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사태 ‘탱크맨’ 사진작가 “당시 현장에서 목숨 걸고 찍었다”

2019년 05월 23일 오후 3:27 업데이트: 2021년 05월 28일 오전 11:53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 항쟁의 발발은 그해 4월부터 계엄령이 선포된 5월20일까지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친 20만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규모가 갈수록 커졌다. 결국 이를 ‘난동’으로 규정한 중국 공산당의 명령으로 인민 해방군이 유혈 진압해 일어난 사건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대만 중앙통신의 5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6·4 30주년을 앞두고 AP통신 전 사진작가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가 당시 총탄 속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과 그 당시 ‘탱크맨’을 찍어 미국에 보낸 과정을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와이드너는 “사진 기자로서 그것은 내가 보도했던 가장 불가사의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1989년 초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을 떠올리며 와이드너는 “시위하던 학생들이 너무 기뻐했고 흥분된 분위기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학생들이 세운 민주 여신상의 위치가 자금성의 마오쩌둥 상을 마주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민주와 전제의 직접적인 충돌이었다. 표현의 자유가 중국에서 통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베이징의 심한 공기 오염은 처음 온 와이드너를 심각한 독감에 걸리게 했고 6월 4일 밤의 무장 충돌은 그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

그는 그때를 상기하며 “톈안먼 광장 인근에서 장갑차를 불태운 사건 당시 시위대가 던진 돌멩이 하나가 나의 얼굴에 떨어졌다. 돌이 나의 카메라에 먼저 부딪혀 죽음을 면했지만 나의 머리는 상처가 났다”고 했다.

돌에 맞은 뒤 와이드너는 여권을 높이 쳐들고 “American(미국인)!”이라고 외쳤다. 앞장선 한 학생이 진정하라고 하며 한 시체를 가리켰다. “그 시체는 불타는 장갑차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학생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시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거리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촬영한 후, 와이드너는 거리에서 LA타임스 기자의 인터뷰를 수행하던 미국 교환학생 마르센을 만났고, 그의 협조로 카메라를 가지고 베이징호텔 6층 발코니에 들어가 톈안먼 광장 상황을 촬영했다.

1989년 6월 5일, 베이징호텔에서 와이드너가 찍은 육신으로 탱크를 막아선 ‘탱크맨’ 사진이 톈안먼 사태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와이드너는 머리 부상에 심한 독감까지 겹쳐 그의 판단력이 이미 영향을 받았고, ‘탱크맨’을 찍을 때 카메라 셔터 속도를 점검하는 것도 깜빡했다고 말했다. 그는 “800mm의 긴 렌즈로 셔터 속도가 1/30초로 느렸다. 그것은 불가능한 임무였지만 기적처럼 한 장이 성공했다”고 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진을 전달하는가가 중요했다. 다행히, 말슨은 필름을 속옷에 넣고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그는 대사관 직원에게 필름을 AP통신에 전달하도록 해 세계 각지의 신문에 채택될 수 있었다.

홍콩 ‘빈과일보’ 5월 5일 자 보도에 따르면, ‘6.4’에 참여했던 베이징전영학원(北京電影學院)의 하오젠(郝建) 교수는 인터뷰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여러 명의 학생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1989년 6월 3일 저녁 10시가 넘자 중공군 계엄부대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군이 총을 쏘지 않으면 정권에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했다.

계엄부대가 돌격해 왔을 때, 하오젠 교수는 톈안먼 서쪽 남장안가 부근에 있었다. 군인이 방패를 든 채 기관총을 들고 몰려왔다. 그의 앞에서 20~3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하자 탄알 한 발이 즉시 날라왔다. 나는 두 학생이 바닥에 쓰러지는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민중들과 “파시스트! 폭도!”를 외치던 하오젠 교수는 베이징영화학원으로 돌아가면서 정법대학을 지날 때 본관 현관에 5구의 희생자 시신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시체는 그 당시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머리가 탱크에 깔려 터진 사람도 있었는데 머리에 묶인 붉은 천 조각은 이미 볼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의 사촌 동생인 하오즈징(郝致京)도 그 사건으로 살해됐다. 그는 당시 베이징의 여러 병원 시체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20여 일 뒤에야 푸싱병원(復興醫院)의 비좁은 냉장고에서 온몸이 새까맣게 변한 사촌 동생의 시신을 찾았다.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30만 명에 가까운 계엄부대가 탱크, 장갑차, 기관총을 동원해 톈안먼 광장에서 청원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했다.

중국 공산당은 몇 명을 학살했는가? 미국과 영국의 기밀해제 문건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이 진압에서 최소 1만여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한다.

/차이나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