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당(黨)문화]제5장 선전 중에서 흔히 보는 당문화(하)

2007년 03월 21일 오후 11:47 업데이트: 2019년 11월 6일 오후 10:19

하편: 당문화의 구체적 표현 

[당문화 해체]제5장 : 선전 중에서 흔히 보는 당문화 (하)


목 차

3.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야 한다 

1) 어디나 존재하는 양면(兩面)적인 선전수법
2) 당의 말을 들으면 무엇을 주는가
3) 당을 따라가는 몇 가지 유형

4. 당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 

1) “당”이 하라고 하는 것
2) “순종 도구”는 어떤 목적을 위함인가
3) “당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의 현재 표현
4) 반드시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


3.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야 한다 

선전 중에서 중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산당이 없으면 신(新)중국은 없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고자 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당을 가장 친근한 친인으로 여기게 하려 했고 “육친 정”을 느끼게 하려 했다. 중공은 더욱이 민중들을 길들여진 도구로 만들고자 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에서 그것의 말을 듣고 따르게 하였으며 그것의 정치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했다.

1) 어디나 존재하는 양면(兩面)적인 선전수법 

사람들로 하여금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른다”는 목적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중공은 흰 얼굴과 붉은 얼굴을 겸용하는 수법을 채용하였다. 정치운동시기에는 흰 얼굴의 역할을 위주로 했고 평소에는 붉은 얼굴의 역할을 위주로 했다. 흰 얼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바로 독립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들에게 투쟁과 타격을 가한 후에 반면적인 교재로 만들어 민중들을 “교육”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두렵게 만들고 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한다. 중공의 매 차례 정치운동, 정풍운동(整風運動)은 모두 잔혹한 정치적 숙청으로 중공에 불충한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사람들의 공포심을 강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당의 말을 듣지 않고 당을 따라가지 않으면 좋지 않은 끝장을 본다는 것을 기억하게 했다.

중공의 정의(定義)에 따르면 오직 당의 말을 듣고 당과 일치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인민”에 속하며 당이 단결(團結)하는 대다수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 대상에 속하는 “낙후분자(落後分子)”에 속하게 되며 심지어 타격의 대상이 되는 “한줌도 안 되는 무리”에 속한다. 중공이 최근 20여 년간 비판한 소위 “자산계급 자유화” 역시 사람들의 독립적인 사상과 선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를 용납한다면 반드시 “당의 말을 듣지 않고 당을 따라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중공은 또 붉은 얼굴의 역할을 잘 하며 “정면적인 선전”을 한다.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는 것”을 주제로 하는 선전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 중에는 중공 두목에 대한 떠받들기와 신격화운동(造神運動)이 포함된다. 또한 중공의 지도적 지위, 정책방침과 소위 “성과”에 대한 부풀림이 포함되며 “당성교육(黨性?育)”, 전형 만들기, 시범표현 등이 포함된다.

당 두목을 떠받드는 것은 신격화를 위한 것으로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중공의 통치를 수호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오쩌둥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통치자, 위대한 키잡이”로 떠받들어졌고 그의 말은 “한 마디가 만 마디를 능가하며 구절마다 진리”로 간주되었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사람마다 한권의 “홍보서(紅寶書)”을 가지고 다녔고 사람마다 “마오 주석”의 말을 들어야 했으며 “마오 주석”의 훌륭한 전사가 되어야 했다. 설사 마오가 심각한 과실을 범해 직접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기근을 겪었지만 중공은 1962년 총결대회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더욱더 당의 지도, 중앙의 지도, 마오 주석의 지도를 의지하고 믿어야 한다. 이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더욱 쉽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떠벌렸다.

마오의 뒤에는 또 “영명한 지도자 화궈펑 주석”이 있었고 그 다음은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있었으며 장쩌민조차도 “과거를 계승하고 미래를 연 지도자”로 여겨졌다. “3개 대표”가 나온 후 중앙 선전부 부장은 “반드시 큰 힘을 들여 “3개 대표”의 중요한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하며 광대한 간부와 군중들의 행동지침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각종 사업의 근본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모(某) 농촌의 벽에는 심지어 ” “3개 대표”로 우리의 도살 작업을 지도하자”는 표어가 나붙기까지 했다.

“내가 모두 대표해!” : 소위 3개 대표사상을 제출한 장쩌민은 당(黨)정(政)군(軍)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인민들의 권리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에포크타임스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간다”는 또 “법률”의 형식으로 고정되었다. 헌법은 본래 한 나라의 근본적인 큰 법이지만 중공은 황당하게도 “공산당의 지도를 견지한다”는 것을 써넣었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말할 때”는 반드시 당의 지도를 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중공은 매 차례 중대 회의를 “단결된 대회”, “승리한 대회”로 선전했다. 중공의 매 차례 회의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심각하게 깨달아야 하고” “착실하게 학습해야 하며” “관철집행”하도록 요구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더욱더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중공은 또 정기적으로 소위 “당성”교육을 하여 당원, 단원들을 강요해 공산당의 각종 서적들을 배우게 했으며 사상보고서를 쓰게 했는데 이로써 사람들의 사상이 당과 일치하도록 보증했다. “사상을 단정하게 하고 당의 지도에 확고하게 복종하겠다”는 말은 이미 전형적인 보고서 언어가 되었다.

“당성에 복종” | 에포크타임스

신격화를 제외하고도 중공은 또 끊임없이 각종 전형을 수립했으며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는 것”은 혁명의 승리와 인민들의 생활개선을 가져올 수 있다고 선전하여 중공을 미화하면서 기만적으로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레이펑(雷鋒)과 같은 전형적인 인물을 통해 그의 행위를 선전했으며 마지막에는 또 “확고하게 당의 말을 들으며 한평생 당을 따라 걷자”라고 말하는 그의 주제를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당이 명령을 내려 농업을 크게 발전시키라고 하면 레이펑은 주동적으로 농민이 될 것을 신청했고, 당이 명령을 내려 공업건설을 강화하라고 하면 그는 또 집을 떠나 노동자가 되었다. 당이 명을 내려 청년들에게 군에 가라고 하면 그는 또 참군하여 부대에 들어갔다.

린뱌오(林彪)가 그를 위해 쓴 제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마오 주석의 책을 읽고 마오 주석의 말을 들으며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가 일을 하고 마오 주석의 훌륭한 전사가 되자.” 레이펑을 선전하고 레이펑을 따라 배우게 하면서 자연적으로 사람들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도록 요구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공은 자오위루(焦裕祿), 쿵판썬(孔繁森)을 선전하면서 동시에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는 “중심사상”을 도처에 삽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오위루 자신은 병이 위중한 것을 알았을 때 아내에게 “당신은 영원히 당의 말을 들어야 하며 생동감 있게 마오 주석의 저서들을 배우고 활용해야 하고 일을 잘하고 아이들을 붉은 혁명의 후계자로 교육해야 하오.”라고 당부했다.

중공의 각종문예형식에도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라는 주제를 부어넣었다. 《반짝이는 붉은 별》이란 영화에서 “혁명의 중책을 어깨에 짊어지고, 당의 가르침 마음속에 새기며, 혁명의 후계자 거센 조류와 같으니,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따르며 당을 따라 나가자”고 선전했고, 《갱도전(地道戰)》이란 영화에서는 “아무리 적들이 흉악해도 주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자”라고 선전했고, 《사가빈(沙家浜)》의 영웅인물 궈젠광(郭建光)이 부른 노랫말을 보면 “마오 주석과 당중앙이 방향을 인도하니 우리를 격려하여 수향(水鄕)에서 싸우게 하네”라고 되어 있으며 《해항(海港)》에는 “확고히 당의 말을 들으며 완강히 전진하고, 당의 말을 들으며 완강히 전진하자”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당의 말을 들어야 하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라는 선전은 이미 낡은 역사로 되었다고 인식할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 신격화운동이든 정치학습이든 아니면 당성교육을 하고 전형을 수립하든지 모두 오늘날 현실생활 중 도처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3개 대표에서 8영8치에 이르기까지, 당원들이 혈기(血旗) 아래에서 헌신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군대 관리, 변방의 전사,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의 “확고히 당의 지도를 옹호하고” “당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정치적 태도표시를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어디든지 다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로 충만해져 있다. 인터넷상에서 “당의 지도를 견지한다”는 검색을 하면 놀랍게도 천만 개가 넘는 관련문구들이 나타난다(“공자”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도 6백여 만 개에 불과하다). “영원히 당을 따라가자”는 단어로 검색해도 여전히 3백만 개가 넘는 관련 어구들이 나타난다.

중공이 6.4 천안문 학생운동에서 총을 쏘며 살인을 자행한 후 “1989년 초여름 발생했던 그 정치적 풍파를 겪은 후 오로지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더욱더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라는 말들이 각종 선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말이 되었으며 나중에 사람들이 사상회보를 쓸 때 견본으로 사용하였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면서 또 “비판” 활동을 벌였고 “백만인 서명” 등 정치적인 태도를 표시하는 활동을 펼쳤다. 파룬궁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는 사람들을 중공은 선전을 위한 전형적인 인물로 이용했다. 오랜 노동모범이 “우리 이 사람들의 평균연령은 60이 넘지만 부처를 믿지 않고 종교를 믿지 않으며 오직 당을 따라간다.”라고 말하는 것, 또 군인이 가족에게 쓴 편지내용에 “당 중앙의 결정을 확고히 옹호하고 “파룬궁”과 철저히 결별해야 한다.”는 등 이런 방법들은 모두 중공 정치 선전의 일관된 수법이다.

지금에 와서는 “영원히 당을 따라간다”거나 중공의 “주제교육”을 막론하고 모두 소위 독서독보(讀書讀報)활동, 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 관람의 달, “홍색경전 듣기” 시리즈 활동,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3개 대표” 학습을 통한 단체 활동 실천, 주제논단을 개최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젊은 세대를 독해하고 있다. 2006년 중공은 당 창건 85주년을 맞아 CCTV에서 문예 갈라 《영원히 당신을 따라간다》를 조직했으며 각지에서 위로는 기관학원에서 아래로는 가도(街道)향촌(鄕村)에 이르기까지 분분히 이를 본 딴 문예활동들이 대량으로 형성되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더는 공산당을 믿지 않는 오늘날에도 중공은 여전히 남들이 원하거나 말거나 도처에서 “당지도의 핵심적 지위를 견지하는 시기에는 당과 인민의 사업은 곧 순조로운 발전이 이루어지고 당의 핵심적 지도지위가 약화되는 시기에는 당과 인민의 사업은 곧 좌절을 겪는다.”라는 구호를 선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또 확고하게 “중국혁명과 건설의 역사가 증명”한 것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당의 말을 들어야 하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에 대한 중공의 욕구는 이미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지경에 이르렀다.

2) 당의 말을 들으면 무엇을 주는가 

역대의 정치 운동과 세뇌교육을 거친 지금의 중국인들은 거의 모두 중공에 대해 일종 본능적인 공포감을 갖고 있으며 습관적으로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간다. 수많은 사람들은 “당과 맞서면 절대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한다”는 말로 다른 사람을 훈계한다. 그렇다면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간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당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사고할 권리를 약탈했으며 10억이 넘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의 “당 대뇌”만 소유하게 만들었다. 당이 무엇을 말하면 곧 무엇이며 당이 무엇이 결정하였으면 곧 무엇을 집행한다. 독립적 사고의 정신은 한 민족이 번영 발전하는 중요한 조건인데 “당의 말을 듣는다”만을 고집하는 민족이 또한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겠는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중공은 통상적 의미의 일반적인 정당이 아니라 투쟁을 즐거움으로 삼고 하늘과 땅과 싸우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며 사람을 해치고 살인을 낙으로 삼는 조폭과도 같은 사교(邪敎)집단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아예 아무런 규칙도 논하지 않으며 어떠한 도덕적인 기초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중공의 주기적인 정치적 박해 앞에서 설사 그것들 자신의 가장 충실한 당원조차도 피할 수 없다.

중공이 타도한 중공의 역대 지도자들: 왼쪽 위부터 중공 창시인 천두슈(陳獨秀), 중공 총서기 보구(博古),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 중공 주석 화궈펑(華國鋒), 중공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 에포크타임스

류사오치(劉少奇)는 중공 제7대에 확고한 당내 제2인자였으며 옌안에서 처음으로 “마오쩌둥 사상”이란 명사를 제출한 사람으로 40년대에 마오쩌둥을 도와 정적(政敵)을 타도한 오른팔이자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국가주석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서 “역적, 스파이, 도적”으로 몰려 3년간 잔혹한 박해를 받고 처참하게 죽었다. 죽을 때는 사람의 모양이 거의 없었고 까치둥지처럼 된 백발은 길이가 두 자나 되었다.

병상에서 쓸쓸히 죽어간 류사오치. | 에포크타임스

1955년 중공이 수여했던 소위 “10대원수(十大元帥)” 중에서 주더(朱德)는 나이가 많고 1949년 이후 정치에 관심을 크게 돌리지 않았기에 정치투쟁 중에서 안전할 수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 또 뤄룽환(羅榮桓)이 일찍 죽은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8명은 모두 정치투쟁을 면치 못했다. 펑더화이는 “반혁명 군사집단”의 수령으로 몰려 투쟁을 당했으며 문화대혁명이 발동된 후 1971년 사이에 200여 차례 비판을 받았다.

죽을 때는 유골함에 “왕촨(王川), 남(男)”이란 세 글자를 써놓았다. 천이(陳毅), 쉬샹첸(徐向前), 녜룽전(?榮臻), 예젠잉(葉劍英)은 “2월 군사정변”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허룽(賀龍)은 투쟁으로 죽었으며 린뱌오(林彪)는 정변에서 실패하자 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다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죽은 후에도 대규모 투쟁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 “혁명”을 가장 철저히 했던 “홍위병 소장들”은 2년 후 이용가치를 상실하자 “산골과 농촌에 가서 빈농과 중농계급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속아 내려갔다. 린뱌오의 “571 공정기요(工程紀要)”에서는 한 마디로 “청년 지식인들이 산골에 가고 농촌으로 가는 것은 모습만 바뀐 징역살이와 같다”라고 꼬집었다.

문화대혁명 때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쫓겨 갔다. | 에포크타임스

역대의 정치운동 중에서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은 단체 중 그 누가 진정으로 “반당(反黨)”한 사람들이었는가?

1957년 반 우파투쟁 과정 중에 비판받고 유배되었던 지식인들은 대다수 중공 창립 전에 좌파문인들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중공을 동정하고 지지했으며 심지어 중공의 권력탈취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 가소로운 것은 그때 공산당에 대해 무한한 희망을 품고 일찍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다니며 가장 많은 고생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57년 가장 무고하게 우파분자로 몰렸던 사람들이었으며 아울러 도움을 많이 준 사람들일수록 더욱 심한 박해를 받았다.

민주당파의 장나이치(章乃器), 장보쥔(章伯鈞), 뤄룽지(羅隆基), 추안핑(儲安平), 왕짜오스(王造時), 교육가 장난샹(蔣南翔), 장룽지(江隆基), 작가 바진(巴金), 아이칭(艾?), 톈한(田漢), 딩링(丁玲), 자오수리(趙樹理), 뤄광빈(羅廣斌), 캉줘(康濯), 양모(楊沫), 학자 양센전(楊獻珍), 젠보짠(?伯贊), 뤼전위(呂振羽), 량쓰청(梁思成), 연예계의 마롄량(馬連良), 시샤오보(奚嘯伯), 저우신팡(周信芳), 상샤오윈(?小雲), 옌펑잉(嚴鳳英) 등은 모두 박해를 받았다. 이 사람들 중에는 공산당원도 있고 혹은 일찍이 사상개조를 통해 공산당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도 있으며 또한 중공 정권을 위해 거대한 공헌을 했지만 여전히 박해받아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다. 소수는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놓았다.

1956년 11월 문화부와 중국연극협회는 상해에서 연합으로 “가이자오톈(蓋叫天) 무대생활 60년 기념회”를 개최했다. 톈한(田漢)은 문화부를 대표하여 가이자오톈에게 영예 상장을 수여했으며 동시에 “탁월한 연극예술가 가이자오톈선생을 따라 배우자”란 주제로 발언했다. 가이자오톈은 답사에서 격앙된 어투로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가이자오톈은 한 무리 폭도들에게 끌려 나가 저자거리에서 구타당해 다리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똥차에 실려가 시내를 돌아다니며 투쟁을 받았다. 그때 이미 나이가 회갑에 가까웠던 가이자오톈은 모욕을 견디다 못해 몇 번이고 똥차에서 기어 나오려 했지만 매번 폭도들에게 저지당했다. 중국 방방곡곡을 누볐던 예술가는 이렇게 백주 대낮에 박해받아 맞아죽었다.

작가 라오서(老捨)는 정치에 복종한 후 줄곧 바싹 공산당을 따르면서 작품을 썼다. 1949년 이후에 “용수구(龍鬚溝)”, “춘화추실(春華秋實)”, “청년돌격대”, “붉은 뜰”과 “일가 대표” 등 연이어 극본을 내놓으며 중공정권을 찬양했다. 1966년 8월 23일 문화연맹 주석이었던 라오서는 홍위병에서 끌려 나가 투쟁을 받았다. 그와 함께 투쟁 받았던 작가들로는 샤오쥔(蕭軍), 눠빈지(駱賓基), 예술가 쉰후이성(旬慧生)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를 절반만 밀었고 또 “조직폭력배”, “반동학술권위”, “잡귀신”의 감투를 썼고 머리에는 먹물을 부었다. 홍위병들은 그들에게 연극복장, 문물, 서적을 불태우는 불구덩이 주위에서 “혁명의 불씨”세례를 받게 했다. 동시에 연극 소품과 동(銅)으로 만든 가죽벨트로 매를 때렸다.

89년 천안문에서 학생들이 내세운 구호는 “반부패”, “반관료(反官倒)”로서 당국에 대해선 에누리 없이 협조적이고 간청의 태도였다. 학생들은 민중들과 같은 인식을 달성했고 “평화, 이성, 비폭력”의 원칙을 견지했으며 학생대표들은 심지어 청원서를 받쳐 들고 인민대회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 5월 23일 학생규찰대대원들은 심지어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 초상을 더럽히고 손상시켰던 3명을 경찰서로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10일 후 중공 군대는 천안문을 피로 휩쓸었다.

공산당이 연출한 수많은 인간세상의 추태 가운데서 의미심장한 두 가지가 있다. 

반(反)우파 운동 중에서 지식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적극성”, “혁명성”과 “당과 가까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지표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표현해도 소용이 없었다. 57년 10월 11일, 북경 청년단 중앙대회당에서는 청년작가를 비판 투쟁하는 회의를 열었고 한 작가가 무대에 올라 유력한 비판발언을 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며 무대에서 내려오자 대청에서 박수소리가 터졌고 이때 북경시 문화연합 비서장이 돌연 큰 소리로 “동지들! 그에게 박수를 치지 맙시다. 그의 가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 역시 우파분자로 판정되었습니다!”라고 선포했다.

1967년 8월 5일, 투쟁을 당한 후 류사오치(?少奇)는 사무실로 압송되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들고 항의하며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다. 당신들이 나 개인을 어떻게 대하든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국가주석의 존엄을 수호하려 한다. 누가 나의 국가 주석직을 파면했는가? 심판하려면 인민대표대회를 통해야 한다. 당신들이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 나 개인 역시 한 공민으로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가? 헌법에서는 매 공민의 인신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도록 보장했다. 헌법을 파괴한 사람은 법률의 엄격한 재재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것은 류사오치가 이때에야 비로소 “헌법”수호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그토록 많은 운동을 벌였고 그토록 많은 사람을 박해하여 죽였으며, 중공의 2인자 류사오치 역시 그 비운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당의 말을 듣고” 타인을 공격할 때는 법률 수호를 언급하지 않다가 자신이 비판투쟁을 받게 되니 비로소 헌법을 생각했던 것이다.

무릇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좋은 끝장을 보지 못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그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중공은 투쟁에 의지해서 일어났고 또 투쟁에 의지해 통치를 유지한다. “혁명의 살인기계”는 일단 가동되면 멈출 방법이 없다. 이 과정에서 매 사람들은 필연 그 피해자가 되며 단지 시간이 길고 짧음에 관계될 뿐이다. 중공은 군중을 이용해 군중을 투쟁하는 방법에 능하며 이용당한 단체 즉 중공의 이용 도구는, 이용당한 후 중공에게 버림받는다. 가벼운 경우에는 그냥 발로 차버리며 심하면 투쟁하고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다. 혹은 희생양으로 삼아 죽임으로써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데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해치는 데서 시작하여 자신을 해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운명이 바로 이런 단체들의 숙명이다.

“작법자폐 (作法自?)”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이 이치를 설명한다. 진(秦)나라에서 변법을 실행했던 상앙(商?)은 진효공(秦孝公)이 죽은 후 도주했다. 여관에 숙박하려 하자 여관 주인이 말하기를 상군의 법에 따라 만약 여관에서 신분증명이 없는 손님을 맞았을 때 주인은 징벌을 받게 된다고 했다. 상앙이 실행했던 엄격한 형법은 결국 자신을 해치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늘 “돌을 들어 자신의 발등을 친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바로 투쟁 메커니즘이 투쟁을 일으킨 자에게 반작용하는 현상이다. 앞 문장에서 이야기했던 두 가지는 바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생생한 사례이다.

두 번째, 중공은 일당의 절대 권위를 건립할 필요가 있었고 당의 최고지도자를 포함한 어떤 당원의 이익이라도 모두 “당”의 이익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타격의 대상은 무작위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중공이 생각하기에 일당독재에 위협을 가하는 어떠한 개인이나 단체도 처벌을 받는다. 설사 적이 없다 해도 매번 일정한 시간이 되면 중공은 또 적을 만들어내며 이로써 민중들의 공포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당에 의해 수시로 적으로 판정될 가능성이 있는 이러한 보편적인 공포 속에서 사람들이 유일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길은 바로 당의 사상과 동향을 반복하여 사색 탐구하고 “당”보다 더 “당”노릇을 하도록 쟁취하고 “당성”을 자신의 유일한 행동지침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의 육체는 단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며 사람의 진정한 생명은 바로 정신과 영성에 있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동물과 차이가 없다. 노력하여 “당”과 일치함을 유지하는 과정 중에서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정신생명을 말살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신을 적으로 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중공의 권력투쟁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승리자 역시 마찬가지로 실패자이다. 왜냐하면 성공한 것은 당성이지 결코 그들 자신의 인성이 아니며 그들의 진정한 자신은 죽어버린 지 이미 오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당을 따라간다”는 것은 중공의 투쟁철학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객관적으로 천지인(天地人)과 투쟁하는 중공의 에너지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끝없는 당내외의 투쟁은 전통적 도덕과 인간관계를 파괴했고 사회풍기를 부패시켰으며 모든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훼손했다. 투쟁의 대상이 된 사람은 필연 그 결과가 매우 비참하며 투쟁을 진행하는 사람 역시 양심의 평온을 잃게 된다. 자신이 투쟁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매 사람들은 모두 타인을 의심하고 방비해야 하며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게 생활해야 한다. 피차간에 투쟁하는 과정 중에서 인성 중의 악(惡)이 가장 크게 확대되어 질투, 탐욕, 이기, 악독(惡毒) 등은 중국인들이 생활하는 일반상태가 되었다. 이 환경 중의 모든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당문화의 결과를 감당하고 있다.

3) 당을 따라가는 몇 가지 유형 

아마 어떤 사람은 공산당 역시 예전의 그 공산당이 아니며, 다시 말해서 현재 근본적으로 공산당을 믿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국민들은 모두 잘 살기 위해 바삐 보내고 있는데 누가 아직도 당을 따라가겠는가? 현재의 사람들은 공산당에 대하여 겉으로는 받들고 뒤에서는 반대하며, 개별적으로 담이 큰 사람은 도리어 공산당이 그를 따라가도록 생각하고 있는바 어느 날 갑자기 공산당이 정말로 환골탈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상은 마치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수표처럼 그 자체로는 믿을 가치가 못된다. 공산당은 결코 당신이 술좌석이나 혹은 일기에서 그것들을 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론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에는 암실의 귓속말이나 드러내지 않은 헐뜯는 말의 권리도 함께 박탈할 수 있지만 암실의 귓속말이나 드러내지 않은 헐뜯는 말의 권리가 있다고 해서 언론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공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는 언론은 일정한 보편성을 지닌 행동으로 바뀔 수 없으며 또한 현실에 대해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린 현재 아직도 “당”을 따라가는 중국인들을 분석해 보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명백하게 당을 따라가기. 어떤 사람들은 중공의 깡패 같은 사교(邪敎) 본질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당의 사악한 본성에 따라가며 “당” 역시 이러한 사람들의 검은 양심과 악독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이 사람들은 중공과 단짝이 되어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하며 가장 사악한 당의 무리에 속한다.

사교 경연대회 확고한 1등 “중공” | 에포크타임스

흐리멍덩하게 당을 따라가기. 중공은 폭력과 거짓말에 의지해 발전했으며 “적”, 인민군중, 국제사회를 기만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편”들 역시 기만했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기만되어 중공에 가입했으며 지금까지도 중공의 거짓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흐리멍덩하게 당을 따라가는 유형에 속하며 중국에 적지 않게 존재한다.

붉은 용의 본질은 폭력과 거짓. | 에포크타임스

어쩔 수 없이 당을 따라가기. 어떤 사람들은 중공의 성질에 대해 일정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중공과 함께 휩쓸려서 나쁜 짓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어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중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비관하는 태도를 지닌다.

당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생각하며 공산당의 정책이 자기에게 잠시 유리한 기회를 타서 “오늘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한다”거나 혹은 “실컷 긁어모은 뒤 가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중공에 협조하여 단기간에 도시에서 가무가 난무하고 취생몽사하는 번화한 양상을 만들어 냈다. 이 양상은 서양을 기만하였고 또 중국인들을 기만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잠시 한몫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은 바로 중공이 고의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의 탐욕, 짧은 견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어 달아나려는 심태 역시 중공이 의도적으로 도출한 결과였다. 이런 사람들은 잠시 중공의 견본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재산은 보장받을 수 없으며 중공은 수시로 하루아침에 그들을 죄수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추호도 안전하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공을 가지고 노는 줄 알지만 사실 중공의 노리개가 된 것이다. 그들은 중공과 손을 잡고 해결할 수 없는 사회의 난제를 만들어 결국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해쳤다.

당이 자신을 따라가게 하려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중공에 대해 상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도로는 중공 당내에 들어가 한 걸음 한 걸음 중공 고층에 침투하여 내부에서 중공을 개량하려고 시도한다. 수많은 사람들 역시 중국의 희망을 그들의 몸에 기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중공내부에서 한 걸음씩 승진하는 과정은 바로 중공에게 동화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중공의 권력마당은 “열등한 것이 우수한 것을 이기고 역향도태(劣勝優敗, 逆向淘汰)”의 메커니즘으로 진정하게 정직한 정치가가 “당”을 통제하는 추세를 허용하지 않는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사례가 가장 전형적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다.

1959년에서 1962년 사이에 중국에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안후이성(安徽省)에서만 7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안후이 성이 이토록 엄중한 재해를 입은 원인은 당시 성위원회 당서기였던 쩡시성(曾希聖)이 확고하게 “당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쩡시성은 나중에 또 1962년에 산둥성 성위원회 서기를 겸임했다. 그때 대기근에서 산둥성에서는 9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쩡시성이 “당을 따라갔기” 때문에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고 이에 민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총살당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그가 견지한 것은 마오쩌둥 노선이었기 때문에 마오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를 보호해 주었다.

쩡시성의 부하 중에 장카이판(??帆)이 있었는데 안후이성 성위원회 부서기였다. 1959년 농촌에서 사람이 굶어죽는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조사를 갔고 우웨이(無?)현에 갔다. 우웨이현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라 매우 큰 현에 속하며 인구가 140만 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후시(蕪湖市)에는 오직 30만 명만이 살고 있었다. 장카이판이 조사할 때는 이미 90만 명이 굶어죽었던 것이다. 장카이판은 양심상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공공식당을 해산시키고 식량창고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50만 명의 백성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카이판은 쩡시성에게 체포되어 수갑과 족쇄를 찼다. 마오쩌둥은 장카이판을 우경 기회주의자라고 말했으며 20년 징역을 언도했다.

공산당원으로 놓고 볼 때 그들이 처한 환경은 바로 이렇게 사악한 메커니즘이다. 창고를 열어 50만 명을 구제하여 백성들에게 “청천(?天)”이란 불린 장카이판은 오히려 공산당이 박해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과 일치함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쩡시성은 몇 백만 명을 굶겨죽였지만 그와 관계가 없었는바 그가 당과 일치함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역대 운동 중에서 중국 공산당은 끊임없이 이렇게 당원들의 당성을 훈련시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선 인성의 양지(良知)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이익에서부터 출발하게 했다. 이렇게 중공의 권력마당에서 한 걸음씩 승진하는 과정은 동시에 끊임없이 중공원죄의 보따리를 짊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들 자신마저도 시커멓게 물들여지게 되었을 때 그의 운명은 바로 중공의 운명과 함께 엮이게 된다. 이때는 당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일부분 사람들은 당과 도박을 하려고 하며 “협력”의 방식으로 역사의 궤도를 바꾸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은 각종 사회역량의 협력 하에 결정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민중과 일부 중공 관원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하며 최후에 중공을 핍박하여 타협하도록 하며 그것의 운행궤도를 개변하여 점차 양성적인 발전의 궤도로 걸어가게 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사람들의 초기 시도는 의심할 바 없이 선량한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모든 폭력기구와 선전도구를 장악하고 있고 나라의 민생에 관련된 모든 대사를 결정할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다. 소수인들의 개량을 위한 소원과 노력은 전국적 범위에서 대규모로 나라와 백성을 망치는 중공과 비교했을 때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역량이다. 만약 현재의 중공정권을 절벽으로 치닫고 있는 열차에 비교한다면 열차에 탄 승객들이 열차내의 질서를 바로잡고 차량의 위생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으로 멸망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중국 민중들로서는 만약 열차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오로지 이 열차를 이탈하는 한 가지 길밖에는 없다.

4. 당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 

정상인의 행위는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나아간다. 이러한 판단은 정확한 정보와 세상의 도덕표준을 기초로 한다. 사람이 기계와 다른 점은 바로 사람의 자주행위와 판단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의 선전 속에서는 오히려 “당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수시로 내세우고 있으며 또한 이를 “당성이 강하고”, “높은 각성”과 “조직 규율성이 강하다”는 표현으로 삼는다.

3,4십년 전의 미친 듯한 연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격정에 겨워 “혁명의 벽돌이 되길 원하며, 동서남북 당에 따라 움직이네.”,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며 호응했다. “무엇이든 한다”는 중국어에는 일체 가능한 행위가 포함된다. 정상적인 사건이 포함될 수 있고 또 재물을 꾀하고 생명을 해하며 살인방화 등 하늘이 불허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도 포함될 수 있다. “당이 무엇을 하라면 곧 무엇을 한다”란 한마디로 중국사회의 몇천 년에 걸친 하늘의 이치와 선악표준을 무너뜨리고 최고의 지휘권과 재판권을 깡그리 중공에게 바쳤다. 그때 사람들은 이것이 중공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과 미신이며 이것이 일종의 황당함과 비참함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무상의 영광으로 여겼다.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곧 무엇을 한다”는 말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계급투쟁이 자신의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 회사동료들 친구들을 해치건 말건 그리고 하늘땅과 싸워 자연을 파괴하건 말건 혹은 검거하여 밀고하든지 모두 앞장섰으며 중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당이 어디를 가리키면 어디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이르러 중공은 중국 인민들에 대한 ‘은혜’(공산당이 없으면 곧 신중국이 없다)와 중국 인민들에 대한 ‘정’(엄마아빠가 친근하다 해도 당만은 못하다)을 선전하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듣도록(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간다) 요구하던 데에서 사람들에게 완전히 자신의 대뇌를 포기하고 자신의 일체를 중공에게 넘겨 주재하게 하고 완전히 중공 수중의 도구로 전락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공이 최근 몇 년간 진행한 ‘보선(保先)’ 운동은 “당이 하라고 하면 곧 무엇이든 하도록”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당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곧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역사상 그 어떤 정권도 중공처럼 이렇게 민중들에 대해 철저한 세뇌와 노역을 진행한 적은 없었다.

중공의 소위 보(保)‘선(鮮)’운동. | 에포크타임스

1) ‘당’이 하라고 하는 것

1967년 여름, 다오저우(道州) 분지를 관통하는 소수하(瀟水河)에 수많은 시체들이 떠내려 왔다. 수면에는 한 층의 암적색 기름이 떠 있었다. ……. 도처에 “검은 4종류를 깡그리 멸하고 강산이 영원히 붉도록 보존하자”라는 구호가 있었고 도처에 “빈농과 중농의 최고법원”의 살인공고가 나붙었다. 전 다오현(道縣) 및 주변 지역은 완전히 적색테러에 잠겨 있었다.

이는 『후난(湖南) 다오현 농촌 대도살 다큐멘터리』란 책에 기술된 문화혁명 시기 후난성 다오현에서 벌어진 대도살의 처참한 상황이다.

후난성 다오현 농촌에서 발생한 이번의 대도살은 2개월 남짓한 시간 내에 소위 ‘4종류의 사람’과 그 가족 4천여 명을 살해했고 전 지역에서 살인한 숫자는 9천이 넘었다. 살해된 사람은 주로 4종류 사람과 그 자녀들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이는 태어난 지 10일밖에 되지 않았다.

에포크타임스

19년 후 대도살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전 칭탕구(清塘區) 무장부 부장이자 ‘홍색연맹’(마오쩌둥 사상의 붉은 전사연합사령부) 영강(營江) 전선지휘부 총지휘관 관유즈(关有志)가 감옥에서 취재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50년에 군에 입대했고 부대에서 입당했으며 간부로 승진했다. 58년 제대하여 도현으로 왔다…. 나는 어떠한 징벌을 받아본 적이 없고 늘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했다. 내가 매일 학습한 것은 바로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들은 것은 모두 계급의 적들이 파괴를 일삼고 복권을 꿈꾸고 있다는 것으로 장제스(蒋介石)가 대륙을 역공한다는 것이다. 나는 총을 잡은 사람인데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문화대혁명 무력투쟁 때 반역파들은 무장부의 총을 빼앗았고 또 듣자하니 4종류의 사람들이 반역하려고 한다는데 이에 나는 자각적으로 ‘홍색연맹’ 쪽에 서게 되었다.”

관유즈처럼 중공의 역대 정치운동 중에서 살인, 구타, 투쟁, 타인을 때려 엎은 수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하기는커녕 자신이 억울하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단지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했을” 뿐이며 자신은 단지 당의 한 입자, 도구일 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 한번 회고해 보자. 도대체 공산당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켰는지를. 사실상, 정상적인 생산과 생활 활동에는 근본적으로 공산당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킬 필요가 없었다. 임의의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하고자 하고 일상생활을 하고자 하며 과학 예술 활동에 종사하려 하고 발명창조를 하려고 한다. 또 정신적인 추구를 하게 되고 인간적인 교제를 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인류활동은 공산당이 굳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격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부추기는 것에는 하나도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하나도 사회의 안정과 인민들의 복지를 위한 것이 없으며 모두 공산당 일당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전에 중공은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항일(抗日)한다고 선전하여 수많은 열혈청년들을 속여 옌안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었다. 이런 사람들은 핍박에 못 이겨 세뇌되었고 심히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사실 그때 일본군은 중국의 절반을 장악했으며 국민당 군이 간고하고 탁월한 저항을 진행했다. 정말로 항일하고 싶다면 근본적으로 옌안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전 중국을 해방시키자”는 것은 전면적으로 내전을 발동시켰고 합법적인 정부를 뒤엎었으며 공산당의 극단통치를 옌안에서부터 전 중국으로 밀어붙였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과 거액의 군사비를 지불했고 당시의 경제를 거의 무너뜨리면서 북한 김일성 정권의 목숨을 부지하게 했고 한국인들에게 심중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대약진, 인민공사화, 공산주의로 달려 들어가자 등은 4천만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큰 혼란을 조성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국민경제는 거의 붕괴되었다. 우수한 인재들은 거의 소멸되었으며 전통문화는 깡그리 파괴되었다.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가라”는 지령은 천만 지식청년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잃게 만들었고 꽃다운 청춘을 농촌과 변방에서 썩게 했다.

중공이 선전하는 것은 무신론과 유물론이므로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하라”라는 말은 더욱 두렵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더는 천리(天理)를 믿지 않게 되었고 오로지 당의 환심을 살 수 있고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곧 어떠한 나쁜 일이든 다 하려 한다. 현재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이다. 수많은 경찰들은 박해정책을 구실로 삼고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것이라며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고문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또 검은 속을 가진 의사와 결탁하여 파룬궁 수련생들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였다.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고문. | 에포크타임스

‘가족단위 책임제(包產到戶)’와 ‘향진기업(鄉鎮企業)’은 중국 농민을 위한 두 가지 큰 업적으로 불린다. 사실 모두 중공이 일정 정도 방임하고 관계하지 않은 결과이다. 백성들은 모두 어떻게 자신의 생활을 잘 관리할지 알고 있다. 중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바로 백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때이다. 중공에게 무슨 움직임이 있기만 하면 필연코 인민들에게 재난을 가져다준다. 지난 50여 년의 역사가 곧 이토록 간단한 진리를 증명해 준다.

2) ‘순종 도구’는 어떤 목적을 위함인가

중공은 단지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하라”고 선전할 뿐만 아니라 선동으로 일으킨 정치적 광풍과 각종 밀폐식 세뇌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내심으로 자신의 우롱, 통제와 지휘를 받아들이게 했다. 동시에 중공은 또 늘 채용하는 기만수법을 통해 “큰 국면에 복종하고”,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등등 그럴듯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당이 하라고 한 것”들은 결코 비열하고 사악한 일이 아니며 설사 살인방화, 자아학대를 통한 멸망이라 하더라도 역시 “당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것이라고 믿게 했다.

중공의 ‘순종도구론’이 사람을 기만하는 점은 바로 중공이 또 동시에 대공무사(大公無私), 적극적인 노력, 자신을 잊고 공공이익을 위하는 것, 꾸준한 노력 등 질적인 문제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한 점 때문에 어떤 사람이 중공이 전통도덕을 파괴하고 전국 인민들의 도덕성을 미끄럼질치게 했다고 지적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표시한 것이다. 중공도 마치 도덕건설을 매우 중시하는 것 같다. 또 “사회주의 도덕”, “공산주의 도덕”, “공산당원의 수양”, “8영8치(八荣八耻)” 등 시리즈의 이론을 가지고 나왔으며 “레이펑을 따라 배우자”, “자오위루(焦裕祿)를 따라 배우자”, “쿵판썬(孔繁森)을 따라 배우자” 등 수많은 명목의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라며 의심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사유방식은 도덕의 목표와 일을 처리하는 태도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였다. 만약 한 사건 자체가 좋은 것이라면 행위자 자체의 근면, 충성, 이기심 제거 등 태도도 좋은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반대로 만약 한 사건 자체가 사악한 것이면 마찬가지로 이러한 질적인 문제들은 악을 행하는 효율을 제고하게 된다. 분명히 부지런한 도적이 게으른 도적보다 더욱 무서우며 겸손하고 배우길 좋아하며 이로 인해 고도의 과학기술을 장악한 테러리스트들은 기술 수단이 평범한 테러리스트보다 더욱 무섭다. 전반 사회가 베일에 싸여 하나의 사악한 목표를 위해 가동될 때, 근면하게 말을 듣는 것은 소극적으로 적당히 일을 하는 것만 못하다.

중공은 ‘당의 이익’을 위해 당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도덕의 최고표현이며 바로 무산계급 정당원칙의 최고표현이며 바로 무산계급 의식순결의 최고표현이다.”라고 떠들어댄다. “당원은 당의 이익을 이탈한 독립적인 개인목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명확하게 보아낼 수 있듯이 중공이 선양하는 “도덕”, “영욕관” 등은 단지 표면적으로 전통이론과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중공을 수호하는 일당독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남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북쪽으로 수레를 몬다(南辕北辙)”는 이야기를 잘 알 것이다. 한 사람이 초나라로 가려고 하는데 비록 그에게 천리마가 있고 충분한 여비에 능력이 좋은 마부가 있다한들 그가 만약 방향을 잘못 택했다면 영원히 초나라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의 말이 좋고 여비가 풍부하며 마부의 능력이 좋을수록 그는 초나라에서 더욱 멀리 떨어져나가게 된다. 사람들이 당의 말을 듣고 열심히 당을 위해 일할 때, 그리고 중공을 도와 백성들을 기만하고 백성들을 박해할 때, 중공을 위해 노래 부르고 분칠할 때 이것이 바로 적극적으로 중공을 도와 중국 사회를 만장의 깊은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당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의 현재 표현

지금의 중국인들은 갈수록 현실을 중시하고 더는 공산주의를 믿지 않으며 더욱이 주의(主义) 혹은 신앙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중공은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 한다”는 이 구호의 다른 측면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즉 당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곧 무엇을 하지 마라, 바로 당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해서는 안 된다. 백성들이 가장 많이 듣는 설법은 바로 “이 사건은 중앙에서도 성격을 규정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지 않는가!”이다.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사설 <9평 공산당> 발표 이후 탈당이란 큰 물결에 휩쓸려 파산 직전의 중공. | 에포크타임스

은연중에 감화시키는 중에서 중공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계를 그어놓았다. 즉, ‘창업’, ‘돈벌이’, ‘하루아침에 부자 되기’, ‘주식투자’, ‘미식(美食)’, ‘소자산계급생활’, ‘시대풍조(时尚)’, ‘화이트칼라(白领)’, ‘엘리트’, ‘자동차’, ‘부동산’, ‘오락’, ‘나들이’, ‘채팅’, ‘에로영화’, ‘궤도이탈’, ‘색정유혹’ 등 물질적인 향수를 개방하여 당신 마음대로 욕망을 풀어놓아 먹고 마시고 놀며 도박을 하고 술집을 찾는 등 마음대로 하게 한다. 지금 중국 사회는 이 방면에서 매우 ‘자유’롭다. 수많은 중공 간부들도 “시대에 따르고” 있으며 “몸소 시범을 보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아마 무엇 때문에 “부패를 반대하면 할수록 부패가 더욱 심한”지 의아할 것이다.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할 때 부패는 바로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하라”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이며 당이 만약 정말로 부패를 허락하지 않고 당원과 간부들에게 좋은 점과 특권을 주지 않는다면 또 누가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팔겠는가? 중공 자체는 유지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있지만 당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해서는 안 된다. 당에 의견을 제출해서는 안 되며 정치개혁을 이야기할 때 근본을 흔들면 안 되며 사회문제를 엄숙히 다루어서는 안 되며 당의 통치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으면 더욱 안 된다. 만약 탈당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탈당하라고 한다면 당은 더욱 허락하지 않는다.

공산진영이 붕괴되고 있고 사람들이 분분히 공산주의를 질타하고 있는 오늘날, 중공은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공산당의 깃발을 내걸고 독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통치 하에서 사회문제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심각한 빈부격차, 높은 치료비, 높은 입학비용, 집값 폭등, 취업난, 사회보장 부족, 부정부패 성행, 도덕 부패, 환경오염, 비민주, 백성들은 말할 권리가 없고 치안상태가 최악이며, 음란물과 도박 및 마약밀매가 성행하고 법을 지키기 않으며 공민의 청원권을 “가로막는” 등등 문제가 끝이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중공이 말할 수는 있으나 개인들은 소일거리로 이야기해도 안 된다. “국가기밀을 유출하고 나라 안전에 해로우며” “법률, 행정법규에서 금지하는 기타내용”을 “제작, 열람, 발표, 전파”하지 못하게 한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불법적인 대우를 받을 때 자신의 기본권을 수호한다면 그것은 바로 당이 하지 말라는 것에 속한다.

4) 반드시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

중공은 부정기적으로 각종 정치운동을 발동한다. 매번의 운동은 모두 거대한 재난이다. 이러한 운동들을 발동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고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한다”는 사유방식을 사용하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곧 무엇을 한다”는 것은 죽으나 사나 중공의 투쟁철학을 뒤따르는 것이며 이는 아주 큰 정도로 중공이 천지인(天地人)과 투쟁하는 에너지를 강화해 주었고 중공의 각종 통치목적을 이룰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은 중공을 따라 살인을 했으며 그리하여 몇 백만의 ‘지주’, ‘자본가’, ‘지식인’의 목이 떨어졌으며, 사람들이 중공을 따라 대약진을 일으키자 몇 천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사람들이 중공을 따라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중국 사회는 이로써 전례 없는 문화파괴와 인성의 마변(魔變)을 겪었으며, 사람들이 덩달아 파룬궁 금지에 참여하자 중화 민족은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는 참담한 신앙박해를 연출하게 되었다.

중공의 파룬궁 수련생 생체 장기적출 만행. 가운데 강제수용소에서 수련생들을 감금하고 고문한 후 필요시 우측 병원에서 장기 이식을 한다. 좌측은 시체를 가공해 인체표본을 만드는 공장. | 에포크타임스

지주와 그 자녀들을 학살하고 심장을 파내 인육을 먹으며, 장즈신(张志新)의 기관을 절단 내고,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감금하고 박해하여 살해한 것 등에서부터 파룬궁 수련생들에게서 산 채로 장기를 적출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교훈이 있어야 사람들은 중공의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한다”는 세뇌와 노역에서 걸어 나와 더는 중공을 따라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한다”는 노역(奴役) 중에서 중국 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가 되었으며 중공을 더욱 바싹 따랐던 그러한 사람들이 받은 피해는 더욱 컸다.

중공은 빈곤지역을 일컬어 ‘노(老), 소(少), 변(邊), 궁(窮)’이라고 한다. 노(老)라는 것은 바로 중공이 일찍이 건립했던 적이 있는 소위 ‘농촌혁명 근거지’를 가리킨다. 중공이 정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농민들이 사람을 내고 돈을 내고 양식을 내고 목숨을 내건 것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천이(陈毅)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화하(華夏) 전역의 승리는 인민 군중들이 작은 차로 밀어내어 얻어온 것이다.”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후 현지 농민을 도와 부유하게 함으로써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민에 대해 과도한 비용 징수를 한시도 늦춘 적이 없었다. 호적제도로 농민을 토지에 묶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또 조상들의 소유인 토지를 강제로 징수해 다시 고가로 부동산 업자들에게 팔아넘기고 있다. 현재의 중국은 대부분 빈곤지역이 일찍이 “혁명근거지”였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이러한 지역은 중공이 창립되기 이전보다 더욱 가난해졌다.

산베이(陝北)는 중공의 ‘혁명근거지’이다. 산베이의 밀이 중국 공산당을 먹여 살렸다. 중공 중앙은 산베이에서 18년 동안이나 거주하면서 나무를 깡그리 베어버렸고 풀뿌리마저 뽑아버렸고 쌀은 다 먹어치웠고 사람들도 모두 사용했기에 산베이 백성들은 중공을 위해 거대한 희생을 치렀다. “개혁개방”이후 산베이에서 대량의 에너지 저장고가 발견되자 중공은 ‘국가개발’이란 미명하에 대규모 개발에 들어갔다. 자원은 뽑아서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에너지를 팔아서 번 돈은 모두 중앙기업에 돌아갔다. 이리하여 산베이는 계속 중공의 착취를 받게 되었다.

중공은 자칭 노동자계급의 선봉대라고 하며 권력투쟁 시 노동자들을 이용해 노동자운동을 일으켜 무장투쟁을 진행했다. 우파에 반대할 때는 “노동자들에게 말을 하도록 허용”했으며 ‘반우파’의 단단한 후방이 되도록 했다. 문화대혁명 시 ‘공선대(工宣隊)’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에게 무장투쟁의 난잡한 상황을 수습하게 했고 ‘4.5운동’을 탄압하는 데는 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자 규찰대’에 의지했다. 1989년 학생운동 중에 또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밖에서 중공의 통치를 수호하게 했다.

중공이 정권을 수립한 후 노동자들이 당을 따라가게 했으며 투쟁도구로 삼고 당을 위해 노동하도록 하기 위해 중국 노동자들에게 ‘철밥통’을 주기도 했으며 복지보장과 사회정치적 지위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졌는데 이들은 태자당(太子黨), 관원, 화이트칼라, 엘리트, 골간 등이었다. 중공 자신의 관방연구기관에서 발설한 데 의하면, 금융, 해외무역, 국토개발, 대형공정, 증권 등 5대 영역 중에서 주요 직책을 담당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고급관리의 자녀였다. 중국의 억만 부호 중 90퍼센트 이상은 고급관리의 자녀이며 모두 2조 위안에 달하는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했으며” 땀방울과 청춘을 모두 당에 바친 노동자들은 일생동안 철밥통을 소유할 줄 알았지만 무정하게도 당이 짓밟아버렸으며 또 듣기 좋은 하나의 이름―‘샤강(下岗)’을 얻었다. 국유기업의 수천만 노동자들이 실직 당했고 노동자들은 일터를 잃은 동시에 또한 직장에서 제공하는 일체의 사회보장, 예를 들면 주택, 교육, 의료보건, 퇴직금 등을 포함한 일체를 잃어버렸다. 비단 이러할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대한 노동자들의 희망 역시 무정하게 짓밟혔다. 대학 학비는 노동자 가정에서 부담할 방법이 없다. 설사 겨우 졸업할 때까지 비용을 댈 수 있다하더라도 노동자의 자녀가 좋은 배경 없이 번듯한 직장을 얻기란 아주 어렵다.

군대는 중공의 생명줄이며, 당이 총대를 지휘하여 당이 어디를 가리키면 어디를 쏜다. 매 사병과 장교를 놓고 말할 때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아예 당연한 일로 여긴다. 중공 군대의 제대군인조례와 대우규정은 모두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에서 정책조례로 발표하며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첫째는 국가 법률에 명문으로 규정된 보장이 없고 둘째는 전국 제대군인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부서나 기구가 없다.

중공은 이들을 이용해먹은 후 사회에 버리므로 사병들은 제대한 후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돌아가야 한다.” 기본적으로 후속적인 복지가 없다. 부상을 입고 장애인이 된 군인들은 더욱 의지할 곳이 없다. 당 중앙을 찾아가 청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북경에 보낸 고소편지를 상부에서 되돌려 보내면, 지방 관리는 아니꼬운 눈초리로 “한 무더기 폐지일 뿐이다”, “유엔에 고발해도 소용이 없다”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원로군인들은 부대에 남을 수 있는 사람, 열사가 된 사람을 제외하고 가족들의 생활을 중공은 아예 관계하지 않는다. 부상을 입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대다수 농촌으로 되돌아갔으며 가난하기 짝이 없는 생활, 고독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생활로 연명해 가고 있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귀국한 후 2-30년은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없다. 베트남전쟁 때의 ‘영웅’이나 ‘일등공신’들은 현재 이미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며 전사한 사병들과 하급 장교들이 받은 위로금은 800~1000위안 사이로 일차적으로 해결을 보았으며 가족들의 이후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관계하지 않았다. 윈난(雲南)성 마쑤포(麻粟坡) 열사묘지에는 노산(老山)전쟁에서 희생당한 957명의 사병들이 묻혀 있으며 그중 300여 명 사병의 가족들은 20여 년 동안 다녀간 적이 없다. 대부분은 여비가 없어서 오지 못하며 어떤 가족들은 오기는 해도 돌아갈 여비가 없었다.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한다”는 말의 오늘날 표현 중 하나는 바로 재물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공은 사람들이 물질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권익을 포기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 또한 예전의 ‘착취계급 소멸’ 정책을 바꾸었으며 자본가들조차도 입당을 허락했다. 평균 몸값이 22억 위안에 달하는 중국의 최상급 부호들 중에 당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48.5%나 되며 거의 절반이 중공 당원이다. 그러나 당의 경제도구로 사용되고 당을 위해 충심을 바쳐 일을 한 후 일단 장물분배가 불합리하거나 어느 한 부분에 잘 처리해 주지 못하면 즉각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화를 불러온다.

모우치중(牟其中), 양빈(楊斌), 저우정이(周正毅), 리징웨이(李經緯), 장하이(張海) 등이 모두 투옥되었으며 “중국의 부자리스트”는 “중국의 죄수리스트”가 되었다. 공산당을 이용하여 부유해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자녀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교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 속담에 “30년은 강의 동쪽이요, 30년은 강의 서쪽이다(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란 말이 있다. 일찍이 공산당을 옹호했던 ‘자본가’들은 가산을 탕진했고 가족들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증거이다.

그동안 중국 부자들은 피땀 흘려 번 재산을 공산당에게 빼앗겨 왔기에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 | 에포크타임스

위에서 이야기했던 내용들은 연자방아를 다 갈고 난 후 당나귀를 죽이는 형태의 예이다. 관건적 시각이 되면 중공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마저도 없애버린다. 문화혁명이 끝날 때 전국 군 간부 중에 17명, 경찰 793명 도합 810명이 윈난에 끌려가 비밀리에 총살당했으며 가족들을 속이기 위해서 “나라를 위해 순직했다”는 통지서를 보냈다. 이는 내막을 숨기고 살인하여 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때 북경의 공안국 국장 류촨신(劉傳新)은 조사가 진행되기 전에 죄가 두려워 자살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장쩌민도 미국에 친서를 보내 파룬궁의 상황을 염탐한 적이 있고 문화대혁명처럼 파룬궁 수련자를 때려죽인 일부 악경(惡警)들을 총살시킴으로써 죽은 생명을 보상하고 파룬궁이 장쩌민을 기소하지 말기를 요구했다. 아울러 문화대혁명의 처리방법보다도 더욱 엄격히 처리하되 얼마나 되는 파룬궁수련생이 죽었으면 곧 얼마나 되는 경찰을 총살시키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매번 중대한 역사적 관두에 중공은 모두 “선을 포기하고 악에 순종하는” 행위특징을 나타냈다. 그러나 중공이 악을 행함에는 반드시 당원 개인을 이용하기에 중공이 무너진 이후에는 그 죄의 대가는 반드시 당원들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마치 예전에 나치가 패망한 후 뉘른베르크에서 심판을 한 대상이 바로 나치 당원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 장쩌민 공개 심판. | 에포크타이스

다시 말해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하며” “명령을 집행”하고 “공무를 집행”한다는 이유로 중공을 도와 악을 행한 사람들은 아마도 현재는 가히 중공 정권의 보호막에 의지해 잠시 정의의 심판을 벗어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중공이 무너진 이후 매 개인은 법률적 재재와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때 더는 중공의 보호막에 의지할 수 없게 된다.

단지 이뿐만이 아니다. 인간 세상의 법정 위에는 또 천리(天理)의 법정이 있다. 선(善)에는 선한 보답이 있고 악(惡)에는 악한 보답이 따르는 것으로 이는 사람들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자연법칙이다.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도가는 “화와 복에는 문이 없다, 오직 자신이 이를 초래할 뿐이다(禍福無門,惟人自召)”라는 말이 있다. 불가에서는 인과관계를 중시하며 “선악의 보답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善惡之報,如影隨形)”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을 하면 모두 자신이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백성들은 “선에는 선한 보답이 따르고 악에는 악한 보답이 따른다. 보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에 선악에 대한 응보의 예들은 많기가 헤아릴 수 없다. 역사에서 볼 때 중공의 도구 역할을 했던 그러한 사람들은 그때 당시는 얼마나 우쭐댔을지 몰라도 그 끝장은 매우 처참했다. 이 또한 어찌 천리의 보답이 체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인성 중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며 큰 선택에 임했을 때 마음속에서 늘 선과 악이 교전을 한다. 그러나 중공 당원들의 몸에서는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왜냐하면 당원들은 모두 ‘당성’과 ‘인성’의 이중적 인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간다”와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한다”는 명령이 부추기는 것은 인성을 억압, 소멸하고 중공의 독재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라는 것이다. 공산당의 악행이 하늘에 사무치고 신속하게 복멸되고 있는 오늘에 와서 고집스럽게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며”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무엇을 하는” 것은 사실 자신에 대해 매우 책임을 지지 않는 표현이다.

인성 중의 선량한 일면을 수호하고 당(黨)이 아닌 정념(正念)으로 자신의 행위를 주재하고 중공을 탈출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있는 당문화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려야만 비로소 자신을 위한 광명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당문화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공산조직에서 탈퇴해야만 광명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 에포크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