생한 대기근에 관한 1200쪽 분량의 문제작 <묘비>를 발표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전역에 발생한 기아상황을 틈틈히 수집했다.

이 기록문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무려 36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사실 마오쩌둥이 벌인 과격한 혁명주의와 민족주의적 발상이 낳은 대약진운동으로 무수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은 웬만한 중국인들은 알고 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프랑크 디코터(Frank Dikotter)가 기밀 해제된 중국 당국의 보고서와 중국 공산당의 내부 보고서에 근거해 작성한 <마오쩌둥의 대기근>에 따르면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중국에서 적어도 4500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프랑크는 이 대기근을 러시아 굴라크 수용소와 독일 나치 대학살과 함께 20세기 3대 인류 재앙으로 꼽았다.

중국 공산당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이 10년의 혁명이 끝이나자 중국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공산당 마저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에게 개혁은 불가피했다.

인민의 성과가 당의 ‘개혁 업적’으로 둔갑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은 11기 3중전회에서 ‘대내 개혁, 대외 개방’을 내세웠다. 이로써 11기 3중전회는 ‘개혁 개방’의 시초로 여겨졌다.

‘다바오간(大包幹)’ 제도로 불리는 농가책임생산제가 개혁이 시작된 상징적인 사건이다. 다바오간 제도는 일정 생산량을 국가에 상납한 뒤 나머지는 개인이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농업생산 청부제를 의미한다.

1978년 11월 24일 안후이(安徽)성 펑양(風陽)현의 샤오강(小崗)촌 농민 18명이 비밀 집회를 갖고 농지를 분배해 각자 자경농을 하기로 결의했다. 당시만해도 여전히 철저한 집단 농장제 사회여서 체포되면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일이 잘못될 경우 서로의 가족들을 책임줘준다는 서약까지 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농민들의 이 시도는 농가책임생산제의 서막을 열었다.

1979년에 이 18명의 농민들은 전년보다 6배나 많은 수입을 올렸다. 1980년 중국 당국은 다바오간의 방식을 인정했고, 1982년 농촌에서 이 제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단지, 중국이 개혁의 모델로 인용된 이 샤오강촌 다바오간 사건은 사실 대표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다바오간은 바로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정상적인 농업생산 방식을 말한다. 샤오강촌의 농민 18명은 단지 이론상 자기 소유의 땅을 임대한 것인데 당시 왜 목숨까지 담보로 해야했을까?

이러한 행동 자체는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스톡홀롬 증후군에 빠진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중국인들은 공산당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상황을 정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서민들을 괴롭히지만 않으면 중국인과 공산당 모두가 당연한 ‘업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40년 동안의 이른바 ‘개혁’을 정리해보면 100% 이런 ‘업적’이다.

농민, 자영업자, 또는 국영, 사기업인들은 당국에 붙잡히거나 심지어 살상당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장규칙에서 정상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에 종사한다. 성과를 낸 후, 다행히 공산당의 인정을 받고는 공산당의 ‘개혁’ 성취로 바뀐다.

중국이 말하는 경제 개혁에 전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일부 경제 분야에서 당의 관여와 통제를 약간 완화하거나 또는 좀 덜 괴롭힌다는 것이다.

‘개혁’ 전에 중국인들에게 안겨준 고된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많은 중국 민중들이 두려움 속에서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 경제와 사회의 40년 동안의 변화를 ‘개혁개방’의 성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 중국식 ‘스톡홀름 증후군’의 폭발이다.

미국이 중국 경제발전에 지대한 역할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중국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지난 40년 동안 중국 경제와 민중생활이 크게 향상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이 경제에 대한 관여를 줄인 것(개혁)을 제외하면 대외무역과 경제, 기술교류와 협력(개방)이다.

그중 미국과의 무역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2017년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3752억3000만 달러로 미국 전체 무역적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은 수년간 중국의 최대 수출시장이었다. 1985년 이후 지금까지 대미 무역흑자 총액이 5조 달러를 넘어서면서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기본적으로 대미 무역흑자에서 나왔다.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2018년 10월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는 전년 동기 대비 4분의 1 가까이 줄었지만 그동안 대미 흑자는 중국의 전체 무역흑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분의 2에서 102%로 늘어난 것은 중국의 무역흑자가 이제는 전부 미국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수치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미국이 중국의 대외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통계서와 중국 통계국에 따르면 중국의 대미 화물 무역흑자가 중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88년 0.9%에서 2005년 8.8%로 매년 높아졌다. 對미국 화물 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8년 2.1%에서 2005년 10.6%로 늘었다.

흑자 또는 수출의 GDP 대비는 단지 수출의 경제적 기여를 반영하는 극히 기계적 지표에 불과하다. 미국을 비롯한 외자와 대외 무역이 중국에 가져온 기술, 관리, 효율성, 공급사슬 및 주변 산업사슬, 고용, 외화흑자 등은 모두 중국 경제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추진 역할을 하고 있다.

대미 무역이 중국 경제 발전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개혁개방’ 40년을 돌아볼 때 공산당이 한 가장 큰 역할은 사실상 경제에 대한 통제를 줄인 것이다. 그런데도 현재 중국 당국은 지도를 강화한다고 하니 중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중국내와 국제사회의 우려가 절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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