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사태 두고 시진핑 VS 장쩌민파 격돌, 일주일 사이 최소 3차례 교전한 듯

Dongfang Hao, China News Team
2019년 09월 16일 오후 9:31 업데이트: 2019년 09월 18일 오전 10:35

뉴스분석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송환법 철회를 공식발표하기 전 7일간 급박하게 돌아갔던 홍콩 사태 이면에 중국 공산당 내부 파벌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홍콩 사태의 급변은 장쩌민(江澤民·93) 전 주석 파벌의 파상공세를 현 집권세력인 시진핑 파벌이 막아내고 수습하는 공방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파벌 간 타협과 협력, 대결로 유지되는 중국 권력

장쩌민 파벌은 홍콩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 시진핑 파벌을 정치적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 이런 공세가 가능했던 것은 한정(韓正·63) 상무위원의 존재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최고권력집단인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현재 7인)이 권력을 나누는 집단지도체제다. 상무위원 인선구성은 파벌 간 타협과 경쟁의 산물이다.

시진핑 국가 주석(서열 1위)와 리커창 국무원 총리(서열 2위)가 각각 군사권과 행정권을 쥐고 있지만 홍콩·마카오·대만 정책은 한정 상무위원(서열 7위)이 총괄한다. 상하이 출신인 한정 상무위원은 계파색이 옅다는 평가를 받지만, 상하이방을 이끄는 장쩌민의 파벌로 분류된다.

장쩌민 파벌이 시진핑 파벌에 맞서는 상황에서, 시진핑의 목소리가 홍콩에 잘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이 때문이다. 홍콩 관련 실무기관인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이하 홍·마 판공실) 역시 한정 상무위원 관할이다.

지난 4일, 프린스 에드워드(太子) 역 외부에 흰색 생화로 장식한 레넌의 벽에서 8월 31일 경찰의 무차별 폭력으로 부상당한 홍콩 민중을 위로하는 모습. | 쑹비룽/에포크타임스

 

시진핑, ‘홍콩·마카오·대만 업무에도 위험 출현’ 처음 언급

지난 3일 시 주석은 중앙당교 중·청년 간부 양성 프로그램 개회식에 참석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중국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 한동안은 각종 위험과 도전이 끊임없이 누적되고 심지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 또한 직면한 중대 투쟁도 적지 않은데, 경제‧정치‧사회‧생태문명 건설, 국방‧군대 건설, 홍콩·마카오·대만 업무, 외교 업무, 당(黨) 건설 등 모든 방면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나날이 복잡해질 것이라고 했다.

시진핑은 다가올 위험과 시험은 갈수록 복잡해질 것이고 심지어 상상하기 어려운 거센 파도를 만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관영 신화통신의 2000여 자 ‘퉁가오(通稿·통신사가 통일적으로 매체에 제공하는 원고)’ 전문(全文)에서 시진핑은 적어도 50여 곳에서 ‘투쟁’을 언급했다.

중국 공산당은 올해 초인 1월 21일, 중공 당·정·군 성부(省部·부성장 및 부부장)급 일인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시진핑은 개회 연설에서 “중국은 현재 정치, 이념, 경제, 과학기술, 사회, 외부 환경, 중공 당 건설 등의 영역에서 중대한 위험과 예측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와 복잡하고 민감한 주변 환경에 직면했다”고 했다. 그는 또 “마지노선 사고방식으로 수많은 중대 위험을 예방‧해소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거센 파도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두 차례 연설에서 시진핑이 말한 내용을 비교하면 변화가 있다. 연초에 열거한 위험은 ‘정치 이념‧경제‧과학기술‧사회‧외부환경‧당 건설 등’의 분야였다. 그런데 9월에는 ‘경제‧정치‧문화‧사회‧생태문명 건설, 국방‧군대 건설, 홍콩·마카오·대만 업무, 외교업무, 당 건설 등’의 방면으로 확대됐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홍콩·마카오·대만 업무에도 위험이 출현했고 중대 투쟁에 직면했다’는 표현을 처음 썼다는 사실이다.

 

홍콩 사태, 일주일 사이 롤러코스터 타듯 급변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기습적으로 진입한 지난 8월 29일부터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송환법 철회를 공식선언한 9월 4일까지 일주일 동안 홍콩 사태는 급변을 거듭했다.

인민해방군은 29일 홍콩에 진입하며 31일 대규모 시위를 앞둔 시위대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이틀 전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긴급법(비상계엄령)’ 발동까지 언급한 상황이었다. 결국 시위 주최측은 31일 예정했던 대규모 시위를 취소하며 충돌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9월 2일 캐리 람 장관의 비공개 모임 발언 녹음파일이 유출됐다. 이 녹음파일에서 캐리 람 장관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했다”며 자책했다. 이어 “중국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헤아리지 못했다”며 “군 투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강경했던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다음날인 3일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날 오후 이하 홍마 판공실이 베이징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대를 격렬히 비난했다. 판공실 대변인은 “홍콩 정부 요청에 따라” 주둔군을 동원할 수 있다며 시위대를 자극했다.

캐리 람 장관 역시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전날 녹음파일 유출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며 “사퇴의사가 없다”고 부인했다. 홍콩 사태가 다시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캐리 람은 바로 하루 뒤인 4일 송환법 철회를 공식 선언하며 한발 물러섰다. 시위대는 송환법 철회를 포함해 모든 요구사항(5가지)을 수용하라며 반발했지만, 홍콩의 위기감은 한층 낮아졌다.

이렇듯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부가 불과 하루이틀 차이로 엇갈린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공산당 내부 파벌 투쟁을 대입하면 설명이 쉬워진다.

 

송환법 추진으로 홍콩 사태 불 지핀 장쩌민 파벌

송환법은 시위 전부터 존재했다. 다만 인권침해 우려 등으로 적용범위가 철저히 제한돼 왔다. 적용범위 확대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추진된 것은 올해 2월 대만에서 발생한 홍콩인 남성의 살인사건을 계기가 됐다.

그러나 송환법에 대한 반대여론을 폭발시킨 기폭제는 지난 5월 한정 상무위원의 송환법 공개 지지 발언이었다.

한정 상무위원은 중국의 홍콩 정책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다. 그가 송환법을 강력하게 지지하자, 홍콩인들의 우려감이 증폭됐다. 그리고 6월 9일 첫 홍콩 시위가 열렸다. 103만명이 참가하며 국제적 이슈가 됐다.

캐리 람 장관은 유출된 녹음파일에서 “송환법 추진은 중국 정부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한정 상무위원 발언과 어긋난다.

이에 대해 홍콩의 정치평론가들은 ‘녹음파일 유출’이 의도된 정치적 제스처라고 분석한다. 시진핑이 홍·마 판공실(장쩌민 파벌)을 건너뛰고 직접 홍콩인들에게 유화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9일 인민해방군 홍콩 진입은 어찌된 일일까. 인민해방군은 시진핑 주석만이 움직일 수 있다. 군을 투입한 그가 며칠 뒤 홍콩 시민들에게 “군 투입은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와 관련, 인민해방군 진입은 시위대가 아니라 홍콩 내 장쩌민 파벌 무장세력에 대한 제압행위라는 시각이 있다.

지난 2개월 간 홍콩 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여론전과 강경진압을 병행했다. 홍콩 경찰 사이에서 조직폭력배로 추정되는 집단이 목격됐고, 본토 경찰이 홍콩 경찰로 위장하기도 했다. 권총을 찬 인물이 시위대 차림을 하고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돼 논란이 됐다.

홍콩 경찰과 본토 공안(경찰)은 중국 사법·공안조직 ‘정치법률위원회(정법위)’ 관할이다. 정법위 수장 궈성쿤(郭聲琨·65)은 장쩌민 파벌 2인자 쩡칭훙(曾慶紅·80)의 심복이다. 홍콩 범죄조직 역시 한정 상무위원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홍콩 중련판 계통, 홍콩 조직폭력 세력, 홍콩 경찰과 중공 공안 및 국가안보 특무 세력 등은 모두 장쩌민파 2인자 쩡칭훙 및 그 심복인 궈청쿤(郭聲琨) 정법위 서기의 지휘를 받는다.

현재 장쩌민파 인물인 한정 상무위원, 조장, 장샤오밍(張曉明) 현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주임, 왕즈민(王志民) 중련판 주임도 모두 쩡칭훙의 부하다.

8월 23일, 홍콩에 사는 한 훙얼다이(紅二代‧공산당 원로 2세)가 본지에 제보한 내용에 따르면 8월 19일 아침, 베이징은 홍콩의 각 기관 및 부서 책임자들에게 시진핑의 최신 지시를 긴급히 전달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 스스로 문제를 잘 마무리하고 중앙에 더 이상 부담을 주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앞서 7월 중순, 한 언론은 시진핑 주석은 중련판과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뿐만 아니라, 한정이 이끄는 중앙홍콩·마카오공작협조소조에도 불만을 품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중앙의 여러 부처가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해 홍콩 정책을 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중련판과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에 문책성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람 장관의 녹음 파일이 유출된 것은 시진핑의 뜻일까

8월 27일 람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시위대의 폭력을 비난하고 ‘독립조사위원회 구성’ 요구를 반박하면서 ‘긴급법’을 시행해 시위를 처리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8월 31일 이 민감한 날을 앞두고 람 장관의 이 같은 행보는 다시 한번 홍콩인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2일 후인 8월 29일 새벽, 대규모의 중공군이 홍콩에 진입했다. 중공 관영언론은 이것이 홍콩 주둔군의 제22차 교대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군대가 29일 진입한 것은 목격됐지만, 홍콩을 떠나는 모습은 지금까지 목격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정황상 시진핑이 홍콩에 병력을 늘린 것은 장쩌민파의 검은 세력을 위협하는 동시에 홍콩 전체가 통제 불능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그러자 람 장관은 ‘긴급법’을 실시할 것 같은 태도를 갑자기 누구러뜨렸다. 9월 3일 기자회견에서 “폭력 수위가 높아질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긴급법 적용을 고려할 것인가” 등의 질문에 람 장관은 “대다수 시민은 폭력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녀는 우선 적용 가능한 다른 법률로 처리할 것을 고려하고 전력을 다해 소통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람 장관은 ‘긴급법’ 시행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면서, 만약 폭력이 감소하거나 사라지면 이 법률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시진핑이 홍콩에 군대를 파견한 후, 민감한 사건이 연발했다.

8월 30일, 외신은 람 장관이 장쩌민파 한정 상무위원에게 보고서를 제출해 송환법 개정을 철회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부됐다고 전했다. 9월 2일, 외신은 람 장관의 내부 대화 녹음 파일을 공개하며 베이징이 위기 해결의 기한을 정하지 않았으며, 시진핑은 홍콩 문제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9월 3일 오전, 람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녹음의 진실성을 인정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중공 고위층의 분열 상황을 보여준다. 한 시사평론가는 내부 녹음의 외부 유출은 시진핑의 뜻에 따라 람 장관이 흘린 것이라 분석했다.

지난 4일, 람 장관은 오후 4시 영빈부에서 행정회의를 열기로 했다. 이에 앞서 한 매체가 람 장관이 송환법 개정을 철회할 것이라 보도하는 바람에 수많은 기자가 현장에 달려갔다. | 쑹비룽/에포크타임스

람 장관, 돌연 송환법 철회 선언

홍콩 언론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 산하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의 베이징 기자회견 열린 3일 밤에 람 장관이 갑자기 홍콩지역 인민대표, 정협위원, 건제파(建制派) 의원 전체를 소집했다

다음날인 4일 오후 3시 반께 조지프 얌(任志剛), 아서 리(李國章), 레지나 입(葉劉淑儀) 행정회의 메버와 앤드류 렁(梁君彦) 입법회 의장, 프리실라 량(梁美芬) 경민련(經民聯) 입법회 의원, 마리아 탐(譚惠珠) 기본법위원회 부주임, 마가레트 천(陳馮富珍) 전국정협 상무위원, 그리고 정뤄화(鄭若驊) 율정사(律政司) 사장 및 리자차오(李家超) 보안국 국장 등이 영빈부에 도착했다.

람 장관은 기자회견을 여는 대신 이날 5시 47분 TV공고를 발표했다. 그녀는 송환법 개정안을 정식으로 철회한다고 했다. 이어 변호사와 전직 경찰간부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또한 람 장관 자신은 지역사회에 들어가 시민들과 대화할 것이며 사회 지도자와 전문가 및 학자를 초빙해 사회문제를 중립적으로 연구조사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송환법 철회 보도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제일 먼저 보도한 언론은 중국 ‘신경보(新京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였고 이후 일부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매체가 이를 전재했다.

중앙 매체들은 모두 즉각 보도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늦게 관영 신화통신이 눈에 잘 뜨지 않는 구석에 ‘캐리 람,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네 가지 행동 제시’라는 제목으로 관련소식을 전할 뿐이었다. 중국 고위층 내부에서도 홍콩 사태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