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人] 나치 독일이 가장 두려워했던 최정예 여성 스파이

김연진
2023년 05월 17일 오전 11:56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정보기관인 게슈타포가 ‘모든 스파이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하며 수배한 스파이가 있다.

그는 나치 독일 점령지인 프랑스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독일군을 교란하고 연합군에 군사 정보를 제공한 최정예 스파이였다.

나치 독일은 총력을 다해 그 스파이를 끝까지 추적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게슈타포가 그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의족을 착용한 젊은 여성’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목숨을 걸고 유럽 전역을 누비며 비밀작전을 수행한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뒤 무사히 미국으로 귀환했다.

눈부신 활약으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전설의 스파이 버지니아 홀(Virginia Hall) 이야기다.

외교관을 꿈꾼 소녀

버지니아 홀은 1906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이 여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여유로운 가정환경 덕분에 버지니아 홀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언어 감각도 뛰어나 래드클리프 칼리지, 바너드 칼리지 등 명문 대학을 다니며 외국어를 전공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던 버지니아 홀은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살려 유럽의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렇게 외교관을 준비하던 버지니아 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미국 정보기구(OSS)가 위조한 버지니아 홀의 프랑스 신분증 | Public Domain

1933년 친구와 함께 사냥을 하다가 엽총 오발 사고로 왼쪽 다리에 치명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버지니아 홀은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착용해야 했다.

평생 의족에 의지해 지내야만 했던 그녀는 좌절하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유럽에 머물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런데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사건을 계기로 버지니아 홀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비밀 요원의 탄생

버지니아 홀은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프랑스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군 구급차 운전병을 자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가 완전히 점령당하자 영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의 정보기관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s)는 버지니아 홀의 재능을 알아보고 스파이 임무를 제안했다. 그녀의 외국어 실력, 유럽 현지 경험,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한 용기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SOE 공작원이 된 버지니아 홀은 미국 기자로 신분을 위장해 나치 독일의 점령지인 프랑스로 침투했다.

그곳에서 버지니아 홀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의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독일군의 군사 정보를 빼돌려 SOE에 보고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합군은 효과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하며 독일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독일군에 붙잡힌 연합군 포로들도 다수 구출했다. 포로수용소에 잠입한 그녀가 연합군 포로 12명을 빼내고 수용소 인근 군수물자 공장까지 폭파한 일화가 가장 유명하다.

게슈타포는 버지니아 홀을 체포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당시 게슈타포는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연합군 포로와 레지스탕스를 심문해 ‘의족을 착용한 여성’이라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독일군 수사망이 좁혀오자 위협을 느낀 버지니아 홀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버지니아 홀은 피레네 산맥에서 겪었던 고통을 평생 잊지 못했다. 험준한 산맥을 넘으면서 의족이 망가지고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이를 악물고 피레네 산맥에 오르던 그녀는 SOE에 무전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도노반 장군에게 십자훈장을 받는 버지니아 홀. 1945년 9월. | Public Domain

다시 프랑스로 가다

1943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버지니아 홀은 스페인을 거쳐 영국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영국은 그녀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뛰어난 공로를 치하했지만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엔 무리가 있다며 스파이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그러자 버지니아 홀은 미국 정보기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로 소속을 옮겨 다시 프랑스로 침투했다.

그 무렵 연합군은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오버로드 작전의 일환이었다.

버지니아 홀의 임무는 오버로드 작전이 시행되기 전에 독일군을 교란, 타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레지스탕스와 함께 게릴라 작전을 벌이며 주요 군사 거점을 폭파하고 통신을 차단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 덕분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으며, 이는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에 진입한 용기병 작전(Operation Dragoon) 성공으로 이어지며 2차 세계대전의 전세(戰勢)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당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버지니아 홀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종전 후 OSS가 중앙정보국(CIA)으로 개편되자 버지니아 홀은 CIA 요원으로 활동했다. 정년퇴직한 뒤에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2년 세상을 떠났다.

현재 CIA는 현장 요원 훈련소를 ‘버지니아 홀 센터’라고 명명하며 그녀의 헌신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