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14개국, 中 정권에 면죄부 준 WHO 보고서 비판

한동훈
2021년 03월 31일 오후 12:55 업데이트: 2021년 03월 31일 오후 2:26

새롭게 밝혀진 내용 없고 中 당국 주장에 부합
지나치게 지연되고 중요 데이터 접근 없이 작성

연구소 유출 가능성은 매우 낮고 박쥐에서 감염됐을 것이라는 세계보건기구(WHO) 조사팀의 코로나19(중공 바이러스) 기원 조사 보고서와 관련해, 세계 각국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조사가 지나치게 지연되고 중요한 자료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로 작성됐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한국, 영국, 호주, 일본, 캐나다, 체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이스라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노르웨이, 슬로베니아 등 14개국은 WHO 조사팀 보고서와 관련해 30일(현지시각) 공동성명을 내고 보고서를 비판했다.

14개국은 “우리는 SARS-CoV-2(중공 바이러스)의 근원에 대한 국제 전문가의 연구가 상당히 지연되고 완전한 원자료와 샘플에 대한 접근이 부족했다는 점에 대해 공통으로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어 중공 바이러스의 기원과 사람에게로 바이러스가 전파된 경로에 대한 동물시험 등 추가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WHO 조사팀은 지난 1~2월 한 달간 중공 바이러스 감염증 발병이 처음 보고된 중국 우한에서 조사를 진행한 뒤 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매우 낮고, 박쥐에서 중간 동물 숙주를 거쳐 사람에게 감염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린 것으로 29일 보도됐다.

보고서는 아직 공식 발표 전이지만, AP통신이 WHO 회원국 외교관 초안을 입수해 공개했다. 그러나 거의 최종안으로 알려져 공식 발표되더라도 큰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백악관의 젠 사키 대변인은 이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WHO의 보고서를 검토 중이며 핵심 데이터와 정보에 대한 접근성과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유럽연합(EU)도 중국 현지에서 조사가 지연되고 샘플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점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14개국 공동성명에서는 중국의 공산 정권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정권은 바이러스의 진상을 은폐하고 세계적 대유행을 고의로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중국 정권은 사태 발생 후 수개월 동안 국제적인 조사요구를 거절하다가 올해 1월에야 WHO 다국적 조사팀이 우한을 방문해 2주간 조사하고 중국 측 전문가들과 정보를 교환하도록 허용했다.

10명의 다국적 전문가로 구성된 WHO 조사팀은 입국 전부터 장애물에 부딪혔다. 중국 정권이 비자 등을 문제 삼으면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시간 지연은 “오해”라고 부인했지만, 입국 후에도 WHO 조사팀의 어려움은 계속됐다.

조사팀의 호주 미생물학자 도미니크 드와이어는 2019년 12월 중국 보건당국이 우한시 야생동물 거래시장을 중심으로 파악한 174명의 초기 환자 데이터 원본을 요구했지만 요약자료만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을 편든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테드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도 이번 조사에 대해 “충분히 광범위하지는 않다”고 인정했다.

한편, 중국 정권은 이번 WHO 보고서와 관련 “과학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고 환영했다.

중국 외교부는 문답형식의 홈페이지 입장문을 통해 “신종코로나 기원 조사에 참여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보여준 과학, 근면, 전문성에 찬사를 보낸다”고 밝혔다.

이어 “중국은 국내 감염병 예방과 통제 업무가 엄중한 상황에도 WHO 전문가들을 초청해 연구를 진행했다”며 “이는 중국의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자평했다.

중국 정권은 이번 조사를 ‘연구’이며, 중국 전문가들과의 공동 연구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조사는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지만 연구는 중립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염병 사태에 중국이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풀이된다.

중국 정권이 ‘과학자들’에게 보낸 찬사가 어떤 과학자들을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이 제기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고서에 실린 연구 대부분은 중국 과학자들이 수행했다”며 “중국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정부를 위해 일한다”고 지적했다.

WSJ은 컬럼비아 대학의 전염병 전문가 머린 밀러의 말을 인용해 “내가 보는 것은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외교적 언어”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중국 정권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듯 WHO 조사팀장도 직접적인 압박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WHO의 식품안전·동물질병 전문가인 피터 벤 엠바렉 박사는 팀원들이 “모든 면”에서 정치적 압력에 직면했다면서도 “보고서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삭제하라는 압박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엠바렉 박사는 또한 중국 측이 자료 공유를 제한한 점을 시인하며 “이러한 제한은 다른 많은 나라에도 있을 것”이라며 중국 당국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덧붙였다.

전염병 전문가는 아니지만 중국 정권의 전략전술 분석에 능한 재미 시사평론가 황허(橫河)는 “중국은 이미 실험실에서 바이러스 유출이 발생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WHO 보고서에서는 냉동식품을 통한 전파, 실험실 유출 등의 가능성이 부인됐다. 정확하게 중국 당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일침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