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 10월10일 대만의 ‘쌍십절’

강우찬
2022년 10월 8일 오후 11:37 업데이트: 2022년 10월 8일 오후 11:37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권력이양
淸 마지막 황제 ‘청실퇴위조서’ 반포

매년 10월10일은 중화민국의 국경일로, 중화권에서는 ‘쌍십절’로도 불린다. 이날은 중화민국 수립으로 이어진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날이다.

쌍십절이라는 이름은 날짜에 십(10)이 두 번 들어갔다는 점에서 유래됐다. 현재는 대만에서만 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 중화민국 건국기념일은 1912년 1월 1일이지만, 대만인과 대만계 화교들 사이에서는 이날이 더 큰 명절로 여겨진다.

1911년 10월10일, 우한 지역의 주요 3개 도시인 ‘우한3진’ 중 하나인 우창에서 청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시작된 ‘우창 봉기’가 중국 각지로 확산되면서 276년간 이어진 청나라가 무너졌다. 이때가 신해(辛亥)년이었기에 신해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신해혁명은 우발적으로 발생했다. 청나라 정부는 외국 차관을 도입해 철도를 건설하며 국유화했다. 이에 민족 자본가들은 매국행위라며 민영화를 주장했다. 그러자 청나라 정부는 후베이성에서 민영철도 건설을 추진하던 단체를 탄압했다.

그 후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봉기 움직임이 이어지자 계엄령이 선포됐으나, 그해 10월10일 우발적 총성을 계기로 우창의 청나라 병사들이 민란을 진압하라는 정부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전국적인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은 순식간에 번졌다. 2개월 만에 전국 23개 성(省) 중에서 일본이 점령한 대만성을 제외하고 17개 성이 청나라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미국에 머물던 쑨원(孫文·손문)이 귀국해 17개 성 대표들과 만났고,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을 개국했다. 초대 총통으로는 쑨원이 선출됐다. 따라서 건국기념일은 1월1일이지만 대만에서는 사실상 쌍십절이 건국일 역할이다.

신해혁명은 중화민국 개국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1912년 2월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가 6살이었던 까닭에 친모인 황태후 융유의 이름으로 ‘청실퇴위조서’가 반포됐다. 이로써 선통제의 퇴위 절차가 정식으로 완료된 셈이다.

퇴위조서에서는 황제 제도를 끝내고 공화정 형태의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명령했다. 또한 “국민의 마음이 공화정에 기울어져 있다”면서 황제는 정치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로써 본명인 푸이(溥儀)로 더 잘 알려진 선통제는 3살에 즉위했다가 3년 만에 퇴위했다.

어린 황제는 퇴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수렴청정하던 황태후 융유는 신해혁명에 압박을 받긴 했지만, 퇴위가 전쟁을 통해 강제로 끌어내리는 형태가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으로 이뤄진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신해혁명을 통한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의 전환이 정식 절차에 따른 권력이양을 거쳐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황제는 역대로 ‘천자(天子)’로 칭해졌다. 이는 황실의 권위와 국가 체제의 정당성이 하늘에 대한 숭경이라는 중국의 전통사상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자는 절대적 권력을 누렸지만 책임도 뒤따랐다. 중국인들을 하늘과 황제를 숭경했지만, 어리석고 무도(無道)한 천자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부덕한 일을 저지르면 하늘이 그를 징벌하고 새로운 천자를 옹립한다고도 여겼다.

‘청실퇴위조서’의 반포가 비록 형식적이었다고 하나, 천자가 백성의 뜻을 살피어 스스로 물러나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하늘(天)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해 지상(地)에 속하는 인간의 우러름이 유지됐다. 청나라와 중화민국은 중국의 전통사상을 수호하고 선양했다.

반면 1949년 10월1일을 정권수립 기념일로 하면서, 과거의 중국전통과 모든 연결고리를 단절하고 “새 중국 건설”을 내세운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은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