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룬궁 박해 20년] ①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날들

애나 조, 공영화
2019년 07월 18일 오전 11:52 업데이트: 2024년 01월 17일 오전 9:52

톈안먼 광장에 청년 서너 명이 현수막을 펼쳤다. 현수막엔 ‘眞善忍(진선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쩐싼런 하오! (진선인은 좋습니다)” 이들이 외치자, 공안이 황급히 뛰어왔다. 공안은 현수막을 낚아채고 아스팔트 위에 이들을 때려 눕혔다. 약속한 듯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호송차가 도착했다. 공안들은 청년들을 태우고 사라졌다. 호송차가 떠난 그 자리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1999년 7월 20일, 중국에는 파룬궁(法輪大法, 파룬따파) 탄압으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1989년 6.4 톈안먼 사건에 이은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기공(수련)은 국민운동이었다. 만여 개 기공 중에 파룬궁 수련자는 1억 명으로 가장 많았다. 13억 인구에 1억 명이니, 수련자는 13명 중 1명 꼴 이었다. 5천 6백만 명이었던 당시 중국 공산당원의 두 배에 가까웠다.

2000년 12월, 사복 경찰이 현수막을 든 노인, 청년,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 Minghui

빠르게 늘어난 1억 명이 장쩌민 당시 국가 주석에게는 ‘세력 확산’으로 보였다. 그는 파룬궁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 핵심 권력인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전원은 탄압 결정에 반대했다. 탄압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규정한 중국 헌법에 위반한 조치였다.

7월 20일, 각종 언론에서 시동을 걸었다. TV, 라디오, 신문에서 매일 300~400편에 달하는 가짜 뉴스를 실었다. 중국국가체육총국의 권장 사항이었던 파룬궁은 이날부터 ‘사회악’이 됐다.

 

톈안먼을 찾아온 사람들

탄압 후 1주일 만에 체포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파룬궁 수련자는 5천여 명이었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7월 20일 당시 선양시 정부 청사 앞에서 청원한 수련자는 1만여 명이었다.

중국 헌법에 명시된 ‘상급 기관 청원권’을 근거로 수련자들은 베이징 상급 기관을 찾았다. 청원 숫자가 늘어나자 당국은 베이징 진입 도로를 봉쇄했고, 청원하려는 수련자들은 도보나 자전거를 이용했다.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는 숫자는 2000년 초부터 2001년 말까지 2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베이징공안국은 많게는 하루 100만 명 이상이 베이징에 다녀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톈안먼 광장에는 연공하거나 현수막을 들고 외치는 파룬궁 수련자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000년 12월 31일, 톈안먼 광장에서 청원하던 파룬궁 수련자가 체포되고 있다. | Minghui

체포된 수련자들은 임시 수용소에 수감됐다.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베이징 당국은 이들을 각 지역으로 분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련자들이 실종됐다.

당시 화이러우 구치소에 수감당했다는 한 여성 수련자는 수감 당시 겪은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남자 교도관이 전기봉으로 내 얼굴, 입술, 코, 이마, 턱, 손에 전기 고문하며 끊임없이 욕설했다. 결국 전기봉 배터리가 방전됐고, 손이 아픈지 다른 사람이 교대했다. 그도 똑같이 했고, 이 사람이 지치자 여자 교도관이 내 머리카락을 잡고 끌고 머리를 벽에 마구 부딪히게 했다.“

 

베이징 기자회견

 

1999년 10월 28일, 베이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파룬궁 수련자 딩옌이 고문 상황을 진술하고 있다. | Minghui

중국 당국은 파룬궁을 ‘금지어’로 규정했다. 파룬궁에 대해 정면 보도한 모든 사이트를 차단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그들의 상황을 알릴 탈출구가 없었다.

1999년 10월 28일, 파룬궁 수련자 30명은 베이징 서쪽 교외 웨이량허 리조트에서 ‘중국대륙 파룬따파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외신 기자들에게 중국 내 파룬궁 수련자들이 처한 상황을 알렸다.

기자회견은 1시간 15분간 열렸다. 수련자들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고문당한 사진 30여 점을 공개했고, 로이터 통신, AP통신,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보도했다. 당시 외신 기자들은 수련자 10명과 인터뷰했다. 그중 한 명인 허베이셩 스자좡 파룬궁 수련생 딩옌(丁延)은 이듬해 8월 18일 청더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이후 톈진, 허베이 스자좡, 선양, 진저우 등에서 비밀 기자회견이 열렸다. 하지만, 기자회견장에 나온 파룬궁 수련자들은 대부분 행방불명되거나 박해로 사망했다.

 

TV 스팟 영상 비밀 송출

 

TV 스팟 영상 송출로 진실을 알린 파룬궁 수련자들. 방송 이후 이들은 참혹하게 학살됐다. | Minghui

“3개월 내에 파룬궁을 소멸하겠다”는 장 주석의 계획이 실패하자, 당국은 보다 조직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조작된 내용은 1400건에 달했다. 톈안먼 분신조작 사건이 그 중 하나였다.

톈안먼 분신조작 사건은 2001년 1월 23일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분신 사건이다. 7개월 뒤 유엔회의에서는 비디오 분석을 근거로 톄안먼 분신조작 사건이 ‘정부의 연출극’이라고 발표했다. 워싱턴포스트(WP) 기자 필립 반은 기사에서 “분신을 시도한 사람은 파룬궁 수련자가 아니었다”라고 언급했다.

2002년 3월 5일 저녁시간, 창춘 파룬궁 수련자들은 케이블 TV네트워크 채널 8개에 TV 스팟 영상를 동시 송출했다. 파룬궁 진상 TV제작물 <분신인가 사기극인가>, <파룬따파, 세상에 널리 전해지다> 등 40~50분 짜리 영상이 창춘시 TV에 방영됐다.

장쩌민 전 국가 주석은 스팟 영상 송출에 연루된 수련자들을 “즉각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창춘 전 지역에서 대대적인 검거 작전 끝에 5천여 명의 창춘시 파룬궁 수련자가 체포됐다. 그들은 중형을 선고받고, 대부분 잔혹하게 학살됐다.

‘장쩌민 고발’ 물결

랴오닝성 안산시에서 파룬궁 수련자가 붙여 놓은 박해 실상을 알리는 게시물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읽고 있다. | Minghui

‘때려 죽여도 자살로 친다. 죽어도 신원조사를 하지 않고 바로 화장한다’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장쩌민 전 국가 주석의 탄압 명령은 잔혹했다.

2000년 8월, 파룬궁 수련자 주커밍, 두안웨이, 그리고 두안웨이의 조카 왕제(王傑)는 중국최고법원과 최고검찰원에 고소장을 보내 당시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세 사람, 장쩌민, 뤄간과 쩡칭훙을 고소했다.

대만 파룬궁 인권변호단 주완치 대변인은 “반드시 장쩌민을 법으로 처리하고 박해를 종려하라고 엄숙하게 말해야 한다”면서, “이는 중국이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일 뿐 아니라 20세기 전 인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2차 대전 때 나치의 종족학살 정책을 겪은 후, 중국에서 또 다시 학살정책을 겪는 것인데, 중국공산당의 집단학살정책은 누구나 침묵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라고 밝혔다.

한편, 전 국가 주석 장쩌민에 대한 반 인류 범죄고발은 한국을 비롯해 각국에서도 활발히 진행됐다. 2018년 기준 241만 명 이상이 연명 혹은 단독으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