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장

2014년 09월 4일 오후 10:00 업데이트: 2023년 01월 26일 오전 10:26

죽은 삼촌의 양아들로 출신 세탁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으로 있을 때, 상하이 민간에서는 벌써 두꺼비가 환생해 장쩌민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학이 그렇게 발달한 도시였고, 장쩌민이 출세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상하이 시민들은 이런 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1989년, 장쩌민이 베이징에으로 자리를 옮기자 베이징 사람들도 그를 ‘장(江)두꺼비’라고 불렀다. 이유는 장쩌민의 얼굴이 두꺼비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중국에는 미녀로 환생한 여우인 ‘달기(妲己)가 조정을 파멸’한 선례가 있었으므로 두꺼비가 환생해 상하이 시장이 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년의 사악한 기운을 배에 삼킨 그 두꺼비는 늪(澤)에서 살고 있는 동물의 왕국 백성(民)이었으므로, 모년 모월 모일에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 톈자(田家)골목 한 부유한 가정에서 환생한 그 인물은 장쩌민(江澤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장쩌민의 할아버지는 장스시(江石溪)이고 아버지는 장스쥔(江世俊)이며 어머니는 우웨칭(吳月卿)이다. 그는 장(江)씨 집안의 장손으로 누나 장쩌펀(江澤芬)과 여동생 장쩌난(江澤南), 남동생 장쩌콴(江澤寬)과 한 집에서 태어났다.

한의사였던 장스시가 45세 때였던 1915년, 그는 갑자기 직업을 바꿔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다네이허(大達內河) 선박회사[역주: 중국 애국민족기업가 장젠(張謇)이 세운 선박회사]의 초청을 받고 양저우에서 일했다. 장스시는 생활이 부유해지자 부자들이 모여 사는 충관가(瓊觀街) 톈자골목으로 이사 갔다.

장스시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은 어렸을 때 죽고, 여섯째 장상칭(江上靑, 江世候라고도 함)은 1928년, 공산당 혁명에 참가했다가 1939년 눈먼 총알에 맞아 죽었는데 당시 겨우 28세였다. 그에게는 동갑짜리 아내 왕저란(王者蘭)과 두 어린 딸 장쩌링(江澤玲)과 장쩌후이(江澤慧)가 있었다. 다섯째 장스슝(江世雄)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던 60년대 말 중풍으로 죽었고, 일곱째 장수펑(江樹峰)은 양저우대학 교사였는데 1993년 11월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장남이었던 장스쥔은 항일전쟁시기 매국노 노릇을 해 장씨 가문의 치욕이 되었다.

매국노는 어떠한 정권 하에서든지 버림받기는 마찬가지다. 때문에 장스쥔의 아들 장쩌민은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를 피해다니며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가 중공 총서기직을 맡고 있을 때, 부패를 저지르든 말든 내연녀의 친척들까지 높은 관직에 올려놓고 봐주었지만 오히려 친 형제들은 도와주지 않았고 왕래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혈연관계마저 부인했다.

이처럼 황당한 일은 덩샤오핑이 죽은 후에야 드러났다. 덩샤오핑이 죽은 후 삼권을 한 손에 틀어쥔 장쩌민은 지체없이 자신의 평전을 쓰기 위해 전문팀을 구성했다. 이 전문팀은 독자들을 탄복시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힘을 다해 장쩌민의 정치적 성과를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으며 반대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어두운 면들만 잔뜩 찾아냈다. 그 중에 장쩌민의 출신이 허위 조작된 문제도 있었다. 장쩌민은 너무 화가 나서 즉시 그 팀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사람의 입을 꿰매지 않는 이상 틈새가 있기 마련이므로 장쩌민의 추문은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1940년 11월 매국노 왕징웨이(汪精衛)의 일본 괴뢰정부 성립 후, 장쩌민의 아버지 장스쥔은 난징(南京)에 들어가 장관첸(江冠千)으로 이름을 고치고 왕징웨이 괴뢰정부에서 선전부 부부장 겸 평론위원회 주임직을 맡았으며 ‘중화일보’ 총 편집국장 후란청[胡蘭成-유명 작가 장아이링(張愛玲)의 전 남편] 밑에서 일했다. 후란청과 저우쭤런(周作人)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 친일 작가였다. 후란청은 나중에 일본에서 ‘역사의 소용돌이’란 책을 출판했는데 장스쥔과 함께 일했던 경력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장스쥔은 장남을 뛰어난 인물로 만들기 위해 장쩌민을 학비가 비싼 양저우 중학교에 보냈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왕징웨이 괴뢰정부의 중앙대학에 보냈다. 또 어려서부터 피아노 등 악기를 배우게 했다. 그 때는 중국 국민들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고난을 겪고 있던 시기여서 일반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지만 이 도련님의 아버지는 매국노 노릇을 한 덕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장쩌민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악기를 다루고 춤과 노래에 능숙했으며 특히 경극과 월극(역주: 경극, 월극, 평극과 예극은 중국 4대 지방극이다)을 부를 줄 알았다.

장쩌민이 정권을 잡은 후 양저우에 가서 제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조상들 무덤 수리에만 국가재산 150만 위안을 썼다. 그러나 기자들은 장쩌민이 7살 때 돌아간 할아버지 장스시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그에게 심혈을 기울였던 아버지 장스쥔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게 주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공산당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계급성분’을 따진다. 때문에 공산당이 장쩌민의 배경 자료를 작성할 때, 그는 승급을 위해 아버지 이름에다 15살 위인 여섯째 삼촌 장상칭을 슬그머니 써넣었다. 이렇게 한 원인은 장상칭이 공산당 혁명에 참가했고 이미 열사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기에 명예는 안전하게 보존된다. 이렇게 되어 대담한 장쩌민은 ‘일본 앞잡이의 자식’으로부터 ‘혁명 열사의 아들’로 변신했다. 장쩌민은 이 때문에 가난한 친척들과 과부로 된 여섯째 숙모 왕저란의 집에 항상 선물을 들고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장쩌민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 그는 명문 양저우중학교에 합격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장두(江都) 현립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아버지의 노력으로 양저우중학교로 전학했으며 나중에도 아버지 덕분에 괴뢰정부의 중앙대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장쩌민은 뒷거래를 하려면 돈과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왕징웨이 괴뢰정권을 승인하지 않는 국민당 정부가 중앙대와 중앙대 졸업장을 승인하지 않아 장쩌민의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다. 사실 일찍이 유명했던 난징 중앙대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남서부에 있는 항일 후방으로 이전되었으며, 난징에 남아 있는 이른바 ‘중앙대’는 왕징웨이 괴뢰정권이 대충 운영하는 대학이었다.

1989년 장쩌민이 중공 중앙 총서기 자리에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징대학에서 낡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장쩌민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난징대 모체 중의 하나인 중앙대에서 공부한 증거물을 찾아냈다. 그것은 장쩌민의 성적표와 사진이 붙어 있는 도서관 대출증이었다. 난징대는 기쁜 나머지 급히 장쩌민에게 ‘혈연관계 인정서’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실망하고 말았다. 장쩌민은 이와 같이 자신의 출신을 깊이 감췄을 뿐만 아니라 학적에 대해서도 언급을 꺼렸다.

1990년대 초, 장쩌민은 장쑤를 시찰할 당시 일부러 난징대학을 방문했다. 난징대는 장쩌민이 예전에 투숙했던 기숙사 건물을 볼 수 있게 그를 안내했다. 장쩌민은 그곳에 이르자 우뚝 멈춰 서더니 무엇인가 사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을 수행하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췄고 사면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기 좋아하는 장쩌민이 이상하게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난징대 관계자들도 “이곳이 주석님이 공부하고 계실 때 투숙하고 있던 숙소인데 여전히 그대로입니다”라고 준비했던 말을 하지 못했다.

국가주석 자리에 올라간 장쩌민이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피아노, 기타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등 장기를 선보여 ‘광대’로 불린 것도 부자집 도련님 시절부터 거금을 들여 재간을 배운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 장상칭의 미망인과 딸들은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장상칭의 둘째 딸 장쩌후이는 ‘장쩌민평전’의 저자 로버트 로렌스 쿤에게 과거를 회억하며 “11살 전의 일이 유일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이라고 말했으며 “집에는 먹을 것이라곤 약간의 식량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질 때가 흔했다”고 말했다.

장쩌후이의 말은 장쩌민이 장상칭의 ‘양아들’이란 사실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1938년 3월에 출생한 장쩌후이는 장쩌민보다 11살이나 어리다. 때문에 장쩌민이 죽은 삼촌의 양아들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장쩌후이는 당시 한 살이었을 것이다. 장스쥔 부부가 ‘장쩌민 평전’에 쓴 것처럼 과부가 된 동생의 아내를 불쌍히 여겨 잘 돌봐주었다면 장쩌후이가 무엇 때문에 11살 이전에 그렇게 가난했다고 말했겠는가? 동생의 아내가 자기 자식들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것을 알았던 장스쥔 부부가 두 조카를 데려다 키웠다면 모를까, 어떻게 자기의 친아들을 그 집에 보내 함께 ‘단식’하게 했겠는가? 이는 사실로 보나 이치로 보나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장쩌민은 집에서 맏아들이자 장씨 가문의 장손이었다. 가문의 대를 잇는 중국사회의 전통에 따르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장손을 양아들로 보내지 못한다.

장쩌민이 양아들로 들어가는 방식도 장쩌민에 의해 황당하게 묘사되었다. 서양식 예절 표현(13세 밖에 안 되는 장쩌민이 열 몇 살 이상인 삼촌의 아내와 포옹했다는 등) 등 사람들을 웃기는 묘사 말고도 쿤의 ‘장쩌민평전’에는 아래와 같은 단락이 있다.

“장스쥔은 이날 ‘나는 이 아이가 양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극악무도한 적들을 물리쳐 원수를 갚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당시 장쩌민은 13세였다.”

이는 분명히 웃음거리였다. 장스쥔은 그 후, 중공 열사인 장상칭과 달리 왕징웨이의 괴뢰정부에 충성을 다했는데 그가 말한 ‘극악무도한 적’에 왕징웨이의 매국 정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장상칭이 죽은 1939년에만 해도 공산당은 아직 역량이 부족해 ‘공비’라고 불렸으며 매국노 장스쥔이 있는 힘을 다해 피하는 상대였는데 자신의 맏아들을 죽은 ‘공비’의 양아들로 보내길 원했겠는가?

장쩌민의 사촌 여동생 장쩌후이의 묘사는 더욱 황당했다. 쿤은 그녀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그 후부터 장 주석은 줄곧 생모를 ‘어머니[媽媽]’라고 부르고 양어머니를 ‘엄마[娘]’라고 불렀다.”, “중국 문화에서 이 두 칭호는 모두 ‘어머니’를 가리키나 자세히 따지면 느낌상 조금씩 다르다. ‘냥(娘)’은 좀 더 친근한 느낌을 주는데 애칭과 같다.” 쿤은 또 특별히 주를 달아 이 두 호칭 간의 구별은 영어의 ‘Mother’과 ‘Mom’과 같다고 했다.

사실, 양저우 사람들은 어머니를 ‘무마(姆媽)’(‘姆’는 1성, ‘媽’는 4성으로 읽음) 혹은 ‘아무(阿母)’(‘阿’는 1성, ‘母’는 4성으로 읽는다)라고 부르지 절대 ‘냥(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아내를 가리켜 ‘냥쯔(娘子)’라고 말하는 사람이 몇 십 년 전에 가끔 있었지만 어머니를 ‘냥(娘)’이라 불렀던 적은 없다. 때문에 이 부분은 장쩌민이 양아들로 들어간 적이 없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 준다.

장쩌후이는 또 쿤에게 “장쩌민 주석을 알기 위해선 우선 그의 양아버지, 다시 말해서 제 아버지 장상칭부터 알아야 합니다”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장상칭은 집을 떠나 혁명에 참가하느라 장쩌민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장씨 가문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때 장씨 가족들은 “장상칭은 꾐에 빠져 잘못된 길에 들어선 청년에 불과하다”며 변호했다. 게다가 당시 장쩌민은 10살 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였는데 장상칭이 영향을 주었으면 얼마나 주었겠는가?

자신의 평전을 쓰기 위해 조직한 전문팀에 의해 자신의 출신이 허위 조작된 것임이 밝혀진 후, 당황한 장쩌민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이를 숨길 수 있는 여러 가지 회고록과 평전을 다급히 써냈으며 일체 기회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자신이 13세 때 ‘열사’인 장상칭의 아들로 들어갔다고 강조했다.

그 중 한 사례로, 장쩌민은 친척 리창춘(李長春)이 광둥성 서기직에 있을 당시 광둥성 조직부가 발행하는 종합성 당기관지 ‘광둥지부생활’ 2002년 10월호에 글을 발표했는데, 특히 세 번째 부분 ‘열사 부인이 아버지 잃은 양아들을 책임지고 키우기로 작심했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내용이 엮어져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열사의 고아’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씌어진 이 글로 ‘광둥지부생활’은 그 달에 200만부의 놀라운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허위 조작된 장쩌민의 출신을 홍보하는데 공로가 컸던 리창춘은 한 달 뒤인 2002년 11월, 중공 16기 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관리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광둥지부생활’지의 운명은 좋지 않았다. 2003년 11월 29일, ‘중국기자언론망’의 보도에 따르면 ‘광둥지부생활’은 당기관보와 기관지에 대한 정부의 정리 정돈 조치와 함께 발행을 금지 당했다.

승직을 위해 웃기는 글을 발표하게 한 리창춘 못지않게 쿤은 ‘장쩌민 평전’ 중문판에 놀랍게도 장쩌민이 법률적인 절차를 거쳐 양아들로 되었다고 기술했다. 법률을 무시하기로 유명한 장쩌민은 그래도 ‘법률’이란 두 글자가 타인에게 가장 신빙성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30년대 중국에서는 여전히 가문 어른들이 가족 내 대부분의 일을 결정했기 때문에 양아들로 보내는 문제에 있어서도 법률적인 서류가 필요 없었다.

장쩌민은 왕저란 일가의 승인없이 출신을 조작할 수 없었다. 장쩌민은 물질적인 투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여섯째 숙모네 집을 드나들 때 항상 그들 모녀를 즐겁게 해줄만한 선물을 챙겨 들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람은 정이 들면 허물도 이뻐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다 장쩌민의 출신이 허위 조작되면 왕저란의 가족에 이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것이 없었으므로 일은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그러나 ‘열사 집안 자녀’ 출신만으로는 더 큰 이익을 위한 최종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장쩌민은 든든한 뒷심이 되어 줄 사람을 찾기로 하고 고위층 관리 중 장상칭과 가깝게 지낸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1982년, 국가수출입관리국 부주임이었던 장쩌민은 우연히 국무원 장아이핑(張愛萍) 부총리가 완둥베이[晥東北 역주-안후이(安徽)성 북동부] 공산당특별위원회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는 희소식을 듣게 됐다. 장쩌민은 즉시 장아이핑의 애호, 장점 등 정보를 서둘러 수집하기 시작했다. 장아이핑이 서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쩌민은 그의 비위를 맞춰주면서도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교묘한 방법을 찾아냈다.

어느 하루, 장아이핑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 가려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장 부총리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에 국가 사무를 보면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국가수출입관리국 부주임 장쩌민이었다. 장쩌민은 장아이핑의 앞에 바짝 다가가 정색하며 물었다. “아직 장상칭을 기억하십니까?” 그러자 장아이핑은 “물론 기억하지, 우린 친구 사이였다네. 아쉽게도 일찍 죽었지만”라고 대답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장쩌민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 톤을 높여 “그는 저의 양아버지랍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장아이핑은 깜짝 놀랐다.

장이이핑은 장상칭을 항일전쟁 시기에 알게 되었다. 그때 장상칭은 중국 공산당위원회의 파견으로 안후이성 북동부 특별위원회에서 장아이핑과 함께 일하면서 친구가 됐다. 1939년, 28살인 장상칭이 사망할 당시 장아이핑은 29살이었다. 장쩌민은 장아이핑이 서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장상칭의 새 묘소에 세울 비석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일로 장쩌민은 왕저란 모녀 세 사람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장아이핑에게 장상칭의 양아들이라는 신분을 알릴 수 있었다.

다 알다시피,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으로 올라앉은 것도 그가 장상칭의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왕다오한(汪道涵)이 힘껏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항일전쟁 초기에 이른바 ‘국공합작(역주-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시기, 왕다오한은 당시 안후이성에서 국민당 지방정부와 지방의 무장통일전선 공작을 책임진 장상칭의 추천으로 상하이, 장쑤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하 공산당원들과 함께 안후이성 국민당정부 제6행정구 책임자 겸 안전부 사령 성쯔진(盛子瑾)이 관리하는 현에 파견되어 관리가 되었다. 성쯔진은 당시 장상칭을 신임하고 있었다.

왕다오한과 장상칭이 어떤 사이인지 알게 된 장쩌민은 기회를 놓칠세라 입만 열면 ‘은사님’이라는 말을 꺼내 왕다오한에게 압력을 가했다(역주-장쩌민은 장상칭이 왕다오한의 은인이라는 것을 안 후 이를 이용한 것이다). 왕다오한의 덕분에 장쩌민은 순조롭게 승직할 수 있었지만 ‘당정군(黨政軍)’ 3권을 혼자 손에 쥔 후 장쩌민은 왕다오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하이에서 시찰할 때, 장쩌민은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면서 왕다오한만은 만나지 않아 상하이 사람들로부터 ‘양심을 개한테 팔았다’는 욕을 먹었다.

왕다오한, 장아이핑을 뒷심으로 삼은 뒤에도 장쩌민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디딤돌이 될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자오쯔양이 총서기직에 있는 기간, 장쩌민은 직접 아첨할 기회가 없자 우회전술을 쓰기로 하고 우선 자오쯔양 비서에게 접근했다. 장쩌민이 자오쯔양의 비서 한 명에게 억지로 ‘고향사람’임을 시인할 것을 요구해 한 때 중난하이(中南海 역주-중국 지도부의 집단 주거, 업무 지역)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사건은 바로 이렇게 발생한 것이었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장쩌민은 중공 전 중앙군사위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훙쉐즈(洪學智) 장군이 안후이성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그를 찾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본적이 안후이성이라고 알려 훙쉐즈 장군과 한 ‘고향사람’이 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골라하고 구미에 맞는 식단을 짜는 것은 장쩌민이 정계에서 한 자리 할 수 있는 비법이었다.

그러나 관직이 높아갈수록 출신이 폭로되는 것이 더욱 두려웠던 장쩌민은 친아버지를 절대 입밖에 꺼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친형제들마저도 일부러 냉대했다. 양저우 외곽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었던 장쩌민의 친누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초기에 우파로 몰려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8위안 밖에 안 되는 월급에 의지해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장쩌민은 매국노 출신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 누나를 도와주기는 커녕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쿤의 ‘장쩌민평전’에 따르면 그 시기 장쩌민은 매월 10여 위안의 돈을 두 사촌 여동생에게 보냈다. 장쩌후이도 부인하지 않고 “당시 그 돈은 정말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장쩌민이 중난하이로 들어가게 되자 두 사촌 여동생이 덩달아 이득을 보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치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포함된 ‘양저우 스밍(世明)쌍어학교’는 양저우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가장 좋은 학교에 속하는데 겉으로는 중국적십자협회가 운영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장상칭의 큰 딸 장쩌링이 배후 사장이다. 이를 증명하듯 이 학교 공식 사이트에 가보면 장쩌민이 써준 기념문이 있다. 장쩌민은 또 장쩌링의 아들 타이잔(邰展)이 은행에서 무담보 대출을 받아 장사하도록 했다.

장상칭의 둘째 딸 장쩌후이는 장쩌민의 덕분에 더욱 거침없이 승직했다. 안후이 농업대학의 평범한 강사였던 장쩌후이는 안후이성 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 안후이 농업대학 당위원회서기, 학장으로 승직했고 최근에는 중국임업과학연구원 원장으로 갑자기 뛰어 올라 국가임업국 당조직 성원이 되었다. 이 밖에 장쩌후이는 또 전국정협위원, 전국정협 인구자원 환경위원회 부주임, 중국과학협회 상무위원, 과학보급공작위원회 주임, 국무원학위위원회 위원, 국제 대나무 및 등나무협회(INBAR) 이사회 회장, 중국화훼협회회장, 중국대나무협회 회장, 중국삼림협회 이사장 등 직무를 겸하고 있다.

장상칭이 사망했을 때, 큰 딸 장쩌링은 3살이었고 작은 딸 장쩌후이는 16개월밖에 안 되어 ‘아버지’에 대해 별로 기억하는 것이 없었지만 이익을 위해 장쩌민의 출신 조작에 동조했다. 장쩌후이 자매는 그 많은 ‘혁명열사’의 자녀들이 누구나 부모 덕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경우만 보아도 아버지가 죽은 후, 그들 가족은 끼니조차 때우기 힘들었다. 하지만 장쩌민은 그들의 아버지를 이용해 왕다오한과 장아이핑을 발판으로 삼아 순조롭게 승직하는 ‘능력’이 있었다. 만약 사촌오빠가 출신을 허위 조작하지 않았더라면 장쩌후이 자매는 현재와 같은 높은 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혁명열사 간판이 사촌오빠 장쩌민 손안에서야 비로소 큰 이익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매는 자원해서 항상 장쩌민의 뜻대로 말했다.

그러나 과분하게 떠받들려 정신없게 되면 입을 잘못 놀리는 큰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어느 날, 장쩌후이는 몇몇 절친한 친구들과 만나 한담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말했다. “너는 참 운이 좋아, 장쩌민 같은 좋은 오빠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네가 있었겠니?” 장쩌후이는 이 말을 듣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 반대야. 우리 가족을 만난 사촌오빠가 운이 좋았던 거지. 우리가 뒤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사촌오빠는 흑오류[역주-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 지주, 부농, 반혁명, 범죄자, 우파들을 가리켜 ‘흑오류(黑五類)’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이런 사람들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되었다]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야.”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장쩌민 오빠는 너네 집에 양아들로 들어오지 않았니?”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배역을 깜빡 잊은 장쩌후이는 “그 때 우리는 너무 가난해 엄마는 친척들이 우리를 받아주기를 바라셨는데 다른 사람의 애를 양아들로 삼다니 말이 돼? 그리고 당시 사촌오빠네는 잘 살았기 때문에 우리를 보는 척도 안했어. 나중에 자기가 필요하니까 우릴 찾아온 거지. 누가 누구의 덕을 입었는지 우린 똑똑히 알고 있어”라고 말해버렸다.

장쩌민이 엮어낸 성장 과정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곳이 많다. 매국노 색채를 희석하려고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혁명을 지지했으며 애국운동에 열심히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시절 장쩌민은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의 관심 아래, 악기와 서예 등 장기를 배우는데 바쳤다. 중학교 졸업 후에도 혁명을 지지한다던 그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남서부로 옮겨간 중앙대학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괴뢰 정부가 운영하는 난징 중앙대학에 들어갔다. 장쩌민은 ‘과학으로 나라를 구하는 길’을 걸으려고 했으며 ‘정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현재 나와 있는 평전을 보면 대학교 시절에 공산당 지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입당까지 했으며 상하이에서 적극적으로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쿤의 ‘장쩌민 평전’에서 대학교 때 혁명 활동에 참가한 시절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모두 사실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 시기 일어난 중대한 사건 ‘6.23시위’에 지하당원 신분인 장쩌민이 참여했고 구체적인 임무를 맡았다는 어떠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그의 말이 사실인지 한 층 더 의심되고 있다. ‘6.23’ 시위는 1946년 6월 23일, 상하이 300여개 회사의 5만 여명 민중이 중공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우쉐첸(吳學謙), 차오스(喬石), 첸치천(錢其琛) 등의 지휘 하에 장제스(蔣介石)를 반대해 일으킨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위였다.

이와 같이 장쩌민의 ‘혁명경력’은 자신에게 이롭게 엮은 소설에 불과하다.

역사는 어릿광대가 운명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배경을 가지도록 배치했으며 사기와 가장술에 능란한 그의 본성을 이용해 권력의 정상으로 가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그가 역사의 버림을 받게 될 때면, 그와 함께 같은 시대를 겪은 사람들을 배치해 그의 내막을 남김없이 폭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할 것이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