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2) – 전란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다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016년 07월 2일 오전 10:00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6

진시황은 천시(天時)·지리(地理)를 얻어 순식간에 중국을 통일했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언뜻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신(神)께서는 전쟁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를 지키고 하늘을 경외하며 분쟁을 종결짓도록 가르치셨다. 동시에 진시황의 천하통일로 혼란이 일단락됐다는 사실은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다’는 이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진시황, 천하를 통일하다

 

1. 진나라 6대에 걸쳐 부국강병 달성

기원전 361년 왕위를 승계받은 진나라 효공(孝公)이 적극적으로 현인을 찾아 나서니 순식간에 천하 인재들이 서쪽으로 몰려들었다.

진나라에서 등용된 승상과 주요 책사들 가운데는 범수(範睢), 여불위, 이사(李斯) 등 다른 제후국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본국에서는 중용되지 못했으나 진나라에 와서 주요한 재상이나 고위 관리가 됐다.

전국시대 중기, 두 강국인 진나라와 제나라는 동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진나라의 군사력은 당대 최강이었다. 이러한 대치상태에 강한 불안감을 느낀 각국은 소진(蘇秦)이 제시한 합종전략을 받아들여 서로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했다. 진나라는 장의(張儀)가 주장한 연횡전략으로 연맹에 맞섰다.

기원전 318년부터 269년까지 진나라는 주변 6개국과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나날이 강성해져 갔다. 6국은 여러 차례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진나라는 이미 6대에 걸친 왕들의 노력을 통해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상태였다. 이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탄탄한 기반이 됐다.

2. 천하통일의 예언과 진시황의 탄생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 책력 정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사기·진시황본기>에서는 “태어났을 때 이름은 정(政)이고 성은 조(趙)씨였다”고 기록했고 <동주열국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태어나던 때 온 방 안에 붉은빛이 가득하고 온갖 새들이 날아올랐다. 태어난 아이를 보니 코는 오똑하고 눈은 가늘고 길며, 이마는 네모지고 눈동자가 두 개였으며 입안에는 치아가 여러 개 있었다. 등에는 용비늘이 돋아 있었고 울음소리가 아주 커서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천하를 통일할 영웅이 진나라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전부터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문공 4년(기원전 762년)에 견하(汧河)와 위수가 만나는 지점에 도시를 건설하고 정주하기 시작했다. <사기·봉선서(封禪書)>에는 이런 기록이 전해졌다.

“어느 날 밤, 문공은 꿈에서 누런 뱀을 보았는데 그 몸은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져 있었고 입은 부현(鄜縣·오늘날의 산시성 옌안 부근) 일대까지 뻗어 있었다. 문공이 태사 돈(敦)에게 물으니 돈은 상제께서 보여주시는 징조라며 제사를 지낼 것을 권했다. 이에 문공은 부현에 제단(鄜畤)을 세우고 소·양·돼지를 바쳐 백제(白帝)께 제사 지냈다.”

<사기·봉선서>에는 문공 19년 진보(陳寶)를 얻은 일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제단을 세운 지 9년 되던 해, 문공은 옥석을 하나 얻게 되어 진창산(陳倉山) 북쪽의 산비탈에 성을 짓고 그 옥석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 옥석의 신령은 어떤 때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오지 않았고 어떤 때는 한 해에 여러 번 오기도 했다. 신령은 항상 밤에만 왔는데 마치 유성처럼 광채를 발했다. 동남쪽에서 사성(祠城)으로 들어왔는데 모습은 수탉 같았으며 밤중에 큰 소리를 내니 들꿩들이 놀라 울었다. 짐승을 한 마리 바쳐 제사 지내고 옥석을 가리켜 진보라고 했다.”

<사기·봉선서>에는 진보에 대한 주석도 달렸는데 “질감이 돌 같고 허파를 닮았다”, “옥으로 된 닭 혹은 돌으로 된 닭 같았다”고 적었다. 진보에 지내는 제사를 보계신사(寶雞神祠)라고도 불렀는데, 오늘날의 산시성 바오지(寶雞)시 이름의 유래가 됐다.

또한 진보를 얻는 자는 패왕이 될 운명이었다. <사기·봉선서>에서는 “진나라 문공은 사냥을 나갔다가 흑룡을 얻었는데 이는 그 수덕(水德·오행 중 물에 상응하는 왕자의 덕)의 길상물이었다”고 했다. 진나라가 수덕에 힘입어 불(火), 즉 주나라를 대체하리라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진 헌공 11년(기원전 374년), 헌공은 주나라 열왕의 태사 담(儋)을 접견했다. 담은 헌공에게 “진나라와 주나라는 처음에는 하나였다가 분리된 것이니, 오백 년 후 마땅히 다시 합쳐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17년 후에는 진나라에 패왕이 출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진나라에 패왕이 나타나 천하를 통일하리라는 예언은 진나라 왕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승됐다.

천하통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하늘의 뜻이었다. 천명에 따라 탄생한 진시황은 결국 천하를 통일,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황조(皇朝)의 위업을 달성했다.

출생 이후로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진시황은 결국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고, 13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13세 때 장양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해 진나라 왕이 됐다. 이때 진의 영토는 이미 파, 촉, 한중(漢中)을 병합하고 완(宛)을 넘어 영(郢)을 점유,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북으로는 상군 동쪽을 거두어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 등의 군을 점령했으며 동으로는 형양(滎陽)에까지 이르러 이주(二周)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재상이었는데 10만 호를 봉토로 받았고 호를 문신후(文信侯)라고 했으며 널리 빈객, 유사들을 초빙하여 천하를 병합하려고 했다. 이사가 여불위의 사인이 됐으며, 몽오(蒙驁), 왕의(王齮), 표공(麃公) 등이 장군이 됐다. 진왕은 나이가 어린 데다 막 즉위한 터라 국사를 대신들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했다.” <사기·진시황본기>

진시황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이후 9년간 중요한 나랏일은 재상인 여불위가 맡아보았다. 여불위는 백가사상을 집대성해 <여씨춘추>를 지었다.

“(진시황) 5년, 장군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해 산조(酸棗)·연(燕)·허(虛)·장평(長平)·옹구(雍丘)·산양성(山陽城)을 평정하고 모두 함락시켜 20개 성을 빼앗았다. 처음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6년 한·위·조·위·초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수릉(壽陵)을 점령했다. 진나라가 출병하자 5국은 군사를 거두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점령하고 동군까지 쳐들어가자 위나라 임금 각(角)이 일족을 이끌고 거주지를 야왕(野王)으로 옮겨서 험한 산세에 의지해 하내(河內)를 지켰다.

“7년 혜성이 먼저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 출현했으며, 5월에는 서쪽에 나타났다. 용(龍)·고(孤)·경도(慶都)를 공격하던 장군 몽오가 죽자 (진나라는) 군사를 돌려서 급(汲)을 공격했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 16일간 나타났다. 하태후가 서거했다.”

“8년에는 진왕의 아우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반란을 일으켜 둔류(屯留)에서 죽임을 당했고 군관들도 모두 참살됐다. 둔류의 백성들을 임조(臨洮)로 옮겨 살게 했다.” <사기·진시황본기>

진시황 9년(기원전 238년), 진시황은 22세의 나이로 고도 옹성(雍城)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친정(親政·직접 나라를 다스림)을 시작했다. 진시황이 성년이 되어 직접 나라를 다스리자 그동안 노애(嫪毐)·조태후(趙太後)와 어울리며 후궁들을 이간질했던 여불위는 처벌이 두려웠던 나머지 자결했다.

친정을 시작한 지 1년 되던 진시황 10년, 진시황은 신속하고 단호하게 내란을 다스렸다.

진시황은 연합할 새도 없이 6국을 하나하나 빠른 속도로 정벌했고 합종전략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진시황의 전략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해 역량을 집중,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먼저 북쪽에서 조나라를 정벌하고 중원으로 진출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쪽의 한나라를 친 후 다시 연나라, 초나라,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진시황이 가장 먼저 공격 목표로 삼았던 조나라는 6국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해 천하통일에 최대 장애물이었다. 진나라는 여러 차례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조나라는 이목(李牧)과 방난(龐煖) 등 명장이 버티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진시황은 조나라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한편, 한나라에 대해서는 조금씩 나누어 공격하는 책략을 취했다. 기원전 231년 한나라 남양군(南陽郡)의 가수(假守·임시 군수)였던 등(騰)은 진나라에 영토를 바쳤고 진시황은 등을 내사(內史)로 임명해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진시황 17년(기원전 230년) 한나라 왕 안(安)이 포로로 붙잡혔고 한나라는 멸망했다.

진시황 18년(기원전 229년), 진시황은 대장군 왕전(王翦)에게 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치도록 했다.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尚) 등이 나서서 방어했고 양국은 거의 1년간 대치했다. 그러나 조나라 왕 청(聽)은 모함을 믿고 이목을 사형하고 이후 사마상마저도 살해했다. 진나라 군대는 무주공산에 진입하듯 순조롭게 조나라를 칠 수 있었다. 이듬해 진나라 군대는 조나라 수도 한단을 격파했다. 조나라 왕 청은 조나라 지도를 바치며 진나라에 투항했다. 그러나 공자 가(嘉)는 대군(代郡·오늘날의 허베이 웨이현)을 빠져나가 이목의 이름을 대고 인심을 얻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진나라 군대는 진시황 25년(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를 포로로 삼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북방 통일을 이루었다.

진시황 16년(기원전 231년), 위나라 경민왕(景湣王)은 진나라의 강대한 세력에 못 이긴 나머지 자진해서 진나라에 여읍(麗邑)을 바치고 원병을 청했다. 이때 한창 조나라를 치고 있던 진시황은 병력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었기에 토지를 받아 주었다. 이로써 위나라는 다만 몇 년이나마 더 연명할 수 있었다.

진나라 군대가 남하해 초나라를 치고 있던 진시황 22년(기원전 225년), 진시황은 왕분(王賁)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오늘날의 허난성 카이펑)을 치도록 했다. 위나라 군대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는 공격할 방도가 없었지만, 제나라는 원병을 보내 위나라를 도우려 하지 않았고 위나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왕분은 연일 큰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황하와 변하(卞河) 두 강을 이용해 성을 공격할 수 있겠다고 판단, 물길을 터서 두 강의 강물을 끌어와 대량으로 흐르도록 했다. 대량은 성벽이 물에 젖어 허물어지고 말았고, 위나라 왕 가(假)는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는 이렇게 멸망했다.

남쪽의 초나라는 영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해 ‘갑옷을 입은 군사만 백만(甲士百萬)’이라고 자칭했다. 그러나 왕과 대신들이 권력다툼으로 내란이 끊이질 않았다.

진시황 19년(기원전 228년) 초나라 유왕(幽王)이 사망했다. 유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우 유(猶)가 왕위를 계승해 애왕(哀王)이 됐으나 재위 두 달 만에 이복형 부추(負芻)에게 살해됐다. 부추는 초나라 왕이 됐다. 부추가 재위 3년째 되던 진시황 21년(기원전 226년), 진시황은 젊은 장군 이신(李信)의 말대로 그에게 20만 명의 병사를 주어 남하해 초나라를 치도록 했다. 이신은 자만했던 나머지 초나라 군대의 항연(項燕)과 굴정(屈定)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진시황은 몸소 노장 왕전(王翦)을 찾아가 60만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치도록 설득했다. 초나라 영토로 쳐들어간 왕전은 병사들에게 군사훈련만 시키면서 진지를 굳게 지키고 떠나지 않았다. 자신은 쉬면서 힘을 비축하면서 적군은 지치도록 하는 책략이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진나라 병사들은 초나라의 지형에 충분히 적응한데다 훈련과 휴식으로 체력과 사기가 드높아 초나라와의 결전만 바라는 상태가 됐다. 반면 초나라는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 왕전이 너무 늙어 몸을 사리고 있으며 진나라 병사들도 싸움을 두려워하고 있는데다 군량미가 부족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지휘부의 오판에 초나라 병사들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왕전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 출격을 명령했고, 진나라 병사들은 앞다투어 용맹을 뽐내며 연전연승으로 초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파죽지세로 쳐들어가 초나라 총사령관 항연을 죽이고 초나라 왕 부추를 포로로 잡은 후 새로운 왕을 세웠다. 초나라가 이처럼 멸망한 것은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의 일이었다.

왕전의 군대가 석산(錫山·오늘날의 우시)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병사들이 밥솥을 묻으려 땅을 파던 중 오래된 비석을 하나 발견했는데, 비석에는 ‘주석이 날 때는 천하 병사들이 몰려들어 다투고, 주석이 나지 않게 되면 천하가 맑아진다(有錫兵, 天下爭, 無錫寧, 天下清)’고 쓰여 있었다. 이를 본 현지 백성들은 “이 산에서는 주나라 평왕 때부터 납과 주석이 많이 났기 때문에 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생산량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이 비석은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왕전은 “이 비석이 나타났으니 이제부터 천하는 점차 평온해질 것이다. 이 비석은 운명을 꿰뚫어본 옛사람이 후세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묻은 것이다. 이 지역의 이름은 이제부터 무석(無錫)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무석(중국 장쑤성 남부)이라는 지명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오래전부터 하늘에서 정한 것이었다.

출생 이후로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진시황은 결국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고, 13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친정(親政·직접 나라를 다스림)하기 전 9년간 진시황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중요한 나랏일은 재상인 여불위가 맡아보았다. 기원전 238년 진시황은 22세의 나이로 고도 옹성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했다. 친정을 시작한 지 1년 되던 진시황 10년, 진시황은 신속하고 단호하게 내란을 다스렸다. 진시황은 6국 각각을 빠른 속도로 정벌해 나감으로써 6국으로 하여금 서로 연합할 틈을 주지 않았고, 합종 전략은 이에 철저히 실패로 돌아갔다.

진나라의 6국 정벌도 | 주웨이챵(竹圍牆)/위키피디아

조나라를 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군대는 연나라 국경 부근까지 이르렀고, 이에 연나라 왕 희(喜)는 온종일 좌불안석이었다. 연나라 태자 단(丹)은 전광(田光)의 추천을 받고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의뢰했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상 알려진 ‘형가의 진시황 암살’로서 시기는 진시황 20년(기원전 227년)이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진시황 22년(기원전 226년), 진시황은 왕전(王翦)과 왕분(王賁) 부자에게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 수도였던 계(薊·오늘날의 베이징)를 치도록 명령했다. 연나라 왕 희는 태자 단과 함께 요동군으로 피난했다.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은 군사 수천 명을 통솔, 태자 단을 연수(衍水)까지 몰아갔다. 태자 단은 물속에 잠수,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 연나라 왕 희는 사람을 파견해 태자 단을 죽여 그 머리를 진나라에 바침으로써 휴전을 성공시키고 연나라를 보전하고자 했다.

연나라 왕 희가 요동으로 피난한 이후 진나라 군대의 주력 부대는 남부 전선으로 이동, 초나라를 공격했다. 진시황 25년(기원전 222년) 왕분은 요동에 있는 연나라의 잔여 세력을 치라는 명을 받들어 연나라 왕 희를 포로로 잡았으니 이에 연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같은 해 남방에서 초나라 대군을 물리친 후 승세를 이어 월나라 군주를 항복시키고 회계군(會稽郡)을 설치했다. 이로써 장강 유역은 전부 진나라에 편입됐다.

진시황 26년(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왕분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 동방 6국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제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나라는 산둥(山東)반도에서 비교적 강대한 나라였다. 그러나 기원전 284년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 5개국이 제나라를 공격했고, 특히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서 제나라는 멸망의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이후로도 제나라는 이전의 강성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제나라 왕이었던 건(建)은 무능한 인물이었다.

왕분은 남하해 파죽지세로 제나라를 공격했고, 쯔허강(淄)까지 밀려간 제나라 왕 건은 후승(後勝)과 함께 진나라에 투항하니 제나라는 멸망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군웅을 평정하고 6국을 통일하는 마지막 단계를 완수했다.

진시황은 십수년간 6국을 정복, 통일 대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복 전쟁을 치뤘으나 그 과정에서 갱졸(坑卒)이나 성내 주민 학살 등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하나도 확인되지 않으니, 실로 중국 역사상 가장 인자한 군왕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 문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진시황의 6국 정벌을 ‘폭력적’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데, 이는 망국의 한을 품은 6국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자비롭게도 목숨을 살려 준 진시황의 은덕을 망각한 채 오히려 진시황에게 ‘잔악하다’는 오명을 씌운 것으로 진시황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진시황이 정말로 잔악했다면, 6국의 후손들은 벌써 예전에 모두 씨가 말랐을 것이다.

22세에 친정을 시작, 29세에 출병해 제나라를 격파하고 나아가 중국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대업을 완수하기까지 진시황은 불과 17년 만에 춘추전국시대 수백 년간 지속되어오던 제후국들 사이의 혼전 국면을 종식시켰다. 또한 통일 국면에 적합한 법령과 조치들을 시의적절하게 반포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하나로 통일된 황조(皇朝)를 건립하고 발전시켜나갔다.

이러한 기백은 보통 제왕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비상한 패기와 용기, 지모로부터 나온 과감한 행동은 하늘의 뜻과 민심에 모두 부합,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태평성세를 누리도록 했다.

3. 재량권주고 전폭 신뢰한 인재기용법

영토 개척에 망설임이 없었던 진시황은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서 평생 인재를 매우 중시하고 중용했다. 인재를 기용하는 안목과 통찰력, 대범함이 남달랐으며 일단 기용한 인재는 충분히 신뢰해 과업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인재를 대하는 그의 진정성과 관용적인 태도는 다른 제왕들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진시황 10년(기원전 237년), 한나라 토목기술자였던 정국(鄭國)이 한나라 왕의 명을 받고 진나라의 수로 공사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간첩 활동을 한 사실이 밝혀지자 진나라 종실 대신들은 이때를 틈타 진나라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후국 출신 ‘객경(客卿·타국 출신에게 주던 고위직)’ 전원을 추방할 것을 진시황에게 건의했고, 이에 진시황은 ‘축객령’을 반포, 진나라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객경’들로 하여금 정해진 시간 내에 모두 진나라를 떠나도록 명령했다.

승상 이사(李斯)는 진나라를 떠나는 길에 진시황에게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상소문을 올려 객경들이 진나라에 공헌한 내역과 그들을 진나라에 남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축객령이 초래할 폐해를 역설했다. 이를 읽은 진시황은 즉시 ‘축객령’을 취소, 추방했던 객경들을 다시 진나라로 초청하고 관직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에게 정위(廷尉) 벼슬을 내렸다. 이사와 정국(鄭國)의 설득 하에 이익과 손해를 따져 본 진시황은 그들의 건의를 과감히 받아들여 진나라 약화 음모의 주모자였던 정국을 사면, 계속해서 수리시설인 정국거(鄭國渠) 건설을 지휘하도록 했다. 정국은 1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마침내 진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수리시설인 정국거를 완공해냈다.

정국거(鄭國渠)의 현재 위치 | Kmusser/위키피디아

진시황은 인재를 기용하는 데 있어 친분을 떠나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국적도 가리지 않았다. 유명한 모략가였던 위나라 장군 위료(尉繚)를 초빙하기 위해 이사를 위나라로 보내 그를 설득하도록 했으며, 설득 끝에 결국 위료를 진나라로 데려와 6국 정벌의 주요 참모 가운데 하나로 삼을 수 있었다.

또한 한 번은 한나라 공자 한비(韓非)가 쓴 서찰이 진나라로 흘러들어왔는데, 한비가 쓴 <고분(孤憤)>, <오춘(五蠹)> 등을 읽은 진시황은 “아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교류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후 진시황은 온갖 방법을 다해 한비를 진나라로 초빙했다.

초나라 정벌 전쟁에 나서기 전 진시황은 칭병하고 자택에서 지내던 대장군 왕전(王翦)에게 산에서 나올 것을 몸소 청했고, 결국 왕전을 설복해 정초대통수(徵楚大統帥)를 맡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초나라 정벌은 승리로 돌아갔다.

죄를 짓고 옥살이를 하던 지방 현령 정막(程邈)은 감옥에서 문자 개혁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이사가 창제한 소전(篆圓) 원절을 방절(方折)으로 바꾸고 간략화하여 10년간 노력 끝에 마침내 새로운 자체를 만들어내니 이것이 바로 예서(隸書)다. 이후 누군가의 상주를 통해 예서를 접한 진시황은 자체가 무척 실용적이라고 판단, 정막을 사면하고 어사시(禦史寺)의 관직을 내렸다.

진시황은 주변에 다재다능한 ‘객경’들을 많이 두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승상 이사(초나라 출신), 군사가였던 위료(위나라 출신), 장군 조타(趙佗·조나라 출신), 상경 감라(甘羅·제나라 출신으로 진나라 장군이었던 감무(甘茂)의 손자), 장군 몽무(蒙武)와 그 아들인 대장군 몽염(蒙恬)·몽의(蒙毅) 형제(몽무는 진나라의 노장이었던 몽오(蒙驁)의 아들이고, 몽오는 제나라 출신), 수리 전문가였던 정국(한나라 출신), 제왕학 모략가였던 한비(한나라 출신), 객경 모초(茅焦·제나라 출신) 등이 있다. 이들 객경들은 훗날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하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시황은 인재를 무척이나 존중했으며,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융통성이 있었고 사람의 마음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파악했다. 위료를 얻기 위해 제왕으로서의 존엄도 서슴없이 내려놓은 진시황은 “위료와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與之抗禮)하고 동일한 등급의 의복과 음식을 주었다”(<사기 진시황본기>). 위료가 진시황의 인품에 대해 비난한 바 있음에도 진시황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위료를 기용, 신임했다.

적국 첩자였던 정국에 대해서도 진시황은 그를 살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중용, 유명한 수리 시설인 ‘정국거’를 완성하도록 하여 진나라의 경제력을 대폭 향상시켰다. 형가의 진시황 암살 시도를 도왔던 고점리(高漸離)는 암살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민간을 떠돌아다녔는데, 그 음악적인 재능을 아낀 진시황은 그를 특별 사면하고 궁정악사로 임명했다.

진시황의 용인술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최대한의 재량권을 주는 것이었다. 일단 사람을 기용한 후에는 간섭하지 않았으며 수하의 장군들과 승상들에게 자주권을 극대화해주었다. 이신에게는 이십만 대군을 맡겼고, 왕전에게는 육십만 대군, 몽염에게는 삼십만 대군을 주었으며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휘 과정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젊은 패기로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쳤던 이신은 초나라에 패배했으나, 진시황은 책임을 묻지 않았고 계속해서 이신을 신임, 이신으로 하여금 왕분과 함께 연나라를 쳐서 연나라 왕을 포로로 잡는 공적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이신 |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몽염 |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전국 통일을 이룬 후에도 진시황은 공신들과 노장들을 계속해서 중용, 이사나 왕전, 몽염 등의 중요한 인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이사와 삼십 년간 군신 관계로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이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