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中 국안법 시행 3년…홍콩 일국양제, 역사에 잠들다

한스 양(Hans Yeung)
2023년 05월 1일 오전 11:35 업데이트: 2023년 05월 1일 오후 4:12

중국 정부의 홍콩 업무를 총괄하는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의 샤바오룽 주임이 중국 국가안보 교육의 날(4월 15일)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홍콩을 찾았다.

총 6일간 체류하며 홍콩을 시찰한 샤 주임의 연설 주제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로, 샤 주임은 국가 안보를 지키는 것이 즉 일국양제와 홍콩의 번영, 민주주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샤 주임은 또 홍콩과 마카오를 향한 미국 등 서방의 체제 전복 시도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모두가 홍콩과 마카오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홍콩인은 방관자가 아닌 애국자가 돼야 한다는 것. 이는 다시 말해 홍콩인들이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지 않을 자유를 잃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국양제는 홍콩의 기본 원칙이자 핵심적 정책에서 조건부 정책으로 전락했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는 자살한 사람이나 범죄자, 또는 파문당한 사람을 교회 묘지에 매장할 수 없었다. 중세 유럽을 본떠 홍콩에서도 비애국자 시신의 매장이 금지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중국 공산당 정권은 일국양제가 전례 없는 위대한 혁신이라고 강조한다. 그 위대함은 점점 더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전례가 없다는 것 자체 또한 의심스럽다.

홍콩이 청나라로부터 영국에 할양된 1841년이 일국양제의 시작이었다. 찰스 엘리엇 홍콩 초대 총독은 ‘홍콩의 중국인 주민들에게’라는 포고문을 통해 영국이 홍콩을 통치하되 홍콩 주민들이 종교의식이나 사회 관습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으며 합법적으로 사유 재산과 이익을 누릴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한 중국인과 관련된 문제에는 중국 법률이 적용될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홍콩의 통치 체제는 중국인과 외국인을 분리하여 통치하는 일국양제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중국인들은 분쟁이 발생하면 영국 정부의 법원 시스템 대신 사원에 가서 수탉을 죽이고 노란 종이를 태우며 맹세했다. 중국인들이 별도로 수사를 진행할 경우에는 그 법적 자격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현대의 홍콩 내무부는 영국령 당시의 홍콩에서 중국 관련 업무를 담당한 장관에서 발전했다. 당시 이 장관은 현지 중국인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의견을 파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은 현지인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자선단체를 설립한 후 이를 중국인을 위한 정부로 운영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일국양제가 홍콩 정부의 근본적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일국양제는 1세기도 더 지난 1970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 해 홍콩 입법회는 첩 제도를 폐지하고 일부일처제로 전환하는 결혼 개혁 조례를 실시했다. 그러나 청나라 법인 대청 법전에 따라 첩의 자녀 및 후손에게도 상속받을 자격이 그대로 주어졌다.

이렇듯 1841년부터 존재했던 일국양제에는 정치적 제약이 없었다. 정치적 제약 대신 진정성이 있었으며 무조건적이었다. 오늘날 공산주의 버전의 일국양제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지점이다.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되면서 일국양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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