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할말하는 체코…“제2의 리투아니아 가능성”

김윤호
2022년 01월 6일 오후 2:05 업데이트: 2022년 06월 3일 오후 3:59

유럽 선진국들이 경제력을 앞세운 중국 앞에 저자세 외교를 펼치는 가운데 홀로 맞서온 유럽의 ‘소국’ 리투아니아에 든든한 지원군이 탄생할 조짐이 보인다.

유럽의 대표적 친중 인사인 밀로시 제만(78) 체코 대통령이 당뇨병 등 건강악화와 소속 정당의 충격적 총선 패배 등으로 사실상 직무수행 불능 상태가 된 가운데 새로 출범한 정부가 중국에 대한 강경 외교를 표방해 관심을 모은다.

페트르 피알라 신임 총리와 얀 리파프스키 외무장관은 일본, 대만 등 민주진영 국가와 협력 강화를 표방하고, 중국·러시아에 대한 기존 외교방침을 재검토할 것임을 시사했다. 밀로시 비스트르칠 상원의장은 중국의 압박에도 2020년 8월 체코 정치인과 기업인등 89명의 수행단을 이끌고 대만을 방문했다.

대만 싱크탱크 ‘넥스트제네레이션 재단’의 마르친 제르조스키 연구원은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체코의 새 정부가 보편적 가치와 인권에 기초한 국정운영과 외교정책을 펼쳐나갈 것으로 분석했다.

제르조스키 연구원은 “이전 안드레이 바비스 전 총리 내각은 경제를 우선시하는 외교를 펼쳤고 인권은 선택이었다. 특히 독재정권과 경제적 관계에서 체코가 지지하는 보편적 가치를 쉽게 포기했다”며 “하지만 새 내각은 출범 이후 EU의 규범 준수를 표방했다. 인간의 존엄성, 자유, 민주, 평등, 법치를 중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지난해 11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독립적으로 외교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 AFP/연합

보편적 가치에 대한 체코의 지지는 역사적 근원이 있다. 체코는 지난 1992년 주민투표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했다.

분리 전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초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였으나, 1989년 ‘벨벳 혁명’을 통해 공산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국명을 공식 변경했으며, 다시 평화적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됐다.

체코 초대 대통령에는 벨벳 혁명의 주역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이 선출됐다.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 직전 마지막 대통령이자 40년 만에 처음 임명된 비공산주의자 대통령이기도 했다.

벨벳 혁명 이후 체코는 ‘포스트 공산주의’ 세력과 친서방적 민주주의 세력으로 나뉘며 신생 민주국가로서 혼란기를 겪었다. 최근 10년간은 포스트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했다. 2012년 공산당과 연정한 포퓰리즘 정권인 바비스 총리 내각이 출범하고, 2013년에는 좌파성향 제만 대통령이 당선됐다.

바비스 내각과 제만 대통령은 새로운 공산권 맹주 중국에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제만 대통령은 대만을 방문한 비스트르칠 상원의장을 향해 “유치한 도발”이라며 강력한 불만을 나타내고, 향후 외교정책에서 배제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으로 체코가 중국의 보복에 직면했다고도 했다.

안드레이 바비스 전 체코 총리.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거액의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부패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공동정부를 구성하던 공산당의 도움으로 탄핵을 면했지만, 작년 11월 총선에서 크게 패하며 현재 각종 기소 위기에 처해 있다. | AP=연합뉴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친서방 민주주의 세력이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하벨 초대 대통령의 고문을 맡았으며 현재 정치 평론가로 활동하는 이리 페헤(Jiri Pehe) 프라하 뉴욕대학(New York University in Prague) 교수는 지난해 11월 체코 총선 직후, 보수정당인 ‘시민민주당’이 승리한 결과에 대해 “탈(脫)공산주의 시대의 신호탄이자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페헤 교수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피알라 총리가 이끄는 새 정부가 하벨 전 대통령의 외교·정치 이념을 채택해 인권과 민주를 확고히 지지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체코 싱크탱크인 유럽가치·안보정책센터 자쿱 얀다(Jakub Janda) 소장은 “새 체코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하고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리파프스키 외무장관 발언을 인용해 “중국은 체코에서 4천 개 일자리를 창출했지만 대만은 2만4천 개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얀다 소장은 “체코와 중국의 교역은 매우 일방적”이라며 “체코 제품의 1%만 중국 시장에 수출된다. 중국의 위협은 실제로는 말뿐이다. 체코가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더라도 중국이 실질적으로 보복할 수단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체코는 제2의 리투아니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발트3국의 하나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인 리투아니아는 옛 소련에서 독립했으며, 공산주의 통치에 대한 높은 경계심에 기반해 중국 앞에서 떳떳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11월 수도 빌뉴스에 대만 대표부를 정식 출범시키며 ‘타이베이 대표부’라는 명칭 대신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다만,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지난 4일 ‘명칭에 실수가 있었다’며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 점을 사과하며 중국에 대해 유화적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는 장기간에 걸쳐 중국을 향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리투아니아는 중국이 중부유럽·동유럽 국가와 맺은 ’17+1’ 경제 협력체에서 탈퇴했다. 가브리엘루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AFP통신에 “17+1 협력체가 EU를 분열시킨다”며 다른 회원국도 탈퇴할 것을 촉구했다.

란드스베르기스 장관은 이어 지난해 11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경제적 압박을 받더라도 한 국가는 독립적으로 외교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중국의 협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EU 회원국을 독려했다.

대만 싱크탱크 제르조스키 연구원은 같은 EU 회원국이자 공산독재로부터 벗어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체코가 리투아니아의 뒤를 이어 17+1 협력체를 탈퇴할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