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70주년 맞이한 영국 여왕, 15번째 총리 맞아…여왕과 함께했던 14명의 총리들

'가장 위대한 영국인' 처칠에서 '파티 게이트'의 보리스 존슨까지

최창근
2022년 09월 2일 오후 7:55 업데이트: 2022년 09월 5일 오후 2:01

영국이 9월 6일 신임 총리 탄생을 앞두고 있다. 2022년 재위 70주년을 맞이한 ‘영국 최장수 군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는 15번째 총리이다. 입헌군주제 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여왕과 군주의 ‘첫 번째 각료(Prime Minister)’로서 실질적 통치를 맡는 총리는 헌정 체제의 양대 축이다. 여왕과 총리는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국정을 운영한다. 처칠에서 보리스 존슨 현 총리에 이르는 여왕과 함께한 14명의 총리들은 어떤 인물일까. 여왕과 총리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즉위 70주년 맞이한 엘리자베스 여왕 9월 6일 새로운 총리 맞이
처칠, 맥밀런, 윌슨, 대처, 블레어, 캐머런, 존슨… 여왕과 함께한 14명의 역대 총리
입헌군주제하 의원내각제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아’
다음 총리는 3번째 여성 총리? 첫 번째 유색 인종 총리?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영국 여왕은 차기 총리를 런던 버킹엄궁이 아닌 스코틀랜드 밸모럴궁에서 접견할 예정이다. 8월 31일, 영국 왕실 대변인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동에 문제가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밸모럴궁은 영국 왕실의 여름 별장이다. 여왕이 신임 총리를 버킹엄궁이 아닌 밸모럴궁에서 신임 총리를 처음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속에서 9월 5일, 발표 예정인 영국 보수당 당수 경선 결과가 주목된다. 보수당 당수가 차기 총리가 되는데  리즈 트러스 외무부 장관과 리시 수낵 전 재무부 장관이 마지막 경합 중이다. 리즈 트러스 장관이 차기 총리가 될 경우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상 3번째 여성 총리를 맞이하게 되고 리시 수낵 전 장관이 차기 당수가 되면 사상 첫 인도계 총리가 탄생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15번째’ 총리이다.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君主)’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2월 6일,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 즉위 70주년을 맞이했다. 여왕은 부왕(父王) 조지 6세가 서거한 1952년 2월 6일, 25세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대관식은 이듬해 6월 2일 열렸다.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다. 아버지 조지 6세(George VI)는 할아버지 조지 5세(George V)의 차남이었고 정상대로라면 여왕의 백부인 에드워드 8세(Edward VIII)와 그 후손에게로 왕위가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퇴위를 선택했고 왕위는 동생 알버트 왕세제(조지 6세)에게로 이어졌다.

말 더듬 증세가 있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던 조지 6세는 1936년 즉위 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군의 공습 속에서도 피란하지 않고 버킹엄궁을 지키며 전란에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로했다.

이 속에서 격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조지 6세는 흡연과 과로가 원인이 되어 폐암에 걸렸고 폐 절제 수술을 했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1952년 세상을 떠났다. 조지 6세 사후 당시 국왕을 대신하여 아프리카 케냐를 순방 중이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가 엘리자베스 2세로 즉위했다.

1953년 대관식 직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 고(故) 에딘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 배튼(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필립공은 몰락한 그리스 왕실의 왕자로서 영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현 엘리자베스 여왕과 결혼하여 여왕의 배우자가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5년 9월 9일 자신의 고조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갖고 있던 영국 역대 군주 중 최장 기간 재위 기록(63년 216일)을 깼다. 당시 여왕은 “내가 바라던 바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친절하게도 오늘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1952년 이후로 여왕은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는 주기적으로 바뀌고 있다. 여왕 재위기 동안 현재까지 총 14명의 총리가 있었다. 역대 총리들의 평균 임기는 하원의원 임기 5년과 일치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군주의 권위와 내각의 효율이 합쳐서 영국식 헌정체제 작동

입헌군주제하 의원내각제를 정체(政體)로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 하지 않는’ 상징적 존재이다. 공식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할 수도 없다. 실질적인 통치는 의회와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와 내각이 맡는다. 하원 우위 원칙에 따라 총리는 하원(House of Commons·서민원)에서 선출된다.

공·후·백·자·남작 등 귀족 작위 소지자는 총리가 될 수 없다. 총리 퇴임 후에는 남작(Baron·Baroness)으로 서임하고 상원(House of Lords·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이다. 귀족 출신 상원의원이 총리가 된 적은 단 한 차례이다. 논란이 일자 그는 귀족 작위를 반납했고 그해 하원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논란을 피했다.

여야가 마주 보고 앉게 되어 있는 영국 하원 의사당. 하원 우위 원칙이 확립된 영국에서 하원은 국정 운영의 중심이다. 원내 다수당 당수(대표)가 총리에 임명되어 정부를 이끈다.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군주의 고유 권한이다.  불문(不文) 관습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헌정 체제하에서 다수당 대표를 총리로 임명한다. 신임 총리는 여왕을 알현하고, 여왕은 정부를 이끌 것을 명령한다. 별도 총리 취임식은 없다. 총리 관저인 영국 런던시의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주하여 공식 임기를 시작한다.

여왕과 총리는 매주 화요일 버킹엄궁에서 열리는 ‘주례회동’을 통해 국정(國政) 전반에 대해 논의한다. 영국의 상징적 국가원수 여왕은 이제까지 어떤 총리들과 마주해 왔을까.

윈스턴 처칠, 여왕의 흠모 받았던 첫 번째 국정 파트너
1953년 대영제국의 군주가 된 약관(弱冠) 25세 엘리자베스 여왕의 첫 총리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기인1940~45년 전시(戰時) 내각을 이끌었던 처칠은 1945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여 총리직을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다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다시 승리하여 두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다.

군주의 이름으로 정부 구성
여왕과 총리는 매주 만나 국정 논의

2002년 영국 공영방송 BBC가 영국인 100만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하여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 1위로 꼽힌 윈스턴 처칠은 명실상부한 국가 원로였다. 영국이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시달리기도 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와 더불어 비상 시기 영국 지도자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사적으로 조지 6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BBC 선정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꼽힌 인물이다. 말버러 공작가의 방계로 아버지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정치 명문가 태생이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정계에 입문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해군성 장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전시 내각 총리로서 영국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명문 귀족 가문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가의 후예인 처칠은 열렬한 군주제 옹호자이자, 여왕 숭배자였다. 여왕과 총리는 매주 화요일 주례 회담에서 위스키와 소다를 마시며 국정과 세계 정세를 두고 의견을 나누었다. ‘할아버지’뻘의 처칠은 주례회동에서 ‘신입’ 군주에게 조언하고 지도했다. ‘손녀뻘’ 여왕은 처칠의 지혜, 연륜, 달변을 흠모했다. 이를 두고 처칠의 손자 아서 니컬러스 윈스턴 솜스 보수당 하원의원은 “할아버지와 여왕은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외교관으로 명망 얻은 앤서니 이든, 수에즈 전쟁으로 실각

처칠의 후임자는 보수당 정치가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이었다. 총리 취임 전 외무부 장관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총리 재임 시 평가는 나쁜 인물이다. 발단은 수에즈 사건이었다. 1956년 6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앤서니 이든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수에즈 운하를 침공하여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소련의 압력으로 영국·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반환해야 했고, 지난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신은 손상을 입었다. 이는 이든의 정치 생명에도 치명상을 가했고 총리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앤서니 이든은 총리 재임 시절 수에즈 운하 사건 관련 사안을 여왕에게 상세하고 보고했고, 관련 문건도 보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앤서니 이든.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됐다. 총리 재임기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수에즈 운하를 포기해야 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 위신을 실추 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나치 독일과 화친하려 했던 네빌 체임벌린과 더불어 평가가 낮은 20세기 총리 중 한 명이다.

정계 가십거리 들려 주던 맥밀런, 각료 둘러싼 추문으로 사임

앤서니 이든의 뒤를 이어 보수당의 해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이 총리에 취임했다. 재무부 장관 출신의 맥밀런은 총리로서 제2차 중동전쟁을 둘러싼 외교 갈등으로 인해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내적으로는 민생 안정을 위한 다양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의 내각에서 1950년대 중후반의 영국 경제는 일시적인 호황을 누렸다. 그 결과 195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하여 1963년까지 8년간 총리로 장기 재임했다.

맥밀런의 사임을 몰고 온 사건은 1962년 발생한 ‘프로퓨머 사건(Profumo affair)’이다. 맥밀런 내각 국방장관 프로퓨머와 매춘부 크리스틴 킬러의 불륜 추문이 폭로됐다. 당시 크리스틴 킬러는 주영국 소련대사관 무관과도 접촉하고 있어 국가 기밀 누설을 둘러싼 스파이 사건으로 커졌다. 파문으로 1963년 6월, 프로퓨머는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했고 정치적 책임을 지고 맥밀런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좌)과 맥밀런 총리(우). 맥밀런은 저명 출판사 맥밀런출판(Macmillan Publishers)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앤서니 이든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고 이든 사임 후 총리가 됐다. ‘수퍼 맥( Super Mac)’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백작 출신 더글러스 흄, 총리되기 위해 작위 버려

맥밀런 사임 후 알렉 더글러스 흄(Alec Douglas-Home)이 보수당 당수 겸 총리가 됐다. 흄이 총리가 되자 논란이 일었다. 영국 총리는 전통적으로 하원(서민원)에서 선출됐는데 관례를 깼기 때문이었다. 흄은 아버지 사후 백작(伯爵·Earl) 작위를 물려받은 현직 상원(귀족원) 의원이었다. 논란이 되자 흄은 총리 취임 4일 후 자신의 백작 작위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논란은 지속됐다. 결국 흄은 1963년 열린 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됐고 ‘하원의원’ 신분으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64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게 패했고 흄도 총리에서 물러났다. 10년 후인 1974년 흄은 하원의원직 사퇴를 선언했고, 여왕은 남작(작위가 세습 되지 않는 당대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알렉 더글라스 흄. 백작 출신 상원 의장으로 총리가 됐다. 논란이 일자 백작 작위를 포기했다. 총리 퇴임 후 다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64년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승리하여 노동당 당수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이 총리가 됐다. 윌슨은 서민 가정 출신의 저명 경제학·통계학자였다. 귀족 색채가 강한 보수당에 대비하여 스스로 ‘민중의 남자(man of the people)’라고 칭한 윌슨은 임기 동안 국방비 지출을 삭감하고 교육·복지 예산을 늘렸다.

서민적 풍모 해럴드 윌슨, 왕실 파티서 설거지하기도…여왕과 돈독

총리 취임 초기 노동당 출신 경제학자로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던 윌슨을 엘리자베스 여왕은 불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왕은 윌슨을 공산주의자이자 소련 스파이로 의심했으나 곧 오해는 풀렸고 이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윌슨은 서민들이 사용하는 격의 없는 농담을 구사해 여왕의 마음을 얻었다. 윌슨은 왕실 바비큐 파티가 끝나면 몸소 설거지를 하는 소탈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왕은 이러한 총리를 좋아했다. 처칠과 더불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총리로 꼽힌다.

영국 저명 팝 그룹 비틀스와 함께 한 해럴드 윌슨. 서민 가정 출신 총리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소탈한 면모를 좋아했고 재임 중 여왕과 관계가 돈독했다.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패배하여 다시금 보수당 내각이 출범했다. 외무부 장관, 노동부 장관 등을 역임한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가 총리가 됐다. 목수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히스는 입지전적인 서민 출신 정치가였다.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에 일가견이 있던 히스는 유일무이한 독신 총리이기도 했다.

에드워스 히스…피의 일요일, 석탄노조 파업

히스의 총리 재임 중 영국 경제는 악화 일로였다. 그 속에서 1972년 영국 석탄노조가 파업을 벌였고, 석탄 부족으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몰락을 부르는 신호탄이 됐다. 대외적으로는 같은 해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시민권 운동 중이던 비무장 가톨릭 교도에게 영국군이 발포하여 14명의 사망자와 13명의 중상자를 낸 유혈사건, 이른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발생했다.

악재와 경기 침체 속에서 치른 19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패배했고 전임 총리 해럴드 윌슨이 제2차 노동당 내각을 구성했다.  다만 두 번째 총리가 된 윌슨은 임기 중인 1976년 대장암 등 건강 문제로 사임하고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이 총리가 됐다.

독신 총리였던 에드워드 히스. 수준급 피아노 연주 실력을 보유하였고, 총리 관저에 피아노를 구비하기도 했다.

‘불만의 겨울’로 실각한 제임스 캘러헌

캘러헌의 총리 재임기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다.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이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웨일스에서도 분리 운동이 시작됐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테러로 매년 수백 명의 영국인이 희생됐다. ‘연합왕국(聯合王國·United Kingdom)’의 일대 위기였다.

결정적으로 석탄 노조를 비롯한 노조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켜 영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1978년의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다. 이로 인하여 1979년 3월, 단 1표 차이로 ‘내각불신임결의’가 하원을 통과하여 조기 총선이 실시됐다. 선거에서 노동당은 패하여 캘러헌은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속에서 캘러헌의 총리 재임 기간에는 여왕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좌)과 제임스 캘러헌(우). 총리 재임 말기이던 1978년 ‘불만의 겨울’로 중도 사임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노동당은 보수당에 참패했다.

첫 여성 총리 마가릿 대처, 여왕과 동갑내기

1979년 총선을 보수당의 승리로 이끈 사람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였다. 1925년생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동갑내기’였던 그는 여러 면에서 여왕과 비교 대상이 됐다. 대처는 중산층 가문 출신으로 옥스퍼드대 졸업 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서방 세계 첫 여성 행정수반이 되어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에 입주했다.

대처는 재임 중 ‘대처주의’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영국병’ 치료에 주력했다. 긴축 재정을 실시, 복지 지원을 삭감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구조를 재편하면서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듣던 석탄산업을 구조조정했고, 이에 반발하는 노조를 분쇄했다. 이 속에서 취임 초기 국정 지지율은 낮았고 재선은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1982년 발발한 포클랜드전쟁은 전화위복이 됐다. 대처는 영국군 파병을 결정했고, 장거리 작전 끝에 영국군이 아르헨티나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포클랜드를 수복했다. 대처는 인기를 회복했고 1983년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승했다.

‘철의 여인’ 대처 영국병 치료 하고 포클랜드전쟁 승리했으나 ‘인두세’에 발목

마거릿 대처. 서방 세계 첫 여성 최고 지도자 선출된 노동장 장기 집권기를 끝내고 보수장 집권 시대를 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6개월 생일이 빠른 대처와 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졌다.

대처 재임기에 경제 정책도 결실을 맺어 영국은 불황을 극복하고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그 결과 1987년 총선에서도 보수당이 승리했고, 대처는 총리 3연임에 성공해 전후(戰後) 최장수 총리 기록을 썼다. 대처의 리더십 위기를 촉발한 것은 인두세(Poll tax) 도입 문제였다. 여론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 보수당 내에서도 대처의 독선적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비등했다.

영국 전역에서 폭동에 가까운 인두세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총리 사임 압력이 가중됐다. 1990년 대처에 반발한 보수당 의원들이 당수(대표) 선거를 실시했다. 대처는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했고 2차 결선 투표에서는 당 중진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후보직을 사퇴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처 총리와 여왕은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은 적도 있다. 198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국제사회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때 대처는 다른 영연방 국가와 마찬가지로 제재에 동참하라는 여왕의 요구를 거절했다. 남아공과의 교류가 영국 경제에 이익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 정책에 항의한 상당수 영연방 국가가 그해 열렸던 영연방 체육대회에 불참하자 여왕은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자신의 시종을 통해 “대처의 정책이 분열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이를 언론이 대서특필하자 대처 또한 분노했다. 대처 사임 후 여왕은 “무슨 일이든 밀어붙이기만 하는 그녀가 불편했다”고 회고했다.

재임 중에는 껄끄러웠지만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영국의 재도약을 견인한 대처의 업적을 여왕도 인정했다. 총리 퇴임 후 24명으로 수훈자가 제한되는 영국 왕실 최고 훈장인 ‘메리트훈위(OM)’를 수여했고, 남작(Baroness)으로 임명하여 대처가 상원(귀족원)에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2013년 대처가 세상을 떠나자 ‘여왕은 평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관계를 깨고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윈스턴 처칠 전 총리 장례식에 이어 두 번째였다.

서커스 단원 아들, 중졸 은행원 출신 존 메이저

1990년 11월 존 메이저(John Major)가 총리에 취임했다. 서커스 단원을 아버지로 둔 메이저는 중졸 은행원 출신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 입문한 후 재무부 장관 등을 거쳐 보수당 당수에 당선됐고, 대처의 뒤를 이었다. 1992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5년간 총리직을 더 수행하였으나, 실업률 문제, 국가 부채 등으로 인하여 민심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대패하여 정권을 넘겨야만 했다. 메이저와 여왕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존 메이저. 당내 리더십 문제로 중도 사임한 대처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됐다. 중졸 은행원 출신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각료를 역임했다. 전임자 대처와 후임자 블레어에 가려 존재감이 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주제 반대자 토니 블레어, 여왕과 갈등

1997년 유례없는 총선 압승으로 대처-메이저의 보수당의 18년 장기 집권을 끝내고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인물은 토니 블레어(Tony Blair)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1953년에 출생한 토니 블레어는 20세기 최연소 총리이기도 했다.

1997년 5월 2일, 총리 취임 후 첫 주례회동 때부터 총리와 여왕은 신경전을 벌였다. 여왕은 “당신은 내 열 번째 총리요. 처음 총리는 윈스턴 처칠이었소.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이죠.”라고 발언했다.

블레어와 여왕의 갈등은 예견된 것이었다. 노동당 출신의 블레어는 군주제에 반대했다. 그는 “요즘 시대에 군주제라는 게 비현실적인 것 아닌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블레어의 잦은 왕실 전용기(Queen’s Flight) 이용 문제로도 마찰을 빚었다. 여왕이 연 평균 5~6회 이용할 때 총리는 60회 넘게 이용했다.

여왕 토니 블레어와 첫 만남 “당신은 내 10번째 총리… 첫 번째는 처칠”

매주 영국 하원에서 열리는 총리 질의 응답(Prime Minister’s Questions)에서 단상에 한 팔을 기댄 특유의 자세로 답변하는 토니 블레어. 40대 총리로 취임하여 노동당 장기 집권 시대를 열었다.

노동당 출신이지만 경제 정책에서는 보수당의 대처 노선 추종을 선언했던 토니 블레어는 2001년 총선에서도 압승하여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4년 이라크전쟁 파병 문제로 ‘조지 W. 부시의 푸들(Bush’s Poodle)’이라는 조롱을 당했고 이는 내각과 노동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200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승리했지만 58석을 잃었다. 총리 사임 압력도 증대됐고, 토니 블레어는 2006년 9월 사임 의사를 밝히고 2007년 6월 퇴임했다.

고든 브라운,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선거 참패

블레어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이은 사람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다. 총리 취임 2년 차에 브라운은 대형 악재를 만났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촉발한 글로벌 금융 위기였다. 여파는 지속됐고, 노동당 내각 지지율은 가파르게 떨어졌다. 2008년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은 참패했고, 노동당 내부에서 브라운의 당수직 사퇴 요구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2010년 4월, 브라운은 여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결과적으로 노동당은 패배했고 브라운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고든 브라운. 노동당 출신 정치인으로 토니 블레어 내각에서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을 맡았고, 블레어 사임 후 2010년까지 총리로 재임했다.

최연소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브렉시트 여파로 낙마

2010년 5월,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이 이끄는 보수당은 승리하여 13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캐머런은 정계 입문 후 2005년 39세 나이로 최연소 보수당 당수가 됐고 5년 후 총리에 취임했다. 긴축 재정 정책, 법인세 인하 등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캐머린 재임 기간에 영국 경제가 회생했다. 이 속에서 2015년 총선에서도 보수당이 승리하여 캐머런은 총리직을 이어갔다.

장기 재임이 점쳐지던 캐머런의 정치 생명에 위기를 부른 것은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른바 ‘브렉시트’ 사태이다. 캐머런은 EU 잔류를 원하는 국민이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믿고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EU 탈퇴가 결정됐고 캐머런은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정치 현안에 침묵해 온 여왕 브렉시트 사태에 불만 토로

데이비드 캐머런. 39세에 사상 최연소 보수당 당수로 선출됐고 40대 최연소 총리가 됐다. 장기 집권이 예상됐으나 브렉시트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임기 중 사임했다. 오른쪽은 후임 총리가 되는 테레사 메이 내무부 장관이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영국 정국은 혼돈에 빠졌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왕은 사석에서 총리와 정치권을 향해 “제대로 통치를 못 한다(inability to govern)”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를 두고 ‘더타임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놓은 ‘가장 혹독한 정치 발언(the starkest political statements)’이라고 논평했다.

두 번째 여성 총리 테레사 메이

중도 사임한 데이비드 캐머런의 뒤를 이어 2016년 테레사 메이(Theresa May)가 사상 2번째 여성 총리가 됐다. 캐머런 내각에서 최장수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임기 동안 브렉시트 뒷수습에 진력했다. 201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318석을 확보하여 하원 원내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여 단독 정부 구성이 어려운 ‘헝 의회(hung parliament)’ 상태가 됐다. 메이 총리는 북아일랜드 소수정당인 민주연합과 연정을 해야만 했다.

연정을 통해 2기 내각을 출범시켰지만, 보수당 내부에서 불신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2018년 12월 당내 불신임 투표안이 발의됐고, 이듬해 1월 내각 불신임 투표가 실시됐다. 하지만 부결되어 정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테레사 메이는 이후로도 지속적인 사퇴 압력에 시달렸고 2019년 6월, 집권 보수당 당수직을 사임했다.

테레사 메이. 캐머런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 재임 후 대처에 이어 사상 2번째 여성 총리가 됐다. 임기 중 브렉시트 후속 조치 등으로 곤경에 빠졌으며 내각 불신임안 표결을 거치기도 했다.

보리스 존슨… 파티 게이트로 사임

2019년 7월 보수당 당원 투표에서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현 총리가 압승하여 당수로 선출됐다. 그는 7월 24일 총리로 공식 취임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는 14번째 총리였다.  존슨은 임기 동안 브렉시트 뒷수습에 더하여 코로나 19 사태라는 악재가 겹쳤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인한 구설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존슨 내각 각료들과 보수당 주요 정치인들이 코로나 19 방역 수칙을 위반하면서 총리 관저에서 파티를 벌인 이른바 ‘파티 게이트’가 터졌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의 장례식 전날인 2021년 4월 16일에도 음주 파티를 벌인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로 인하여 총리 사임 압력이 가중됐고 존슨은 2022년 7월 보수당 당수직 사임을 발표했다.

보리스 존슨. 2019년부터 총리로 재임 중이며, 이달에 사임한다. 파티 게이트 파문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며 영국 왕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