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당(黨)문화]제5장 선전 중에서 흔히 보는 당문화(상)

2007년 03월 21일 오전 12:31 업데이트: 2019년 11월 6일 오후 9:55

하편:당문화의 구체적 표현 

【당문화 해체】5:선전 중에서 흔히 보는 당문화(상) 


< 목 차 >

들어가는 말 

1. 공산당이 없으면 신(新)중국은 없다 

1)노래와 거짓말
2)시기마다 껍데기만 바뀌고 내용은 그대로
3)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떻게 하는가
4)공산당이 중국에 가져다준 것

2. 엄마아빠보다 당이 더 친근 

1)선전 중의 다양한 표현형식
2)당이 엄마라는 정서 주입
3)도적을 아버지로 여기는 심리적 원인


들어가는 말

중공 통치하의 중국에는 다른 나라와는 색다른 점들이 많다.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도처에 표어와 구호가 난무한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이 수집한 “중국표어대전(中國標語大全)”의 내용에는 가족계획, 범죄와의 전쟁, 육림(育林), 보통교육 보급과 문맹퇴치 등이 있으며 또 형형색색의 정치구호가 있는데, 그 거칠고 야만적이며 황당무계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입이 벌어지게 할 정도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몇십 년 동안 이런 환경 속에서 생활해 왔기에, 이것을 인류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여기면서 또 세계 여러 나라들도 이럴 것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이상한 일을 겪어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산당은 무엇 때문에 문화선전방면에서 표어와 구호의 작용을 이렇게 중시하는가? 그 원인은, 다음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표어와 구호는 간단하고 입에서 잘 나오며 생생하고 기억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작용이 직접적이고 효과가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이다. 둘째, 표어와 구호는 종종 아주 간단하기에 복잡한 논증과정을 포함할 수 없다. 때문에 그것들이 선전하는 이론 정책 자체의 황당한 오류와 겉만 번지르르한 것을 덮어 감출 수 있고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난 몇십 년간 중공 폭정(暴政)의 역사를 관통하는 한 세트의 구호가 있다. 이 일련의 구호는 중공의 집단목표를 집중적으로 체현하였다. 중공은 일찍이 아주 큰 힘을 들여 이것을 반복적으로 주입했으며, 또 여러 가지 문예형식으로 해설하고 과장하였다. 비록 국내외적인 형세의 변화에 따라, 어떤 때는 구호의 형식만 바뀌거나 또 다른 일종 혹은 여러 가지 형식이 나타났지만, 그 정신은 실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목적은 바로 공산당에 대한 인민들의 의지와 순종을 공고하게 하여 공산당 일당독재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일련의 구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은 없다”

“엄마아빠가 친하다 해도 당보다는 못하다”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자”

“당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

우리는 제3장에서 중공의 주입수단을 논술하였다. 선전기구, 문학작품, 교과서거나 아니면 영화, 희극, 가무, 곡예 등 어떠한 문예형식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악기(樂器)처럼 중공이 당문화를 주입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물론 시대 혹은 당시의 사회형태, 경제형태의 차이에 따라 구체적인 창작자가 사용한 소재가 달라질 수 있고 창작물이 달라질 수도 있다. 때문에 이런 악기들 속에서 나온 곡은 곡조(曲調)가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표현하는 주제는 도리어 위 네 가지 구호와 궤를 같이 한다. 만약 구체적인 각종 현상에서 그것들의 주제와 표현하려는 것으로 되돌아가면, 위 네 가지 구호는 바로 선전 중에서 늘 보는 당문화의 고도의 개괄이며, 또 선전 속에서 늘 보는 당문화 창작지도의 대강(大綱)이다. 만약 선전 중에서 늘 보는 당문화의 다양한 표현의 실질을 똑똑히 알고자 한다면, 이 네 가지 구호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1. 공산당이 없으면 신(新)중국은 없다 

1)노래와 거짓말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은 없고/ 공산당은 민족을 위해 고생하며/ 공산당은 한마음으로 중국을 구하려 하네./ 그는 인민에게 해방의 길을 가리켜 주었고/ 그는 중국을 광명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하고/ 그는 항일 전쟁을 8년 이상 견지했고/ 그는 인민의 생활을 개선했고/ 그는 적 후방의 근거지를 건설했고/ 그는 민주를 실행했으니 좋은 점이 많다.”

아주 널리 전해진 중공을 찬양하는 이 노래는 1943년에 창작되었다. 원래 당시 가사는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이 없다”였다. 1950년 마오쩌둥은 “중국” 앞에 하나의 “신(新)”자를 추가했고, 가사 역시 오늘날과 같이 변했다.

이 “신(新)”이라는 글자는, 아주 궁리를 해서 추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인, 모두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기에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이 없다”고 말하면 이 사람들의 인생경험과 일치하지 않기에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한 가지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산당의 사전에서 “새로 생긴 사물”은 특정한 함의가 있는 명사이다. 만약 어떤 물건이 새로 생긴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반드시 역사의 조류에 부합되는 것으로 “강력한 생명력과 원대한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의 어떠한 결점이든지 모두 “새로 생긴 사물의 미성숙”에 의한 것이고, 장래에 언젠가는 이런 결점들이 모두 하나하나 극복될 것이다. 공산당은 확실히 이렇게 자신을 변호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1942년, 국민당 정부를 이끌고 일본과 전면 항전을 진행한 장제스(蔣介石)가 『중국의 운명』이란 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디가 “국민당이 없으면 중국은 없다”는 것이다. 옌안(延安)에 숨어 “정풍(整風)”하던 공산당은 이에 날카롭게 맞서서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으며, “공산당이야말로 항일의 튼튼한 기둥이다”라고 성명했다. 때문에 이 노래의 주요내용은 “중공이 전국 인민을 지도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쳤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많은 역사자료들이 증명하다시피 “항전을 지도”했다는 것은 중공의 주관적인 염원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도 아니다. 큰 적을 앞에 둔 위기의 시각에, 중공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떻게 기회를 틈타 자신을 발전시키고 최종적으로 정권을 탈취하느냐는 것이었다. 중공은 명목상 “항일민족통일전선”을 만들고, 여론을 이용해 인심을 매수했지만, 암암리에 “1할은 항일하고, 2할은 국민당과 대처하며, 7할은 자신을 발전시켰다.” 심지어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과 암암리에 내통하여 아편을 밀거래하기도 했다.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항일전쟁은 1931년 9.18 만주사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14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국민당은 1932년에 “1.28 쑹후(淞?)항전”을 했고, 1933년에는 장성(長城)항전을 진행했다. 그러나 중공은 도리어 9.18사변이 발생한 두 달 후, 장시(江西)에 할거정권을 세웠다. 중공이 줄곧 “8년 항전을 견지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바로 1931년부터 1937년 사이에는 전혀 항전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 항일전쟁 전: “내전을 중단하고 공동으로 항일하자”(중화민국 정부군 170만 Vs 중공군 7만)항일전쟁 후: “전 중국을 해방시켰다”(중화민국이 항일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자 중공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90만 정규군을 동원해 정권을 탈취했다.) | 에포크타임스

중국대륙에서 출판한<류사오치 연보(劉少奇年譜)>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강남지역에서 중공 최고 지도자였던, 류사오치 군령(軍令)과 보고를 전부 살펴보아도, 의외로 항일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 중화민국 군대를 타격하고 분열시킬 것인가에 온통 집중되어 있다. 중공이 참여하여 일본과 벌인 대규모 전투라고는 오직 “평싱관 전투(平型關戰役)”와 “바이퇀 대전(百團大戰)”이 있을 뿐이다. “평싱관 전투”를 말하자면, 중공은 근본적으로 “이 전투를 지휘하고 참가한 지도와 주력부대”가 아니었으며, 적군을 매복 기습한 보충부대였을 뿐이다. 이 전투는 항일 전쟁이 시작된 후 중공이 거둔 최초의 큰 승리라고 알려졌지만, 중공 역사책에는 제2차, 제3차의 승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원인은 중공이 참여한 큰 전투라고는 오직 위 두 차례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이퇀 대전(百團大戰)”은 중공 내부에서 도리어 당 중앙의 전략방침을 어긴 것이라고 여기며, 전공을 세운 펑더화이(彭德懷)는 도리어 “죄를 지은 장수”의 하나가 되었다. 1959년의 루산(廬山)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가지고 펑더화이를 공격했다. “일부 동지들은 일본이 땅을 적게 차지할수록 좋다고 여기는데, 나중에야 인식을 통일했다. 일본이 땅을 많이 점유하게 해야, 애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장제스의 나라로 변해 버린다.” “우리는 바로 국민당과 일본인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해야 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발전해야 한다.”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榮) 수상에게 “당신들은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오지 않았더라면(침략하지 않았다면), 우리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중공이 적극적으로 항일했는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일본을 지지하여 중국을 침략하게 했는지는, 마오의 대답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인민영웅기념비”에 새겨진 비문도 항일에 대한 중공의 태도를 잘 설명하고 있다. “3년 이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전쟁 중에서 희생된 인민 영웅들은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30년 이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에서 희생된 인민영웅들은 영원히 길이 빛나리라!” 여기서 분명한 것은 중공의 진정한 적은 국민당이었고, 8년 동안 중화민족이 외부의 침략에 저항해 목숨 걸고 피 흘려 싸운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 당사(黨史)연구실, 국가 당안국(國家?案局)에서 운영하는 “민족 혼”사이트에 나열한 “항일전쟁시기” 희생자 명단 중, 절대 다수는 모두 국민당과 전투에서 사망했다. 단지 사망한 시기가 “항일전쟁시기”였을 뿐이다. 중국 민중들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투영웅 둥춘루이(董存瑞), 추사오윈(邱少雲), 황지광(黃繼光) 등도 항일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은 없다.

중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마오쩌둥에 의해 “산 아래서 복숭아를 딴다(下山摘桃子)”고 비웃음을 당했던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1937년부터 1945년 사이에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일본군과 소형전투 총 3만 8,931차례를 치렀고, 중대한 전투 1,117차례와, 큰 전투 22차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고급장교만 200명 이상이고 사망자수는 330여만 명에 달한다. 타이얼좡(台兒莊), 쑹후(淞?), 창사(長沙), 두산(獨山) 등 정규전쟁과 상하이(上海), 젠차오(?橋) 등 공중전에서 일본군을 크게 타격했고 최종적으로 간고하고 탁월한 노력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공산주의 이상이 이미 사람마음을 미혹시키는 모든 능력을 상실한 오늘날, 중공은 민족주의 깃발을 자주 사용하면서 스스로 중화민족의 정통대표라고 자칭하기에, 절대로 “항일전쟁의 튼튼한 기둥”이라는 월계관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의 진상은, 전국 인민이 온 힘을 기울여 외부 침략자에 대한 반격이 가장 필요할 때, 중공은 도리어 수치스럽게 조국과 인민을 배반했다.

2)시기마다 껍데기만 바뀌고 내용은 그대로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은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구호는 이미 몇십 년 전의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중공의 선전 아래, 구호에 나오는 “신중국(新中國)”은 중공이 1949년 건립한 “신중국”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후 각 시기의 중국을 가리키며, 이 구호는 시기마다 각기 다른 내포와 표현이 있다.

이 구호가 바로 당문화 선전 중의 지도사상이며 여러 가지 구체적인 선전내용은 모두 그것을 지도로 삼았다. 선전 중에서 각종 방법을 사용하여 각종 구호를 말하고, 각종 좋은 일을 말하며, 각종 사회현상을 해부하는데, 모두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이용한다.

아래에서는 이 구호가 다양한 역사 시기 선전 중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1949-1959 정권 강화 단계 

문공단(文工團), 양거대(秧歌隊), 퍼레이드, 표어, 전단지 중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세 개의 큰 산을 타도하고 중국 인민은 일어났다. 해방을 이룬 것은 공산당에 그 공적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공이 정권을 건립하기 전에 있었던 외적의 침입과 중공의 무장봉기로 인한 장기적인 혼란국면은, 바로 “낡은 중국”의 “암흑”에 대비해 “신중국”의 “우월”을 돋보이게 하는 밑천이 되었다.

토지개혁에서 “마오쩌둥은 인민을 구원한 위대한 별”이 되었고, “오직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한국전쟁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고 선전했는데 그 의미는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이 망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 주동적으로 남한에 발동한 침략전쟁으로, 유엔에서 결의를 통해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을 향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미국이 중국을 노렸다고 한다면 이는 완전히 중공의 허구적인 조작이다. 1950년 가을 린뱌오(林彪)가 병을 핑계로 정부에 나오지 않을 때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다. “미국은 중국을 침략할 의도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3년 내전 때 이미 개입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50만 명 이상의 관병을 희생하면서 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육성시킨 것은 도리어 백여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하고 굶어죽게 한 북한 독재정권이었다. 북한이 고집을 부려 개발한 핵무기는 현재 중국에도 위협이 되고 있다.

▲ 중공의 석유, 식량, 기술 지원을 받고 있는 김정일의 큰 소리: “미제가 우리를 없앨 마음을 품고 제재를 가한다면 이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 | 에포크타임스

<백모녀(白毛女)>를 대표로 한 각종 형식의 문예작품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낡은 사회”와 “신(新)사회”의 대비를 선전한다. 낡은 사회는 1949년 이전의 전체 사회 역사를 가리키는데, 국민당 통치, 북양(北洋)정부, 청나라 더 나아가 더 오래 전 고대 등을 가리킨다. 또는 구시대(舊時代)라고 부른다. “온갖 악을 갖춘 낡은 사회” 또는 “신구 사회 두 하늘”이라고 말한다. 1949년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것을 경계로 그 이전은 반동, 압박, 암흑, 착취, 추함, 우매, 재난, 공포, 불의(不義)이고, 그 이후는 진보, 해방, 광명, 복지, 아름다움, 문명, 행복, 평화, 정의 등이다. 하나는 “천당”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중심은 바로 공산당이 없으면, “신사회”와 “신중국”이 없다는 것이다.

▲ 모자에 대한 변천 : 온갖 악을 갖춘 낡은 사회(좌), 소위 “인간 천당”이라는 붉은 신세계(우) | 에포크타임스

▶1959-1966 “사회주의” 건설단계 

중공은 “대약진”과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 중에서 선전하기를 “한 무(畝)에서 만 근을 생산하고, 강철생산을 갑절로 늘려 10년이면 영국을 추월하고 15년에 미국을 따라잡자.”, “공산주의로 달려 들어가자.”, “전 인민이 강철을 정련하다.”, “철강산업을 기간산업으로 하자.”, “마오 주석은 우리에게 대약진, 공사화를 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라고 하셨다.”, “인민공사는 공산주의 천당으로 올라가는 하늘 사다리다.”

중공은 대약진 운동 기간에 전 인민을 동원해 강철 생산을 독려했다. “강철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려 10년 내에 영국을 추월하고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자!” | 에포크타임스

이런 선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이 소위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목표”를 실현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이 강국이 되려면 공산당에 의지해야 하고 공산당이 없으면 “공산주의를 실현”한 “신중국”이 없다. 하지만 중공이 지금까지도 감히 공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당시 중국에서 3,4천만 명이 이것 때문에 무참하게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중공은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으로 “3년 자연재해”라고 부른다.

▶1966-1976 문화대혁명 

모범극, 마오쩌둥 사상 문예선전대, 대자보, 영화, 선전 포스터, 교재 등을 전국에 널리 보급하고, “무산계급 독재 하에서 계속 혁명하자”, “전국의 산하를 온통 빨갛게 하자.”, “전 인류를 해방하자.”, “무산계급혁명사업의 후계자가 되자.”, “혁명 사업을 위해 한껏 솜씨를 발휘하자.”, “착취계급의 일체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크게 타파하자.”, “일체 온갖 잡귀신을 타도하자.”, “각 문화영역을 포함한 상부구조에 대해 무산계급의 독재를 실행하자.”고 선전했다. 이름은 혁명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공산당이 계속 지도하려는 것이다. 근본적인 의미는 반드시 시시각각 경각성을 높여 도처에 존재하는 “적”들의 “파괴와 전복”을 제거하여, 중국 사람들이 또 다시 “온갖 악을 갖춘 낡은 사회”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되풀이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며, 공산당이 중국에 가져온 “사회주의제도”하의 이른바 “신중국”을 공고히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1976-1992 독재정치 하의 경제개혁개방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중공은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4인방을 타도하자”, “10년 동란”, “10년 큰 재난”, “4인방의 앞잡이, 잔당” 등을 고취하였다. 또 중공 통치가 위기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민족에 대한 발광적인 약탈과 파괴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고 사회 각 층면이 재생되어 일으킨 변화를 이용해, 당의 “집권능력”과 “잘못을 바로잡는” 결심을 증명했다. 또 당이 “혼란 상태를 수습하여 바로잡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고, 중국이 혼란 상태를 벗어나 “신중국”을 건설하려면 반드시 공산당에 의지해야 함을 증명하였다.

1979년 후 중공은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중점적으로 선전했다. 지도사상은 공산당이 없으면, 경제적으로나 생활에서 일체 좋은 변화가 없다는 것이며, 중공이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사상을 포기하고 강제적으로 경제와 과학기술영역을 “지도”한 후, 사회가 정지에서 발전으로 나아가고, 봉폐에서 개방으로 나아간 것을 “중공 제11기 3중전회”의 공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중공이 정부를 건립하기 전에, 중국은 줄곧 개방정책을 행했음과 중국사회의 봉폐는 완전히 중공이 만들어냈다는 것은 무시하였다.

1989년 이후, 중공은 “자유화”를 반대하고, 6.4학살의 정확성을 선전하였다. 국민경제는 중공의 층층 속박을 벗어난 후 점차적으로 재생되었고 전 세계적인 경제 조류 속에 융합되어 들어갔는데, 중공정권의 합법성을 증명하는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중공은 이 기회를 빌려 혼란한 논리를 만들어 공산당이 학생들을 탄압하지 않았으면, 중국은 해체되고 난리가 났을 것이며 오늘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은 공산당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1992-1999 경제발전시기 

“GDP성장”, “거시 조정”, “발전이야말로 확실한 도리”, “홍수와 투쟁에서 승리”, “올림픽 신청”, “홍콩반환”, “마카오 반환”, “3강(講)”, “인민생활수준제고” 등 각종 선전은 공덕을 찬양했다. 즉, 공산당이 조국의 강토를 수호하고 경제건설을 지도했으며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제고하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제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을 따져보면, 중국의 잠재 소비량, 중국인의 근면성, 과거 몇십 년 동안 사회경제에 대한 중공의 파괴로 조성된 중국인의 값싼 노동력, 대량 국제자본의 유입, 또 거대한 경제적 투입, 생태자원과 사회도덕의 파괴를 대가로 한 이른바 경제의 “고도성장”은, 현재 일정 정도 민중들의 물질수요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중공은 도리어 이 기회를 이용해, 마치 모든 성과는 오직 공산당에 의거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듯이 계속적으로 고취하고 있다.

▲ 무대 앞(좌) : “우리 당의 영명한 지도하에 또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무대 뒤(우): “농민들은 반드시 토지세, 민병훈련비 등 수많은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 에포크타임스

▶ 1999-현재 

“3개 대표”, “파룬궁 적발 비판”, “평화적인 굴기(和平?起)”, “8영8치(八榮八?)”, “조화사회(和諧社會)”, “강국부민(强國富民)”, “경제기적”, “공산당원 선진성 유지”, “사스에 대항”, “후진타오-원자바오 신정부(胡?新政)”, “과학발전관” 등. 중공은 여러 가지 매체 중에서 제멋대로 물질적인 소비의 번영과 GDP 성장을 선전하고, 잘사는 사람의 생활방식을 선전하며, 부동산과 각종 건설항목의 시설을 선전한다. 중공의 이른바 “경제개혁”은 본질적으로 사회모순을 완화시키고 자신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지, 국가와 민족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맹목적인 “고도성장”에 뒤따른 폐단은 점차적으로 사회의 불만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생태환경의 파괴로 조성된 오염, 자연자원에 대한 약탈과 파괴로 인해 빈번하게 나타나는 “백년” 심지어 “천년에 한 번 있을” 자연재해, 도시와 농촌 및 서부와 동부의 극단적인 발전 불균형으로 조성된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 국가 장기적인 발전의 기초인 교육방면에 대한 장기적인 저투자, 의료방면의 불합리한 정책 및 물욕에 대한 극단적인 추구가 가져온 사회도덕의 타락과 부패 등이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중공은 “조화사회”와 “후진타오-원자바오 신정부”, “지속 가능한 발전” 등을 강력하게 선전했고, 이런 “과학”, “현대”란 허울을 쓴 새 명사를 이용해 현실에 불만이 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했으며 사람들에게 중공은 여러 가지 문제를 근절할 “결심이 있다”는 가상을 심어주었다. 중국 문제는 그래도 결국 당에 의지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중공은 국경절 열병식을 대대적으로 행하고, 사이트와 매체를 이용해 군대와 무기건설을 선전했으며, 대만을 공격하고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고취하며, 대국굴기(大國?起)와 철혈확장(鐵血擴張)을 선전했다. 그 의도는 공산당이 중국의 국력과 군사력을 확장시켰고, 공산당이 정권을 건립한 후 해놓은 “좋은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 “신중국”의 대국(大國)지위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3)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떻게 하는가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은 없다”는 말의 숨겨진 뜻은, 공산당이 중국 인민을 지도하여 휘황한 성과를 얻었고, 이런 성과는 만약 공산당의 지도가 없었다면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공이 늘 허풍을 떠는 성과에는 민족의 독립을 얻고, 중국 인민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했으며, 완전한 국민경제체계를 건립했고, 십몇 억 인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며, 강대한 국방체계를 건립했고, 원자탄과 핵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과학기술 및 문화 사업에서 빠른 진보를 획득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국의 진정한 민족독립, 국제 4강에 들어선 것, 불평등조약을 폐지한 것과, 대만을 회수한 것은 모두 국민당 정부가 1945년에 해낸 것이다. 정권을 세우기 전에 중공이 한 것은 분열과 내전이며, 정권을 건립한 후에는 민중을 노예처럼 부리는데 힘썼고, 정치운동을 크게 벌여 인민들을 핍박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중국의 경제 체계는 중공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꽤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 강남의 조선소는 1918년 미국에 4척의 1만 톤 급 선박을 건조했고, 1920년 3월 진수했으며, 미국 교통부에서 검사한 결과 품질이 아주 우수했다. 1929년 랴오닝 박격포 공장은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었다. 기타 성냥, 페인트, 선반, 심지어 군함, 비행기 등, 현대 공업생산품들은 대부분 국민당 정부, 북양정부 심지어 청나라 때 이미 모양을 갖추었다.

중국인들이 밥을 먹는 문제를 말하자면, 도대체 누가 농사를 짓는가? 누가 집을 짓는가? 누가 과학연구를 하는가? 그래 농민, 노동자, 지식인 등 대중백성들이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중공이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중국 인민의 입을 것과 먹을 것 및 재산은 자신이 노력하여 일한 결과이며 스스로 번 것이지 중공이 가엾게 여겨 베풀어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인민이 중공 정권을 먹여 살린 것이지, 중공 정권이 인민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다. 중공의 후안무치함은 바로, 인민의 재산을 전면적으로 박탈하고는 최후에 당신 자신이 창조한 재산을 조금 돌려주고는, 오히려 당신에게 고맙게 여기게 하고 당신에게 “당의 영명한 정책에 감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경제학에 “기회비용”이라는 용어가 있다. 의미는 바로, 사람이 어떤 선택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잃게 되는 것이 바로 그가 얻은 물건의 기회비용이라는 것이다. 중공은 자신의 “위대한 성과”를 떠들어 대면서, 언제나 종적으로만 비교하지 횡적으로는 비교하지 않는다. 언제나 전란 연대와 비교하며 태평한 연대와는 비교하지 않는다. 언제나 무엇을 했다고 말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지난 반세기 이래 비(非)공산 국가와 공산 중국이 걸어간 길을 비교해 본다면 발견할 것이다. 만약 공산당이 없었고, 중국 인민의 지혜와 근면에 의지한 자유민주의 중국이었다면 지금 상태보다 얼마나 더 휘황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우선 경제를 예로 들어 보자. 중공은 늘 중국은 인구가 많고 밑바탕이 취약하다고 말한다. 그럼 우리처럼 인구가 많고 밑바탕이 취약한 공산당이 없는 일본을 보자. 일본의 인구밀도는 1Km2당 339.3명(1998년 자료)로 중국의 약 3배이다. 일본은 국토의 71%가 산지와 구릉이고 토지는 척박하며 자원이 부족하고 자연조건이 그리 좋지 않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했지만 겨우 30년 만에 패전으로 인한 경제의 그림자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강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을 뛰어넘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강국이 되었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여러 차례의 정치운동을 발동하여 중국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을 때, 일본의 GDP는 연속 18년 동안 평균 10%의 속도로 고속 성장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본경제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인도의 인구는 중국과 비슷하기에 중국과 어느 정도 비교가 가능하다. 1980년대, 중공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거의 같은 시기에, 인도는 라지브 간디 총리의 지도하에, 온건한 자유개혁을 시작했다. 1991년부터, 인도는 개혁의 발걸음을 가속화했고, 1980년부터 2002년까지 인도경제는 연평균 6% 성장했다. 2002년부터 2006년 년 평균성장률은 7.5%에 달하는데, 이는 중공이 발표한 8%에 거의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 은행의 부실채권은 전체 대출의 2%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건전하며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다. 소득 불균형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도 0.33으로 이는 같은 시기 중국의 지니계수가 0.5~0.6에 가까운 것과 비교하면 빈부격차가 작은 편이다. 중국 경제의 성장은 주로 자원을 많이 투입한 것에서 유래했지만, 인도의 GDP성장은 주로 생산성 제고에서 온 것이지, 자본이나 노동력 투입을 증가시켜서 온 것이 아니다. 인도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독특한 경제성장 모델을 만들었다. 주로 국내시장에 의지하며 수출에 의지하지 않았고, 소비에 의지하고 투자에 의지하지 않았으며, 서비스업에 의지하고 공업에 의거하지 않았으며, 하이테크에 의지하고 기술이 낮은 일반 제조업에 의지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인도경제의 성장모델이 민중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준다고 말한다.

군사와 국방 역시 중공이 늘 자랑하는 제목이다. 자고로 “군대는 흉기니, 성인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한다(兵者?兇器,聖人不得已而用之)”고 했다. 『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병법은 적의 의도를 꺾어 놓는 것이고(上兵伐謀), 그 다음 병법은 적의 외교를 끊어 놓는 것이고(其次伐交), 그 다음 병법은 적의 군대와 전쟁을 하는 것이고(其次伐兵), 최하의 병법은 적의 성곽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다(其下攻城).”라고 했다. 중공은 투쟁철학에서 출발하여 몇십 년 동안 일종 전쟁에 대해 망상하는 태도로 끊임없이, “제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하다”, “중국과 미국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치른다”고 떠들어댔다. 사실 그것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내의 모순을 없애는 상투적인 통치수단이다. 사실 진정으로 “혁명을 수출”하는데 열중하고 도처에서 선동하면서 천하가 어지러워지기만 바라는 것이 바로 공산당 정권이다. 중공은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 41억 달러(1957년 가치)를 소모했다. 어떤 사람이 계산한 바로는, 만약 이 돈을 식량을 사는 데 썼다면 대기근에서 굶어죽은 4천만 명을 전부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국방의 목적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그럼 이렇게 많은 국민들을 해치는 국방이 도대체 무슨 의의가 있단 말인가? 억지로 병사를 동원하여 무력을 남용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국민들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적어도 무기 개발을 국민들에게 자랑하는 밑천으로 삼을 수는 없다. 게다가 공산당이 없는 그런 국가들은 국방을 건설하지 않는단 말인가?

대만 국립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밍쥐정(明居正)이 일찍이 재미있는 가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만약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의 정권이 손중산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삼민(三民)주의의 길을 걸었더라면 중국의 정황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말한 적이 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5대 운동이 없었을 것이고 미국과 전쟁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국에게 봉쇄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대약진 운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중간에 아주 많은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3면 홍기(紅旗), 대약진, 인민공사가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중국에서 3천만 내지 4천만의 인민이 덜 죽었을 것이고…,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경제는 계속하여 발전하고 인민은 더욱 부유해졌을 것이다….”

“만약 삼민주의를 따르는 이 정당(역주: 국민당을 말함)이 계속 집권했다면, 1980년대에 이르러, 중국 경제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대략 4천 달러 내지 5천 달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중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마땅히 미국의 절반에 도달해야 하고, 경제규모는 미국의 2배가 넘었을 것이다. 중국은 의심할 바 없이, 일찍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중국 대륙이 걸어간 길이 손중산의 길이고, 공산주의의 길이 아니었고 줄곧 걸어왔다면 중국은 진작에 굴기(?起)했을 것이다”.

중국 고대에, “휴양생식(休養生息)이라는 단어가 있다. 바로 정부가 형벌을 감면하고, 조세를 줄이며, 부역을 경감하여 백성들을 휴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부가 백성들을 들볶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근면하고 용감하기에 오직 사회가 공정하고 운동을 하지 않으며 정부가 마음대로 지휘하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스스로 방법을 찾아 부유해졌을 것이다. 중공 스스로도, 3년 대기근 때 몇 천만 명이 굶어죽었고,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 국민경제는 이미 붕괴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인정했다. 만약 몇 십 년 동안 중공의 들볶음이 없었다면, 중국은 적어도 30년 전에 좋은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 현재, 중공의 전제(專制), 부패, 낭비와 이에서 야기된 혼란한 사회질서와 부패한 사회도덕은, 이미 중국 사회발전에 거대한 장애를 조성했다. 중공 스스로 승인한 것만 해도, 매년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데 2000억 위안, 관용차 소비에 3000억 위안, 해외출장비용 2000억 위안 등이다. 세계은행은, 중국은 “7차 5개년 계획”부터 “9차 5개년 계획”기간에, 투자정책 실수율이 30% 정도에 달하고, 낭비가 4000ㅡ5000억 위안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우방궈(吳邦國) 스스로도 “우리나라 최대의 낭비 중에 전략 정책결정 실수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또 크고 작은 각 급(級) 당위원회 관리가 몇 백만 명에 달하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돈을 낭비하는지 모른다. 일반 국가의 백성들은 세금을 내 정부를 먹여 살리지만, 중국 백성들은 정부를 먹여 살리는 외에도 방대하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당을 먹여 살려야 한다. 때문에 중국 백성들은 이런 무거운 부담을 견딜 수 없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한편으로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이다. 공산당은 주입을 통해 자신이 민족과 국가와 융합되어 일체가 되었다는 가상을 만들어, 당이 망하면 나라가 없어지며, 마치 엄마 품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이는 엄마가 없는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공산당은 지금까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었고 중화 민족에게 강제로 달라붙은 부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중공이 국가의 모든 자원과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고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중공에 의지해야만 국가를 관리할 수 있다는 가상을 조성한 것이다. 사실 중공이 없어도, 중국인들은 예전처럼 여전히 중국인이고, 국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중국사회는 몇천 년 동안 공산당이 없었어도 아주 훌륭하게 지내오지 않았는가?

다른 한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또 공산당이 없으면 국가가 혼란하게 된다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동란(動亂)이 일어나는 것보단 차라리 지금 어렵게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동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생각해 본다면, 중공의 통치야말로 바로 동란의 원인이고 모순을 격화시키고 있으며, 중공이 바로 사회의 불만을 압제하고 있기에, 동란의 도래는 바로 중공 통치하의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중공을 유지하는 것은, 이 동란의 도래를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속화하며 동란의 파괴력을 강화할 뿐이다. 현재 중국의 각종 문제들을 해소하는 방법은 바로 중공이 가로막고 있는데, 원인은 그런 해소방법들이 중공의 통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오직 공산당의 요소가 사라져야만, 공평하고 건강하고 뒷근심이 없이 중국 문제를 토론할 수 있으며 정상적인 궤도 위에서 전면적으로 개혁을 진행할 수 있다. 때문에, 지금 급선무는 바로 중공을 해체하여 다른 일들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길을 닦는 것이지,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문제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것은 문제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다. 20세기말 공산주의는 전 세계에서 이미 파산되었고, 중공의 고관(高官)들조차도 공산당의 몰락은 “10년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2004년 인민일보에서 사설을 발표하여 “공산당, 다시 20년을 하게 하자”라고 큰 소리로 주장했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중공 자신의 가장 낙관적인 예측도 ‘20년’뿐이다. 사람들도 늘 말하지 않는가, “20년이 지나면 중국도 어쨌든 민주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분명한 것은, 사람들도 일찍이 이미 공산당이 무너진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럼,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이 문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어떻게 하는가?” : 겉으로는 부패 척결과 탐관오리 숙청을 외치면서 뒤로는 탐관오리들을 비호하는 중공. | 에포크타임스

때문에, “공산당이 마땅히 무너져야 하는가.”는 이미 문제가 아니며, 문제는 “어떻게 공산당을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더욱 현명한 물음은 “어떻게 해야 공산당을 무너뜨리면서도 사회 동란을 야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혁명의 폭력수단에 의거하는 것은 분명 타당하지 않다. 폭력이 초래하는 것은 다만 새로운 폭력일 뿐이고, 공산당의 통치는 사람들의 문화와 심리적인 단절을 조성했다. 오직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공산당을 반성하게 하는 것만이 공산당의 전철을 피할 수 있다. 현재 중국에서 세차게 일어나고 있는 ‘탈당 열조’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탈퇴하여 중공을 무너뜨리는 과정은 바로 한 민중이 각성하는 과정이고, 바로 중공 강권이 장차 무너진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또 여러 가지 신생세력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성장과정 중에서 자각적으로 공산당의 폭력원칙과 명백히 경계를 긋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직 중국 인민들의 심령이 진정으로 해탈되어 이성을 지닌 민중이 있다면 중국은 평온하게 넘어갈 수 있다.

9평 공산당을 읽고 자발적으로 중공 관련 조직을 탈퇴하는 중국인들. | 에포크타임스

적지 않은 서방 정치인들도 중공이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하고, 중국에 파괴적인 동란이 나타나 세계질서를 충격할까 염려한다. 그리하여 “세계가 중공을 감싸기”를 원하고 중공을 도와 정권을 유지하게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아주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근시안적인 행동이다. 왜냐하면 공산당 통치하의 중국은 필연코 문제가 나타날 것이고, 폭발할 때를 기다린다면 문제가 더욱 커지고 그때는 후회해도 늦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없다면 중국은 더욱 좋아질 것이다. 그럼 공산당이 있다면, 중국은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4)공산당이 중국에 가져다준 것

과거 약 한 세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3개의 큰 산을 뒤엎고”, “인민을 이끌고 해방”한 중공이 바로 중국 인민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큰 산이 되었다.

중공의 역사는 바로 한 부의 폭력투쟁, 사상투쟁과 권력투쟁이 서로 엇갈린 역사로서, 운동은 한 차례 또 한 차례씩 잇따랐다. 예를 들면 ‘진반(鎭反)’, ‘숙반(肅反)’, ‘3반(三反)’, ‘5반(五反)’ 역대의 사상비판, 사회주의 개조, ‘반우파(反右)’, ‘대약진’, ‘반우경기회주의(反右傾)’, ‘4청(四清)’,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 ‘경계선을 가르기(清階)’, 일타3반(一打三反),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 문화대혁명, 덩샤오핑 비판하고 우경반란풍조를 반격, 반자유화, 6.4, 파룬궁 탄압…. 매 차례의 운동은 모두 국가와 인민의 원기를 크게 상하게 했다. 중공 정권은 중국 인민들을 전대미문의 노예상태에 처하게 했다. 그 어떤 비공산당 정권도 중화민족에 이렇게 심각한 재난을 가져올 순 없다.

▶영토 팔아먹기

1999년 12월 9일과 10일, 중공 두목 장쩌민은 북경을 방문한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가 중러 국경선 동서양단의 서술협정서(中華人民共和國政府和俄羅斯聯邦政府關於中俄國界線東西兩段的敘述議定書)”를 체결했다. 외흥안령(外興安嶺) 남쪽, 흑룡강성 북쪽의 ‘외흥지역(外興地區)’, 우수리강 동쪽의 ‘우동지역(烏東地區)’, 또 탕누우량해(唐努烏梁海)지구 및 쿠릴열도를 포함하여 불법적으로 침략당한 중국 영토 적어도 백여만 Km2가 정식으로 러시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2001년 5월, 장쩌민은 또 타지키스탄과 협약을 체결해, 분쟁지역 2만 7천 Km2 가량을 공손히 바쳤다.

장쩌민은 적어도 100만 Km2가 넘는 분쟁지역을 러시아에 바쳤다. 위 지도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 | 에포크타임스

장쩌민은 외부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막이 분명하지 않은 작업을 하고, 비엔나 《조약법 공약(條約法公約)』에 따라 무효로 할 수 있었던 일련의 중러 불평등조약을 승인하고, 원래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회수할 수 있는 드넓은 땅을 러시아에 공손히 바쳤고 중화민족이 생존 발전할 퇴로를 끊어놓았다. 중공 고위층은, 장쩌민의 매국행각이 드러날 경우 필연코 중공 통치에 위기가 닥칠까 우려하여 장쩌민과 서로 의기투합해 이 사실을 극력 숨기고 있다.

▶환경 파괴

공산당은 극단적으로 오만방자하여 일체 자연법칙을 무시한다. 그것이 정권을 잡은 후 처음 30년 동안, 하늘과 투쟁하고 땅과 투쟁하며 사람과 투쟁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면서도 도리어 자연환경은 몹시 크게 파괴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단편적으로 경제의 고속성장만을 추구하면서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어 장기적인 이익을 해쳤다. 인년(寅年)에 묘년(卯年)의 식량을 먹는 식으로, 생태자원을 미리 앞당겨 지나치게 소모했다.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오염이 가장 심한 나라가 되었고 공산당이 남겨놓은 생태환경은 이미 오랜 세대를 이어가며 이 땅에 살아온 화하(華夏)의 자손들을 거의 담아낼 수 없게 되었다.

중공 환경보호총국에서 인정한바, 현재 중국에서 산성비 피해를 입는 지역은 국토의 3분의 1에 이른다. 대기 오염은 4억이 넘는 도시 주민들로 하여금 오염이 심각한 공기를 호흡하게 하여 1500만 명이 이로 인해 각종 기관지 질환과 호흡기 암을 얻었다. 수질 오염은 날로 부족해지는 수자원을 더욱 악화시켰고, 7대 강 수계(水系) 중 열악한 5급수가 41%나 차지한다. (주: 5급수는 이미 물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심지어 관개와 관상용으로도 부적합하다) 3억 6천만 농촌 인구가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고, 도시 하천의 90% 이상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오염으로 인한 암환자 촌이 서부의 신장(新疆)에서 동부의 헤이룽장까지, 남쪽으로는 윈난, 광둥까지, 북으로는 내몽골까지 거의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중국은 또 90%이상의 천연 초지가 퇴화되고 있으며 매년 증가하는 퇴화된 초지가 200만 헥타르에 달한다. 사막과 사막화한 면적은 이미 174만 3천㎢에 달하고, 매년 3436㎢의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1년에 큰 현(縣) 하나의 면적이 손실되는 것에 해당한다. 농경지의 점용으로 현재 중국에서 토지를 잃은 농민의 총수는 4000만 명 정도 되며 매년 200여만 명이 증가하고 있다.

일인당 평균 토지와 자연자원 점유량을 말하면, 중국은 원래 세계적으로 후미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발전해 내려간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장차 경작할 땅이 없어지고 마실 물이 없으며 호흡할 공기마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일부러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말이 아니다. 중공 관방에서도 현재 ‘지속 가능한 발전’을 크게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부 중공 통치를 수호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는 중공의 근시안적인 특징을 갖고 있기에 이것은 단지 외관을 장식하는 새로운 명사일 뿐이다. 오늘날, 중국의 수많은 생태재난이 조성한 결과는 이미 거의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며 이것은 전 민족의 재난이다.

▶중국민중 살해

중공은 정권을 잡은 이래, 역대의 정치운동 중에서 4천만 명을 살해했고, 3년 기근 중에 굶어죽은 4천만 명을 합하면, 총 8천만 명의 중국인을 살해했다. 중국과 외국 학자들은 이미 발표된 역사자료에 근거하고, 반복적인 통계연구를 거쳐 최후에 위와 같은 결과를 추산해 냈다. 하지만 중공 각급 정부에서 발표하는 숫자는 대부분 축소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숫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중공은 핍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인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말은 반박할 가치도 없다.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초기에,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전쟁을 치렀기에 중국 백성들은 안정을 바라고, 새로운 정권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다. 중공은 천하에 대사면을 할 수 있었고 정치협상제도와 여러 가지 법률을 완비할 수 있었으며 경제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공은 살계(殺戒)를 크게 열어 질풍노도식의 정치운동을 발동했으며, 살인으로 조성한 공포를 통해 독재제도를 건립했고 민주당파는 신속히 정치꽃병으로 전락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중공이 이상을 위해 살인했다고 말한다. 즉 마오쩌둥이 사람마다 평등한 사회주의제도를 건립하기 위해 살인한 것으로 일정한 대가를 치른 것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법은 더욱 황당한데, 독일의 히틀러와 일본의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살인한 것은 그래 그들의 이른바 ‘이상’을 위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은 모두 지나간 일이고 중공은 이제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아니다. 중공은 지금껏 살인을 중단한 적이 없다. 다만 과거에는 대대적으로 죽였다면 현재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슬며시 죽일 뿐이다. 예전에 중공이 살인한 목적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그것의 독재 권력을 수호하려던 것이었다면 현재는 살인을 복잡한 산업으로 변화시켰다. 예를 들면, 파룬궁을 박해하면서 파룬궁 수련생들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여 고가로 중국과 외국환자들에게 팔아 거액의 이윤을 얻었다.

▶재물 약탈과 유린

현재 중공은 매년 8%의 GDP 성장을 중공 집권 합법성의 근거로 삼았다. 중국의 몇몇 도시는 특수정책과 외자 유치에 힘입어 고층빌딩이 즐비하게 밀집해 번화한 모습을 만들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대도시, 연해, 기득권층에서 시선을 옮겨 농촌, 내륙, 일반 도시민과 중국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을 본다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빈곤이 여전히 중국의 무서운 현실임을 발견할 것이다.

중국이 원래 이렇게 가난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청나라 중엽 이전까지, 중국경제는 늘 세계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에 중국의 GDP는 전 세계의 51%를 차지했으며 이는 현재의 비중(4%)보다 훨씬 높다. 중화민국 시기에 비록 전란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북양(北洋)군벌정부는 그래도 25%의 경제성장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부(富)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전 세계 GDP 중 중국경제가 차지하는 비율이 청나라 이후 줄곧 하강해 왔음을 알 수 있다. | 에포크타임스

이것은 많은 부분이 중공의 약탈과 낭비 결과이다. 중공은 정권을 잡은 이후, 상공업개조와 인민공사화를 통해 민간의 재산을 몇 년 사이에 중공권력 계층의 수중에 집중했고 이를 ‘공유제(公有制)’란 미명으로 불렀다. 교묘한 수단과 힘으로써 빼앗았는데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중공의 극단적으로 어리석은 정책과 각급 간부의 낭비와 약탈은, 수많은 국민재산을 유린했고 중국을 철저히 가난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중공은 정권 건립 초기에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발동했다. 이때 들어간 총 비용은 500~6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국민수입의 절반을 한국전쟁에 썼다는 의미이다. 1960년대의 ‘대약진’은, 몇 천만 명을 사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조성한 직접적인 경제손실이 1200억 위안(당시 화폐가치로 계산한 것으로 아래도 마찬가지)이었다. 10년 문화대혁명이 초래한 중국의 경제손실은 적어도 5000억 위안에 달한다(이것은 무수한 진귀한 서적문물의 손실, 사상속박으로 인한 거대한 후유증과 전반 사회도덕과 법률질서의 붕괴, 1천만 가구의 집이 약탈당하고 2천만 명이 비판당하고 심하게 구타당했으며, 수십만 명이 핍박으로 자살하는 등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간접적 손실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1949부터 1979년까지 30년 동안의 고정자산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은 것이다. 마오쩌둥의 “세계대전은 빨리 일어나는 것이 늦게 일어나는 것보다 낫다”를 지도사상으로 한 공업의 대 이전, 소위 ‘3선공정(三線工程)’이 조성한 경제적 손실은 6000억 위안에 달한다.

80년대 이후 중국경제의 발전은, 바로 중공이 통제를 늦추고 백성들이 근면하게 노동한 결과이지, 중공이 자랑하는 소위 ‘정치적 성과’가 전혀 아니다. 번영의 밑바탕에는 심각한 위기가 잠복해 있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경제 발전 방식, 떨어지지 않는 실업률, 날로 확대되는 빈부격차(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현재 중국도시 주민의 수입격차는 ‘지니계수’로 0.5에서 0.6 사이이며 이는 유엔에서 규정한 위험 경계선을 훨씬 초과한 것이다), 대규모 국유자산의 유실(중공은 2004년 손실이 3521억 2천만 위안 이상이라고 인정)과 탐관오리들의 해외재산 도피[2004년 8월 16일 ‘법제만보(法制晚報)’의 보도, 상무부가 처음으로 발표한 자료에서 보다시피, 중국에서는 현재 탐관오리 4000여 명이 이미 외국으로 도망쳤으며 이들이 가져간 자금은 500억 달러에 달한다]은, 바로 취약한 중국경제체계를 붕괴의 임계점으로 몰아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공은 또 국력을 기울여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했고, 천문학적인 국가재정을 무고한 주류 민중을 박해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일체 대가를 아끼지 말고 파룬궁을 소멸시켜!” :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투입한 자금에는 감옥, 노교소 유지와 증축, 경찰, 610, 특무, 세뇌반, 감시와 체포비용 외에 외국 정부를 매수하거나 해외에 특무를 파견하는 비용, 각국에 주재하는 화교들을 매수하는 비용 등을 포함한다. | 에포크타임스

▶도덕 파괴

중국 사람들은 탐오와 부패, 정경유착, 경찰과 폭력조직의 결탁, 음란물, 도박, 마약의 유행, 위폐유행, 신뢰의 위기 등 도덕이 크게 타락한 표현에 대해 이미 아주 익숙해졌다. 이 외에 또 한 가지 도덕이 타락한 표현형식이 있다. 이것은 비교적 잘 드러나진 않지만 해악은 더욱 크다. 그것은 바로, 도덕표준마저 모두 함께 추락한 것으로 사람들은 이미 떨어져 내려온 도덕표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가늠하고 자신이 아주 괜찮다고 여긴다. 사실, 중국사회는 이미 도덕이 붕괴하기 직전까지 왔다.

공산당 관리들과 폭력조직의 구조적인 결탁 | 에포크타임스

이런 상황은 바로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중공은 인민들에게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과 약육강식의 투쟁관념을 주입했고, 유신론과 일체 정통사상을 비판했으며, 기초부터 철저히 중국인의 도덕체계를 파괴했다. 공산당은, 도덕을 상부구조의 일부분으로 결국 통치계급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부정한다. 중공은 비록 ‘법치(法治)’를 높이 외치면서 인민들에게 현재 여러 가지 정황은 법치가 불건전하여 조성된 것이라고 오인하도록 만들었지만, 법치의 기초는 도덕이며 아무런 도덕적 단속이 없는 사람은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는다. 중공은 법 위에 군림하면서 앞장서서 법률의 실시를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악법을 제정하여 선량한 백성을 박해하고 있다. 중공이 거짓말을 제도적으로 고정해 놓았기에 관원들은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료사회에서 아예 생존할 수 없다. 백성들도 이 상황을 직접 보고 깨닫고 이해하기에 먹지 않으면 손해이며 갖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하고, 네가 검으면 나는 너보다 더 검다는 식이 되어 사회풍기는 일사천리로 급속하게 타락하였다.

<관자>에서는, “예의염치는 나라의 4가지 근본도덕이고, 4가지 도덕을 잘 베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禮義廉恥,國之四維;四維不張,國乃滅亡).”라고 했다. 무력과 돈만을 숭배하는 중공은 도덕이 사람들의 마음을 장기간 안정되게 하는 작용을 일으킴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인성 중의 악이 중국사회에서 극도로 복잡하게 표현되는 것에 직면하여, 중공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다. 만약 역사적으로, 외적이 침입하여 중화민족을 망국(亡國)과 멸종(滅種)의 위험에 처하게 했었다면, 중공에 의해 조성된 인심이 전면적으로 통제를 상실한 오늘날의 현실은 중화민족으로 하여금 역사상 전례가 없는 더욱 무서운 위기에 직면하게 했다.

▶문화 훼멸

공산당은 3교를 일제히 없애고, 한자를 간략화하여 중화문화의 허리를 잘랐으며, 발광적으로 문물을 파괴하고 지식인들을 박해했다. 문화대혁명 이후, 전통문화가 기본적으로 유린당한 후 일부 표면문화를 가지고 외관을 꾸미고 돈을 번다. 이에 대해서는 『9평 공산당』 제6평과 본서의 1,2장에서 이미 상세히 논술했기에 여기에서 다시 부언하지 않겠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외적의 침략을 당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2000만 명이 넘는 중국 군인과 민간인의 사망을 초래했고 600억 달러의 직접적인 경제손실을 끼쳤다. 그러나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자칭하고 ‘가장 광대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고 자칭하는 중공이란 이 당이 중화민족에게 조성한 심각한 상해는, 도리어 일본 군국주의를 훨씬 초과했으며, 또 역사상 그 어떠한 외적의 침입보다도 더 큰 상해를 초래했다.

아주 많은 중국인들은 한편으로 중화민족의 정통으로 자처하면서 외국인들 앞에서 될수록 대국의 풍모를 표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극력 공산당의 형상을 수호하면서 남들이 조금이라도 비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중화문화를 짓밟은 원흉이 바로 천지와 투쟁하고 재물을 탐하며, 나라를 팔아먹고, 온갖 나쁜 짓이란 짓은 다하는 이 공산당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만약 정말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우선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바로 중공과 한패가 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공산당이 없어져야만 신중국이 있을 수 있다.

2. 엄마아빠보다 당이 더 친근해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로 말한다면,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이 구호를, 이미 아주 가소롭게 생각할 것이다. 중공이 오늘날 이 구호를 직접 선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런 적나라한 주입에 반감을 느끼기 때문만은 아니며, 아직도 장기적으로 명시적이거나 혹은 은밀한 선전을 통해 사람들이 이미 이 구호의 배후에 있는 내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비자각적으로 중공을 조국과 동일시할 때, 중공은 단지 애국주의를 선전하고 ‘장강의 노래(長江之歌)’를 부르기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당’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선전은, 여전히 오늘날 사람들의 사유 속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이 구호를 공산당이 어떻게 말했고 또 어떻게 그것의 선전목적에 도달했는지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1)선전 중의 다양한 표현형식

거의 모든 ‘혁명’ 영화 속에, 모두 이런 장면이 있다. 영웅 인물이 몸에 큰 상처를 입고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직도 가슴속에서 무언가를 한참 뒤적이다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자신을 대신해 마지막 당비 혹은 입당신청서를 제출해 달라는 장면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목적은 바로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주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숨을 거두기 전에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부모, 처자식이지만, 당문화의 선전 중에서 사람들이 임종 전에 생각하는 것은 육친정이 아니라 엄마아빠보다 더 친근한 ‘당’이며 자신이 가진 최후 물건까지도 당에 바쳐야만 눈을 감을 수 있다.

군대와 관련된 작품 속에서는, 종종 지도원과 정치위원(政委)이 어떻게 사병들에게 관심을 갖는가 하는 것이 있는데, 따뜻이 보살펴주고, 가정의 곤경을 돌봐주는 등 세부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사병의 입을 통해 부대는 ‘큰 가정’이자 큰 용광로이며 자신은 ‘큰 가정’속에서 ‘성장’하고 ‘진보’했다고 말하는데, ‘큰 가정’의 아빠엄마는 자연스럽게 바로 ‘당조직’이 된다. 지방생활을 반영한 것도, 좋은 일은 늘 ‘우수당원’이 한 것이고 당위원회 서기는 생활, 결혼, 가정, 주택 분배, 출산, 사람들 사이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마지막에는 모두 ‘당지부 서기’가 ‘대국을 주재’하고 공정하게 처리한다. 일이 있으면 조직을 찾고, 조직을 믿으며, 당의 사유방식을 믿으라고, 자신도 모르게 감화시키고 주입하며, 사람의 잠재의식을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주제로 이끈다.

또 선율이 아름다운 많은 가곡에서도, 그 속에 관통된 것은 바로 노골적이든 은밀하든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주제이다. “파란 하늘엔 흰 구름이 떠가고, 흰 구름 아래엔 말들이 달리네, 채찍 소리 사방에 울리며, 흰 새가 날고….”(‘초원 위로 떠오르는 지지 않는 태양’) 사람들이 민족적인 색채가 농후한 이 노래를 부를 때,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바람 부는 풀밭 아래 소와 양이 보이”는 초원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서론에 불과할 뿐이며 이 노래의 최후 구절은 진정한 주제로 귀결된다. 바로 “마오 주석의 공산당이 우리를 키워 초원위로 떠오르는 지지 않는 태양으로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우리 함께 노를 젓자(讓我們蕩起雙槳)’라는 이 노래는 선율이 아름다워 심지어 많은 성인들도 다시 음미하는 곡이다. “작은 배는 파도를 밀고, 바다에는 아름다운 백탑이 거꾸로 비치며, 주위에는 녹색나무로 된 붉은 담장이 감돈다.” 사람들이 시와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서에 잠기게 한 후, 잘 드러나지 않는 가사 한 구절에서 명확하게 주제를 밝혔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한테 물어본다. 누가 우리에게 행복한 생활을 마련해 주었는가” 어느 아이가 자신의 생활을 안배해 준 것이 부모란 것을 모르겠는가? 이 의미심장한 한마디 질문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은 더욱 깊은 한 층의 주제인 “부모보다도 더욱 친한 당이 우리의 행복한 생활을 안배했다”는 것이다.

중공은 선전 중에서 전형적인 모범을 수립하는 것을 아주 즐겼는데, 물론 이때 좋은 일을 하는 인물은 다 당원(黨員)과 단원(團員)이었다. 어떠한 사회에도 모두 마음이 선량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공은 이런 좋은 사람들을 ‘당조직’에 끌어들이는데 아주 능숙하고, 또 선전수법을 이용하여 당원 속에서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을 찾아내는”데 능숙하다. 그들이 인성 중에서 선량한 일면의 작용 하에서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일을 한 데 대해 중공은 이를 크게 선전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당성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이런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의 배양과 교육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 공산당원으로서 사랑의 최고경지는 인민을 사랑하는 것이다”는 등을 말한다. 그리고 또 당에서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는, “신중국에서 태어나 홍기 아래에서 자라고 시시각각 사회주의 대가정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태도를 표시하게 했다. 선전 중에서 이런 행위를 고취하는 것은 모두 사람들에게 오직 공산당원만이 진정으로 당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이렇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신의 친부모를 초과하며,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중공은 사회자원의 각 방면을 약탈하고 독점했다.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고 일을 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의식주와 행동 및 생로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중공이 엄밀하게 통제하는 사회 속에서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중공은 선전 중에서 사람들의 개념을 뒤섞고, 정상사회 중에서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히 구비해야 할 생활환경을 모두 ‘당’ 혹은 ‘정부’가 준 복지라고 말해, 사람들로 하여금 부모가 자신을 낳았다는 것마저 잊게 하고, 돈은 자신이 벌어온 것임을 잊게 했으며, 시비를 뒤섞는 당문화 사유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우리 당이 없다면, 어디 지금처럼 좋은 생활이 있겠는가!”, “그래도 당의 부민(富民)정책이 좋다.”, “개혁의 봄바람이 온 땅에 불어온다.” 등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고 생활이 제고된 것은 모두 당이 준 것이며 그 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은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북경에 ‘사스’가 유행했을 때 장쩌민은 감염이 두려워 상해로 도망갔다. | 에포크타임스

선전 중에서, 당의 공덕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좋지 못한 방면, 예를 들면 빈부격차, 탐오와 부패, 사회의 각종 난잡한 현상, 자연재해 등도 모두 중공에 의해 문장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다”, “지도가 내려오다”, “따뜻함을 전하다”는 등이며 인터넷에는 매일 톱기사로 ‘반부패’ 결심, ‘홍수방지 투쟁의 승리’를 지도, ‘사스’ 공격에 대한 저항 성공 등이다. 모두 백성들의 고난을 이용해 중공 자신의 영광을 만드는 것이다. “초점탐방” 프로그램에서는 매일 사회의 어두운 면과 여러 가지 불공정을 제기한다. 이렇게 폭로한 다음 사람들이 사회현실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은 후 국면을 수습하는 것은 꼭 당과 정부의 ‘각급 관련부서’이다. 선전 중에서 좋은 일만 말하고 나쁜 일을 말하지 않는 것도 더욱 숙련되어, 사건이 얼마나 나쁘던지 상관없이, 문제는 최후에 모두 “오직 착실하게 당의 ××정책을 따르기만 하면 꼭 해결될 것이다.”로 귀결된다. 이런 선전의 주제는 바로 당은 어느 곳이든 없는 곳이 없고,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중국인들의 생활 속의 각종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해결해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모도 이런 재간이 없으니 정말로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

2)당이 엄마라는 정서 주입

“산(山) 노래를 불러 당에게 들려주네, 나는 당을 모친에 비유한다. 어머니는 단지 내 몸을 낳았지만, 당의 영광은 내 마음을 비춘다.”

“어머니,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은 그 감미로운 모유로 나를 양육하고 키웠습니다…. 당이여, 당이여, 당신은 마치 어머니처럼 나를 배양해 키웠고 조국을 사랑하도록 교육했으며 문화를 배우도록 격려했으며….”

“당이여, 친애하는 모친이여!” | 에포크타임스

이 두 곡은, 오늘날의 중국인들도 귀에 익숙하다. 그렇다면 중공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의인화한 선전수법에 열중하는가?

왜냐하면 어머니란 호칭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감이 충만하게 하는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아 길렀고 우리에게 은혜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를 몹시 사랑하며 우리에게 정이 있다. 어릴 때, 우리는 어머니에게 의지해 자란다. 성년이 된 후에, 우리는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중국 전통사회는 효도를 중히 여기는데, 설령 지고무상(至高無上)한 권력을 쥔 제왕(帝王)이나 장상(將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주 존경했다.

공산당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자기를 어머니로 분장했고 이를 통해 중국인들이 당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봉양하도록 기만한 것이다. 지난 몇십 년 동안의 선전을 통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공산당을 한 가족으로 여기게 되었다. 공산당이 나쁜 일을 한 후, 사람들은 ‘당엄마’의 애초 의도는 좋은 것이라거나 혹은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거나 혹은 개별적인 사람에게 이용당했다고 믿는 것을 좋아한다. 전체적으로 ‘당’은 틀리지 않았고, 설령 ‘당’이 틀렸다 해도 용서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당이 엄마라는 정서와 관련되는데, 그것은 바로 “집안의 허물은 밖으로 소문내지 않는 법이다”는 것이다. 만약 누가 공산당이 중국 백성들에게 한 나쁜 일을 폭로하면, 특히 국제사회에 폭로할 경우, 바로 ‘당과 정부’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것이라고 여기는 ‘애국 인사’들이 마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느끼면서 즉시 일어나 그를 비난한다.

공산당이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은 잠시 차치해 두자. 설사 그것이 우리의 어머니라고 가정한다해도, 만약 한 어머니가 식칼을 들고 아이들을 대한다면 이웃들은 단지 상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마땅히 경찰을 불러야 한다. 설령 백보를 양보해, 중공이 좋은 마음으로 나쁜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인민들은 마땅히 폭로해야 하며 강대한 여론 압력으로 중공이 계속적으로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른 한편, 더욱 많은 역사사실과 내막이 폭로됨에 따라,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다. 공산당의 살인, 부패, 기만과 중국 백성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그것들이 공개적으로 선양하는 이론원칙이자 일관적인 정책방침이라는 것이다. 정풍, 반우파, 문화대혁명에서 줄곧 파룬궁 박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절대 공산당의 ‘실수’가 아니며, 그것의 엄밀한 획책이자 체계적으로 실시한 통치술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다시피, 중공은 절대로 엄마아빠보다 더 친근한 친인이 아니며, “좋은 사람” “친인”의 외투를 걸친 강도이자 깡패이다.

3)도적을 아버지로 여기는 심리적 원인

80년대 초에 유행했던 영화 “말을 방목하는 사람(牧馬人)”의 주인공인 쉬링쥔(許靈均)은 우파로 몰린 후, 내몽골에 20년 동안 유배되어 있었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 갔던 아버지가 귀국하여 그를 보러왔고, 그에게 미국에 가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유는 자신과 천백만 중국 인민들의 고난은, ‘한바탕 역사적인 오해’로, ‘어머니가 아이를 오해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어머니를 원망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때는 방법이 틀렸지만 말이다.

쉬링쥔의 생각은 아주 보편성을 띠고 있다. “엄마가 아이를 때리는 것”과 “엄마가 아이를 오해한 것”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의 문예작품 속에서 늘 사용된 비유였고, 또 아주 많은 중공의 역대 정치운동 중에서 걸어 나온 지식인들과 당원 간부들의 심태였다. 우리는 이런 정서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공산당에게 이렇게 거듭 농락당하고, 잔혹하게 탄압당하며, 감옥과 노교소, 농촌과 변방 유배지에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시기를 낭비하거나 심지어 공산당의 핍박에 의해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집안이 망한 피해자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쉽게 중공의 거짓 ‘참회’를 받아들이는가?

중공이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를 선전하는 진실한 함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엄마아빠보다 더 친한” 중공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효도를 숭상하는 중국인들은 줄곧 아무나 부모로 삼는 것을 커다란 수치와 모욕으로 여겨왔다. “원수를 아비로 섬긴다”는 욕설은 욕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중공통치하에서 그렇게 많은 중국인들이 80년밖에 되지 않는 중공이 자신을 5천년 역사를 지닌 중화민족의 어머니로 비유해도 묵인하고 있는가? 이 배후의 심리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중점적으로 분석한 세 가지 주요원인은, 첫째 중공의 기만선전과 관련되고, 다른 두 가지는 기만당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관련된다.

(1)진짜와 가짜, 두 개의 공산당

공산당은 일관적으로 ‘도덕’이란 큰 깃발을 잘 치켜든다. 그러나 그런 도덕구호의 내포는 완전히 중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면, “전심전력을 다해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는 말 속의 인민은 당이 정의를 내린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당이 정의를 내린 적에 대해서는 도리어 추풍이 낙엽을 쓸어버리듯 잔혹하고 무정한 것이다. ‘대공무사(大公無私)’는 마음속까지 전부 당에 바치라는 것이고, “뇌봉(雷鋒)의 좋은 본보기를 학습하자”는 것의 중점은 그의 선명한 계급적 입장과 나사못 같은 당에 대한 충성을 배우라는 것이다. “5강 4미 3열애(五講四美三熱愛)”는 “공산당을 열애하고 사회주의를 열애하자”는 것을 떠나지 못한다. “심령의 아름다움(心靈美)”은 반드시 공산당 지도하의 사회주의를 열애하는 것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문명’이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으로 사상문화와 여론 진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것이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을 ‘덕’의 최고 경지로 삼으라는 것이다. ‘조화사회’가 강조하는 것은 당과 일치를 유지하는 ‘사회주의 조화사회’이고, 당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조화이다. ‘8영8치(八榮八恥)’는 당이 입장에서 무엇이 영광이고 무엇이 치욕인가를 갈랐다.

바로 중공의 도덕운동은 모두 공산당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도덕의 최고경지로 삼았기 때문에, 도덕교화를 장려하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다만 한 시기 운동할 뿐이다. 이것은 도리어 중국의 사회도덕이 날로 타락하는 것을 조성했으며, 도덕의 위기는 현재 이미 중국에서 공인하는 사회적 위기로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이런 ‘도덕운동’은 중공에 한 층의 ‘도덕’이란 외투를 걸치게 하여 민중들을 미혹시킨다. 동시에 중공은 일관적으로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범한 일체 잘못을 모두 소수 희생양에게 덮어씌웠다. 언론의 선전은 더욱 중공을 “외적을 막아내고 중국을 진흥”시킨 화신으로 묘사했다. 그럼 이렇게 장기적으로 내려간다면, 민중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공산당의 쓴맛을 보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가상적인 공산당을 수립하게 되며, 이 ‘가상’이야말로 공산당의 ‘본질’이자 ‘주류’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설사 자신이 막대한 상해와 억울함을 당했다 해도, 여전히 선의적으로 중공을 가늠하고 ‘당’의 출발점은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

(2)자신이 속았다고 인정하는 것을 거절

대개 기만당한 사람들은 늘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원인은 기만당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당시 유치하고 쉽게 믿었으며 경험이 없고 세상물정을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청년들은 이전에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려는 이상을 품고 중공의 선전을 믿었으며 그것이 정말로, “한마음으로 민족을 위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혹은 중공에 가입했고, 혹은 중공의 동반자가 되었으며, 그것에 대해 일종 동정하고 찬양하는 태도를 지녔다. 중공의 ‘사업’ 중에서, 그들은 대량의 심혈을 지불했고, 아주 많은 정을 투입했다. 끝내 어느 날, 그들은 자기의 순진한 이상이 중공에게 무정하게 희롱당한 것을 발견한다. 중공 내부의 알력과 타락은 역사상 그 어떤 소위 ‘착취계급’ 정권을 능가하며, 중공정권이 인민과 국가에 가져온 재난도 역사상 그 어떤 외적의 침입을 능가한다. 이때, 그들은 마땅히 불현듯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아 자신의 인식에서 잘못된 영역과 인격적인 약점을 반성하며, 자기가 어떻게 중공에게 이용당했고, 중국을 어지럽히는 중공의 도구로 되었는가를 반성하며, 더 나아가 행동을 취해 그것을 폭로하며, 그것을 제압하고, 혹은 적어도 그것을 이탈하여 다시는 계속해서 악당의 앞잡이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변명하고, 체면을 중시하며, 자아에 강렬하게 집착하는 이런 심리상의 약점은 그들이 청성(淸醒)하게 위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들은 잠재의식에서, 공산당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이상추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기고, 자기는 애초 가득한 열정과 좋은 염원을 품고 ‘혁명에 참가’한 것이라고 느낀다. 자신의 이상 추구를 부정하는 결론을 얻어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산당의 죄악을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혹은 축소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들은 행위의 동기와 효과가 종종 위배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당원 개체의 동기는 절대로 중공의 전체적인 동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며, 당원의 개체 행위도 절대 중공의 전체행위와 같지 않으며, 후자야말로 중공이란 조직의 성질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를 질책하려는 의도가 없다. 중공이라는 이 동서고금의 사악을 집대성한 조직은, 좋은 말은 다 하면서 온갖 나쁜 일을 다 저질렀는데, 그 사악과 위선은 인류의 경험과 상상을 초과했다. 공산당이 중국에서 일어설 때는 또 중국의 국력이 계속 아래로 떨어질 때였고, 내우외환이 절박한 위기에 빠졌을 때였다. 그런 상황 하에서 냉정하게 사고하고 이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몇십 년이 지난 오늘, 반평생 심지어 더욱 오랜 시간 기만당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중공의 본래면목을 알 기회가 있게 되었고, 이 거대한 심리적인 차이에 적응하자면, 철저하게 자신의 생애와 사업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자면 특히 비범한 성실과 거대한 도덕용기가 필요하다.

(3)스톡홀름 증후군

1973년 8월 23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완전무장한 강도들이 뛰어들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총을 난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티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두 명의 강도는 남자 세 명과 여직원 1명을 납치했다. 경찰이 현장을 포위하여 대치하다가, 28일 공격에 성공해 인질을 구하고 강도를 사로잡았다. 경찰과 대치하던 6일 동안, 인질들은 의외로 외부의 구원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하러 온 경찰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여겼고 자신들을 납치한 사람들이 그들을 보호한다고 여겼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몇몇 인질들은 구출된 후에도 강도들을 고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언론과 법관에게 강도를 찬양하면서 강도가 자신들을 죽이지 않고 선량하게 대해준 은혜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중 여자 인질은 강도 중 한 명과 약혼까지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기금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강도를 위한 자금을 모았다.

생명을 위협당할 때, 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은 이 몇 명 인질들로 하여금 그들을 납치한 사람들을 인정하게 했고 그들의 이런 인정은 위협이 해소된 후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증상을 나중에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불렀다.

스톡홀름증후군이 생기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조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하고, 이 폭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수시로 서슴없이 그들을 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폭행을 하는 사람이 피해자에게 작은 은혜를 주어 피해자로 하여금 폭행자가 그들 생명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 셋째 조건은 피해자의 정보환경을 통제하여, 그가 세상과 동떨어지게 하여 폭행자가 피해자에게 얻지 못하게 하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어야 한다. 네 번째 조건은 피해자로 하여금 도망할 길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옌안 정풍운동. | 에포크타임스

독자 여러분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다시피, 중공은 스톡홀름 증후군을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했다. 중공은 중국인들을 매우 성공적으로 세뇌했고 그 메커니즘과 스톡홀름 증후군의 메커니즘은 놀랄 정도로 유사한 점이 있다.

중공은 비교적 규모 있게 스톡홀름 증후군을 만들어냈다. 40년대의 옌안정풍, 간부심사, 간첩제거운동부터 시작하였다. 당원의 반성자료는 일반적으로 모두 3번 내지 5번 수정했는데, 어떤 사람은 무려 13차례 이상 수정하기도 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고비를 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운동이 진행되던 나날에, 간부들은 보편적으로 긴장하고 초조해했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몰랐고 밤에는 편하게 자지도 못했다. 당원 간부들은 강대한 폭력 위협과 이론 주입 하에 기나긴 정신적 지옥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육체에서 영혼까지 모두 떨면서 ‘당’의 권위 아래 굴복했다. 작가 류바이위(劉白羽)는 이 시기를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간부를 심사하는 운동의 충격을 거친 후, “만장 높은 하늘에 고립되어 있던 데에서 진정으로 평탄한 지면에 내려왔다.”라고. 여기서 말하는 소위 ‘평탄한 지면’이란 것이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이며 자신이 건강할 때의 상태를 망각한 것이다.

중공은 정치운동 중에서 흔히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여 한쪽 편을 끌어당기면서 다른 한 편을 타도한다. 매 당원마다 모두 자신이 ‘당’의 신임을 얻기를 희망하고, ‘당’이 자신을 자기사람으로 보고 적으로 간주하지 말기를 바라며, ‘투쟁의 신뢰하는 대상’이 되고 타격대상이 되지 말기를 희망한다.

또 한 가지 중공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은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이다. 매 차례의 운동이 지난 후 모두 “확대되었다”고 성명하고는, ‘선별’, ‘개정’, ‘누명을 벗겨주다’를 시작한다. 운동 중에서 운 좋게 관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흔히 누명을 벗겨주길 희망하며, 갑자기 닥쳐온 작은 은혜에 기뻐 놀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는데 이 때문에 ‘조직’에 대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여류 작가 딩링(丁玲)은 장편소설 『태양이 상간하 위를 비추다(太陽照在桑干河上)』로 1951년 “스탈린문학상”을 받았고, 1949년 이후 문단에서 한때 이름을 날렸다. 1932년에 중공에 가입했고, ‘국민당 반동파’에 의해 남경(南京)에서 3년 동안 연금되었던 딩링은, 그녀가 무한히 충성하는 ‘당’에 의해 20년 동안 유배되고 감금당하였으며, 그 사이에 비인간적인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당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녀는 당을 사랑했다.” “누명을 벗은” 후, 『태양이 상간하 위를 비추다(太陽照在桑干河上)』를 다시 출판했고, 자신은 여전히 “전사(戰士)처럼 마오 주석을 부르며 전쟁터로 나간다”고 했다. 1984년,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딩링은 중공 중앙에 편지를 써서, “52년 동안, 나는 많은 따뜻함과 영예, 행복을 얻었고 또 계발을 얻었다. 나로 하여금 더욱 당에 가깝게 접근하게 하였고 인민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으며 공산주의가 필승할 신심을 더욱 강화하였다.”고 했다. 이때 딩링의 나이는 80이었고, 인생의 4분의 1을 중공 감옥에서 보냈으며, 중공의 도리에 역행하고 잔혹하며 무정한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지만, 의연히 “전사처럼 마오 주석을 부르며 전쟁터로 나간다”고 했으니 실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공의 역대 정치운동을 겪고, 중공의 독재기구인 ‘소탕’, ‘파괴’, ‘박살’, ‘때려 부수’는 야만적인 역량을 목격하여 중공에게 놀라 혼이 빠져서, 설사 자기 집에 있어도 감히 큰소리로 말도 하지 못하고, 해외에 있으면서도 중공이 정의내린 ‘반동서적’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런 가련한 중국 동포들, 그들이 “엄마아빠가 친근해도 당보다는 못하다.”, “당이여, 친애하는 어머니여.”, “나는 당을 어머니에 비한다.”를 말하거나 혹은 노래를 흥얼거릴 때, 우리가 듣는 것은 바로 스톡홀름증후군에 걸린 뒤틀린 심령의 신음소리이다.

스톡홀름 증후군 : “당신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해도 살 길을 주셨으니 저는 당신에게 감격하고 탄복합니다!” 뒤에 보이는 작두 4개는 각각 레닌 작두, 스탈린 작두, 마오쩌둥 작두, 장쩌민 작두이다. | 에포크타임스

위에서 분석한 3가지 정황―중공에게 기만당하고, 자아에 집착, 스톡홀름증후군―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중공이 외치게 한 구호를 부르게 했다. 그 외에, 오늘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중공의 장기적인 훈련을 거쳐,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두 개의 얼굴을 드러내고 두 가지 어조를 바꿀 수 있다. 그들은 한 얼굴과 한 가지 어조로 중공 관원, 회의에서 태도를 표시하고 사상회보에 응하지만, 다른 한 얼굴은 한가하게 휴식하는 시간과 가족이나 친구사이에 사용한다. 몇 년 전 대륙에서 유행하던 순구류(順口溜)가 있었는데, 전형적으로 이런 심태를 반영하고 있다. “반찬을 많이 먹고, 술을 적게 먹으며, 아내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라.”고. 무엇 때문에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모두 가족(친구)의 관심이 진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이 비록 “전심전력을 다해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만, 도리어 종래로 사람의 생사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태도를 표시하지 않으면 또 안 되기에 단지 몇 마디 구호를 외치고 적당히 얼버무릴 뿐인데 바로 이른바 “진지하게 적당히 일을 얼버무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