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바티칸 외교관계 정상화 說

최창근
2021년 11월 9일 오후 3:39 업데이트: 2021년 11월 9일 오후 3:39

中, 외교관계 정상화 조건으로 대만과 先 단교 요구
바티칸 “베이징 주재 대사관 개설이 먼저” 맞서

총 면적 0.44제곱킬로미터의 바티칸 시국(교황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시국(市國) 국가원수는 교황. 예수 그리스도의 으뜸 제자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하느님의 지상(地上) 대리인이다. 교황은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에서 참석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선출된다.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교황이 가진 대표적 권한은 사제·주교(主敎) 임명권이다. 전세계 가톨릭 교회를 영도하는 교황이 행사하는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법 제377조 1항은 “교황은 주교들을 임의로 임명하거나 합법적으로 선출된 자들을 추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조 5항은 “주교의 선출, 임명, 제청 또는 지명의 권리와 특전은 국가에게 전혀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황이 통치하는 바티칸은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막강하다. 전 세계 가톨릭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단일 교단으로서는 최대 규모인 13억 신자를 보유한 바티칸과 단일 국가로는 세계 최대  14억 인구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는 대만해협을 두고 중국과 마주한 대만(중화민국)이 자리한다.

10월 24일,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는 “중국 정부가 바티칸에 수교 선제 조건으로 대만과 선 단교를 요구했다” 보도했다. 이에 바티칸은 베이징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것이 우선이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티칸-중국 수교설’이 타전 될 때 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것은 대만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 본산이자 세속국가이기도 한 바티칸은 대만의 공식 수교국이다. 중국 측의 요구대로 바티칸이 단교할 경우, 대만은 ‘유럽 유일 외교 거점’을 잃게 된다.

강소국 바티칸…대만의 유럽 유일 외교거점

‘설(說)’에 그치던 바티칸-중국 국교 정상화가 가시화 된 것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Papa Francesco) 즉위 이후다. 2013년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Papa Benedetto XVI)의 이례적 사임 후, 사도좌(使徒座·성 베드로로부터 계승되어 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고 주교좌, 바티칸)의 주인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국에 전향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그는 취임 후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을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임명했다. 국무원장은 총리 겸 외교장관 역할을 수행하는 교황청의 2인자,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청 내 대표적 중국 전문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이듬해인 2014년 1월, 중국 대표단은 로마에서 교황청 대표단과 첫 회동을 가졌다. 핵심 의제는 관계 개선이었다. 중국 정부도 교황의 메시지에 화답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할 때 중국은 이례적으로 영공을 개방하기도 했다. 중국 영공을 지날 때 교황은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중국인에게 안부 메시지를 전했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국 땅을 밟는 첫 교황이 되기를 바란다”며 재차 중국과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4년 후인 2018년 9월, 중국과 바티칸은 ‘주교 임명 합의안’에 서명했다. 교황청 외교차관 앙투안 카밀레리(Antoine Camilleri) 몬시뇰(Monsignor·명예 고위 사제)과 왕차오(王超)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베이징에서 서명한 합의안에는 중국 측이 임명한 주교(主敎)를 교황청이 승인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교황청은 “합의안은 중대한 문제인 주교 임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양자 관계에서 더 큰 협력을 위한 환경을 창출 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는 각 교구(敎區) 책임자다. 교회법에 의하면 그리스도 열두 제자의 사도(使徒)적 사명을 주교들이 이어받는다. 교황만이 교구의 주교를 임명할 수 있다. 이는 전 세계에 통용돼온 보편 원칙이다. 중국만은 예외다. 1949년 공산 정부 수립 후, ‘외세 간섭 배제’ 문제를 들어 자체적으로 주교를 임명해 왔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정부는 선종(善終)하여 공석이 된 주교 자리를 자체적으로 선임했다. 교황청은 이들을 파문했고, 주교를 임명했고 중국 정부는 이들을 연금 하는 것으로 맞섰다. 그러다 극적인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2018년 10월 3일, 중국 주교 2명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했다. 중국 주교가 세계주교회의에 참석한 것은 56년 만이었다. 참석자 중 궈진차이(郭金才) 청더(承德)교구장 주교는 중국 정부가 임명했다. 이후 교황청이 추인했다. 세계주교회의에 발도 붙이지 못했던 중국 주교가 회의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中-바티칸, 2018년 주교 임명 합의 2020년 2년 연장 발표

2020년 9월, 바티칸은 2018년 합의를 2년 연장 한다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과 바티칸이 내달 주교 임명안 합의를 연장하려는 데 대해 “중국 신자들에 대한 끔찍한 박해”라고 비판했다.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바티칸이 중국과의 합의를 갱신한다면 그 도덕적 권위가 실추될 것”이라면서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중국의 인연은 길다. 가톨릭 교회의 중국 선교가 본격 시작된 것은 명(明)말 청(淸) 초이다. 1534년 예수회(Societas Iesu) 공동 창립자로서 해외 선교를 책임졌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는 동방 선교에 주력했다. 인도와 일본 복음화에 성공한 그는 1551년 중국 선교를 시도하지만 입국하지 못한다. 1512년 11월, 광둥(廣東)성 상촨(上川)섬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는 ‘동방의 사도’라 불리게 된다.

하비에르 사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27년간 중국에 체류하며 복음화를 시도했다. 1603년 마테오 리치는 유교적 관점에서 가톨릭 교리를 해설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집필한다. 이후 로마 가톨릭은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동양에 자리 잡게 된다. 리치 사후,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다했다. 왕족·고위관료·학자를 주 대상으로 삼은 예수회는 이른바 ‘적응주의’ 선교를 펼쳤다. 조상 제사 등 유교 의례에 대해서는 미신이 아닌 관습으로 간주하고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속에서 명·청 교체기, 천주교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마테오 리치가 세상을 떠날 무렵 신자수는 27만여 명에 달했다.

예수회가 적응주의 선교로 중국 복음화 시도… 미완으로 끝나

가톨릭 교회의 중국 선교가 벽에 부딪힌 것은 청 강희제(康熙帝) 재위기다. 예수회에 이어 중국에 발을 디딘 도미니크회·프란치스코회 등 다른 수도회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에 문제 제기를 했다. 이들은 예수회를 교황청에 고발했고, 1701년 교황청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는 잘못됐다”고 선언하고 배공제조(拜孔祭祖·공자에 대한 공경과 조상 제사), 위패 안치 등 일체 유교적 행위를 금지했다.

교황 특사로 파견된 샤를 드 투르농(Charles Maillard de Tournon) 주교는 1705년 베이징에서 강희제를 접견했다. 배공제조와 위패 안치를 우상숭배라 주장하는 투르농에게 강희제는 반박했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기에 존경받는다. 다만 우리는 행복, 벼슬, 재물을 얻으려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居)한다고 믿진 않는다.”

강희제는 예수회가 제시한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따르지 않는 외국 선교사들도 중국 땅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예수회를 제외한 기타 교단의 선교도 금지했다. 이로써 가톨릭교회의 중국 선교는 막을 내렸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국 선교는 제1·2차 아편전쟁 후 재개됐다. 전쟁에 패배한 청은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고, 가톨릭 선교사들도 다시금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앞장섰다.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교세는 다시금 확장됐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결과, 이듬해 아시아 최고 민주공화정 정부인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됐다. 중화민국은 사상·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선교의 자유를 얻은 기독교 선교사들은 교세를 확장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유물론(唯物論)·무신론(無神論)의 공산주의와 종교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주재 교황청 대사는 중화민국(대만)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臺北)로 대사관을 옮겼다. 중국 정부는 1951년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교황청과 단교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공식 외교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 단호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종교를 문화 침략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종교 자유는 허용하나 스스로 관리하고[自治], 자급자족하고[自養], 스스로 선교[自傳]하며 국가에 충성하라는 이른바 ‘삼자운동(三自運動)’을 추진한다. 4000명 개신교 선교사 중 절반가량이 신변 위협 때문에 중국을 떠났다.

중국 내 가톨릭 탄압 속에서 교황 비오 12세(Pope Pius XII)는 1954년 ‘중국 민족에게’라는 서신을 보냈다. 교황은 ‘삼자운동’을 질책하며 “누구도 교회가 강권(强勸)에 복종할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누구도 교회에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가톨릭 교회 내부는 순교를 각오하고 교황 지시를 따르자는 파와 중국 정부 정책에 따르자는 파로 갈라져 충돌했다. 이즈음 중국 당국은 가톨릭교회를 위협하기 위해 최대 도시 상하이에서 수천 명의 신자를 체포·구금하고, 사제와 신자 17명을 총살했다.

공산정부 수립 후 가톨릭 교회 탄압 시작, 중국천주교애국회 성립하여 독자 노선

중국 정부의 강경책은 이어졌다. 1957년 7월, 중국천주교애국회(中國天主教愛國會)가 공식 성립됐다. 전국 26개 성(省) 교구 대표 241명이 참석한 제1차 전국천주교대표회의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로마 교황청은 미(美)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계를 위해 일하며 사회주의를 원수로 간주한다. 따라서 교황청의 명령은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종교 메시지의 형식을 빌렸으나 실제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명령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천주교애국회는 “교황청과 순수한 종교 관계는 유지하되 정치·경제적 관계는 단절한다”고 밝혔다. 천주교애국회는 또한 주교를 스스로 선출하는 자선자성 원칙도 확립하여 교황청과 공식 결별했다. 중국 정부는 주교 후보는 “사회주의를 열렬히 사랑하고 사회주의에 유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중국 정부와 천주교애국회를 거부하는 성직자와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후 중국 내 가톨릭교회는 천주교애국회와 ‘지하교회’로 양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중국 내 공식 가톨릭 신자는 570만 명, 지하교회 신자까지 합치면 1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세계 인구 60%를 차지하는 아시아 인구 중 가톨릭 신자 비율은 12%에 그친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14억 인구의 중국은 교황청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개인 이력도 겹쳐진다.

중국 입장에서도 바티칸과 수교는 매력적인 카드이다. 대만에 외교적 결정타를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현재, 15개 수교국이 남은 대만으로서는 바티칸과 단교가 미칠 파장은 크다. 설상가상으로 중남미 카리브해 도서(島嶼)국가가 다수를 차지하는 수교국들은 스페인 식민통치 영향으로 가톨릭 국가이다. 만약 바티칸이 타이베이 대신 베이징을 택한다면 이들 국가들도 따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과 바티칸 모두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바티칸과의 수교를 통해 대만을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시키고 대만 독립노선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바티칸 입장에서는 교황의 중국 주교 서품의 권한을 회복하여 세계 가톨릭의 합일성을 이루고 광대한 중국 가톨릭 신자를 얻게 되는 장점이 존재한다.

다만 중국과 바티칸의 공식 외교 관계 수립은 여전히 험로이다. 중국으로서는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수립 할 경우 치러야 할 대가도 존재한다. 중국 내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영도권’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 천주교 애국회를 해체해야 할 지도 모른다. 교황청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대만과 대만 내 가톨릭 신자를 버렸다는 비판도 피해가기 힘들다.

가톨릭 교회 내부의 반발과 분열도 피해가기 힘들다. 2018년 합의 당시 홍콩 대교구장을 역임한 천르쥔(陳日君) 추기경은 이를 ‘배반(betrayal)’으로 정의하며, “바티칸이 중국 내 가톨릭 교인들을 팔았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천르쥔은 2006년 ‘중국인’ 최초로 교황 다음 최고위직인 추기경에 서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