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새로운 미래로 가는 한일관계, 공은 일본 코트에 있다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2023년 03월 11일 오후 11:14 업데이트: 2023년 03월 12일 오전 10:32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로 규정했다. 이어서 3월 6일에는 박진 외교장관이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의 해법을 발표했다. 요지는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했거나 앞으로 승소하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한국 기업들이 출연하는 ‘일제 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을 통해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는 것,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가 포함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계승을 밝히는 것,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를 통해 양국 기업들이 출연하는 ‘미래청년재단’을 만들어 양국의 청년들을 육성하는 것 등이다. 이 직후 윤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임을 강조하고 국민적 이해를 구했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한일관계를 건전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라며 호평했다. 미국도 자신들에게 가장 가까운 두 동맹국 간의 협력이라면서 연거푸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왜 가해자인 일본기업들에게 배상 책임을 묻지 않는가”, “왜 가해국인 일본 정부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가”, “우리만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불균형 외교 아닌가” 등의 질문이 쏟아지고 있음이다.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도 “왜 가해자가 아닌 우리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아야 하나”라고 반문하고 있다. 솔직히, 필자는 이런 볼멘소리들을 시비하고 싶지않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일관계의 새 지평을 열려는 정부의 노력에 반대할 생각도 없다.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힘들고 인기 없는 결정이지만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불만스러움과 불가피함을 구분하는 국민의 냉정함과 국민 불만을 최소화하는 정부의 대일 외교역량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때이며, 이런 조화로 ‘반일 몰이’로 세상을 뒤집으려 하는 세력들에 대처해야 한다. 당연히, 일본의 상응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한국의 제안에 일본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한국 정부의 이번 결단이 순항할 수도 있고 좌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은 일본 코트에 있다.

불만족스럽지만 불가피한 선택

3·1절 기념식에서 반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평화선까지 선포한 이승만이 사진에도 없고 연설에서도 빠진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 당연한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이 가중되는 신냉전 시대에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정책방향을 틀린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강제징용 문제 해법에 대해 제기된 불만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든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지향적 한일 협력 시대를 열어야 하는 당위성이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불행한 역사가 가로 놓여 있지만 지리적·인종적으로 가장 가깝고 경제적·문화적·인적 교류도 깊다.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다. 이것만으로도 두 나라가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가 많지만 한반도 내외의 안보정세를 감안한다면 한·일 간 그리고 한·미·일 간 안보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한국은 대륙 쪽으로부터 엄습하는 당면위협과 미래위협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구조적으로만 본다면 6·25 전야만큼 취약하다. 북핵 문제부터가 그렇다. 비핵화 외교를 통해 북핵을 포기시킬 수 있다는 ‘헛꿈’을 30년 동안 꾸어온 덕택(?)으로 한국은 미 핵우산에 의존한 채 ‘대남 선제 핵사용 불사’까지 선언한 북한의 핵무력 앞에 벌거벗고 서 있었다. 그랬다가 핵우산의 신뢰성이 떨어지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2022년에 제정한 「핵무력 정책법」이 북한이 공격을 받든 안 받든 최고 지도자가 언제든 누구를 향해서든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중에 동맹국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돈과 노력을 퍼붓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군은 문재인 정부 동안 오히려 축소되고 군기는 이완되었으며 나라는 이념과 지역으로 쪼개져 있다. 북한의 시각에서 보면 핵위협을 앞세우고 대한민국을 유린할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활짝 열려 있는 셈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위협도 통제불능이다. 시진핑 주석의 중국은 중화 패권 시대를 개막하고자 경제, 군사, 반도체, 우주, 사이버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 주변국들에는 눈알을 부라리면서 전랑(戰狼)외교를 앞세우고 수직적 질서를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아예 오만한 종주국 행세를 하고 있다. 이미 미국보다 더 많은 전투함을 보유한 중국 해군은 중간선을 무시하고 서해를 내해화하고 있으며, 군용기들은 매년 100차례 이상 한일 양국의 방공식별구역(ADIZ)이 중첩되는 구역을 침범하여 한·일을 길들이고 이간시키고 있다. 또한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으로 북핵 제재 결의들을 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이 북핵을 방어하기 위해 반입한 사드(THAAD)를 시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핵군비통제 조약을 거부하고 아무런 제약도 없이 핵군사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만주와 산둥에 한반도와 일본을 사거리로 하는 미사일과 레이더들을 잔뜩 포진시킨 상태에서 10여 개의 공군기지가 있는 산둥반도에 새로운 군용공항들을 건설 중이다. 이렇듯 중국은 이미 현재위협이고 향후 더욱 엄중한 미래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런 시대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일본이 안보협력을 통해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는 것은 필수다. 1,2차 대전을 포함한 수많은 전쟁을 통해 서로를 죽였던 유럽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나토(NATO)의 틀 내에서 합심하여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지 않는가?

공은 일본 코트에 있다

지금 일부 세력들은 또다시 반일 몰이에 나서기 위해 몸을 풀고 있다. 무슨 연대니 연구소 노조니 하는 늘 듣던 좌성향 단체들과 인사들이 또다시 전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 정치인들도 1637년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상기시키면서 “삼전도 굴욕에 버금가는 최대 치욕에 국민과 함께 강력히 맞서겠다”며 기름을 부어대고 있다. 국민이 이들의 장단에 휘둘리면 나라의 장래는 암울해질 것이다. 애국 국민이라면 문재인 정부시절 정부가 좌익단체들과 함께 ‘죽창가’를 합창해서 무엇을 얻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괴, 무역 제재 등으로 한국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던가? 국민이 더 안전해졌는가? 북한의 도발과 중국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한국이 일본마저 적대국으로 삼아서 국방을 꾸려갈 수나 있는가?

한국 국민에게는 이 말고도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다면 한미동맹도 한일 안보협력도 어렵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선거때마다 정부가 좌우로 바뀌는 나라, 정부가 바뀌면 전임 정부의 대북 기조를 180도로 바꾸고 전임 정부의 국제합의를 뒤집는 나라로 낙인찍힌다면, 동맹국은 피흘려 싸워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소중한 전략자산이나 정보를 공유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우방국들도 합의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강제징용 피해자 해법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가 일본 쪽에 많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배상이 완료되었고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과 사과도 이미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공식 사과는 가해자로부터의 직접 배상을 생략한 이번 한국 정부의 해법은 이런 입장을 충분이 배려한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일본 정부와 가해자 기업들은 합의문에 적힐 내용을 넘어 한국 국민과 피해자들이 원하는 바를 자발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대승적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며, 국민은 윤석열 정부에 이런 것을 이끌어내는 외교역량을 기대한다. 그렇게 되지 못는다면 한국의 좌파세력들은 또다시 ‘반일 몰이’에 나서 죽기살기로 국민을 선동하여 세상을 뒤엎으려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공은 일본 코트에 있다.

양국이 함께 관리해야 하는 민감 사안들도 있다. 역사 왜곡을 둘러싼 감정싸움과 독도를 둘러싼 자존심 싸움은 양국관계를 일순간 냉각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들이다. 이들을 현명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한일협력의 ‘봄날’은 일순간 삭풍이 부는 시베리아로 돌변할 수 있다. 현재로서 가장 현명하게 관리하는 방법은 상대국 국민의 반일정서나 혐한정서를 자극할 수 있는 새로운 조치들을 자제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한일 양국이 진정 미래를 향한 협력기조를 정착시키고 싶다면 다투어야 할 사안들과 협력해야 할 사안들을 분리하고 협력사안들을 중심으로 양국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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