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재로 반도체 비상 걸린 중국…한국 인재 빼가기로 돌파구?

이윤정
2020년 09월 17일 오전 11:23 업데이트: 2020년 09월 17일 오후 5:51

중국이 점점 노골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인재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방증이다.

최근 미국이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파운드리)인 SMIC를 거래 제한 명단에 올리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 반도체 분야 선두기업들도 중국 정보기술(IT) 기업 화웨이에 지난 15일부터 반도체 공급을 중단했다.

오는 2025년까지 SMIC의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며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던 중국은 된서리를 맞았다.

반도체 분야 핵심기술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SMIC가 미국의 거래 제한 명단에 포함되면 자립은커녕 주요 칩 공급이 중단돼 관련 산업 전체가 극심한 침체에 빠질 위기에 놓였다.

중국이 들고 나온 카드는 인재 빼가기다.

그동안 ‘천인계획’(해외 과학자 채용·지원 프로그램) 같은 중앙정부 차원의 인재영입 프로그램에 기업·지방정부 차원의 인재영입(우호도시 체결, 친중협회 결성) 등에 더해 또 다른 방식을 동원하고 있다.

최근 한 국내 구인‧구직 사이트에는 “중국에서 근무할 D램 설계자를 모집한다”는 구인 공고가 올라왔다.

자격요건에는 “S, H 반도체 관련부서 근무자 우대”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한국의 특정 기업을 노골적으로 지목했다.

지난 8월 초 국내 한 구직 사이트에 등록된 헤드헌팅 업체의 DRAM 설계 구직공고. S, H 반도체 관련부서 근무자 우대를 자격조건으로 내걸었다. /화면캡처

자녀 동반 시 국제 학교까지 보장 가능하며 주택도 제공할 수 있다는 우대조건도 제시했다.

해당 구인공고에서 담당업무로 ’10나노 DDR4 설계’라고 밝혔다. 30나노급 이하 D램 기술은 국가 핵심기술에 해당한다.

지난 8월 초 국내 한 구직 사이트에 등록된 헤드헌팅 업체의 DRAM 설계 구직공고. /화면캡처

현재 SMIC의 기술 수준은 14나노(nm) 칩 양산 수준이다. 현재 최고 수준인 삼성과 대만 TSMC의 7나노와는 2세대 격차다.

중국의 3대 메모리 반도체 회사인 허페이창신(合肥長)이 10나노 D램 제품 판매를 개시했지만 수요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국내 채용사이트에도 “중국이나 대만에서 근무할 반도체 식각(에칭) 경력 직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

에칭은 반도체 회로에 패턴을 그리는 미세 공정이다.

대만, 중국의 유명 외국계 반도체 기업에서 근무할 경력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한 구인공고 /화면 캡처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 세계 최초로 ‘3세대 10나노급 8GB DDR4 D램’을 개발해 하반기부터 양산에 돌입했다.

내년에는 4세대 10나노급 제품 양산을 예고한 바 있다. 삼성의 뒤를 이어 SK하이닉스도 3세대 D램 생산에 돌입한 상태다.

SMIC가 여전히 14나노급 공정에 머물러 있는 중국으로서는 세계 메모리 업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최첨단 기술에 눈독을 들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자율주행차량의 핵심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카이스트 교수가 구속기소 됐다. 해당 교수는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가 주관하는 ‘천인계획’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카이스트 측은 이번 사건으로 입장문을 내고 “연구 보안을 철저하게 감독해 동일 사건의 재발을 막겠다”고 했지만, 그저 기업이나 대학, 연구소에만 맡길 일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엄미정 연구위원은 “국정원이 관리하는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이 있지만, 너무 포괄적이라 실효를 거두기 어렵고 개인적으로는 과도한 규제로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엄 연구위원은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인력, 기술 유출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고 세분화된 기술 안보 기준을 마련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사한 사건이 줄줄이 터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신속하게 내놓고 있다.

미국의 한 보안전문가는 중국의 기술유출에 대해 “상대는 국가”라며 “기업이나 개인이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2007년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최소 형량이 없어 솜방망이 처벌이 적지 않다는 산업계의 지적을 반영해 지난해 국가 핵심기술의 해외유출에 대한 처벌기준을 강화했다.

국가 핵심기술의 국외유출 범죄에 대해서는 최소 3년 이상의 징역형과 15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개정했다.

기술유출 /연합뉴스

그러나 2007년 관련법 제정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중국으로 기술과 인력이 유출되는 문제는 수년 전부터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삼성전자 고위 임원 출신 인사가 중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인 에스윈(ESWIN) 과기그룹 부회장으로 부임했다가 기술 유출 논란이 부각되면서 4개월여 만에 퇴임했다.

삼성전자에서 D램 설계를 담당했던 한 고위 임원도 2018년 중국의 D램 회사인 허페이창신으로 이직했다.

최첨단 D램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산업부장관상을 받았던 이 인사는 당시 삼성전자의 신청으로 법원으로부터 전직 금지 처분을 받았다.

엄 연구위원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가 심각하다”며 “이번 카이스트 교수와 같은 기술 유출 사건이 점점 늘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엄 연구위원은 “경력자, 퇴직자들이 자신이 보유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를 꾸려줘야 한다”며 “이를 위해 인식의 전환과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만 인재 빼가기의 표적이 되는 건 아니다.

대만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 반도체 기업 두 곳이 지난해부터 고액 연봉을 내세워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대만 TSMC의 고경력 엔지니어와 매니저를 100명 이상 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