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당(黨)문화] 제1장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

9평 편집부
2006년 11월 1일 오후 3:42 업데이트: 2021년 12월 3일 오후 5:56

상편:당문화는 어떻게 건립되었는가 

【당문화 해체】제1장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


목차

1. 무신론(無神論) 선전
2. 유물론 선전
3. 전통문화 부정
4.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위대함을 선전 


전 세계적으로 모든 고대문명과 문화는 다 신화에서 시작한다. 만물을 환화(幻化)시키는 인도 시바의 춤, 아테네 제우스 산의 여러 신들의 경이로움, 여호와의 일념(一念)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이집트 태양신 및 수많은 호법(護法), 중국의 반고(盤古)와 여와(女?)의 위대한 신화 등은 모두 이런 고대 문명들이 시작한 내원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의 활동 역시 모두 신(神) 또는 하늘의 보호감독과 계시 하에 전개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고향을 신주(神州)라고 부르는데 신의 나라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불렀는데 이는 곧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다. 천단(天壇)은 황제가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그 면적이 자금성보다도 4배나 크다. “하늘의 도를 살피고 하늘의 뜻을 따르며 모든 것이 그 속에 있다.”(觀天之道,執天之行,盡矣.) 이 말은 《황제음부경(?帝陰符經)》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곧 중화민족이 문자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 처음 했던 말인 하늘의 도를 관찰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하며 모든 도리가 그 속에 깡그리 포함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중국인들은 비단 “하늘”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또 “하늘” 중에서 그 가장 오래된 “노천야(老天?)”를 숭배하는데 이는 우주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이다. 중국인들의 기억 속에 반고가 천지를 열고 여와가 사람을 만드는 데서부터, 신농(神農)이 백초(百草)를 맛보는 데까지, 신은 인류를 이끌고 홍몽(鴻?)을 개벽할 때의 어려운 세월을 지나왔다. 중화의 멀고 오래된 반신(半神)문화는 침구, 역경, 팔괘 등 문명을 남겼으며, 비록 몇 천 년이 흘러갔지만 오늘의 인류는 여전히 경탄만 할뿐 완전히 이해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헌원황제(軒轅黃帝)가 신선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묻고, 공자가 노자를 향해 도를 물은 이야기부터, 불법(佛法)이 동으로 전해질 시기가 되기까지, 유불도는 중국인들을 위해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는 문화의 내포를 다져주었으며 정통적인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남겨주었다. 분명한 것은 중국의 전통문화 중에서 인간세상의 규칙 외에 또 “하늘”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세속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겸손함의 진정한 내포는 바로 신에 대한 경외심이다. 심지어 나라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천재인화(天災人禍)도 모두 “천자”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있으며 그러므로 황제는 자신을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대사면을 하거나 혹은 목욕재계 하고 신과 하늘을 공경해야 한다.

농경과 의약학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알려진 신농이 백가지 약초를 맛보는 모습. | 에포크타임스

그러나 지난 세기 공산주의가 인간세상을 어지럽히고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공산당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중공은 전면적으로 중국의 신전문화를 훼멸시키는 폭력적인 운동을 펼쳤으며, 체계적으로 전통문화를 대체하고, 비자연적인 당문화 체계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 대체과정에서 나타나는 계통적인 체현을 보면, 중공은 “무신론”으로 몇 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앙을 단절시켜버렸고 또 공산당의 “유물론”을 세계와 역사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했으며 폭력과 투쟁을 위해 이론적인 지도를 찾았다. 동시에 공산당의 가치관으로 정화(精華)적인 것과 쓰레기, 선진적인 것과 열악한 것을 판단하고 전면적으로 중국의 정통적인 전통문화를 부정하여 민족 문화의 뿌리를 잃게 했다. 그런 후 “무신(無神), 유물(唯物), 문화의 뿌리가 없어진” 중국 인민들 앞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의 위대함을 선전했고 “신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이론을 크게 선전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실천 중에서 변이된 이런 일련의 문화로 중국 인민들의 사상을 개조시킴과 동시에 하늘을 반대하고 땅을 반대하며 인성을 반대하는 당문화이론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1. 무신론 선전

수천 년의 인류 역사는 번잡하고도 많은 문화체계를 형성했고 사회제도 체계와 함께 병존해 왔다. 모든 체계 중에서 인류의 궁극적인 가치관은 모두 신령(神靈)이나 천의(天意)의 형식으로 세속의 행정 권력을 초월하여 존재했다. 국왕과 황제의 위에는 반드시 신 혹은 하늘의 인증(認證), 보호감독과 인도가 있었으며 이를 “왕권신수(王權神授)” 라고 불렀다. 이러한 체계 중에서 신령과 천의는 세속 가치관의 궁극적인 인정과 재판관이 되어 세속의 최고 권력에 대해 평가하고 재판하는 기능을 갖게 했으며 세속의 최고 권력이 무한히 팽창하는 경향에 제한을 가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세속 생활 중에서도 신령과 하늘은 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인류의 행위를 규범하고 인류 사욕(私慾)의 팽창을 제한하는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였으며 세속의 이익을 초월하는 형식으로 존재했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문화 중에 “경천(敬天)”, “신권(神權)”을 함유한 요소들이 세계 각 지역에 모두 체현되어 있다. 설령 현대 서양사회의 민주제도라 할지라도 기독교 문화 중의 “신”의 형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은 전통의 유신론(有神論)이 자신들의 집권 합법성에 도전이 된다고 여긴다. 대다수 나라의 교육체계 중에서 신에 대한 개념을 보면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신의 존재를 승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사실 과학은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며 또한 무신론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공산당이 무신론을 선전하는 기초가 되는 소위 “과학”의 기초인 진화론 또한 아직까지 실증을 거치지 않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진화론 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아직도 줄곧 증거를 찾기 위해 힘을 들이고 있겠는가? 그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도 완전히 부정하는 “무신론”과 같은 이러한 일종 학설을 전체 국가의 사상체계로까지 상승시킨 것은 오로지 공산당과 같이 이렇게 집권 합법성을 찾는 국가에서만 발생하고 있다.

애초 집권의 합법성이라곤 전혀 없었던 중공이 자신들의 합법성을 가장하기 위해 진화론, 무신론, 폭력, 거짓말 등으로 누더기처럼 기운 기구. | 에포크타임스

그리하여 공산당이 있는 곳은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단지 큰 분자들이 우연히 부딪쳐 생성된 생명들이 다시 수십 억 년의 진화를 거쳐 사람이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사람이 또 약육강식의 밀림의 법칙에 따라 계급투쟁을 거쳐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로부터 사회주의사회로 “진화”했다는 것만이 존재한다. 허점투성이인 이러한 이론들은 비록 공산당이 왜 집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는 해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사회, 역사와 정권에 대한 전통문화의 인식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전통의 정교(正敎)는 모두 사람들에게 마음을 닦고 선을 향하며 천지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가르치지만 중공은 오히려 하늘, 땅, 사람과 투쟁하게 한다. 정교(正敎)를 신앙하는 사람은 천국세계의 영원한 행복에 대한 추구가 있어 세간의 영광과 향수를 중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생사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공은 오히려 탄압과 살육의 수단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물욕(物慾)으로 민중을 매수한다. 정교(正敎)가 사람들에게 수립해 준 선악(善惡) 표준은 중공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행동하고 있음을 더욱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중공은 신앙의 존재를 자신의 통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본다.

레닌의 스승이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플레하노프가 1918년 4월 위독한 상태에서 남긴 말이 소련이 붕괴된 후 1999년 11월에 발표된 《정치유언》에 실렸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레닌은 절반의 러시아인들이 행복한 사회주의의 미래로 서둘러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른 절반의 러시아인을 깡그리 죽일 수 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슨 짓이든 모두 할 수 있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심지어 마귀와도 동맹을 맺을 것이다.”

여기에서 세속, 권력과 이익을 초월하는 원칙과 가치관은 소실되었으며 남은 것은 오로지 적나라한 권력과 이익뿐이며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80년대 초 중국은 일찍이 소위 “진리의 토론”을 전개한 적이 있다. 그들이 논쟁했던 요점 중 하나는 바로 진리, 인도주의, 아름다움, 선량함 등에 계급적 속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통 공산당원의 눈에는 오로지 공산당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만이 비로소 고취하고 발휘할 가치가 있는 도덕이며 그렇지 않는 모든 것은 마땅히 타도해야 할 대열에 속한다.

무신론을 선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바로 각종 종교 신앙이었다. 그래서 중공은 정권을 탈취하고 난 뒤 “반혁명회도문(反革命會道門)”을 탄압한다는 명분으로 불교, 도교, 기독교. 천주교 등 대규모 신앙단체에 대해 도살용 칼을 치켜들었다. 아울러 특무(特務 첩자)들을 종교 내부에 침투시켜 협회를 설립하게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종교경전을 왜곡하여 신도들을 미혹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공 지도자에게 충성할 것을 선포함으로써 중공의 지위를 종교 신앙의 신(神)을 능가하는 위치에 올려놓았다.

인생에는 3대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전통 신앙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있는데 바로 각각 신이 창조했다는 설(神創論), 전생과 금생, 천국과 지옥이다. 무신론에서도 반드시 이에 대응할 만한 논리가 있어야 했으니 시공을 크게 단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신의 창조론”을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고 “노동이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으로 변모시켰고 “전생과 금생”은 “새로운 사회와 낡은(舊) 사회라는 두 가지 세계”로 변모시켰으며 “천국과 지옥”은 빵을 그려서 허기를 채우는 식의 “공산주의”로 변모시켰다.

전통신앙에서는 “3치 머리 위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하는데 신령들은 초상적인 능력으로 사람을 감시하고 보호해 준다. 중공은 사람들의 신앙을 파괴한 후 끊임없이 자신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함”과 “우리를 이끌고 승리에서 다른 승리로 나아간다”고 고취시켰다. 종교에는 구세주가 있는데 중공은 자신의 지도자를 “인민을 구한 큰 별”이라고 칭한다.

정통 신앙은 안정적인 특성이 있다. 예수는 “천지를 폐기할 수는 있어도 내 말은 폐기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중국인은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도(道) 역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교(正敎)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경전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이런 시비(是非) 표준은 안정된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필요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이전에 선전하던 시비표준을 바꾸거나 뒤엎어 버린다. 공산당의 가치관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권력과 이익이다. 만약 공산당 권력의 통제 하에 있지 않거나 혹은 그것의 임시적인 이익에라도 부합되지 않으면 모두 “반동”이란 누명을 씌워 제거해버린다.

예를 들면 스탈린이 러시아공산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트로츠키를 제거한 것과 마오쩌둥이 공산당 지도자인 류사오치(劉少奇)를 제거한 것 등은 결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귀속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 대량의 “마르크스주의 소조”, “공산주의소조” 등 이론조직이 반동조직으로 선포되었다. 나중에 저명한 경제학자가 된 양샤오카이(楊小?)는 바로 이들 이론소조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10년형에 언도되었다. 최근 중국에서 발생한 사건 역시 이러한 궤도에 따라 운행된 것이다. 2001년 중공 장시(江西)성 위원회는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한 권의 중공 중앙 문건집을 반동출판물이라고 선포하고 명령을 내려 전부 회수하여 소각했다. 그 원인은 매우 간단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건들은 장시성 지방정부가 농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집행하는데 불리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를 소멸하던 데에서 자본가의 입당을 허락하기, “1대2공(一大二公 역주: 중공이 인민공사 조직을 위해 내건 슬로건으로 규모가 크고 집단화 수준이 높다는 의미)”부터 “집집마다 도급제를 실시하기”, 사유재산 제도를 소멸하던 데에서 사영(私營)경제를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기, “대명대방(大鳴大放)”에서 “쟁론하지 않음”까지, “관건문제는 농민을 교육하는 것”에서부터 “가난한 중하층 농민의 재교육 받아들이기”, “영원히 (마오쩌둥의) 정론을 뒤집지 않겠다”던 덩샤오핑 등이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바로 뒤집은 것, “마오쩌둥 주변의 사람들”이 마오의 경호실장에 의해 연행되어 죄인이 된 것, “자본주의 꼬리 자르기”가 “집안을 일으켜 부자 되기”로 변모한 것, 이런 매 차례 개변은 모두 원래 정책이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 계속해 나가면 중공 자체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사령(共産邪靈)의 통제 하에 끊임없이 원칙과 입장이 바뀌는 공산당 | 에포크타임스

이는 바로 영국의 저명한 작가 조지 오웰이 이야기한 것과 흡사하다.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은 그것이 비록 사상을 통제하지만 결코 사상을 고정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추호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교조(敎條)를 확립하지만 또 날마다 그것을 수정해야 한다. 그것이 교조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이 신하와 백성들의 절대 복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를 모면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권력정치의 필요 때문이다.”

공산당체계 중에서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연계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세속권력을 초월한 이러한 평판과 재판의 기능은 박탈당했고 원칙과 도덕의 인증과 재판은 세속 권력 자체의 일부분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이 아니면 진정 확고한 공산당 정권을 건립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관이 지탱하는 인류의 행위는 인성 본질의 약점이 표현하는 모든 열악한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점차적으로 충분히 발휘되고 확대되어 최종적으로 유일무이한 당문화(黨文化)의 체계로 변하게 된다.

2.유물론 선전

무신론은 당문화의 기초가 되어 신에 대한 사람들의 바른 믿음을 파괴했으며 이는 중공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중공은 이보다 더 멀리 가려고 했다. 변증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은 공산당의 세계관과 방법론이 되었으며 당문화의 또 다른 기초가 되었다. 유물론에 세뇌당한 중국 민중들이 보는 세계와 역사는 과거와는 이미 완전히 같지 않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단지 아주 논쟁적인 일종의 철학유파에 불과했다. 출판업자 에드워드는 일찍이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초고를 아인슈타인에게 넘겨주어 의견을 발표하도록 했으며 이 초고를 인쇄할 필요가 있을지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책을 보고 나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겼으며 “만약 이 초고가 역사적인 인물로서 주목할 만한 저자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인쇄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왜냐하면 당대(當代) 물리학의 관점에서 말하든 아니면 물리학사(物理學史)의 각도에서 말하든 이 초고의 내용은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모두 들어맞는” “진리”로 여겼으며 교과서의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았고 매일 매일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

마르크스 변증유물론의 유물론과 전통적인 유물론은 또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전통적 유물론은 오직 일종의 유심(唯心)적인 철학이라고 여겼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세계를 개조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철학은 단지 탁상공론식으로만 세계를 인식할 것이 아니라 철학은 반드시 계급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여기까지 이르러 이 유물론은 이미 간단한 철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비단 소위 봉건사회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에 이르는 역사적 노정을 예측했으며 또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혁명에 의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이 나타났을 때 이상주의 색채로 가득했다. 인간 세상에서 “천당”을 건립하려는 이상(理想)은 뜨거운 피가 끓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 속에 가입하게 했는데 그 결과 붉은 재앙이 10여 개 나라에 퍼져 십 몇 억의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고 일억이 넘는 사람들이 비명에 횡사했다. 폭력만으로 유지하는 정권은 오래갈 수 없다. 공산당은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다 하는” 동시에 또 “좋은 말이란 좋은 말은 다 해”야 했다. 즉 거짓말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殺戮)을 위한 모종의 “합리”적인 해석을 제공할 것이 필요했다. 이런 거짓말은 정밀한 공산주의 이론 포장을 거쳐 아주 아름답고 완벽하게 보인다. 그것은 살육을 위한 변호일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정치, 경제, 군사, 법률, 과학, 교육, 사회관리, 의료위생, 더 나아가 양로(養老) 및 가정생활 등 여러 방면에 대해 일련의 지도 및 통제 이론을 제출했고 역사에 대해서도 일련의 해석을 가했다. 다른 한 방면에서 중공은 또 사회 각종 업종, 각종 미세한 세포에 대해 전면적인 통제를 진행했다.


유물론의 칼을 들고 인간 천당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유인하여 노예로 만들고 살해한 공산주의. | 에포크타임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바로 공산당의 폭력혁명과 투쟁철학 등 구체적인 행동을 위한 이론적 지도를 제공하였다.

당문화(黨文化) “유물주의”의 최초 표현은 “폭력숭배주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마르크스 : “물질역량은 오직 물질역량으로만 파괴할 수 있다.”

엥겔스 : “기관총, 대포가 가장 권위 있는 것이다.”

레닌 : “폭력은 100번 변론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국가는 계급압박의 도구이다.”

마오쩌둥 : “정권은 총 끝에서 나온다.”

린뱌오 : “정권이란 바로 탄압하는 권력으로 정권이 있으면 백만장자, 억만장자라도 하룻밤 사이에 때려눕힐 수 있다.”

현재 당문화의 “유물주의”에서 진일보로 파생된 “물질숭배주의”, “숭금(崇金)주의”, “향락주의”는 결국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유리주의(唯利主義)”로 이끌게 된다. 이것들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덕이 추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있다. 당대(當代)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중공 폭력의 탄압과 돈으로 매수하는 정책 하에서 기어 다니고 있으며 철저한 “유리주의(唯利主義)”자가 되었다.

당문화의 거센 폭풍우에 휩쓸린 중국 대륙은 도덕과 양심이 폭우에 떠내려가고 오직 유물주의, 폭력숭배주의, 물질숭배주의, 유리주의가 판치게 되었다. | 에포크타임스

폭력과 금전을 신봉하는 중공은 신앙의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앙 탄압에 대한 중공의 자신감 역시 “유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물주의는 도덕을 부정하는 작용을 하는데, 인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소위 도덕이란 모두 어느 한 계급에 종속되는 것으로 중국에서 도덕의 의미를 결정하고 이를 서술하는 것은 자연히 모두 공산당이다. 도덕에 대한 중공의 변덕스런 작법은 보편적인 세상 도덕으로 하여금 정치운동 중에서 철저히 전복되게 하였다. “도덕 한 근에 몇 푼이나 하는가?”라는 말은 당문화가 교육해 낸 “유물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사유논리이다.

유물주의는 생명에 대한 냉담과 무시를 가져왔다. 사람의 정신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인 요소만 인정하기에, 엥겔스는 생명이란 단지 단백질의 존재형식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단지 한 더미의 단백질이 존재형식을 변경한 것에 불과하며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데 이는 공산당 살인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유물주의는 직접적으로 양지(良知)의 작용을 부정한다. 신을 믿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한 후 모두 양심상 가책을 느끼게 되며 신명(神明)의 감독과 관찰, 인과응보가 있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마치 마오쩌둥이 “철저한 유물론자는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을 징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세상의 폭력밖에 없다. 아울러 한 사람 혹은 조직 자체가 바로 인간 세상의 폭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어떤 악한 일이든 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선악(善惡), 도덕 등 가치판단이 인류의 세속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신과 하늘의 뜻 그곳에서 박탈되었으며 도리어 완전히 세속권력의 일부분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또 세속권력의 타락과 명성의 추락에 따라 마지막에는 개인의 이익으로 선과 악과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완성하였다.

당문화는 “물질이 의식을 결정”하고 “경제적인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은 필연적으로 정치 발전, 민주주의의 개선, 법제(法制)의 건전화, 도덕의 승화, 문화적인 번영 등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철저한 당문화의 “유물주의” 사유방식은 이미 우리가 직접 목격한 지난 몇십 년 동안의 개혁개방에 동반된 정치적인 부패, 독재의 횡행, 도덕의 타락, 문화적인 쇠락, 사법(司法)계통의 독재 도구화 등의 현상을 통해 거짓임이 철저히 입증되었다.

중공이 경제발전으로 자신을 변호할 때 늘 일종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지곤 한다. 당신이 중국의 민주와 법제건설 부족, 신앙, 언론, 결사 등 기본적인 자유권이 국가의 폭력에 의해 잔혹하고 뻔뻔스럽게 박탈당하는 것을 비난할 때면 중공은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고 교육수준이 낮으며 인민들의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댄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러한가?

“우리는 튼튼한 전함과 강력한 대포만으로 강대국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민주 자체를 하나의 힘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재산, 모든 국방용 무기는 단지 민주와 함께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진정 강대한 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민주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오늘의 일이 아니며 몇 년 뒤의 일로 간주하는데, 그들은 중국인민의 지식과 교육정도가 구미 자본가 계급 민주국가 정도로 제고된 후에야 다시 민주정치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로 민주제도 아래에서 민중을 교육하고 훈련하기가 더 쉽다.”

위에 서술한 두 구절은 중공 기관지인 『신화(新華)일보』에 발표된 것이다. 단지 인쇄시점이 각각 1944년 3월 5일 과 1939년 2월 25일일 뿐이다. 이는 그때 국민당 정부의 전시 특별상태를 겨냥하여 진행한 비판이었다.

여기서 보다시피 중공은 정권을 탈취하기 전에 민중의 경제상황과 교육정도가 민주를 실현하는 장애가 된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경제상황과 교육정도가 전체적으로 항일(抗日)전쟁이나 국공(國共)내전 시기보다 월등히 좋은데 어떻게 도리어 장애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더욱 풍자적 의미를 지닌 것은 “유물주의”를 높이 외치고 있는 중공 자체가 결코 “유물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중공은 이데올로기 선전부문을 농업부문보다도 더욱 중시해왔다. 유물주의 깃발 아래 중공은 재차 “유의지론(唯意志論 역주: 오직 의지만 있으면 다 된다는 의미.)”의 착오를 범했다. 즉 “사람이 대담해질수록 땅에서 산출되는 양도 많다”, “하루는 20년과 같다”, “공산주의로 달려 들어가자.” 등등이다. 펑더화이(彭德懷)는 이러한 구호들이 “과장되고”, “소자산계급의 열광”이며, 경제법칙과 과학법칙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겼다가 마오쩌둥에게 “반당(反黨)집단”으로 몰려 공격받았다. 전국적으로 “우경 기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결국 직접적으로 3천여만 명이 굶어죽는 대기황이 들었는데 이것은 실로 중공의 “유심(唯心)”의 결과였다.

1960년 린뱌오(林彪)는 “인적인 요소가 제일이고, 정치공작이 제일이며, 사상공작이 제일이고, 활동사상이 제일인바 이것이 우리 군의 정치사상 공작 방향이며 또한 전체 군대의 건설 방향이다.”라고 제기했다. “4개의 제일”이란 말을 꺼내는 자체가 바로 사상을 물질 위에 놓은 증거이니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바로 “유심주의”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오히려 “누가 중국인에게 창조가 없다고 말하는가? 4개의 제일은 좋은데, 이것이 바로 창조다.”라고 치켜세웠다. 1964년 2월 1일 『인민일보』 사설 「전국적으로 모두 해방군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글에서는 “해방군은 정치사상 공작을 크게 틀어쥐고, “4개의 제일”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해방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원인이다.”라고 크게 선전했다.

지금까지도 중공은 여전히 “3개 대표”를 치켜세우면서 이 몇 십 글자를 “하나의 체계적인 과학을 형성했으며….” 이는 공산당의 “입당(立黨) 근본이자 집권 기초이며 힘의 원동력이다”라고 한다. 중공 중앙선전부 부장 류윈산(劉雲山)은 “반드시 “3개 대표”의 중요사상을 마음속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큰 힘을 기울여야 하고 광대한 간부 군중들의 행동 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각 항목 공작에서 근본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모 농촌의 담벽에는 놀랍게도 “”3개 대표”로 우리의 도축작업을 지도하자”라는 큰 표어가 나붙었다.

“유물주의”거나 민주에 대한 논술이거나 간에 모두 공산당의 다른 하나의 큰 이론계통 중에 놓여있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법(辨證法)이다. 변증법의 기능은 바로 어떻게 “백(白)”을 “흑(黑)”으로 이야기하는 가이다. 백마(白馬)는 말이 아니며 회백(灰白)은 백이 아니라는 식의 유희는 공산당의 언어계통 중에 충만 되어 있으며 또한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은연중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절름발이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시장경제”라고 부르며 중공의 독재통치를 “사회주의 민주”라고 부르며 독재는 “인민민주주의독재”가 되었고 인권침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인권이론”이 되었다. 아무튼 접두사나 접미어를 더한 후 제 마음대로 원뜻의 정의를 고쳤다. “변증”을 거친 이런 종류의 황당한 개념들은 과거에 중국 대륙에서 범람했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내가 다시 강조하는데 백은 흑이요, 흑은 백이다! | 에포크타임스

3. 전통문화 부정

서론에서 묘사한 것처럼 중국의 전통문화는 일종의 반신(半神)문화이다. 신전문화(神傳文化)는 중화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반영되었으며 또한 민간의 생활 중에서도 깊은 뿌리를 내렸다. 세속의 다른 절반에서 중국인들은 사회윤리를 일종 신앙으로 삼았는데 충효인의(忠孝仁義)는 도덕과 품덕(品德)의 정도를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

중국에서 불충(不忠) 불효(不孝) 불인(不仁) 불의(不義)하다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계속 존재할 수 없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이르기를 “유천지명, 어목불이(維天之命,於穆不已)”라 하였으니 상천(上天)의 명령은 영원히 몹시 엄숙한 것이다. 중국 고대에 신령(神靈)은 늘 이름을 구비하거나 구비하지 않는 형식으로 “하늘”의 뒷면에 몸을 숨기고 있다. 중국인들은 도덕과 세속 생활의 최종 재판관은 의심할 바 없이 “신(神)”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후 중국 민간에서는 점차 천당, 지옥과 환생, 선악에 보응이 따른다는 것을 확고히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념과 윤리에 대한 중국인들의 견지는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 기초를 형성했고 중국 전통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문화 중에서 보다 중요한 부분은 중국 전통지식인들이 담당했다. 이 한 부분은 역사를 거울로 삼아서 지난날을 알고 흥망성쇠를 미리 아는 기초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어떠한 민족이건 중국인들처럼 그렇게 역사를 중시하는 민족은 없다. 중화 민족이 문자를 창조한 초기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곧 역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한자를 창조한 창힐(倉?)은 바로 헌원(軒轅) 황제의 사관(史官)이었다. 혼란한 춘추 시대에 제(濟)나라의 백(伯), 중(仲), 숙(叔), 계(季) 4명의 태사(太史) 중 3명이 참수를 당했다. 원인은 단지 한 마디 진실한 말을 쓰기 위해서였다. 즉, “여름 오월(五月) 을해(乙亥)일, 최저(崔?)가 그 군주인 광(光)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쓰기 위해서였다. 죽간(竹簡)에 글을 쓰기란 아주 힘이 드는데, 사마천(司馬遷)은 궁형(宮刑)을 당한 후 어두운 등잔불 아래서 죽간에다 50여 만자의 《사기》를 써냈다. 한나라 이후 “격대수사(隔代修史 역주: 전 대의 역사를 다음 대에 기술하는 것)”의 전통은 중국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속적이고도 정확하며 믿을 만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만들었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 | 에포크타임스

역대로 역사를 기록한 사람은 모두 당대의 대 유학자들로, “사학(史學), 사식(史識), 사재(史才), 사덕(史德)”을 겸비해야 했다. 사건을 기록한 후에는 늘 “태사공왈(太史公曰)” 혹은 “신광왈(臣光曰)”과 같은 유의 평론이 있었다. 이러한 평론들은 유가(儒家)의 관점에 서서 한 사건에 대한 저자의 시비(是非)평가를 체현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사서는 진실한 역사사건을 기록해 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시의 관제(官制),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리(水利), 상업, 병법(兵法), 음악, 과학 등 방면의 백과사전식 저작도 포함되어 있다. 이 속에는 역사기록자가 갖고 있는 유가 도통(道統)도 포함되어 있다.

유가의 이런 역사관은 두터운 중화 전통문화를 계승했으며 이는 또한 중공이 처음부터 즉각 소멸할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공산당이 중국문화를 소멸하는데 사용한 큰 무기가 바로 역사유물주의이다.

역사유물주의는 역사 발전을 “계급투쟁”의 결과와 생산력 및 생간관계 사이의 모순의 결과라고 해석하며 또한 무산계급이 곧 자산계급과의 투쟁에서 정권을 세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울러 공산당은 무산계급의 선봉대로서 자연히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분석의 방법에 따라 고대 제왕과 지식인들이 아무리 많은 좋은 일을 했든지 막론하고 착취계급을 대표했기에 모두 마땅히 부정과 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폭동을 일으킨 반역자들은 비록 그들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거나 아무리 많은 부녀들을 간음했어도 그들은 무산계급 혹은 피압박자에 속했기에 모두 부추기고 찬양받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을 위해 온 힘을 쏟은 청렴한 관리들에 대해 중공은 “계급모순”을 완화해 지주계급의 통치를 연속시켰다고 여겨, 온갖 악한 짓을 다 자행한 탐관오리보다 오히려 더 심한 비판을 가했다.

중국인들은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死生有命 富貴在天]”와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善惡有報]”는 것을 믿으며 부귀와 명리(名利)는 모두 전생과 금생에 쌓은 인과라고 여겼다. 부귀하든지 빈곤하든 지간에 “출세하면 겸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궁핍하면 홀로 그 몸을 수양한다[達則兼濟天下,窮則獨善其身]”이므로 공산당의 “계급투쟁”사관이 주입한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다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의 문화는 포용적인 문화로 유불도 3교가 공존한다. 즉 유가학설 중에서는 정주리학(程朱理學, 성리학)과 육왕심학(陸王心學, 양명학)이 공존한다. 도가에서는 남방의 정일교(正一敎)와 북방의 전진교(全眞敎)가 공존하고 불교에서는 선종, 정토종, 천태종, 화엄종 등 다양한 종파가 공존한다. 서양의 기독교, 천주교, 동방정교(그리스 정교), 유태교, 회교 등 역시 중국문화와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이는 모두 중국인의 넓은 포용성과 조화를 중시하는 정신을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각기 다른 종교 사이의 전쟁이나 종교 내부의 각기 다른 교파 사이의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다.

이런 종류의 포용사상은 중공의 투쟁사상과는 완전히 대립되므로 반드시 소멸할 대상이었다.

중공은 “투쟁”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사람들은 서로간의 투쟁 속에서 믿음을 잃었고 흩어진 모래알처럼 되어 중공이 통제하기 쉬워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공이 조고(趙高)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진나라 때 간신 조고가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강변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모순된 것을 우겨서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짓)” 권모술수를 부렸다는 것이다. 즉, 조고는 “지록위마”를 인정하는 사람은 마음 놓고 중용했고 침묵하는 자는 당연히 양심이 남아 있기에 배척했으며, 반대하는 자는 죽여 버렸다. 그러나 조고의 “지록위마”는 단지 궁중 권모술수에 불과했지만 중공의 “지록위마”는 오히려 전 국민의 참여를 강요하는 “대중문화”로 되었다. 예를 들면 “토지개혁”, “진반(鎭反)”, “상공업개조”, “연극계의 제도개조, 사람개조와 극 개조” 등 여러 운동이며 모두 “지록위마”의 검증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참가해야 했고 반드시 태도를 표시해야 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2원화의 세계 속에서 중공과 같은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즉시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쩌둥: “8억 인구에 투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 에포크타임스

도가는 “진(眞)”을 숭상하고 불가는 “선(善)”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하며 공자는 “인(仁)”과 “신(信)”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역사는 바로 “거짓(假), 사악(惡), 투쟁(鬪)”의 역사이다. 1987년 중공이 통과시켰던 당안법(?案法) 제19조 규정에 따르면 일반 당안은 30년이 지나면 공개할 수 있으며 일반 공민들도 모두 열람할 수 있다. 그러나 중공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항일, 내전, 진반, 토지개혁, 대기근 등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공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스탈린과 체결한 중소비밀조약을 감히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거짓으로 은폐시켰던 죄악이 폭로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확실히 유물주의는 정신영역에 대해 매우 무능력하다. 그중에서 “미(美)”가 바로 한 예이다. 비온 후의 무지개, 석양에 물든 저녁풍경을 유물주의자들은 오직 전자기파의 서로 다른 스펙트럼이라고 분석할 수밖에 없다. 사랑에 대해서는 인류 자신의 호르몬의 변화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인류의 고귀한 정조(情操)에 대해선 자질구레하고 범속한 보잘 것 없는 은혜라고 이해한다.

본질로부터 말하면 인성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모두 공산당 통치에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중공은 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어휘인 “인성론(人性論)”을 발명하였다. 당원에 대해 말하자면 “당성(黨性)”으로 “인성(人性)”을 압도할 것이 필요하며, 보통사람으로 말하면 “인성”은 또한 혁명이 철저하지 못한 표현으로 본다.

중공은 문예 선전 중에서 늘 “금욕주의(禁慾主義)”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사랑을 부정하고 가정을 부정한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중공은 이미 “금욕주의”에서 180도 돌변하여 “종욕주의(縱慾主義 역주: 욕심에 따라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를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중공의 예전의 작법과 서로 상반되는 정책 같지만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동일한 원인에서 출발한 것이다. 즉, 중공이 과거에 사람들에게 금욕하게 했던 목적은 공산당에 충성을 다하도록 시키기 위함이었고 당성이 가정과 인성보다 높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 중공의 이데올로기는 파멸되었다. 중공은 사람들더러 매춘, 도박, 마약, 하룻밤의 정사, 축첩에 빠지게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들의 도덕을 황폐화시켜 미친 듯한 향락 중에서 공산당을 반대할 겨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좌우에서 협공”하는 이런 방식은 중공의 통치역사 중에 도처에 널렸으며 중공 통치를 수호하기 위한 배후의 목적은 일관적이었다.

유가 문화의 핵심은 가정윤리로, 이런 가족 윤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육친정과 인애(仁愛)이다. 공산당 선전 중에는 계급감정으로 육친정과 우정을 대체했다. 예를 들어 리위허(李玉和)가 부르는 노래처럼 “사람들은 세상에서 오직 육친정과 의리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계급의 정과 의리가 태산보다 무겁다.”라고 선전한다. 이른바 “친하냐 친하지 않으냐는 계급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인데 아울러 경계선이 분명한 단어인 “동지”를 발명해냈다. 서로 “동지”가 된 자는 곧 혁명 대가정의 일원이며 반대하면 모두 단호한 탄압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동지”냐 아니면 “적”이냐 하는 간단한 이원 대립관계로 일체 사회관계를 구분했으며 육친 혹은 친구 관계를 능가하는 곳에 올려놓았다. 계급투쟁이 필요할 때는 부자간에 반목하고 부부가 원수가 되어 서로 고발하고 투쟁하며 자신의 육친을 구타하는 것으로 자신의 계급성이 인성보다 강하다는 것을 표시하면서 당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다.

중공의 선전 중에는 “원한을 깨물고 원한을 깨물며, 원한을 억지로 삼키노니 원한은 맘속에 깃들어 싹이 트누나”와 같은 노래가사가 중국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원한은 공산주의 동력 중 하나로서 또한 더욱 중요한 일종의 공산주의 감정이다. 원한의 반복적인 주입은 중공 각종 군중 운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인간 세상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동정, 관심과 사랑, 선량함 등은 이로 인해 공산주의의 천연적인 적이 되었으며 반드시 제거할 대상이 되었다.

계급의 고통을 잊지 말고 피눈물의 원한을 단단히 기억하자! | 에포크타임스

4.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위대함을 선전

무신론과 유물론이라는 당문화의 양대(兩大) 이론기초를 확립한 후 전면적인 신전문화(神傳文化)에 대한 부정을 통해 당문화 체계는 곧 “만사가 구비되어 오직 동풍(東風)만 필요할 뿐이다.” 민중들의 신앙에 공백이 발생하자 공산당은 기어이 자신의 “신(神)”을 만들어 민중들의 사상 속에 주입시켜 이 공백을 메우려 했다. 바로 이러한 조신(造神 역주: 신격화)운동을 통해 공산당과 같은 이런 종류의 정교(政?)가 합일된 사교조직 체계는 전부 완성되었다. “신”을 그리고 마지막에 눈을 그려 넣은 후 천지(天地), 인성을 반대하는 당문화는 결국 살아 숨쉬기 시작하며 인간세상을 해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역사상에도 “황건적”, “태평천국”과 같은 부류의 정교합일 정권이 나타난 적은 있지만, 이런 정권들은 모두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그들의 교리를 다른 조직에까지 보급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중공은 유일하게 전국 정권을 탈취하였고 아울러 폭력을 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인 “정교합일” 조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그 교주는 바로 각 시기 중공의 최고 권력자였다. “위대한 수령 마오 주석” 다음에는 또 2년만 지탱한 “영명한 수령 화(華) 주석”이 있었다. 조신이란 어휘는 영원히 공산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대를 이어서 “혁명 지도자”가 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은 당연히 신격화되는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해방자” 혹은 “구세주”의 명예를 쓰고 신의 제단에 받들어졌다.

신은 전지전능하며 잘못을 범할 수 없다. 때문에 중공은 조신 과정 중에서 자신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한[偉大光榮正確]” 형상을 수립했다. 이 때문에 중공 최고 지도자가 만약 현직에 있다면 정말로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 합법성의 출처가 바로 “일관되게 정확”하다는 것인데 일단 잘못을 인정하게 되면 곧 합법성의 상실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을 퍼뜨리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조신 중에서 어떠한 초자연적인 존재라도 완전히 부정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을 예로 들자면 홍군의 제5차 반(反) 포위토벌이 실패한 후 이리저리 도처로 도망 다녔다. 이 실패와 도망을 공산당 교과서에서는 “북상항일(北上抗日)”로 선전하고 있다. 분명 “9.18 만주사변 후” 3개월에 마오쩌둥은 징강산(井岡山)에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란 분열국가를 세웠으나, 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했을 때는 도리어 “장제스를 압박하여 항일”에 참여하게 만든 영웅이 되었다. 이런 식의 역사날조는 마오쩌둥에게 “민족의 영웅”이란 영광을 주었다.

북상항일이란 미명하에 유사시 소련으로 탈출하기 위해 패주하던 중공이, 일본에 맞서 싸운 국민당 정부를 비방하며 마치 자신들이 항일을 주도한 것처럼 역사를 날조. | 에포크타임스

루산(廬山)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좌경모험주의와 과장에 도전했다. 공산당 지도자에 대한 이런 도전이 일단 성공하면 “조신운동”은 곧 실패하게 되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중공의 집권 합법성 문제가 직접 도전받게 된다. 때문에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등은 펑더화이에 대한 비판을 발동한 후 더욱 이지를 잃고 “약진”을 선전했으며 이는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근을 직접적으로 초래하게 했다.

중공은 단지 문장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연극, 영화, 가곡, 음악 등의 형식으로도 신격화를 계속했다. 어록가(語錄歌), 충자무(忠字舞)를 이용하고, 아침이면 (마오 주석에게) 교시를 청하고 저녁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신을 만들었으며, 징을 치고 북을 울리면서 “최고지시”를 환영하면서 신을 만들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여전히 “반복 학습”, “깊은 이해”, “실시 관철”, “착실히 수행”과 같은 유의 선전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장쩌민이나 후진타오의 “중요 강화(講話)”를 대하고 있는데 사실은 현재 지도자에 대한 조신운동인 셈이다.

무신론의 보급은 19세기 진화론 학설(진화론의 오류에 대해서는 앞으로 뒷장에서 상세히 논술)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유물”은 정신적인 힘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며 인류를 초월하는 일체 존재, 즉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앙경전에서 유래한 도덕표준들은, 동양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善), 도가의 진(眞), 유가의 “극기(克己)”와 “조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和?貴]”을 포함하고 서양의 모세 10계 등을 포함하여, 전부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다. 이에 도덕표준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경시킬 수 있는 준칙으로 변해버렸다.

공산당사회 중에서 가치관과 도덕에 대한 해석권은 최고 통치자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중공의 가치관에 저촉되는 세상의 모든 보편적인 도덕은 중공에 의해 쉽사리 사이비도덕, 봉건잔재, 자산계급 인성론 등 각종 모자가 씌워질 수 있다. 그런 후 중공은 스스로 도덕을 해석할 수 있는 고지에 서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비판, 투쟁, 탄압을 진행한다.

기왕에 중공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하다면 일체 “당(黨)문화”는 반드시 이런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함”을 찬양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중공은 또 피의 빚[血債]이 산더미처럼 많고 극도로 사악한 사교(邪敎) 조직이다. 도덕의 좌표를 잃은 상황에서 공산 사당(邪黨)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함”을 찬양하는 문화가 사람들의 도덕에 어떠한 혼란을 조성하고 사회 기풍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중공의 선전 속에서 마르크스는 혁명가, 철학자,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843년 귀족 처녀 예니(Jenny)는 25세의 마르크스에게 시집올 때 하녀 렌헌(Lenchen)을 데려왔다. “착취”에 대해 줄곧 극도로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가장해 온 마르크스는 자본가인 엥겔스가 “착취”해온 돈을 마음대로 썼으며, 무상으로 하녀의 노동을 점유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로 그녀의 몸을 차지하여 1850년에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당시 예니는 이 일로 인해 마르크스와 심하게 다퉜다. 그러자 마르크스는 오랜 친구이자 독신으로 있던 엥겔스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명예를 위해 엥겔스에게 희생양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사생아를 엥겔스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고 엥겔스는 아이를 한 노동자의 집에 입양시켰다. 말 못할 피해를 입은 엥겔스는 죽기 전에 후두암에 걸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프레디(Freddy)는 마르크스의 아들이다. 투시가 그녀의 아버지를 이상화(理想化) 시켰다.” 여기서 프레디는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고 투시는 마르크스의 딸이다. 이 추문은 지금 이미 동부 독일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4년 6월의 『유럽신경학 저널(The European Journal of Neurology)』에서 폭로한 바에 따르면, 3명의 이스라엘 의사들이 역사 자료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하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 매독에 걸렸으며 이 때문에 1924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참고한 역사자료에는 유럽과 소련에서 레닌을 치료했던 의사의 기록과 레닌의 건강 상황 자료 및 연구자들에게 “정치선전”이라고 불리는 검시(檢屍)보고서를 포함한다.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정신과 의사 러너(Vladimir Lerner)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레닌의 이름을 없애고, 그 증상을 전염병에 대해 잘 아는 신경학자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매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레닌에 대한 진단결과: 매독 | 에포크타임스

중공 당원들은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마치 모두 금욕주의자인 것 같았지만 마오쩌둥만 해도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부인만 셋이나 된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楊開慧)가 죽지도 않았는데 허쯔전(賀子珍)에게 장가를 갔고, 허쯔전과 이혼도 하기 전에 바로 장칭(江靑)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1994년, 마오쩌둥 신변에서 22년간 근무했던 리즈쑤이(李志綏)는 『마오쩌둥 주치의 회고록』이란 책에서 마오쩌둥의 방탕하고 문란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폭로했다. 책에서는 마오는 “언제나 여자를 노리개로 삼았다”라고 했으며, 많은 아름답고 젊은 여자들을 입궁시켜 “마치 식탁에 요리를 올리듯이 번갈아 가며 여자를 진상했다”고 언급했다.

마오쩌둥의 경호원은 마오가 대기근 기간에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인민들과 고생을 같이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대기근은 이미 1959년에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후난(湖南)성 위원회 서기 장핑화(張平化)에게 적수동(滴水洞) 행궁(行宮)을 건축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를 “203공정”이라고 불렀다. 1960년 하반기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62년까지, 총 건축면적 3638.62평방미터에 달하는 1, 2, 3호의 주 공사와 더불어 소산(韶山)에서 적수동까지 연결 도로를 동시에 준공하는데, 총 1억 위안을 소비했다. 만약 이 돈으로 식량을 구입했다면 후난성에서 대기근 3년 동안 적어도 150만 명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공산당 지도자의 방탕한 생활은 무절제한 욕망에 따른 방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권모술수와 냉혹함 그리고 거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란하고 안일한 생활은 신앙의 단속, 도덕의 단속, 매스컴의 감시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게 했으며 그 결과는 극도의 재난(災難)성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저속하고 타락한 품성이 일으킨 시범 작용은 사회도덕을 급속히 아래로 끌어내렸다.

“조신(造神 신격화)”은 개인 독재의 기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신은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에 공산당 지도자 역시 자연적으로 진리의 화신으로 가장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오직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일언당(一言堂)”을 합리화했고 한 사람의 두뇌로 수억의 두뇌를 대신함으로써 재난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바로 시정할 방법이 없었다. 독립적인 사고는 위험한 일로 되어 버렸는데, 왜냐하면 중공이 싫어하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세를 따르고 흐름 등에 따를 뿐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했다. 모든 문제는 오로지 중공의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조직에서 결정하기만 기다렸다.

중공에 의해 신으로 떠받들어진 마오쩌둥 | 에포크타임스

조신”의 또 다른 결과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박해를 받을 때 여전히 “조직을 믿고 당을 믿는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때 마음속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신의 공정함에 희망을 기탁할 수 있다. 하지만 무신론자는 박해 받을 때 그들은 더 높은 도덕권위를 찾을 수 없기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당) 중앙은 좋으니, 조직에서 명확히 해결할 거야”라고 말한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이런 것도 중공이 자신을 신격화한 결과이다.

유신론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기도를 하거나 심지어 사찰이나 도관(道觀)에 가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빌 수 있다. 무신론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으면 조직을 찾아가는데” 당(黨)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오히려 당(黨)이야말로 문제를 만들어낸 진정한 장본인임을 모르고 있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초기에 즉시 매체와 교육을 농단하였다. “일언당(一言堂)”의 방식으로 “무신론” 과 “유물론”을 주입했으며, 전통신앙에 대해서는 단속, 왜곡, 탄압을 진행했으며,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사상개조를 진행에 왔고,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먹칠하면서 “봉건(封建)”, “미신(迷信)”이라고 폄하하며 모조리 무너뜨렸다. 폭력기계를 지휘하여 당(黨)문화를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는 출가인과 지식인들을 소멸해 버리거나 혹은 생활 내원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협박하여 굴복하게 만들었다. 또 개인을 숭배하는 “조신” 행동을 통해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빈 공간을 채웠다. 중공의 안중에서 어떤 문화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학술문제나 혹은 단순한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이자 계급적 입장의 문제이다. 문화대혁명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黨)문화가 마침내 단련되고 성숙되어 중공이 희망하는 정도로 전통문화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이 신세대는 모두 당문화의 교육에서 자라나 정통(正統) 문화와 관념에 대해서는 무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2006년 9월 24일 수정

(판권은 에포크타임스에서 소유하고 있습니다. 전재하는 것을 환영하나 내용을 고쳐서는 안 됩니다)

주1 : 일언당(一言堂)이란 (지도자가) 대중의 (반대)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제 의견만을 고집하고 (혹은 부당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감히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않는 상태를 비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