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꾼들 사이에서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얼마나 뒤늦게냐면, 무려 500년도 더 된 일이다.
15세기, 조선 왕 성종은 장난치기 좋아하던 왕이었다.
어느 날 밤, 성종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운종가(지금의 서울 종로)로 잠행을 나섰다.
중신들이 위험하니 가지 마시라 말려도 봤으나, 성종은 “백성이 잘살고 못 사는 것을 내 눈으로 친히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날 성종이 청계천 다리 위를 지나던 때였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 한 명이 다리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성종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누구신데 예서 잠을 청하시오?”
“예, 저는 경상도 흥해 땅에 사는 김희동이올시다”
잠에서 깨어 반갑게 대답한 시골 사람 김씨는 이어 자신을 소개했다.
“마흔이 넘도록 어진 임금님이 계시다는 한양 구경을 못 했지요.
오래 벼르기만 하다가 간신히 노자를 구해 가지고 나섰는데 수십 일 만에 겨우 당도하여 누구에게 물으니까 예가 서울이라 하잖은가요.
이제 막 저녁은 사 먹었지만 잘 곳을 찾지 못해 여기서 밤을 새우던 중이오.
댁은 뉘시기에 이 밤중에 나다니시오? 아, 혹시 임금님이 계신 집을 아시거든 좀 가르쳐 주구려”
순박한 백성을 만난 성종은 시치미를 뚝 떼고 “나는 이 첨지라는 사람이오. 임금이 있는 곳을 알기는 하오만, 만일 알려주면 임금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 하오?”라고 물었다.
김씨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소?
우리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님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걱정 없이 잘 산다지 않소. 그러니 임금님 한번 뵈옵고 돌아가자는 거지요.
빈손으로 뵙긴 뭣할 것 같아 우리 고장에서 나는 전복이랑 해삼 말린 것을 좀 짊어지고 왔지요. 임금님께 이것을 드려 한 끼 반찬이나 합시사 하구요”
멀찌감치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들이 낯선 사람인 김씨를 보고 달려왔다.
성종은 호위무사들에게 귀띔한 뒤 “이 자들을 따라가면 오늘 밤 지낼 곳도 있을 터이고 임금을 만날 수 있을 거요”라고 일렀다.
김씨는 “서울 양반은 참 인심도 좋구만!”이라고 좋아하며 뒤를 따랐다.
이튿날 성종은 또 한 번 평상복 차림을 하고 김씨가 묵고 있는 집에 들렀다.
김씨는 “이 첨지는 참말 좋은 사람이외다. 처음 보는 시골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라고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임금님을 뵈올 수 없다면 그냥 돌아갈 수밖에요. 이왕 온 길이니 임금님께 길이 닿으면 이것이나 전해주시지요”하고는 해삼과 전복을 싼 보퉁이를 내놓았다.
성종은 웃음을 꾹 참으며 “내가 힘써볼 테니 하룻밤만 더 묵고 계시오. 당신이 직접 갖다 바쳐도 좋지 않겠소”라고 대답한 뒤 집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김씨는 관복 한 벌을 받았다.
“그래, 이 첨지는 어디로 갔는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김씨는 영문도 모른 채 옷을 갈아입고, 한 손에는 해삼과 전복이 든 짐을 들고 대궐로 따라갔다.
잠시 뒤, 대전에 들어선 김씨는 내관이 시키는 대로 세 번 절하고 엎드렸다.
그때 저 높이 있는 용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임금이다. 네가 짐을 보러 수백 리 길을 왔다지. 겁내지 말고 쳐다보아라”
김씨가 고개를 겨우 들고 용상에 앉은 임금을 쳐다보니 바로 이틀 동안이나 마주 앉아 대하던 이 첨지가 거기 앉아 있었다.
“엥, 이 첨지가 어떻게 여기 와 있소?”
김씨는 해맑게 물었다가, 매서운 주변 신하들의 눈초리를 받고서야 깨달았다. 이 첨지가 바로 임금님이셨다.
김씨는 몸 둘 바를 모르고 벌벌 떨다가 당황한 나머지 가지고 온 보따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성종은 자비로운 얼굴로 보따리를 주우라고 말했다.
“저 해삼과 전복은 희동이 나를 위해 먼 길을 걸어 갖고 온 것이니 내 고맙게 먹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성종은 김씨에게 후한 상금을 내려 금의환항하게 하였다. 김씨는 걸어서 올라올 때와는 달리, 말을 타고 고향에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