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27주년] 두 대학 동창의 엇갈린 명암

2016년 06월 3일 오전 9:24 업데이트: 2019년 11월 9일 오후 1:43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왕후닝과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 샤밍

중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고비에 두 젊은 지식인이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1989년 학생 민주화 운동 때 톈안먼(天安門·천안문) 광장에서 유혈 무력진압이 벌어지자 한 명은 공산당을 편들었고 다른 한 명은 학생의 편에 섰다.

왕후닝은 현재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중국 권력 내의 유력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격렬한 파벌 투쟁 속에서 고위층 자리를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샤밍은 현재 뉴욕대학 정치학과 교수다. 왕후닝과 대학원생 시절 서로 옆방 기숙사를 썼으며, 이후 일을 할 때도 사무실이 서로 가까이 붙어있었다. 샤밍은 학자와 민주운동가 사이를 오가며 활동했는데, 양심적인 많은 중국 지식인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위치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차례로 푸단대학에 들어갔다. 샤밍은 1981년 16세의 나이로 입학했고 왕후닝은 1978년 22세에 입학했다. 10년 동안 그들의 생활과 하는 일의 공간은 늘 가깝게 붙어 있었다. 몇 년 후, 샤밍과 왕후닝의 전처는 친한 친구 관계를 이어왔는데 미국에서 온 그녀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본지는 영문판에서 이 두 남녀 이야기를 통해 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운명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정권에 ‘고용된’ 문인은 유행하는 이론과 무기로 고위계층을 치장하며 상류층으로 발돋움했고, 어떤 이들은 옛 선비정신을 계승해 정직과 성실, 품성을 지켜나가며 “통치자 비판은 선비의 책임”이라는 신념에 따르다가 타국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왕후닝조심스럽고 신중한 친구였다

샤밍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전 동료였던 왕후닝에 대해 “아주 신중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왕후닝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느 한쪽을 편들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관점을 밝히기는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출신 학자 천쿠이더(陳奎德)는 문화대혁명 이후 푸단대학에서 철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천쿠이더는 왕후닝과 같은 해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3년 동안 같은 기숙사에서 살았다. 천쿠이더는 현재 인터넷 잡지 ‘종람중국(縱覽中國)’의 편집장이다.

천쿠이더는 본지에 “우리는 친한 사이였다. 왕후닝은 현대시 짓기를 좋아했는데 같이 밖에서 어울릴 때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고 회상했다.

샤밍이 아직 학부생일 때 왕후닝은 대학원생이었고, 샤밍이 졸업할 때 왕후닝은 교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기 학과에서 정치위원을 맡았는데 매주 동급생들의 사상동태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두 사람은 이후 한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서로의 사무실이 멀지 않아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1989년 국제사회를 뒤흔든 톈안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이념이 급속도로 쇠퇴했다. 지식인들은 이념에 대해 논하는 대신 콜라를 마시고 로맨틱 소설을 쓰며 점차 생활인이 되어 갔다.

푸단의 봄

1989년 4월 상하이는 베이징 학생 시위의 파문이 남아 있었다. 푸단대학 캠퍼스에서도 단식·연설시위를 볼 수 있었다. 샤밍은 당시 유명한 교수이자 당원, 정치위원이었다. 4월의 어느 날 그는 학생 수백 명 앞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연설했다.

다음날 상하이의 다른 대학 학생들이 시위와 단식을 시작했다. 항의시위에 참여한 젊은 교직원들은 경력이 오랜 교수들을 찾아 청원서에 사인을 받았다. 그들은 왕후닝을 찾아 서명을 부탁했지만 왕후닝은 거절하며 오히려 항의시위에 반대하는 문서에 서명을 했다.

천쿠이더는 “당시 왕후닝은 학생운동을 반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굳혔다”고 말했다.

톈안먼 운동에 대한 진압이 시작되고 샤밍은 자유를 잃었다. 샤밍은 부모가 홍색 혁명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그는 감금당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정치교육을 받고 사상을 보고해야 했으며 학교 캠퍼스를 떠나는 일이 금지됐다.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다

왕후닝은 그리 좋은 홍색 가문이 아니었다. 80년대, 그는 저우치(周琪)라는 우수한 여학생과 손을 잡았다. 저우치의 부친은 국가안전부 부부장이었다. 이후 왕후닝은 급속도로 승진해 학과에서 가장 젊은 부교수가 됐다.

개방(開放), 보쉰(博訊) 등 중국 해외언론은 전 푸단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해 “상하이 국가안전부 특수요원과 왕후닝이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국가안전부에서는 샤밍에 대해서도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샤밍은 한 인터뷰에서 “국가안전부에서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자신을 영입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1989년 현직 상하이시 위원회 서기였던 장쩌민은 상하이의 학자들과 회의를 열어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연설했다. 회의 참가자 대다수는 도보에 대한 압력행사에 반대했지만 왕후닝은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쩡칭훙(曾慶紅)의 눈에 들기 위한 것이었다. 쩡칭훙은 장쩌민의 부하이자 정치적 책사로 알려져 있었다. 쩡칭훙은 왕후닝을 회의 후 남도록 해 장쩌민에게 소개했다.

샤밍과 천쿠이더 역시 회의참가자나 다른 소식통을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확인했다.

관영언론은 1994년 왕후닝은 장쩌민의 개인 보호 속에 베이징으로 파견됐다고 보도했다. 이후 왕후닝은 공산당의 통치가 정치에 유용하다는 이론을 꾸며내기 시작했다.

공산당 사상 주입을 피하려 해외 망명

1980년대 말, 중국에서 개혁이 실패로 끝나고 샤밍은 살아남으려면 해외로 떠나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일방적인 도피는 아니었다. 그는 정치학자로서 중국의 더 큰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사상 주입과 통제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했다.

샤밍은 2010년 미국의 중국인 밀집지역인 플러싱의 한 모임에서 공산당 탈퇴를 선언하고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던 공산당식의 사유에 대해 반성했다.

그는 대기원과 인터뷰에서 “우리 모두가 공산당 세뇌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공산당은 뼛속까지 자신밖에 모른다. 사람들을 해치는 세뇌를 일삼는다. 나는 내 마음속에 어두운 사상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정화하는 데 20년을 소모해야 했다”고 전했다.

샤밍은 지난 수년간 사상을 정화하며 기독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그는 불경을 읽기 시작해 심경(心經), 법화경(法華經)을 독파하고 공자·맹자·묵자 같은 중국 전통철학에 심취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며 “(이런 철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해줬다. 나는 세상의 진리에 맞게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샤밍은 중국이 정치·사회 발전을 이룩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공정한 나라로 거듭나게 하는 책을 쓰고 있다고 근황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